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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07 (일)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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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26      
[현대] 5.18광주민중항쟁 2 (부상자회)
5.18광주민중항쟁 2

관련문서

5.18광주민중항쟁의 성격
10.26사건과 12.12사건
5.18광주민중항쟁의 배경
5.18광주민중항쟁 1
5.18광주민중항쟁 2
5.18광주민중항쟁의 의의

5. 5월 22일부터 25일까지의 상황

가. 시민공동체, 광주

항쟁 5일째 되는 날이 밝았다. 지난 저녁에 그토록 날뛰던 계엄군들이 물러나고 시민군들이 도청을 장악하자 시민들은 그러한 현실을 눈으로 확인하고자 도청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광주시민의 계엄군에 대한 초기 저항은 수세적이고 자연발생적인 것이었으며, 생존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그에 대한 자기방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항전이 담고 있는 역사적인 내용은 훨씬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모두 승리감을 만끽하며 높은 시민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그동안의 혼란 속에서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잔해들을 치워내고 시내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광주공원에는 지난 밤의 지역방어전투에 참가했던 '시민군'들이 모여들어 시민군의 재편성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부터 '시민군'이 해야 할 일은 자체조직과 병력을 통제하여 계엄군의 반격에 대비하면서 시내의 치안을 유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다시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우선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구내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 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지대에서 자체방위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기동타격대를 편성, 출동하기도 했다.

당시 계엄군은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하여 외부에서 광주시내로 들어오는 진입로 7개 지점을 차단, 봉쇄하고 있었으며, 시 외곽의 야산을 중심으로 매복하여 시민군이 통과하려 하면 사격을 가하였다.

나. 수습대책위원회 구성과 역할

한편 금남로와 도청 주변에 모여든 수많은 시민들은 도청앞에 모여 무엇인가 만족할만한 조치가 발표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낮 12시 30분경 신부, 목사, 변호사, 교수, 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유지급 인사들의 [일반수습위]는 주로 계엄사 측과의 협상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위]는 실질적인 대민업무를 맡아보게 되었다.

학생수습위는 장례반, 홍보반, 차량통제반, 무기수거반으로 나누어 당일 계엄사에 요구한 7개항의 요구조건을 홍보하고 무질서하게 돌아 다니는 차량을 통제했으며 엉겁결에 총을 들었다가 버린 총이나 총을 놓고자 하는 사람들한테서 총을 받아 300여정을 수거했다.

두 수습위는 이날까지는 혼연일체가 되어 활동했으나 계엄사가 요구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무장해제를 요구하는데서부터 두 수습위 모두 강온파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였다.

시민수습위의 온건파(사실상 투항파)는 축출되고 학생수습위는 24일 저녁부터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다. 5월 23일의 상황

시민들이 광주시 전역을 장악한지 이틀째인 23일, 시 외곽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지만, 아직 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이날도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 길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 솥을 걸고 밥을 지었으며, 밤새워 경계근무를 하던 시민군들에게 앞다투어 식사를 제공했다.

이날부터는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모여든 시민들로 도청앞 광장은 거의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해 있었다. 도청앞 광장 맞은편 상무관에는 시체를 담은 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관이 부족하여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체들도 무명 천에 덮여 있었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분향하고 있었다.

한편 지난 밤에 구성된 학생 수습대책위원회는 일반시민 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을 새워 대민질서, 홍보, 장례, 무기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지만, 무기반납 문제는 팽팽한 대립을 보였다. 무기를 일부 반납하여 그것을 조건으로 시민요구사항을 협상하자는 문제를 놓고 두 세력사이에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라. 수습위의 내부갈등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서의 갈등, 시민군과 수습대책위원회의 갈등, 이렇게 상이한 의견들이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선 것은 항쟁 6일째인 5월 24일이었다.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열린 '학생수습위'에서는 김종배, 허규정 등의 강경한 주장이 관철되어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이 결의되었다.

