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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9 (토)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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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8-언론 출판 (브리)
대한민국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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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출판

해방 이후 한국의 현대사가 겪은 충격과 혼란, 변화와 발전은 한국 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문화에 일관된 정체성을 주고 있는 것은 단일 언어로서의 한국어의 존재이다. 고유언어는 있었으나 고유문자는 갖지 못했던 옛날에 한민족은 오랫동안 중국의 한자를 빌려서 이두(吏讀)를 사용해왔다. 그러다가 15세기 중반 조선 세종 때 훈민정음이 창제됨으로써 제 나라 말을 제 나라 글씨로 적을 수 있는 고유문자를 갖게 되었다. 한글은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음소문자로서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한글의 사용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해독률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 한글전용정책은 일부 민간 및 학술 단체로부터 끈질긴 반대에 부딪혀 이를 관철하지 못하고 현재까지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이 양립되고 있다. 국민의 문화생활에 밑바탕이 되는 어문정책의 혼란은 오늘을 사는 한국 국민을 '한글세대'와 '국한문혼용세대'로, 한국 출판물을 한글전용서적과 국한문혼용서적으로 갈라놓았고, 심지어 같은 일간신문의 지면조차 한글전용지면(사회면·지방면·스포츠면 등)과 국한문혼용지면(정치면·경제면·국제면·논설면 등)으로 갈라놓았다. 그결과 한글을 전용할 경우 세계에서 가장 높은 문자해독률을 자랑할 수 있는 한국인이 국한문을 혼용할 경우에는 학교를 졸업하고도 제 나라의 신문도 제대로 읽을 줄 모르는 '교육받은 문맹(文盲)'이 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해방 이후 남북의 분단과 6·25전쟁의 체험,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추진된 한국사회의 급격한 산업화와 국제화는 한국문화에 있어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그리고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을 뒤섞이게 했다. 스포츠 분야, 도시생활 분야,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외래어들이 우리의 일상용어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한국의 언어에도 내재되어 있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의 혼합, 그리고 언어생활 그 자체가 체험하고 있는 급격한 변동의 과정과 그 역동성은 오늘의 한국문화 전반을 규정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산업화·도시화·대중화·민주화·국제화로 가고 있는 현대 한국의 사회변동의 추세는 문화의 각 분야에 있어서도 문화적 가치의 변화, 그 전달수단의 확충과 전달대상의 확대, 나아가 문화적 창조행위에의 참여 내지는 참여욕구의 확산 등 폭넓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한 변화의 모습을 언론·출판·문화 분야에서 다음과 같이 개관해본다.

언론

사회의 근대화와 과학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신문·방송과 같은 언론의 대중매체(매스 미디어)가 널리 보급되어 거의 모든 시민의 일상생활 속에 자리잡게 되었음은 현대문화의 주요 특징의 하나이다.

서양에서 최초의 근대적인 매스 미디어가 등장한 것은 1609년 독일의 두 도시에서 나온 주간신문을 효시로 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비록 그 실물이 보존되어 있지 않지만 믿을 만한 기록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이율곡의 〈경연일기 經筵日記〉에 의하면 독일에 앞선 1578년(선조 11)에 민간인이 조보(朝報)를 날마다 인쇄하여 여러 군데에 팔아서 돈을 번 일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비록 2개월 남짓 간행된 뒤에 금압되기는 했으나 이것은 세계 최초의 인쇄된 민간 상업일간신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같은 조보의 인행(印行)을 통해 언론의 보도기능을 확충하려던 시도보다도 더욱 주목되어야 할 것이 언론의 간쟁(諫諍)기능, 곧 비판기능이었다. 그때그때 정사의 시비나 관리들의 잘잘못을 가려 바른 말을 직언하는 간쟁언론은 사헌부·사간원의 이른바 언관(言官)들뿐만이 아니라 상소를 통해서 군주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던 재야의 선비들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조선시대의 사림(士林) 문화의 큰 기둥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간쟁언론의 전통은 19세기말 개화의 과정에서 '정부에 대한 감시'(check on government) 기능을 스스로의 구실로 맡고 나선 근대적 신문의 탄생으로 자연스럽게 계승되었다. 대한제국 말기에 근대적 신문이 나오기는 1883년 정부기관(統理衙問 博文局)에서 간행한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처음이요, 민간지로서는 1896년에 서재필(徐載弼)이 창간한 〈독립신문〉이 그 효시이다. "우리는 바른 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폐일 터이오"라고 밝힌 〈독립신문〉의 창간논설은 바로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감시자로서의 이른바 자유주의형(libertarian type) 신문의 탄생을 밝혀주고 있다.

