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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4 (일) 06:11
분 류 사전3
ㆍ조회: 1995      
[정치] 선거-선거사와 결과분석 1 (민족)
선거(우리 나라 선거사와 결과분석1)

세부항목

선거
선거(우리 나라 선거제도의 변천)
선거(우리 나라 선거사와 결과분석1)
선거(우리 나라 선거사와 결과분석2)
선거(평가)
선거(참고문헌)

(1) 국회의원선거

① 제1공화국

광복 후 1947년으로 접어들면서 점차 국기(國基)를 잡아가기 시작하여, 이승만을 필두로 하는 민족진영이 좌익세력을 누르고 주도세력으로 성장하여 단독정부수립이 구체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여건의 성숙 속에서 당시 미국의 국무장관 마샬(Marshall,G.C.)은 1947년 9월 17일 제82차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정식의제로 상정하여, 그 해 11월 14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파견안이 가결되었다.

1948년 2월 6일 유엔소총회의 ‘가능지역 내의 선거실시에 관한 권한’을 유엔한국위원단에게 부여하는 결의의 채택에 따라, 유엔한국위원단은 그 해 5월 10일 이내에 선거가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함으로써 그 해 5월 10일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한 역사적인 제헌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물론, 제헌국회의원선거는 미군정 당국이 선거의 준비와 집행을 담당하였으므로 이 선거에 적용된 선거법은, 대한민국국회에서 선거법을 제정할 때까지의 잠정법인 군정법령이었다. 그러나 이 선거법은 미군정하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 의하여 기초, 제정된 것이므로 한국인 자신의 의사에 의하여 결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선거는 정당의 성장발전이 초보적인 단계에서 치러졌고, 권력투쟁의 계기라기보다는 다분히 건국운동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뒤의 선거와 다른 특색을 지니고 있다.

건국 당시 이승만에 협조하였던 한민당(한국민주당)은 이승만의 외면으로 그와 결별한 뒤 야당화되었으며, 제헌국회 말에는 이승만의 독주를 막으려고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내놓았으나 부결되었다. 그로부터 야당의 인기는 상승일로에 있었으므로 그 예기를 꺾기 위해서 이승만은 선거를 11월로 미루겠다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제헌국회의 임기가 2년이었기 때문에 늦어도 1950년 5월 중에는 제2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어야 한다는 열화 같은 여론 앞에 정부는 선거일을 5월 30일로 결정하였다.

제헌국회에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에 연계된 전원이 체포, 구금되었고, 남북협상파의 거물이던 김구(金九)가 안두희(安斗熙)에 의하여 피살되고 북한과의 협상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나자 중간파 혹은 협상파는 크게 후퇴하였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제헌의원선거에 불참하였던 남북협상파와 중간파들이 모두 참여한 가운데 시행되었으며, 처음으로 우리 정부의 자주적 관리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한시법(限時法)으로서 제정된 군정법령인 〈국회의원선거법〉이 폐기되고 우리의 제헌국회에서 1950년 4월 10일 새로이 제정한 〈국회의원선거법〉에 따라 제2대 국회의원선거와 제3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1950년 5월 30일에 제2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하였으나 전국의 종합적인 결과를 집계하지 못한 채 그 해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관계자료가 불타거나 분실되어 선거결과에 대한 자료를 가지지 못하였다.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유동상태에 있던 기성정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으로 무소속의원의 대거진출이 이루어졌다는 점과 정치지도자의 부침이라는 관점에서 민족주의좌파와 사회주의계 인사 등 중간파 지도자의 진출이 현저하였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제2대 국회는 1950년 6월 19일 소집, 개원되었으나 그 해 6월 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국회는 대전·대구·부산 등지로 전전하였다.