첫째, 금번 광주사태에 대하여 일부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이번 사태로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세째, 5·18 사태로 구속된 학생, 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네째, 금번 사태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이로써 학생수습위는 강경파(투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온건파(협상파)가 한걸음 물러섰으며 무기를 무조건 반납하자는 시민수습위의 온건파(투항파)는 이미 전날 축출을 당했다. 당시 시민수습위에는 시민들의 신망을 전혀 받지 못하는 인사들이 끼여 있었고 그들의 태도는 종잡을 수 없었다. 이들의 행태를 바탕으로 학생수습위의 온건파까지 무조건 투항하자는 사람들로 취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분류라고 볼 수 있다. 학생수습위의 위원장이던 김창길(전남대 농대 4년)은 당시 전남·북계엄분소 김기석 부소장의 양식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협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었다. 김창길은 시민수습위원들과 동행하여 학생대표로서 김기석 부소장과 담판한 적이 있으며 김부소장의 고뇌에 찬 태도에 신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날도 각국 외신기자들의 취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시민들은 사실보도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내기자들의 취재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보도를 하는 외신기자들에게는 협조해주어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국내기자의 도청 출입은 상당한 통제를 받았지만, 외신기자들의 취재영역은 훨씬 자유스럽게 개방되었다.

23일 이후 광주 시내는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의 의견대립으로 지도력이 흔들린데다가 정보요원들이 잠입하여 교란작전을 편 관계로 커다란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25일 아침 8시에는 독침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도청 안에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지만, 후일 이 사건은 정보당국의 교란작전이었다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마. 광주시민 자발적 질서회복, 공동체 실현

그러나 '수습위'내에서의 갈등이 커져가는 것과는 달리, 시민들은 어느 정도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대한 식량공급이나 전기, 수도 등은 관련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되고 있었다. 병원들은 한때 항쟁기간 동안에 발생한 수 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이 부족하여 곤란을 겪기도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이었다.

치안유지력이 매우 약화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 대한 사고는 단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등 일반 상점에서도 별다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이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위'나 시민군들이 필요한 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으며, 300∼400여명에 이르는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밥으로 해결되었다. 그 수는 줄었지만 시민군도 지도부의 의견대립과는 관계없이 대부분이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도덕성과 자치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날에 이어 25일에 이르자 '수습위'의 온건파는 그날밤 모두 도청을 빠져나가고 저녁 10시 드디어 최후까지 투쟁하기를 결의한 항쟁지도부가 탄생하였다. 새로운 지도부는 학생수습위의 일부 투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그동안의 무장투쟁 국면에서 전면으로 부상한 기층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새로운 지도부는 무기반납을 중단하고 투쟁의 조직적 지도를 위하여 역할을 분담했으며, 도청 내부의 행정체계를 잡고 민중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려고 했다. 그들의 전략은 '일면투쟁, 일면협상'이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자위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계엄군이 총공격해오면 도청 무기고에 있는 다이나마이트를 폭파하겠다는 위협적인 협상조건을 계획하였다(이들은 그때까지 그 다이나마이트의 뇌관이 제거된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한 대치상황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하여 모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사항도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현실적인 전망이나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적 조건 속에서 그들에게 그만한 역량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6. 신군부의 광주 무력진압, '상무충정작전'

가. 죽음의 행진

5월 26일 새벽 5시, 농성동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시민군이 탈취했던 계엄군의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보고되었다. 전 시민군에 비상령이 하달되었으며, 일반 수습위원들중 이성학 장로, 김성룡 신부 등 일부는 농성동으로 달려가 도로 위에 드러눕기도 했다. 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의 바리케이트를 깔아뭉개 버리고 1Km 쯤 밀고 들어와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26일 밤 도청 안에서는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한 것을 예상하고 일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 나갔다. 항쟁지도부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사회자를 통해 최후까지 싸울 수 있는 사람만 남아달라는 말을 전한 바 있었다. 이렇게 해서 YMCA에 모여 도청 항쟁지도부에 합류한 사람들이 150여 명이 되었다. 이중 80여 명은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60여 명은 고등학생 및 군 경험이 없는 청년들이었으며, 여학생도 10여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나. 상무충정작전

군의 자료에 의하면 충정작전은 5단계로 나누어지는데 1단계(5. 17 이전)는 경찰력에 의한 데모 진압작전, 2단계(5. 18∼5. 21)는 계엄군에 의한 데모 해산 및 진압작전, 3단계(5. 22∼5. 23)는 도로차단 및 광주 봉쇄작전, 4단계(5. 24∼5. 26)는 선무활동 및 상무충정작전 준비, 5단계(5. 27)는 상무충정작전의 실시로 진행되었다.