서양에서는 인쇄업자·우편업자 등이 돈벌이를 위한 상업적 동기에서 근대 신문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한성순보〉나 〈독립신문〉이 다 같이 비상업적 계몽주의 동기에서 개화의 방편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그리고 그러한 한국신문의 고유한 특성은 일제강점기의 민족지와 8·15해방 후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의 정론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한국언론계에 본격적인 상업신문이 등장한 것은 8·15해방 이후의 정치적·이념적 대립이 정부수립으로 일단 수그러지고, 6·25전쟁이 휴전협정으로 막을 내린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미군정치하에서 좌우로 분열되었던 공론권(公論圈)은 정부수립 이후에는 여·야로 갈라지고 공론의 대중매체인 신문도 여당지 또는 친여당지와 야당지 또는 친야당지로 갈라졌다. 그러나 1950년대말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의 폭정이 심해짐에 따라 불편부당의 중립을 표방하며 이제는 정론신문이 아니라 상업신문을 지향하게 된 대부분의 신문조차 비판적인 야당지로 선회하게 되었다. 그에 대해서 여당지 내지는 반관영지(半官營紙)는 독자를 얻기가 어려운 열세에 몰려 있었다. 신문매체에서 여·야의 대국이 보인 이러한 불균형은 방송매체의 정부장악으로 어느 정도 중화될 여지는 있었으나 정부여당은 그보다 더욱 직접적인 수단에 호소하는 것이 예사였다. 공권력에 의한 언론통제 내지는 언론탄압이 그것이다. 특히 1961년 장면 민주당 정부를 5·16군사정변으로 전복하고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집권시대 18년과 1979년 10·26사태 뒤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 7년 동안은 설득력있는 정당성을 갖지 못한 권력과 비판적 감시자로서의 전통을 갖고 있는 언론매체 사이에 긴장관계가 지속되었다.

4·19혁명으로 탄생한 단명의 민주당 정권을 예외로 하고 역대 정권은 헌법에 명문화되고 있는 언론 자유를 한갖 구두선으로 그치게 하는 갖가지 법률로 언론의 규제를 시도했다. 반공을 제1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1948년에 제정된 국가보안법과 1958년에 개정된 신국가보안법이 비단 용공 언론만이 아니라 정치적 반대자나 비판자의 소리까지 억압하고 위축시키는 데 확대적용되곤 했다. 1961년 5월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장군은 먼저 군사혁명위원회의 계엄령 포고 제1호를 공포하여 4·19혁명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나온 언론매체를 대폭정리했다. 그뒤에 제정된 출판사 및 인쇄소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2. 12. 30), 전파관리법(1961. 12. 30), 신문·통신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1963. 12. 12), 방송법 등은 모두 신문·통신·방송 및 출판사의 등록요건을 강력히 규제하고 신고와 허가의 이중적인 통제를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유신통치'시대는 한국언론의 중세기적인 암흑기를 가져왔다. 유신헌법은 필요한 경우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입법도 가능하게 하는 규정을 마련했으며, 실제적으로 이 시기에 언론통제를 위한 수많은 법률이 제정되었다. 언론인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1974.1.8), 제9호(1975.5.13)가 반정부적·비판적 보도와 출판을 금지함으로써 언론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려 했다. 1979년 10월 26일 이후 '서울의 봄'이라 일컫던 민주화의 소강기(小康期)는 이듬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됨으로써(1980. 5. 17) 다시 그 싹이 꺾이고 말았다 (→ 색인 : 언론통폐합). 전두환 장군이 이끄는 국군보안사령부를 배경으로 한 국가보위입법위원회는 계엄령 치하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언론기관의 통폐합과 언론인의 대량해직을 단행했다. 그결과 당시 발행되던 전국의 28개 일간신문 가운데 11개(중앙지 1, 지방지 8, 경제지 2)를 정비하고, 전국의 29개 방송사 중에서 6개(중앙사 3, 지방사 3)가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통합되고, 한국문화방송(MBC) 계열사 21개의 주식 51%를 서울 MBC가 소유주로부터 인수하여 계열화하고, 7개 통신사가 통폐합되어 단일통신사로서 연합통신이 창설되었다. 이를 전후해서 172개 가량의 정기간행물이 하루 아침에 등록취소되고(1980. 7. 31), 617개의 출판사가 또한 등록취소되었다. 한편 이 와중에 직장에서 해직된 언론인은 무려 770명이나 되었다. 한편 국가보위입법위원회가 제정한 ' 언론기본법'은 정보청구권과 취재원 보호를 위한 진술거부권 등을 부여한 반면 언론표현물에 대한 압수규정을 강화하고, 언론통제를 용이하게 하는 여러 독소조항을 담고 있어 그 개폐문제가 처음부터 꾸준히 제기되었다. 언론기본법이 시행되면서 전두환 정권하에서 이 법의 취지에 따라 몇 개의 언론단체가 생겨났다. 한국방송위원회·한국방송심의위원회·언론중재위원회, 그리고 한국언론연구원과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그것들이다. 물론 권력의 언론 및 언론인에 대한 통제와 탄압은 법을 방편으로 하고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박정희·전두환 정권하의 각종 권력기관에 의한 언론제작에의 개입·간섭, 언론인에 대한 법외적 또는 초법적 테러 행위와 그 위협 등이 언론을 위축시켰다. 더욱이 전두환 정권하에서는 문화공보부에 홍보정책실을 두어 언론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일삼기도 했다.

