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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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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229      
[현대] 대한민국4-역사 (두산)
대한민국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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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역사

1. 시대구분

한국사에서 시대구분은 예로부터 큰 관심을 끌어왔다. 신라의 역사를 상대(上代)·중대(中代)·하대(下代), 또는 상고(上古)·중고(中古)·하고(下古)로 구분한 것은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왕조(王朝) 중심의 구분법이 줄곧 관용화되어왔고,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서양의 근대적 역사 연구방법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시대구분에 여러 가지 새로운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하였다. 시대구분은 바로 역사를 이해하는 척도이자, 역사관의 반영이다.

지금까지 제시된 시대구분을 공통성을 기준으로 하여 보면 몇 개의 유형으로 나뉜다.

첫째는 시간의 원근(遠近)에 의한 시대구분인데, 최남선(崔南善)·이병도(李丙燾)·진단학회(震檀學會)에서 밝힌 견해이다. 이들 모두는 현재를 기점으로 하여 시간의 원근을 기준으로 삼아 시대를 구분한 것이다. 여기에는 서양사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는 고대·중세·근대의 3분법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둘째는 사회 발전의 단계를 기준으로 시대를 구분한다. 이는 백남운(白南雲)·이청원(李淸源)·손진태(孫晉泰), 그리고 한우근(韓,劤)·김철준(金哲埈) 공저(共著)에서 제시된 시대구분이다. 이들은 대체로 원시사회·고대사회·봉건사회·근대사회라고 하는 사회 발전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있다. 다만 손진태의 《조선민족사개론》에서는 국가의 발전이란 측면에서 독자적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셋째는 민족의 성장과정을 기준으로 한 구분법으로서 손진태·이인영(李仁榮)의 주장이 이에 속한다. 그러나 이 구분법은 실제 내용 서술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넷째는 이인영·이기백(李基白)의 ‘개설서’에 제시된 시대구분으로서, 주제 중심 또는 지배세력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어서 역사를 본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시대구분의 의미가 적다.

끝으로 최근에 시도되고 있는 방법은 사회 발전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역사의 이해를 구조적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다.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대체로 집약된, 한국사연구회의 《한국사연구입문》과 교육부에서 만든 고등학교 교과서에 제시된 시대구분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경우에는 서양의 3분법과도 맥이 통한다.

2. 원시사회

원시사회는 가족이나 씨족이 사회구성의 단위를 이루면서 석기(石器)와 같은 유치한 연모를 사용한 선사시대(先史時代)의 사회를 말하는데, 한국사에서는 구석기(舊石器)시대·중석기(中石器)시대·신석기(新石器)시대의 단계를 거쳐 진전되었다.

원시사회에서는 정치생활을 엿볼 수 없었고, 경제적으로 사유재산의 개념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구성원 전원의 사회적 지위는 평등하였다.

한국의 구석기시대는 약 5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천 전곡리(全谷里), 상원 검은모루, 공주 석장리(石壯里), 제천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동굴, 웅기 굴포리(屈浦里) 등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밖에도 한국의 여러 곳에서 구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다. 이로 보아 구석기시대에 이미 한국 전역에 사람들이 널리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석기시대에는 가족을 단위로 하여 옮겨 다니면서 강가나 바닷가에 움막을 짓고 거친 뗀석기[打製石器]를 이용하여 사냥을 하거나 물고기를 잡아먹고 살았다. 한국의 중석기 문화는 아직 확연하게 밝혀져 있지는 않으나, 석장리의 최상층 문화와 점말동굴의 위층 문화는 중석기적 특색을 보여준다. 이 시대의 생활 단위는 여전히 가족이었으며, 화살촉·작살 같은 석기가 만들어지고, 고기잡이·조개잡이 외에 활을 이용하여 사냥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또한 이 때에는 예술에 대한 초보적 감각을 발휘하여 울산 반구대(盤龜臺) 암각화에 나타난 사슴의 그림을 남겨놓았다. 한국에서는 중석기시대에 이어 약 6000년 전부터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은 농경과 목축 등으로 식량을 생산하였고 토기(土器)를 만들어 쓰기 시작하였다.