5월 21일 상오의 대책회의에서 공수부대를 외곽으로 재배치하고 "5월 23일 이후 폭도소탕작전 실시"를 결정한 신군부는 광주시민의 저항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기 위한 채비를 서둘렀고 충정작전 5단계인 '상무충정작전'을 통해 광주시민의 저항을 말살하기로 결정한다. 특히 '상무충정작전'에서 도청진압작전에 3공수여단 11대대의 1개 지역대를 특공대로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이들을 수류탄으로 중무장 시켰다.

3공수여단 특공조 휴대장비

M16 수류탄 방탄조끼 깨스탄 스턴 수류탄 특수 화학탄 오성 신호탄
80정, 정당140발 중대당3발 개인당1착 중대당 2발 (방독면) 전체 10발 전체 10발 중대당 1발

☞ 자료출처 : 평화민주당 광주민중항쟁 백서, 156쪽에서 인용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7. 5월 27일 도청, 새벽의 마지막 불꽃

가. 도청진압작전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료했다. 이들은 밤 11시경 이동을 시작, 27일 새벽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 뒷산에 집결,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후 3시와 3시 30분경에 각기 도청,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다.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부대 및 결과

부대 병력 (장교/사병) 목표 행동개시 점령완료

                                       도청
특공부대 3공수여단 14/66     광주공원            01:00     05:00
            7공수여단 33/224    전일빌딩           01:10      05:06
            11공수여단 4/33      YWCA 관광호텔 01:00     04:40
            계           53/323
공격부대 20사단    56/693       광주시 일원     02:20       05:00
            31사단    252/4,035                        04:00       05:00
            계          308/4,728
봉쇄부대 보병학교 24/548   외곽선   04:50   05:30    
            포병학교 36/620   외곽선   03:40   05:25
            기갑학교 19/1,522 외곽선  04:48    05:25
            계          79/2,690

☞ 자료출처 : 정상용 외, 광주민중항쟁, 1990, 돌베개, 305쪽에서 인용

나. 도청의 마지막 항전

공수부대의 특공조는 26일 오후 6시에 도청의 항쟁지도부를 '소탕'하기 위한 예행연습을 완료한 후 도청을 기습타격할 임무를 맡은 3공수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 11대대(대대장 임수원 중령) 제1지역대(지역대장 편종식 대위)는 M16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을 하였다. 3공수는 물론 7, 11공수여단 병력까지 얼룩무늬 제복대신 일반보병 전투복을 입고 방탄조끼를 착용했다. 20사단 역시 모든 준비를 갖추고 작전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도청진압 특공조는 27일 밤 1시 30분을 전후하여 조선대학교 뒷산에 집결하여 작전계획을 최종 점검한 뒤 각기 목표지점을 향해 은밀히 침투해 들어갔고 다른 공수대의 지역대들도 시내 주요지점을 향해 골목길을 타고 침투하기 시작했다. 또한 광주시 외곽에 봉쇄선을 펴고 있던 20사단은 새벽 3시 30분까지 사단의 전병력이 중심가를 포위한 공격개시선으로 이동하여 포위망을 압축하였다.

항쟁지도부는 26일 밤, 죽음을 불사하고 남아서 싸우기로 한 시민들과 기존의 시민군들을 모아 전투조를 편성하였고 궐기대회가 끝난 후 YMCA에 남은 150여명을 기존의 시민군들과 섞어 도청을 중심으로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등의 주요지점에 배치했다.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시와 전남 일원 사이의 전화를 두절시켰고 곧이어 시내전화선도 모두 차단해버렸다. 전화가 끊어지기전 시민들의 제보로 계엄군의 진입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항쟁지도부는 도청에 비상령을 내렸고 조용히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홍보부에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결정했다.

박영순과 이경희가 홍보차량에 올라 새벽 3시까지 광주시내 전지역을 돌면서 목이 터져라 가두방송을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요……." 그녀들의 애절한 부르짖음은 그후 오랫동안 광주시민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기억 속에 남아있게 된다.