변혁을 위한 일대 전기는 1987년에 마련되었다. 6월의 시민항쟁은 마침내 집권세력으로부터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약속하게 한 이른바 '6·29선언'을 쟁취했다. 1987년 11월 제137회 정기국회는 '언론기본법'을 폐기하고 이에 대신하여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방송법', '한국방송공사 개정법률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새로운 언론정책을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 그에 따라 언론통폐합 조치로 사라졌던 신문·잡지가 복간되고, 새로운 정기간행물이 대거 쏟아져나오게 되었다.

신문

1991년말 현재 한국에는 전국적인 보급망을 갖는 10개의 중앙종합일간지와 약 30개의 지방지가 발행되고 있다. 그밖에도 특수일간지로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10개에 가까운 경제지, 3개의 스포츠지, 수종의 어린이 또는 학생 신문, 2개의 영자신문 등이 있다. 종합일간지 가운데에는 1920년 일제강점기에 창간되어 지령 2만 호를 넘는 역사가 깊은 신문이 있는가 하면 1990년대에 창간된 새 신문도 있다. 서울에서 발행되고 있는 종합일간지 중에는 하루의 발행부수가 100만 부를 넘는 신문이 있는가 하면 10만 부에도 미치지 못하는 지방신문도 있으나 정확한 신문의 발행부수는 공사제(公査制)가 실시되고 있지 않아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추정치로 따져 하루의 전체 신문발행 총부수는 1,000만 부를 웃돌고 있고 유가발행부수도 1,000만 부를 크게 밑돌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평균 1가구당 1개 신문의 보급을 예상하는 수치이다. 일간신문의 발행면수는 1970년대 말기까지 매일 8면씩 주 48면, 언론통폐합을 강행한 이후 1981년 1월 1일부터는 매일 12면씩 주 72면으로 매우 빈약했다. 그것은 1970년대부터의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광고수요의 증대와 정보량의 급격한 팽창에도 불구하고 증면이 억제되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7년의 이른바 '6·29 선언' 이후 언론의 자율화 추세에 따라, 그리고 서울 올림픽 대회의 개최에 따라 점진적인 증면이 거듭되어 1991년말 현재로는 매일 28~32면을 발행하는 신문이 흔하게 되었다. 지면의 컬러 인쇄도 보편화되었고, 신문제작의 전산화(CTS)에 의한 편집이 활판제작법을 대치해서 빠른 시일 안에 보급될 전망이다. 주요 언론단체로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한국기자협회, 한국신문윤리위원회, 한국언론인금고, 관훈 클럽 등이 있다. 현재 발행되고 있는 한국의 신문은 모두 한국신문협회에 가입하고 있고, 대부분의 신문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있어 이들 각사 노조는 1988년 11월에 발족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에 가입하고 있다.

통신

통신사로는 1980년말 언론통폐합을 통해 정비된 2개의 통신사만 1990년대에 들어서도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 그 이전까지 존속했던 양대 통신사(동양통신과 합동통신)가 발전적으로 해체되어 창설된 연합통신은 언론통폐합과정에서 시사통신·경제통신·산업통신까지 흡수한 대형 종합통신사로, 전국의 신문사와 방송사가 공동으로 출자하고 있다. 또 하나의 통신사인 내외통신은 공산권 특히 북한에 관한 보도를 전문으로 취급하고 있다.