1952년 중에 실시될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대통령선거방법에 대한 개헌파동이 야기되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처음 초당적인 통치형태인 거국내각을 구성하였으나 민주당 등이 반발하며 야당세력이 결속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1951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신당조직의 필요성을 발표, 이어 자유당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원내세력 판도로 보아 국회의 간접선거로는 이승만의 재선이 어려웠으므로, 그의 재선을 위해 정부는 대통령직선제·국무원불신임권 등을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여,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으로 알려진 발췌개헌안을 1952년 7월 4일 통과시켰다. 발췌개헌안의 통과로 국회는 양원제가 되었으므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실시전에 선거법의 개정이 실현되어야 했다.

그러나 전시하의 당시 형편으로는 복잡한 양원제가 필요없고 당초 이승만이 양원제 개헌안을 내놓은 것 자체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실시하려는 정략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선거법으로 제3대 국회의원선거도 치렀던 것이다. 제3대 국회의원선거의 특징은 우리 선거사에 있어 처음으로 공천제를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즉, 여당인 자유당이 조직을 강화하여 의원후보자공천제를 채택하자, 그에 대응하여 제1야당인 민주국민당도 의원공천제를 실시하였다. 제2대 국회 때의 발췌개헌과 제3대 국회 때의 4사5입개헌으로 국회는 민의원과 참의원 양원제로 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참의원선거법의 제정이 요청되었고 정부에서도 여러 차례 양원의원 선거에 적용할 ‘국회의원선거법안’과 이를 분리한 ‘민의원의원선거법안’ 및 ‘참의원의원선거법안’을 제의하였으나 국회의 통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제3대 국회의원 임기만료에 따른 총선거에 적용할 선거법의 개정이 절실히 요청되어, 야당은 1957년 5월 22일에, 여당인 자유당은 그 해 9월 24일에 국회의원선거법 개정안을 각각 제출하였다.

이렇게 여야가 각각 제안한 법안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두 법안의 상정 심의에는 대단한 파란이 예상되어 여야는 여러 차례(1957.9.18.∼1957.11.9.)의 협상을 거듭한 끝에 여야단일안을 작성할 것을 합의하고 〈민의원의원선거법〉과 〈참의원의원선거법〉의 두 협상법안을 완성하였다. 이 법에 따라 1958년 5월 2일 제4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5·2선거는 입후보자의 수가 종전보다 현저히 감소하고 특히 무소속의 진출이 억제되어, 자유·민주 두 정당을 축으로 하는 정당대결의 경향을 보인 특색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은 양당제도의 확립이라는 방향으로 정당이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② 제2공화국

1960년의 3·15정·부통령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난 4·19혁명으로 이승만독재와 자유당정권이 붕괴되었다. 이 정권의 붕괴 후 일부세력은 정·부통령의 직선을 주장하였으나, 국민의 압도적 여론은 구제도의 폐지와 1인독재의 재현을 방지하기 위한 내각책임제 정부형태에로의 전환이 시급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회는 1960년 4월 26일에 열린 본회의의 결의에 따라 선정된 내각책임제 개헌안기초위원들이 민주당에서 당책으로 기초해 놓았던 안과 자유당의 혁신파에서 작성한 안을 중심으로 요강을 작성하였다. 그 뒤 각계각층의 인사를 초청하여 공청회를 개최하고, 국민의 여론을 들어 1960년 5월 11일 개헌안을 제안하였다.

영국식 정부형태를 모방하고 민권을 대폭 신장한 이 개정안이 30일간의 공고기간을 거쳐 1960년 6월 15일 국회를 통과하자, 정부는 그 날로 개정헌법을 공포하였다. 선개헌 후선거의 원칙이 성립되자, 국회는 곧 민·참의원의 선거를 전제로 〈국회의원선거법〉의 개정을 단행하였다.

이리하여 제5대 국회의원선거는 1960년 7월 29일, 민의원 4년, 참의원 6년(첫 선거 때만 반수를 3년으로 해서 3년마다 그 반씩을 개선하도록 하였다) 임기의 선거가 실시되었다.

