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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7 (일) 09:52
분 류 사전3
ㆍ조회: 713      
[현대] 5.18광주민중항쟁의 배경 (부상자회)
민주화의 후퇴

관련문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10.26사건과 12.12사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경
5.18광주민중항쟁 1
5.18광주민중항쟁 2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1. 신군부의 등장과 정권탈취 음모

가. 신군부의 최규하정부 내각장악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마침내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8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도정에 나섰다. 제일 먼저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의 내각장악을 위한 세가지 조치를 취했다. 먼저 비상계엄령의 유지였고, 둘째 합수부의 권한강화와 활동영역의 확대였으며, 셋째는 헌법개정작업의 지연이었다.

또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사회심리적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여론을 호도하는 K-공작계획을 치밀하게 준비, 진행시켰다.

먼저 신군부는 유신관료집단인 신현확 내각 장악에 나섰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수부장으로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렵기 때문에 공석중인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절실히 필요했다. 1980년 3월말경, 전두환은 신현확 총리의 사무실에서 "중앙정보부장 겸직"을 주장했고, 이에 반대하는 신총리에게 "1980년 1월 29일 석유값 59.4%인상 배후 의혹이 있어 조사를 지시했다"는 협박을 가해 신총리의 암묵적 동의를 얻어냈으며, 4월 14일 최대통령은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명시된 "중앙정보부장의 타직 겸직 금지"조항에 위배되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전두환은 4월 14일 이전에도 국무회의에 참석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회의진행을 위한 실무자로서 보고행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4월 14일 중앙정보부장 겸직 이후부터는 실무자가 아닌 '주요각료급'의 일원으로 최규하 정부의 신현확 내각이 결정하는 정책방향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나. K - 공작계획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여 신현확 내각을 무력화시킨 것이 유신관료집단의 주도권 완전박탈 조치였다면 언론장악은 국민여론을 조작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의 장악이었다.

신군부는 정권찬탈을 위해 1980년 2월 1일, 보안사령부내 정보처를 복원, 기구를 대폭 확대한 후 사회 각계각층에 대한 치밀한 정치공작을 전개했다. 특히 보안사의 이상재 준위가 팀장인 '언론조종반'에 의해 1980년 3월경 작성된 'K(King의 약자)-공작계획'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 K-공작계획은 1980년 당시 보안사령부의 대외비 문서로서 1989년 12월 29일, '전두환 청문회'를 앞두고 이철의원이 국회 5공특위와 광주특위 위원장에게 제출, 국회에서 공개한 것이다.

'K-공작계획'의 목적은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데 있다. 신군부는 '언론공작반'을 통해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해 안정세로 전환한다"는 방침에 따라 ① 보도검열단을 통한 봉사활동 ② 언론계 중진들과 개별 접촉한 후 회유공작 실시방안을 마련하여 중앙 일간지 및 방송사 등 언론사 사장 및 간부 94명을 차례로 접촉, 회유공작을 실시했다. 이 공작은 전두환 중심의 신군부만이 "혼란의 확대재생산"을 막을 강력한 세력임을 주입시키기 위함이었다.

'K-공작계획'의 내용중 특이사항은 "공작업무 수행과정에서 수정 및 보완을 요할 시는 사전에 사령관의 재가를 득한 후 실시"라고 서술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 'K-공작계획서'를 작성한 곳은 보안사령부이고 당시 보안사령관은 다름아닌 전두환으로서 전두환 자신이 계획과 실행, 실행과정상의 문제점 발생에 따른 수정·보완까지 일일이 간여할 만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권력찬탈 음모를 치밀하게 진행시켰다.

다. 충정훈련

한편 신군부는 정권찬탈을 위해 1980년 2월 18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충정부대 및 후방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소위 '충정훈련'은 공수부대라는 특전부대를 중심으로 대도시 부근 일반부대까지 실시하였는데 이들을 '충정부대'라 했다. 강력한 충정훈련을 실시케 한 신군부는 대학가의 개학을 앞둔 3월 4일부터 사흘간 충정작전의 실효성을 검토하고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CPX 및 FTX 훈련을 실시하고 이어서 3월 6일 1980년도 제1차 충정회의를 소집했다.

이날의 충정회의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1, 3, 5, 9공수여단장, 20, 30, 26사단장 및 해당부대의 작전참모들이 참가한 가운데 노태우 소장이 사령관으로 있던 수도경비사령부에서 열렸다.

충정부대의 주력은 공수부대로 4월경 진압봉(길이 45∼70㎝, 직경 5∼6㎝, 재질 물푸레나무 혹은 박달나무)을 제작, 폭동진압 충정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했다. 충정훈련은 시위진압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공세적 진압 훈련으로써 시위대를 향해 돌격하여 와해시킨 뒤 재집결 불허와 분쇄 및 주모자를 체포하되 기동에 유리한 경무장을 하며 반드시 진압봉을 휴대하는 것이 훈련 실시목적이었다.