대체로 중석기시대의 생활방식을 이어받아 바닷가에 움집이나 귀틀집을 짓고 고기잡이·사냥·채취 등을 하는 한편, 농사짓는 방법을 터득하여 곡식을 직접 재배하였다. 빗살무늬를 새긴 토기를 주로 사용하였는데, 뗀석기와 아울러 새로이 간석기[磨製石器]도 개발하여 사용하였다.

이 시대에는 처음에 씨족이 사회의 구성단위를 이루다가 후기에는 부족(部族)이 나타나면서 협동으로 일하여 같이 분배하는 공동체사회를 이루었고, 석기제작이나 예술활동에서는 분업형태를 취하였다.

3. 고대사회

신석기시대 말기에 이르러 농경이 보다 발달하여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금속문화를 알게 되었다. 청동기와 철기로 대표되는 금속문화는 바로 고대사회의 특성으로서, 그것은 국가 성립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략 기원전 10세기경 북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때의 유물로서 세형동검(細形銅劍)·잔무늬거울[細文鏡]·동모(銅場) 등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고, 아울러 반달돌칼[半月形石刀]·홈자귀[有溝石斧] 등의 간석기와 민무늬토기가 다수 발견되었다. 도구의 개발과 농경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대되었고, 그만큼 농업의 비중이 증가되었다.

한편 청동으로 만든 칼과 창으로 무장한 부족들은 이웃 부족들을 정복하여 공납(貢納)을 받아들임으로써,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성립되고 정치적 사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종래에는 이를 부족국가라고도 하였으나, 근래에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또는 읍락국가(邑落國家)라고 한다.

도처에 형성된 이들 읍락 중심의 정치적 사회는 정복 활동을 통하여 보다 큰 정치집단으로 발전해갔고, 점차 그의 권력을 강화하여 지배조직을 확대해 갔는데, 최초의 연맹왕국(聯盟王國)은 단군이 세웠다고 하는 고조선(古朝鮮)이다.

고조선 역시 초기에는 읍락 중심의 사회였으나, 후기에는 동방사회의 중심세력을 형성한 커다란 연맹왕국으로 발전하였다. 고조선은 대동강(大同江)과 랴오허강[遼河] 일대에 걸치는 광대한 연맹체로서, 엄한 법률로 사회 질서를 유지하면서 지배세력을 강화하였다.

고조선 초기에는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하였으나, 후기에는 철기문화를 알게 되었고, 이 시기의 지도자는 이주민 집단을 이끈 위만(衛滿)이었다. 위만은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漢)나라와 자주 충돌을 일으켜 한무제(漢武帝)가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을 때, 고조선은 이에 대항하여 1년간이나 싸웠으나 BC 108년 끝내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었다.

고조선이 망한 이후 철기문화에 기반을 둔 새로운 연맹왕국들이 성립되었다. 북쪽에서는 부여(扶餘)·고구려(高句麗)·동예(東濊) 및 옥저(沃沮)가 일어났고, 남쪽에서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이 일어났다. 철기의 사용은 생활의 모습을 여러 모로 변화시켰는데, 특히 철제 농기구에 의한 농경 방법이 발달하여 경제기반이 급속히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목축이 성하였고 어업도 발달하였으며, 부족 상호간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여러 계통의 문화가 융합되어 고대국가의 기초가 마련되어갔다.

한국의 고대국가는 고구려·백제·신라의 3국에서 비롯된다. 철기문화가 널리 보급되면서 정복전쟁이 활발해지고 농업경제가 진전되어 사회분화(社會分化)가 분명해져갔다. 따라서 왕권을 장악한 지배자는 중앙집권적 체제를 강화하였고, 밖으로 정복국가, 영역국가의 기틀을 다져갔다.

