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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5 (화) 19:28
분 류 사전2
ㆍ조회: 1234      
[조선] 나철 (민족)
나철(羅喆)

1863(철종 14)∼1916. 대종교의 초대 교주·독립운동가. 본관은 금성(錦城).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

29세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호남 출신의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하였다.

을사조약 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政客)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서울에 도착하여 숙소로 걸어가는 도중에 한 백발 노인에게서 두 권의 책을 받았는데, 그 책이 바로 ≪삼일신고 三一神誥≫와 ≪신사기 神事紀≫라고 한다.

1906년, 다시 한번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이토 히로부미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岡本柳三助)·도야마(頭山滿) 등을 만나 협조를 구했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였다.

또한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誅殺)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 주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나서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전하는 말로는 일본에 체류할 때 두일백(杜一白)이라는 노인이 찾아와서 단군교를 포교하는 일을 사명으로 여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자마자 오기호, 강우(姜友), 유근(柳瑾), 정훈모(鄭薰模), 이기, 김인식, 박호암(朴湖巖), 김춘식(金春植) 등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공표하였다. 이 날이 바로 중광절(重光節)이다.

곧 교직을 설치하고, 초대 교주인 도사교(都司敎)에 취임하여 5대 종지를 공포하였다. 또한 단군의 개국과 입도(立道)를 구분하여 서기전 2333년에 124년을 더하여 ‘천신강세기원(天神降世紀元)’이라고 하고, 단군교의 원년으로 발표하였다.

1910년 8월에는 단군교의 이름을 빙자한 친일분자들의 행각으로 인해, 원래의 명칭으로 환원한다는 의미와 함께 대종교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911년에는 대종교의 신관(神觀)을 삼신일체의 원리로 설명한 ≪신리대전 神理大全≫을 발간하는 한편, 강화도 마니산 제천단(祭天壇)과 평양의 숭령전(崇靈殿)을 순방하고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교당과 지사(支司)를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급속한 확장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대종교를 불법화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교단이 존폐의 위기에 봉착하자 1916년 음력 8월 14일, 상교(尙敎) 김두봉(金枓奉)을 비롯한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하였다.

그리고는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그러나 16일 새벽 이상스럽게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자신이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의 유언에 의하여 청파호에 유해를 안장하였으며, 그 후 대종교에서는 그가 운명한 날을 가경절(嘉慶節)이라 하여 4대절(四大節)의 하나로 기념하고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大倧敎重光六十年史(大倧敎倧經倧史編修委員會, 大倧敎總本司, 1971).

<박현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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