상황실에는 시시각각 계엄군의 진입현황이 보고되어 들어오고 있었다. 계엄군의 이날 밤 광주진입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새벽 4시가 지나면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도청의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에 2∼3명씩 1개조로 담장을 따라 배치되었고 도청안에는 1층부터 3층까지 유리창 옆에서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도청 뒷담을 뛰어 넘어온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대자 곧이어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하여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그야말로 '폭도소탕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동이 터오기 사작하는 오전 5시 10분경 YMCA, YWCA, 계림초등학교, 전일빌딩, 관관호텔 등이 이미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당했고 도청을 마지막으로 최후의 항전은 끝났다. 완전히 소탕했음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후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항쟁의 피로 물든 아침이 밝아 왔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폭도'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계엄군은 작전을 개시한지 약 1시간 30분만에 모든 것을 마무리짓고 항쟁을 진압하였다. 그리고 '80년 5월 광주민중의 무장투쟁도 열흘간에 걸친 역사의 막을 내렸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8. 항쟁의 확산

5월 21일의 도청앞 집단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시내를 벗어나 전남 일원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광주민중항쟁 당시 광주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항쟁의 불길이 광주 이외의 지역인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지로 번져간 것이다. 21일 오전, 아세아 자동차공장과 각종 차고에서 차량이 시위군중에게 대거 획득된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는 광주 시내에만 국한되어 고립적으로 진행되었던 민중항쟁이 전남 도내 각 지방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최초 시위대는 보다 전국적인 항쟁의 확산을 목적으로 전주·서울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우선 항쟁이 전남 이외 지역으로 확산될 것을 두려워 한 계엄군이 호남고속도로와 철도를 철저히 봉쇄한 결과 주로 전남 도내 서남부에 있는 각 시, 군으로 진출하였다.

광주항쟁이 확산되는 경로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적인 점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항쟁이 발발한 지역이 주로 광주 이남 서남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물론 전남지역과 다른 여타 지역을 분리하여 전남을 고립시키려는 신군부와 계엄군의 전략·전술에도 원인이 있지만 전남에서 항쟁이 발발한 대부분의 지역이 광주에서 버스를 타고 간 시위대에 동조하여 항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또한 전남일원의 경찰력 대부분이 광주에 투입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근 도시의 경비가 취약했다. 각 지역의 민중들은 그 전에 광주에서 계엄군에 의하여 처참한 학살이 자행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감정적인 분노에 머무르다가 광주에서 온 시위대에 의하여 그 분노가 실천적인 저항으로 폭발한 것이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9. 광주항쟁과 미국

가.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입장

5월 22일 미 국방성 대변인 토머스 로스는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며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동아일보 1980년 5월 22일 강인섭 워싱턴 특파원 보도)

또 이날 미 국무성 대변인 호딩 카터는 광주사태에 대한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의 소요사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동아일보, 1980년 5월22일 보도)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오끼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한다.

나.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이양

이같은 미국의 일련의 움직임은 무엇을 의미하고 미국은 과연 신군부의 광주무력진압에 어떤 입장과 역할을 담당했는지는 1980년 5월 16일의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과 관련해서 파악할 수 있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한·미연합사령관은 요청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군부가 20일에는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한·미연합사에 '부대이동에 관한 문의'를 하였다. 이에 위컴은 '워싱턴에 있는 상관들과 협의한 후 동의(agreed)'한 것이다.

또한 미 행정부는 한·미연합사가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위해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을 해제해 준 사례가 있다.

5월 23일, 육군참모총장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확대에 대비, 광주지역 질서유지를 위해 5월 23일 12:00부로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는 부대사용 협조문"을 보냈다.(육군본부, 육군참고자료지-작전명령 및 지시의 육본 작상전 제0-232호 인용) 그러자 연합사령관은 즉각 "승인"한다는 전문을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33사단 101연대 제2대대는 23일 12시25분에 성남비행장에서 광주투입작전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나 실제 광주에는 투입되지는 않았다.

미국행정부가 남침의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광주사태가 더 격화될 경우 남침할 수도 있다'는 식의 경고를 계속한 것은 일반 국민이 광주항쟁을 불안하게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광주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무력진압을 정당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미국은 12·12쿠데타이후 신군부를 직·간접으로 지원·옹호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출전 : 5.18 부상자회-5.18이야기-항쟁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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