1세기 태조왕(太祖王) 때 고대국가를 수립한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이어서 4세기초 미천왕(美川王) 때에는 낙랑군(樂浪郡)을 축출하고 대동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백제는 위례성(慰禮城)을 중심으로 한강 유역에서 일어났는데, 3세기 고이왕(古爾王) 때 고대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정치적 발전을 보였다. 한편 경주평야에서 일어난 신라는 4세기 내물왕(奈勿王) 때 주변 지역을 정복하고, 김씨 중심의 왕권을 강화하여 고대국가로 성장하였다. 이들과 아울러 낙동강 하류에는 가야연맹(伽倻聯盟)이 독자적 발전을 보였으나,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하고 6세기에 신라에 병합되었다.

3국의 융성은 3국 간의 경쟁적 각축 속에서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모용씨(慕容氏)와 백제의 침입으로 한때 시련을 겪었으나, 소수림왕(小獸林王) 때 불교를 수용하고 태학(太學)을 세우며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이어서 광개토왕(廣開土王)·장수왕(長壽王) 때에는 밖으로 비약적 발전을 보였다.

그리하여 5세기에 고구려의 판도는 북으로 쑹화강[松花江], 남으로 아산만과 죽령(竹嶺)에 이르는 선, 동으로 동해안, 서로 랴오허강까지 이르는 대제국이었다. 서울도 산골짜기의 국내성(國內城)에서 넓은 평야가 있는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겨 정치·경제 제도를 완비하고 문화를 꽃피웠다.

백제는 4세기에 벌써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서쪽으로 동진(東晉), 남쪽으로 왜(倭)와 통하면서 국제적 지위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부터 국세가 약해져 성왕(聖王)이 서울을 사비(泗沘부여)로 옮기고 한때 중흥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다.

가장 늦게 일어난 신라는 5세기 초 지증왕(智證王) 때 우경(牛耕)·수리 사업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뒤이은 법흥왕(法興王) 때에는 율령을 반포하고 연호(年號)를 사용하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내정개혁을 단행하여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갖추었다.

마침내 6세기 중엽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대외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 화랑도(花郞徒)를 중심으로 한 신라군은 한강 유역·낙동강 유역을 장악하고, 더 나아가 동북으로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였다.

3국의 발전은 중국의 왕조 교체와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는데, 마침내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다시 고구려·백제 유민과 힘을 합쳐 당의 세력을 이 땅에서 내쫓고 자주적인 통일을 성취하였다.

고대사회의 발전은 676년 신라의 삼국 통일로 급변하였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왕실은 골품제(骨品制)를 확립하여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중앙의 정치체제를 정비하고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9주(州) 5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당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무역이 발달하였고 당에는 신라방(新羅坊)이라는 신라인의 거주지까지 생겨났다.

삼국의 문화를 종합하면서 보다 넓은 기반 위에서 새로운 문화를 꽃피워, 문학·과학·예술의 각 분야에서 민족 문화의 토대가 확립되어갔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도 더욱 발달하여 불교왕국을 이룬 가운데 원효(元曉)·의상(義湘)·혜초(慧超) 등의 고승이 활약하였고, 불국사·석굴암·봉덕사종과 같은 문화재를 남겼다.

남쪽의 신라와 상대하여 북쪽에서는 발해(渤海)가 고구려의 옛 전통을 계승하여 만주지역을 통치하였다. 당과 교류하면서 유교적 정치제도를 도입한 발해는 8~9세기에 걸쳐 독특한 발전을 보였으나, 거란족에 의해 패망한 이후 만주는 우리 역사에서 떨어져나갔다.

통일신라는 말기에 이르러 왕권이 약해지면서 6두품(六頭品) 세력이 대두하고, 지방에서 호족(豪族) 세력이 성장하면서, 마침내 후고구려(後高句麗:마진·태봉)와 후백제(後百濟), 그리고 신라로 다시 분열되었다.