③ 제3공화국

제2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으로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발생하여 제2공화국과 함께 제5대 민의원과 제1대 참의원은 불과 1년도 못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박정희(朴正熙)가 이끄는 군사정부는 1963년에 민정이양을 하기 위하여 내각책임제의 권력구조를 대통령제로 하고, 정당정치를 구현하는 헌법개정안을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시키고, 그 해 12월 26일 개정헌법을 공포하였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는 헌법공포일로부터 1년 이내에 실시하여야 한다는 이 헌법부칙에 따라, 1963년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선거를, 그 해 11월 26일에 국회의원선거를 각각 실시하였다. 이에 앞서 군사정부에서는 이 선거에 적용할 〈대통령선거법〉과 〈국회의원선거법〉을 제정하여 1963년 1월 16일에 공포하였다.

이러한 일정 속에서 혁명으로 일시 금지되었던 정치활동이 1963년 1월 1일을 기해서 재개되자, 그 해 2월 26일 민주공화당이 처음 창당된 데 이어, 민정당·민주당·국민의 당이 창당되어, 정당법상의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정당은 의외로 난립하였는데, 그 이유는 정당에 의한 후보자 공천만을 인정한 〈국회의원선거법〉 때문이었다.

12개 정당이 난립하였던 11월 26일의 총선거는 여당의 원내 안정세력확보와 야당의 대통령선거에서의 패배설욕전이라는 점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끌었다.

1967년 5월 3일에 실시된 제6대 대통령선거가 끝나자 그 해 5월 8일 제7대 국회의원선거의 공고로 각 당은 국회의원선거 체제정비에 착수하였다. 그 달 16일 등록이 마감되기 전까지 여야는 몇 가지 문제를 놓고 논전을 폈다.

그 하나는, 정부가 그 달 9일 〈대통령선거법〉 및 〈국회의원선거법〉의 두 시행령을 개정하여 대통령과 국무위원 등이 대통령과 국회의원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문제였다. 야당측은 이러한 개정은 공무원의 선거운동을 금지한 헌법정신과 〈국회의원선거법〉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쟁점에 대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1967년 5월 13일 국무위원의 선거운동은 〈국회의원선거법〉에 위배되므로 불가능하다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이 논의는 의외로 정부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이로 옮겨졌다.

이러한 논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5월 21일 정당의 대표자인 대통령은 〈국회의원선거법〉상 선거운동을 할 수 있다는 유권해석을 내림으로써 일단락되었다.

또 다른 문제는, 선거공고가 있던 그 해 5월 8일 정부는 대통령후보였던 서민호(徐珉濠, 대중당)·오재영(吳在泳, 통한당)과 신민당원 장준하(張俊河)를 구속하였다. 이들이 대통령선거시 특정후보 박정희를 신랄히 공격하였던 것이 문제가 된 것인데, 선거기간 동안에는 구속하지 않다가 선거가 끝나자 구속하였던 사실이다. 이들은 6·8국회의원선거가 시작되기 전 그 해 5월 31일에 석방, 국회의원선거를 치렀다.

또 다른 정치문제는 여야 다같이 공천문제에 따르는 파동이었다. 공천제는 여당에게는 논공행상적이었고, 야당에게는 자금조달원이라는 비난이 빗발쳤다.

이렇게 하여 그 해 6월 8일 선거는 실시되었다. 제7대 국회의원선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군소정당은 불과 1석밖에 획득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여촌야도(與村野都)라는 지역적인 편차를 보이며, 선거법상의 수많은 금지규정에도 불구하고 부정선거였다는 평가가 나올 만큼 관권개입이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국회의원선거를 전면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야당(신민당)과 일부분에 걸친 부정이라는 여당(민주공화당)의 주장이 맞서 6·8선거후유증을 유발시켰다.