기타 정기간행물

1991년말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는 주간지 1,338종, 월간지 2,672종, 기타 정기간행물 1,842종이 발행되고 있다. 이것은 1961년말의 주간지 338종, 월간지 178종, 기타 간행물 83종, 또는 1980년말 언론통폐합 이후의 주간지 94종, 월간지 659종, 기타 간행물 428종에 비하면 엄청난 증가세를 기록하고 있는 숫자이다.

방송

방송의 신속성과 광역성 및 광범위한 영향력으로 인해 권력을 쥔 집단은 방송을 국유화거나 관영화함으로써 방송 내용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로 방송이 광고매체로서 갖는 효율성과 수익성은 영리를 추구하기 위한 방송의 민영화 또는 상업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방송은 공공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공영화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기업·일반 대중 사이의 상이한 욕구와 이해관계는 방송의 위상을 국영(관영)·민영·공영 중 어떤 형태로 정립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를 불러일으켜왔다. 일제강점기에 첫 라디오 전파를 띄운 경성방송국은 8·15해방 후 미군정청 공보부에 귀속되어 운영되던 과도기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 공보처 산하의 국영방송으로 새롭게 발족했다. 모든 방송이 국영으로 운영되던 건국 직후의 단일체제는 먼저 1954년 12월에 민간방송인 기독교중앙방송국(CBS)이 개국되면서 2원화되었다. 그뒤 1959년 4월 부산문화방송국이 창설되면서 상업방송시대로 접어들었다. 1962년 12월에는 한국문화방송(MBC)이, 1963년 4월에는 동아방송(DBS)이, 1964년 5월에는 라디오서울(RSB)이 문을 열면서 민간상업방송은 경쟁체제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1961년 12월에는 KBS-TV가 개국되면서 본격적인 텔레비전 방송시대의 막이 올랐고, 그 뒤를 이어 1964년에는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TBC-TV)가, 1966년에는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MBC-TV)가 문을 열면서 텔레비전도 국영방송과 민간상업방송으로 2원화되어 3사 경합시대로 들어섰다.

1980년에 단행된 언론통폐합조치는 방송계에도 심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까지 국영방송과 민간상업방송으로 2원화되었던 방송구조는 '공익'을 우선한다는 이른바 '공영' 방송체제 수립을 명분으로 TBC와 DBS 등을 흡수하여 비대화된 KBS와 MBC의 2대 방송망 조직으로 재편성되었다. 그밖에는 기독교방송·극동방송·아시아방송 등 3개 종교방송이 특수 라디오 방송만을 할 수 있도록 남게 되었다. '공영방송'은 허울뿐이었다. 방송사의 주요인사와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정부권력의 간여는 오히려 더욱 강화되었고, 1980년 12월부터는 한국방송공사법에 따라 KBS도 광고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공영'의 이름 밑에 운영되고 있던 방송의 실상은 '국영상업' 방송이었다. 이러한 방송의 운영과 프로그램 편성에 대한 시청자의 불만은 1986년 2월부터 KBS-TV 시청료납부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국방송의 역사에 특기할 만한 이 자발적인 시청자운동은 그 다음해 6·29선언을 쟁취한 민주화 시민운동의 전주가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6·29선언 이후 방송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1987년 10월 기독교방송(CBS)이 박탈당한 보도기능을 부활시켰다. 1988년 12월에는 언론통폐합 당시 KBS가 보유하게 되었던 MBC의 주식 70%를 방송문화진흥회가 인수하도록 하는 방송문화진흥법안이 국회에서 의결되었다. 1990년 4월 천주교의 평화방송(PBS)이, 5월에는 불교방송(BBS)이 각각 FM 종교방송으로 문을 열었고 6월에는 교통방송국(TBS)이 개국되어 FM 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1990년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한국 방송의 구조를 국영방송·공영방송·상업방송이 병존하는 3원체제로 개편한 새 방송법의 공포였다. 1989년 5월 방송위원회의 위촉으로 방송제도연구위원회가 마련한 보고서의 건의에 따라 제정된 이 새 방송법안은 방송계와 학계 및 일반사회의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국회에서 여당의원들만 참석한 가운데 통과되었다. 새 방송법에 따라 그해 12월에는 교육방송(EBS)이 KBS에서 독립하여 개국하게 되었고, 1991년 12월에는 민영방송인 서울방송(SBS)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에서는 MBC·EBS·SBS와 주한미군방송인 AFKN의 4채널, 그리고 KBS의 2채널 등 총 6채널을 통해 TV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다.