4. 중세사회

10세기 초에 이르러 고대사회는 중세사회로 전환되어갔다. 918년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후삼국(後三國)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족을 재통일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보다 능률적인 중국의 관제를 도입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마련하는 한편, 유교정치사상을 통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 이 때에는 사회적·문화적 혁신이 단행되어 민족의식이 강화됨으로써 3차례에 걸친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귀족 중심의 고려시대에는 신라보다도 문화의 폭이 크게 확대되어 지방호족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고,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융합되었다.

불교는 전기에 의천(義天)을 중심으로 천태종(天台宗)이, 후기에는 지눌(知訥)을 중심으로 조계종(曹溪宗)이 발달하였는데, 불교의 발달로 3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대장경(大藏經)이 조판되었다.

또한, 과거제도가 실시되면서 한문학·역사학도 발달하였는데, 최승로(崔承老)·정지상(鄭知常) 등의 학자가 유명하였고,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책이다.

예술에서는 고려청자로 널리 알려진 공예 부문이 특히 발달하였다. 그릇 표면에 음각(陰刻)을 하여 무늬를 넣는 순수청자에 이어, 제작된 백토나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청자(象嵌靑瓷)는 고려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작품이다.

한편 중세사회에서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가 경제생활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사회의 경제기반을 마련했는데, 특히 지배세력의 성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성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을 중심으로 전시과(田柴科)가, 이어서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중심으로 과전법(科田法)이 실시되었는데, 모두가 지배층인 귀족이나 양반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제도적으로는 토지 국유(國有)를 원칙으로 하여 지배층은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만 가지며 농민은 토지의 경작권만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동요하는 12세기 이래로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 경향이 나타나, 13세기에는 전국에 농장(農莊)이라는 대토지 소유제가 형성되었고, 그것은 소수 권문귀족(權門貴族)의 사유지였을 뿐만 아니라 면세(免稅)·면역(免役)의 특권을 누렸다.

농장의 소유주인 귀족들은 부재지주(不在地主)였으며, 농장의 경작은 전호(田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위치는 농노(農奴)와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왕조의 과전법 체제하에서도 마찬가지로 농장의 소유주가 양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의 공전(公田)을 침식하였고, 따라서 국가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다. 국가 재정의 궁핍은 왕조의 동요를 초래하여, 귀족정치의 혼란에 이어 나타난 무인집권, 그리고 밖으로 몽골[蒙古]과의 항쟁을 통하여 위기를 맞은 고려왕조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귀족사회의 모순은 이미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 1135년 묘청(妙淸)의 난, 1170년 무신란(武臣亂)으로 나타나 마침내 60년에 걸친 변태적인 무인집권을 초래하였고, 뒤이어 몽골의 침입, 원(元)의 정치적 간섭이 행해졌다.

조선왕조는 이와 같은 내외의 시련을 해결하는 방향에서 출발하였다. 일찍이 14세기에 충선왕(忠宣王)과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개혁을 시도한 새 왕조의 주동세력인 사대부(士大夫)들은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사회의 융합을 꾀하는 한편,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진하여 국가의 역량을 키우려 하였다.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 개혁의 주도세력인 사대부들은 양반이란 명목하에 정치·사회의 주도 계층으로 성장하면서 지배 신분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태종(太宗)·세종(世宗)·세조(世祖)를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개편되고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세종 때에는 국토가 압록강·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 또 산업발전과 실용적 학문의 발전으로 민족문화가 크게 피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1446년(세종 28) 반포된 훈민정음, 즉 한글은 민족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15세기의 이같은 개혁운동은 14세기 붕괴 직전에 이른 중세사회를 재편·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써, 고려와 조선의 교체는 중세사회 내부에서의 변혁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순과 한계를 지니고 있던 조선왕조는 16세기 이래 다시 동요되어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커다란 외적 시련을 맞아 17세기에는 그 수습에 힘쓰는 한편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고식적이고 미봉적인 타결책은 역사의 새로운 방향과 부합되지 못하였다.