신군부는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을 '맹목적 저항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즉 투옥해야 한다고 결론지은 뒤 그래도 안될 때는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광주항쟁 초기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시위확산을 방지하고 자진해산을 유도하는데 중점을 둔 경찰의 진압방식과는 달리 병력을 돌격시켜 시위대를 무지막지하게 분산시킨 다음 재집결을 분쇄하고 주모자를 현장에서 색출·살상하게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전술을 채택하고 훈련한데서 나온 결과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시위대의 머리와 목 등 급소만을 겨냥하여 특수하게 제작한 진압봉을 휘두르고, 총에 꽂은 칼로 찌르기까지 했으며 그렇게하여 붙잡힌 시위대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옷을 벗긴 다음 트럭에 짐짝처럼 던져 군부대에 수감했으며 수감상태에서도 온갖 만행을 다하여 보복을 했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2. 1980년 서울의 봄

가. 80년 봄의 학생운동

19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논의를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은 1980년 봄의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시작하여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신학기 대학가는 각종 써클이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여러 가지 대자보가 등장하여 연일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비행을 폭로·질타했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가자 대학은 민주화투쟁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지로 변해갔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그 뒤를 따랐다.

학생운동은 학생회 구성작업이 마무리된 시점까지 일체의 과격한 투쟁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집회와 시위를 최대한 자제했다. 3월은 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운동 기간이었고 4월은 학원민주화투쟁 시기였다. 이 투쟁은 족벌사학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농성으로 시작되었으나 학원민주화투쟁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4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병영집체훈련문제가 학원민주화투쟁의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이 본격화되고 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이 공방은 조만간 다가올 신군부와 학생의 일대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보도가 나오고 입영훈련 거부투쟁과 맞물리면서 대학가에 투쟁의 진로와 방법에 대한 이견과 노선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심각한 국면에 접어든 학생운동은 5월 1일,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5월 2일부터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정부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운동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정치투쟁으로 돌입했다.

5월 2일이후 13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은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에서 쿠데타의 명분을 찾으려는 신군부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5월 12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시위로 나서게 된다.

나. 동상이몽 속의 정치권

1980년 봄의 정치권은 최규하 정부와 정치권 전체의 대립·갈등과 정치권 내부에 있어서 3김씨 사이의 협력 및 경쟁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국민연합'으로 결집해 있던 재야민주인사들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김대중씨를 매개로 정치권의 변화와 맞물려 움직였다.

1980년 1월 9일, 각 신문, 방송에 대서특필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은 정치권에 심각한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최규하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면서도 연두기자회견이나 정부개헌심의위원회의 발언을 통해 절충형 정부형태를 추진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원집정부제 개헌론 파문은 개헌의 주체와 권력구조에 대한 정치적 전망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공화당과 신민당 그리고 재야를 기반으로 한 정치권의 3김씨는 최규하 정부의 이원집정부제 개헌주도 노력을 견제하기 위해 국회가 개헌의 주체로 나서도록 협력관계를 구축했다.

이런 가운데 '친여 신당설'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 소문은 1979년 12월경부터 퍼지기 시작했는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유정회 국회의원, 전직 장관, 김종필 총재와 불편한 관계인 TK출신 공화당 의원, 그리고 최규하 정부의 각료들까지 포함한 신당이 추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당설은 혼미를 거듭하던 정국전망을 한층 더 어둡게 만드는 역할을 크게 하였다.

개헌주도권을 둘러싼 관료집단과의 대결국면에서 잠시 협력했던 3김씨는 개헌을 전제로 대권을 향한 경쟁을 시작했다. 1980년 2월 28일 김대중씨가 복권되어 합법적인 정치활동의 권리를 찾은 후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사이의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었고 각자의 정치적인 실력을 겨루는 경쟁이 치열해지자 야당인 신민당은 분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당시 양김씨의 시국인식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구실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신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수 없을 것으로 보고 계속해서 인내와 자제만을 요청하고 있었다.

공화당의 김종필 총재는 김대중·김영삼씨간의 경쟁을 '추악한 파벌싸움'으로 몰고가는 신군부의 여론조작을 관망하면서 신민당이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임명문제, 학원사태 등 시국상황을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 소집요구를 계속해서 기피했다.