컬러 방송은 1980년 12월 1일 KBS 제1TV를 통해 처음 시험방송이 실시되었다. 같은 해 12월 22일부터는 KBS 제2TV와 MBC-TV도 컬러 시험방송을 시작하여 전면적인 컬러 TV 시대에 돌입했다. 컬러 방영이 시작된 1980년 당시에는 흑백 TV 수상기 618만여 대에 비해 컬러 TV 수상기는 13만 여 대밖에 되지 않았으나 다음해 81년에는 이미 컬러 TV 수상기가 100만 대(117만 7,808 대)를 넘어섰고, 89년 7월말에는 643만여 대로 늘어났다.한편 1981년 2월 2일에는 한국 최초로 UHF 채널을 통한 TV 교육방송이 전국적으로 시작되었다. 1985년 10월 1일부터 KBS와 MBC가 수도권지역에서 음성다중방송을 시작하여 음악방송, 스포츠 방송은 스테레오 음으로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외국영화는 원어와 우리말 더빙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1990년 1월 1일부터 KBS가 착수한 텔레비전의 문자다중방송(teletext)의 시험 서비스는 뉴미디어 시대를 개척한 한국방송의 또다른 이정표이다.

한국 텔레비전의 표준 컬러 방식은 미국·일본 등과 동일한 NTSC(national television system committee) 방식이며, 북한은 독일·영국과 같은 PAL(phase alter-nate line) 방식을 쓰고 있다. 외국(일본의 NHK)에서 조사한 미디어 통계에 의하면 1990년 현재 우리나라의 라디오 수신기는 3,860만 5,000대, TV 수상기는 900만 대로 전 인구대비 21.8%의 보급률을 기록하고 있다. 국내의 모든 방송사는 한국방송협회에 가입하고 있고 각 방송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다.

출판

한글의 점진적인 전용화, 교육받은 인구의 팽창과 높은 문자해독률, 산업화·도시화·국제화에 따른 정보 및 정보수용의 폭발, 인쇄용지난의 해소와 소자본에 의한 출판사의 설립가능성 등 여러 요인에 의해서 한국의 도서출판은 적어도 그의 양적인 통계에 있어 세계의 선두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중국·미국·영국이 누락된 유네스코의 1987년 통계를 보면 한국의 연간 서적출판 종수는 4만 4,288종으로 프랑스(4만 3,505종)·스페인(3만 8,302종)·일본(3만 6,346종) 등에 앞서 소련(9만 1,145종)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듬해 1988년에는 미국·영국·중국·일본·프랑스의 통계가 누락된 유네스코 통계연감에서 한국의 연간 서적출판 종수는 4만 2,842종으로 2위를 기록하고 있다.

1948년 정부수립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의 연간 도서발행 종수는 1,136종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58년에도 도서발행종수는 1,281종으로 거의 제자리 걸음을 걷고 있었으나 다시 10년 후인 1968년에는 2,528종으로 배가 증가했고, 이 해의 도서발행총부수는 530만 3,277부를 기록했다. 그로부터 다시 10년이 지난 1978년에는 연간 도서발행이 1만 5,149종으로 6배나 증가했고 총발행부수는 5,853만 6,520부로 무려 10배 이상 늘어나게 되었다. 한국의 연간 도서발행 총부수가 1억 부를 넘게 된 것은 1983년(1억 441만 1,111부)부터이며, 그 절정을 이룬 것은 연간 발행된 4만 1,712종(초판·중판 포함)의 도서가 2억 4,183만 9,337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한 1990년이었다. 1991년말에는 도서발행 종수는 2만 2,769종, 총발행부수는 1억 3,461만 6,495부로 격감하고 있다.

1991년 통계를 도서종류별로 보면 1위가 문학서적(4,373종), 2위가 학습참고서(3,765종), 3위는 사회과학서적(3,276종), 4위는 아동서적(3,213종), 5위는 기술과학서적(2,208종)으로 되어 있다. 제1위를 기록한 문학서적을 다시 장르별로 보면 소설이 2,219종으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뒤를 시(804종)· 수필(403종)·희곡(82종)·평론(55종)이 잇고 있다.

한국에서 번역되는 외국서적은 1982~91년의 10년 동안 초판 기준 3,000종에서 5,000종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1991년 번역된 외국서적의 신간은 3,901종으로 이를 부문별로 보면 문학서적이 1,326종으로 가장 많고 그뒤를 종교서적(612종)·사회과학서적(434종)·기술과학서적(265종)·예술서적(245종)·철학서적(231종)·순수과학서적(124종) 등이 따르고 있다. 1991년말 현재 등록된 한국의 출판사 총수는 6,299사로 이중 반 이상인 3,762사는 당해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출판하지 않은 '무실적' 출판사이다.

<최정호(崔禎鎬)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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