특히 왜란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피해는 극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란 이전에 이미 불붙은 당쟁(黨爭)은 더욱 격화되어 전체 양반사회를 분열과 침체에 빠뜨렸고, 전통적 신분체제를 크게 와해시켜 갔다. 한편 농촌사회에서는 농장이 계속 확대되어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전호(小作田戶)의 위치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농업 기술과 상업적 농업의 보급으로 부(富)를 얻을 수 있었던 일부의 농민들은 자작농(自作農)과 소작농(小作農)을 겸하거나 경영형 부농(經營型富農)으로 성장하여 종래와 같은 봉건적 지배를 점차 탈피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지배층은 성리학(性理學)을 교조적(敎條的)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교에 대신하여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수용한 성리학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중세사회 체체 내에서는 사회개혁과 사회체제의 정비를 위해 긍정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융성한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국면으로 발전하여 이황(李滉)·이이(李珥)와 같은 철학자를 배출하였고,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어 예학(禮學)으로 전화(轉化)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래로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로 인하여 사회적인 기능을 상실하자, 성리학의 전근대성(前近代性)을 탈피하려는 새로운 사상체계인 실학(實學)이 대두되었다.

5. 근대사회

한국사에서의 근대사회의 태동은 실학(實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중세사회는 17·18세기에 이르러, 특히 사회·경제 분야에서 전통적 사회의 특성을 잃고 있었다. 사회붕괴의 여건이 바탕이 되어 사상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사조(思潮)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전통적 사회체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루려는 일련의 사상체계인 실학이 발달하였다.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정약용(丁若鏞) 등 중농적 개혁사상을 주창한 실학자나, 유수원(柳壽垣)·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과 같이 상공업 중심의 개혁안을 제시한 실학자 모두가 비현실적인 문제의 해결을 목표로 사회 개혁과 제도 개편을 주장하였다.

비록 실학이 유교적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실학자들의 개혁안이 모두가 실천되지 않았다 해도, 그것은 서서히 근대사회로 지향하는 데 기여하였다. 중세사회의 태내(胎內)에서 근대 지향적인 사상으로 발달한 실학은 개항(開港) 이후의 개화사상으로 연결되어 한국 근대사상에서 하나의 맥락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지식인들에 의하여 실학사상이 제시되었으나, 19세기의 정계는 세도정치(勢道政治)로 말미암아 파국을 맞았다. 정치 기강의 문란으로 국가재정이 어려워지고, 농촌경제는 파탄에 빠졌다. 아울러 동요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한 신분제는 양반 중심의 지배체제에 커다란 위기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의식이 점차 높아져 곳곳에서 민란(民亂)이라 지칭되는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가톨릭과 함께 서양세력이 들어와 양반사회를 더욱 위협하였다. 이러한 때에 집권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전제왕권(專制王權)을 재확립함으로써 조선이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 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마침내 1876년 개항을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은 오랜 유교적 전통사회로부터 새로운 근대사회로의 지향이 가속화되었다. 정치제도 개혁과 외교관계 혁신, 교통·통신·의료·교육 등에서의 근대 문물 도입 등이 서서히 추진되었다.

그러나 근대사회를 예비하지 못한 정계(政界)는 개화사상과 척사사상(斥邪思想)의 갈등 속에서 임오군란(壬午軍亂:1882)·갑신정변(甲申政變:1884)·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1894)·갑오개혁(甲午改革:1894)·을미사변(乙未事變:1895)·아관파천(俄館播遷:1896) 등 극심한 혼란을 거듭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길을 잃었고, 한반도는 거문도사건(巨文島事件:1885), 청·일전쟁(淸日戰爭:1894), 러·일전쟁[露日戰爭:1904] 등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침략세력에 대항하는 민족적 각성과 근대문화에 대한 선각 지식층의 이해가 깊어지면서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조직되고, 자주자강운동(自主自强運動)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일어나 1899년 근대국가로서의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대한제국은 관제를 개혁하고 교육시설을 확충하며, 민의가 반영되는 개혁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끝내 열강의 간섭을 배제하지 못하고,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민족의 민족운동을 탄압하고 경제적 착취를 강행하여 한국의 사회와 문화를 해체해 갔다.