학생들의 교내 정치투쟁이 가열되면서 5·15총궐기설이 끈질기게 나돌자 양김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계엄령 해제' '임시국회 소집' '정부개헌 작업의 중지' 등을 담은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신민당의 계속적인 임시국회 소집 요구에 대해 공화당은 20일 이후에나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며 시국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착각속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렇게 정치권이 미로를 헤매고 있을 때 신군부는 '충정부대'를 전국의 주요도시에 투입할 계획을 최종점검하며 일부 병력은 이미 점령목표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의 대학생들의 노도와 같은 가두시위로 1980년 봄의 가장 강력하고 적대적인 두 세력간의 사활을 건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나흘간이 숨가쁘게 지나간 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씨는 그날이후 이땅의 국민들이 다시금 그들을 부를때까지 역사의 전면으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다. 서울역 회군

1980년 5월 14일 새벽 4시 30분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지역 27개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1980년대 한국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은 운명의 나흘간이 이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대표들이 헤어진 뒤 7시간이 지난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등을 외치며 학생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수만명이 진출하였다. 이 가두시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신말기의 탄압속에서 사회운동세력은 조직적 역량을 제대로 갖출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투쟁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했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다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이날 서울 이외 지방에는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감행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서울역 광장에 운집한 학생들은 역광장을 중심으로 연좌하면서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였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라는 돌발적인 사태를 접한 정치권은 황망하고 분주한 모습을 보이며 신민당은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정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방법에 의한 사태해결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런데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그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한다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했다. 입수된 병력이동 정보를 점검해볼 때 곧바로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짙었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따라 서울역에 있던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했고 그리고 다음날 아침, 대학가는 거짓말처럼 평온했다. 16일에는 전남대와 조선대, 광주교대 학생들이 도청앞 광장에서 대중집회를 연 후 야간에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벌이는 등 일부 지방대학의 시위가 있었으나 토요일인 17일에는 그나마 자취를 감추었다. 각 대학의 교정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민주진영의 모든 세력들을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유신부활음모 분쇄를 위한 공세에 나서도록 고무하고 촉진시켰으며 표면상으로는 전두환의 신군부가 마치 수세에 몰린 것처럼 보였으나 바로 그 무렵 신군부의 치밀하고도 무자비한 공세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3. 80년 봄 광주의 상황과 '5·17' 비상계엄령 확대

가. 민족민주화성회

타지역에 비해 산업기반이 취약했던 광주·전남지역은 당시 학생운동이 민주화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역량이었다. 당시 광주·전남지역에 있어서 학생운동의 중심적인 역량은 전남대 학생운동에 있었고 조선대학교 등에서는 학원민주화투쟁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10·26사건'과 '12·12사태'를 거치면서 전남대학내에서는 그동안의 반민주세력 및 반민주적 요소의 청산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그동안 학생들의 관제기구로 전락했던 학도호국단의 기능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학자추'의 작업은 결실을 맺어 총학생회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어 박관현(법학과 3년)이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명실공히 학생들의 대표기구인 총학생회가 학원민주화투쟁을 주도해 나가게 되면서 어용교수 퇴진 문제를 제기하는 등 그동안의 누적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학생들의 내적인 단결을 고양시켜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국적인 상황 전개에 영향을 받은 때문인지 전남대 학생들은 5월초를 분기점으로 운동의 초점을 전환시키기 시작하였다. 정부의 구체제 복귀 조짐과 더불어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가 소문으로 전달되면서 이에 대응하여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투쟁으로부터 민주화를 위한 정치투쟁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이같은 방향전환은 당시 5월 6일의 '전남대학교 비상학생총회'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비상학생총회는 5월 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을 '민족민주화성회'기간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에 따라 5월 8일에 열린 '민족민주화성회'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공동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은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대학에 휴교령이 내린다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양심있는 교수들의 적극적 동참을 호소하였다.

이러는 사이 일반학생들의 정치적 열기는 날로 고양되어 가고 있었다. 이들은 교내시위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점차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고,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행사에서 학생들은 예정을 하루 앞당겨 당장 가두로 진출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전남대 총학생회는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5월 14일 오후부터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오후 2시 총학생회의 지휘 아래 전경대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돌파한 전남대생 7천여 명은 오후 3시에는 도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강행하였다. 이날까지만 하더라도 광주시민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신군부세력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겁을 먹고 구경만 하는 자세였다. 이날 도청 앞 집회에서 대학생들은 만약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린다면 일차적으로는 오전 10시 학교 교문앞에서,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앞 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가두시위는 다음날인 15일에도 계속되었다. 오전에 전남대에서 '제3차 민족민주화성회'를 마친 1만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광주교대생 1만여 명, 전남대교수, 청년, 시민 등 수 만명의 인파가 도청 앞에 집결했다. 또 16일에는 광주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합류한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민족민주화성회'가 열렸으며 밤이 되자 사흘동안의 민주화성회를 마무리하는 횃불시위가 열렸다. 횃불을 든 시위행렬이 광주시내의 중요 도로를 누비는 이 횃불시위로 14일 이후 이루어진 시민, 학생들의 민주화시위를 장엄하게 마무리하였다.

