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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3 (일) 10:14
분 류 사전2
ㆍ조회: 1793      
[조선] 유인석 (브리)
유인석 柳麟錫 1842(헌종 8) 강원 춘성~1915. 1. 29

한말의 위정척사론자ㆍ의병장. 한말 서양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유교적인 이념으로써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를 구상했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초기 항일의병을 주도했다.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출신 및 초기활동

아버지는 중곤(重坤)이다. 14세 때 족숙인 중선(重善)에게 입양되었으며, 할아버지 영오(榮五)의 인도로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이항로는 그를 처음 보고 몸이 크지 않지만 강한 의지력과 과감한 성품이 있음을 보고 한눈에 대성할 인물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주로 김평묵(金平默)과 종숙부인 유중교(柳重敎)의 가르침을 받았다.

주리적 성리학자인 이항로의 문하에서 전통적 유교질서인 정(正)에 대비하여 서양세력의 침략 및 서양문명의 수용을 사(邪)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려는 위정척사론을 받아들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전국에서 개국반대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홍재구(洪在龜) 등 강원도ㆍ경기도 유생 46명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국이 부당함을 상소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한편 1891, 1893년에 김평묵과 유중교가 죽자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정통도맥(正統道脈)을 이어받았다.

을미의병과 그후 의병활동

1894년 갑오개혁이 실시된 이후 민비학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생들의 무장봉기가 삼남 일대에 일어났다. 1895년말 경기도 지평의 이춘영(李春永)ㆍ안승우(安承禹)가 강원도 원주로부터 활동을 시작하자, 서상렬(徐相烈)ㆍ주용규(朱庸奎)ㆍ신지수(申芝秀) 등 유중교 문하 유생들이 많이 호응했다. 원주로부터 충주를 거쳐 제천으로 진출한 이들 의병부대는 내부적 단결을 굳건히 하고, 또 광범한 지역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유생으로서 전국적으로 이름이 높은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그는 처음에는 어머니의 상중(喪中)이며 부해지행(浮海之行)이라는 이유를 들어 거절했으나, 결국 중의(衆議)를 받아들여 의병항쟁에 참여했다. 그는 전국 사림(士林)에게 격문을 띄워 개화에 반대하는 척왜양(斥倭洋)의 대의를 호소했다. 한편 평민 출신 의병장 김백선(金伯善)이 400명의 산포수(山砲手)를 거느리고 참가하여 전투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의 의병부대는 제천ㆍ충주 등 충북 일대를 석권하면서 관찰사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하여 인근 친일군수를 처단하고, 조령(鳥嶺) 밑에 있던 일본군 주둔소를 공격했으며, 중앙에 납입할 조세를 군수(軍需)로 압수하는 등 이 일대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충주 일대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할 때, 선봉장 김백선이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며칠간의 전투에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김백선은 지원군을 요청했는데도 안승우가 보내주지 않아 일본군에게 패퇴한 것을 분하게 여겨 칼을 뽑아 대들었는데, 그는 평민이 양반에 대해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김백선을 군률에 따라 처형했다.

이 사건은 그의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김백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병 대중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듬해 5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패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화승총(火繩銃)으로 무장한 의병으로서는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나 관군에 대항하기 어려웠다.

제천에서의 패배 후 단양으로 일시 퇴거했다가 다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해 평안도로 북상했고, 청나라의 원조를 받기 위해 다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이동한 뒤 랴오둥[遼東] 지방으로 옮겼다. 그러나 선발대로 보낸 이범직(李範稷)이 중국 관헌에게 무기를 빼앗기고 부하 20명과 함께 피살되자, 자신을 따르던 219명의 의병을 해산시켜 귀향하게 한 후 퉁화 현[通化縣]에 정착하여 재기의 기회를 엿보았다.

1898년(광무 2) 고종의 소환으로 일시 귀국했다가, 이듬해 다시 랴오둥으로 들어가 1900년 다시 귀국할 때까지 랴오둥에서 강학(講學)과 저술에 전념했다. 귀국 후 황해도 평산과 평안도 태천ㆍ개천ㆍ용천 등지에서 문인들을 가르쳤다. 1904년 8월 〈칠실분담 漆室憤談〉을 저술한 뒤 배성일전(背城一戰)을 내세워 깊고 넓은 타국으로 떠나 거국수의(去國守義)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충청도ㆍ황해도ㆍ평안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향약을 조직하고 그 시행을 권장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국 유림들에게 의병의 궐기는 못할지라도 의토(義討)ㆍ언토(言討)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07년 한일신협약이 강제 체결되고 군대 해산이 이루어지자 전국민의 조직적인 성토대회로 적을 제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국내의 의병운동은 외국으로부터 원조가 없는 한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국외인 노령에 항구적인 항쟁의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곳에서 이범윤(李範允)ㆍ이남기(李南基)ㆍ이상설(李相卨) 등의 추대를 받아, 13도의군도총재가 되었다. 이때 13도 대소동포(大小同胞)에게 통고하는 포고문을 발표하여 국민의 단결과 결사 보국을 역설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전국에 있는 지사(志士)들에게 간도로 나와 함께 수절(守節)하자고 호소했다. 1915년 관뎬 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서 일생을 마쳤다.

사상과 역할

그는 척사론을 기본으로 하여 서양사상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유교적인 이념으로써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를 구상했으며, 국제질서도 중국 중심으로 다시 개편할 것을 주장했다 (→ 색인 : 위정척사론).

특히 서양사상의 주체가 되는 평등 자유론, 공화제 또는 입헌군주제의 민주주의 체제, 그 첨병으로서의 기독교ㆍ신학문이 구래 유교질서를 파괴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사농공상병(士農工商兵)의 오민(五民)으로 체계화된 귀천존비의 사회질서가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향약을 실시함으로써 농민반란을 방지하고 제국주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독립운동방략은 의병전쟁의 지도이념으로 기능했고 비록 유교사회를 재건한다는 복고적인 것이었으나, 그의 영향하에 있었던 제자들이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이어져 독립운동전선을 향해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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