그럼에도 한민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수호하고자 궐기하였으니, 그것은 일본의 야심이 본격적으로 나타난 을미사변 이래 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의병의 항전은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시해와 단발령(斷髮令)에서 비롯되었는데,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의 강제체결로 본격화되고, 1907년 고종(高宗)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최익현(崔益鉉)·신돌석(申乭石)·허위(許蔿) 등은 의병대장으로서 대대적인 대일항쟁(對日抗爭)을 전개하였다. 의병들은 산간 벽지를 근거로 유격전을 벌이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으나 10년 국권피탈을 계기로 점차 활동의 기반을 잃어 이후 만주와 시베리아로 자리를 옮겨 영속적으로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을 전개하였다.

한편 을사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활발히 일어난 애국계몽운동은 10년 이후에도 줄기차게 국내외에 확산되었는데,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로 활동이 어렵게 되자 신민회(新民會)와 같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3·1운동은 이와 같이 국내외에서 추진된 거족적 구국운동의 결실이었다.

6. 현대사회

19세기 유럽에서는 봉건시대(封建時代)의 잔재인 신분적 특권과 지방분권적 요소를 일소하고 국민적 통일의 완성을 요구하는 시대사조(時代思潮)가 강력히 대두되었다. 보통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nationalism)라고 일컫는 이 사상의 영향으로 국제사회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임을 요구하고, 자국(自國) 내에서는 국민의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주장하는 국민국가(國民國家)의 출현을 보았다.

국민국가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국가이다. 유럽에서 18세기에 발흥된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는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벨기에·그리스를 비롯하여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로 하여금 독립을 쟁취하게 하였고, 수세기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독일이나 이탈리아로 하여금 국가의 통일을 완수하게 하였다.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하여 식민지로 전락해 있던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국민주의 운동은 독립형(獨立型)으로 추진되었으며, 중국·인도·한국이 그러하였다.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스와라지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서, 국민주의 또는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비롯된 것이며, 그 결과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국가라 이름할 만하다. 말하자면 1919년은 한국 현대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의 세계사는 격랑과 같이 소용돌이쳤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이 일어났고, 1914년에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으며, 이를 수습하고자 1920년 국제연맹이 조직되었으나, 전체주의(全體主義)가 곧이어 나타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을 침탈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을,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세계사를 동요시켰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는 바로 이러한 세계사의 움직임과 이어져 전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하여 제창된 민족자결주의(民族自決主義)는 그 동안 망명활동과 비밀결사, 혹은 교육활동·종교운동 등에 의지하여 소극적으로 전개되어오던 독립운동을 전국적인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표면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어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비록 망명정부(亡命政府)였지만, 3·1운동에 나타난 국민의 힘의 반영이며 또한 한국 국민의 정치의식이 이미 새로운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일제의 대륙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 우리 민족의 독립투쟁도 거세어져 국내에서는 1926년 6·10만세사건,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고, 국외에서는 1920년의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를 거쳐, 1940년 광복군(光復軍) 창설을 보았다.

마침내 1945년 8월 한민족은 35년 간에 걸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고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민족의 광복은 그대로 독립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국토분단의 비극과 민족분열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역경 속에서 1948년 8월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을 출범시켰으며,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고 민주주의를 추구하면서 새 국가로의 발전을 다짐하였다.

1950년 6·25전쟁의 민족적 비극을 맞았으나 자유당(自由黨)의 제1공화국, 민주당(民主黨)의 제2공화국, 공화당의 제3공화국, 유신 후의 제4공화국, 10·26 후의 제5공화국·제6공화국을 거쳐 제7공화국의 문민정부가 수립되었다.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확립을 위한 노력이,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산업체제의 수립이 추구되면서 사회적으로 복지사회를 지향하며, 대중문화가 확산되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이같은 민족적 과제 속에서 문민정부는 세계 속의 한국, 한국의 세계화를 지향하면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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