이제 자신들의 의사는 충분하게 전달했으니 정부 측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 18일은 쉬기로 한다. 정부가 계엄해제와 향후 정치일정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하고 잠시 휴식에 들어갔으나 바로 그 순간에도 신군부가 다음날의 참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한편 학생·시민들의 민주화시위가 연 3일째 계속된 광주지역에서는 이들 시위대와 경찰 사이에서도 별다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학생시위에 대한 여론의 엄청난 지지 때문인지 경찰은 시위대의 주변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정도였고, 이러한 경찰들에 대하여 학생들도 음료수 등을 전달하면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가꾸어 나갔다.

나. 5·17비상계엄령 확대조치

'10·26사건'으로 야기된 지배권력의 내부적인 혼란이 신군부의 헤게모니 장악으로 일단락되면서 이들은 자신의 권력을 제도적으로 강화하고, 영구화하는 방안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국민들이 민주화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권력의 표면에 나서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신군부는 무력으로 사회운동을 굴복시키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이 전면에 등장하여 명실상부하게 권력을 장악한다는 방향으로 나가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치권의 각 세력들도 학생과 시민들의 요구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신민당은 5월 14일 소속의원 전원의 이름으로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 조차 적극적인 자세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5월 20일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안을 양당이 공동처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우기 여기에 유정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계엄령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신군부의 위기감을 부추기고 있었다.

명분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궁지에 몰린 군부는 예정대로 무력사용을 통해 위기상황의 정면돌파를 시도하였다. 대학가의 시위가 가열된 5월 12일에는 전군에 비상이 발령되었다. 이와 더불어 전국의 공무원들에게도 비상근무령이 내려졌다.

17일 10시 국방부에서는 계엄사 전군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는 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② 각급 학교 휴교조치 ③ 국회해산 ④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설치 등을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회의결과는 청와대에 보고되었고, 군의 결의를 받아들인 최규하대통령은 17일 자정을 기해 제주도가 제외되었던 비상계엄을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하는 전국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런 조치는 그 자체 내에 이미 새로운 불씨를 안고 있었다.

즉 '5·17계엄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10·26' 이후의 일련의 개량적인 변화들로부터도 완전히 후퇴한 것이었다. 아무튼 계엄확대와 더불어 발표된 '계엄포고 10호'를 통해 ①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 대학 휴교 ③ 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 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 언론 사전검열 등의 조치를 취하는 한편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인 26명을 연행하였다.

한편 경찰은 이미 5월 17일 오후 전국학생회장단모임이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수십명의 학생대표를 연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5월 17일 자정을 전후하여 전국적으로 민주인사들에 대한 예비검속을 실행하여 수백명을 강제연행하고 있었다.

군과 경찰이 이미 행동을 개시한 17일 광주시내의 각 대학은 그동안의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학생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한산한 분위기였다. 그날 밤 자정을 전후해서 광주의 각 대학은 계엄군에 의해 점령당했으며,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 상당수가 검거당했다.

다. 5월 17일 충정부대의 이동상황

신군부는 더 이상 망설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국무회의가 계엄확대안을 의결하기 수시간 전인 오후 6시경 합동수사본부는 경찰병력을 이끌고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다수의 학생대표를 체포한데 이어 충정부대 역시 초저녁부터 작전에 들어갔다. 신군부의 쿠데타 2단계 음모가 그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군의 기록에 나타난 충정부대의 이동상황은 다음과 같다.

① 육군본부 작전처장, 전군에 작전참모 정위치 지시(16:50) : 1, 2, 3군 작전참모 및 관구 작전참모, 사단 작전참모는 정위치에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의 지시받을 준비를 할 것.(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 ② 육군본부에서 2군사령부에 5월18일 00:01부로 충정작전 유효지시(19:40) : 학교점령은 04:00이전, 불순분자 체포는 00:01이전까지 완료.(전교사 전투상보) ③ 제7특전여단 부대 투입을 위한 차량 34대 지원(21:15).(특전사 전투상보) ④ 육군본부 전군의 충정부대 투입명령 하달(22:30) : 1, 2, 3군 및 수경사, 특전사 충정부대.(특전사 전투상보) ⑤ 육군본부, 충정작전 해당부대 작전요원에게 정상근무 지시(22:40).(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 ⑥ 육군본부에서 2군사령부에 추가지시(22:45) : 학교점령은 02:00이전에 완료할 것.(전교사 전투상보) ⑦ 2군사령부에서 전교사에 충정작전 5월 18일 00:01부로 유효지시(22:45) : 학교점령은 전북지역이 01:30이전, 전남지역이 02:30이전까지 완료.(전교사 전투상보)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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