이러한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여야는 숱한 협상 끝에 이른바 ‘보장입법’을 마련, 1968년 12월 29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보장입법은 〈대통령선거법〉·〈국회의원선거법〉·〈선거관리위원회법〉·〈정당법〉 및 〈정치자금에 관한 법률〉 등 5개 선거관계법이었다. 또 1969년 9월 14일 3선개헌의 처리과정과 그 해 10월 17일 국민투표과정에서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문제로 여야대립은 국회운영의 공백을 초래하게 하였다.

이러한 정국을 정상화하기 위해서 1969년 11월 하순부터 막후교섭으로 진행되어온 여야총무회담에서 선거제도개선이 국회운영의 정상화의 관건으로 대두, 여야는 협상선거법에 대한 합의를 보았다. 1970년 12월 17일 선거관계법의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그 해 12월 22일 공포되었다. 이를 제2의 협상선거법이라고 한다.

이 선거법으로 1971년 5월 25일 제8대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이 선거는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진 선거로, 여당인 공화당은 안정세력을 확보하고 야당인 신민당은 의석의 과반수에 접근하여 균형 있는 원내 의석분포를 보인 것이 특징이다.

④ 제4공화국(유신체제)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의 비상사태특별선언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당활동이 금지되었으며, 해산된 국회기능을 수행할 비상국무회의가 설치되었다.

그 해 10월 27일 비상국무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지향한다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했으며, 이에 대한 국민투표가 그 해 11월 21일 실시되었고, 91.5%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유신헌법이 확정되어 그 해 12월 27일 이를 공포하였다.

이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되고, 국회의원선거는 헌법시행 6월 이내에 실시한다는 이 헌법의 부칙으로 인해 〈국회의원선거법〉을 그 해 12월 30일 제정,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73년 2월 9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일이 공고된 뒤, 그 해 2월 14일 후보등록을 마감하여, 2월 27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또한 그 해 3월 5일 대통령의 일괄추천에 의하여 그 해 3월 7일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임기 3년의 국회의원을 찬성투표로 당선을 결정하여 3분의 1을 선출함으로써 제9대 국회의원선거가 종결되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선출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는 점이 제9대 국회의원선거의 특징이기도 하다.

1973년 유신체제로 처음 선출된 제9대 국회의원의 임기는 6년으로, 1979년 3월 11일에 만료된다. 또 1978년도는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과 제8대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해로서,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와 제9대 대통령선거 및 제10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해야 하는 선거의 해이며 6년간의 유신1기가 마무리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여야는 제10대 국회의원선거를 1년여 남겨 놓은 1977년 정기국회에서 정치의안인 선거관계법 개정문제를 놓고, 그 해 11월 10일부터 5인회담과 10인중진회담을 번갈아 열어 20일간의 협상 끝에 타결된 〈국회의원선거법〉 중 개정안을 1977년 12월 17일 국회에서 의결, 12월 31일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1978년 12월 12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 뒤 10·26사태와 5·17군사쿠테타 등을 거쳐 제5공화국의 기틀이 된 헌법이 공포, 발효됨에 따라 그 규정에 의거하여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국회의원선거법〉·〈대통령선거법〉 등의 사회개혁을 위한 제반 입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기존정당은 모두 해체되고, 정치활동의 부분적 해제조치를 통하여 일부 구정치인과 신인정치인들을 중심으로 정계개편이 이루어져 민주정의당·민주한국당·한국국민당 등이 창당되어 총선준비에 들어가게 되었다.

⑤ 제5공화국

제5공화국 출범을 위한 마지막 정치일정인 제11대 국회의원의 총선거일(1981.3.25.)이 1981년 3월 5일 공고됨에 따라 민정·민한·국민을 비롯한 각 정당이 국회의원후보공천을 끝내고 선거전에 들어갔다.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276명을 선발하는 3·25총선은 평균 78.4%의 투표율을 보인 가운데 민주정의당이 압승하였으며, 기타 정당들은 예상보다 저조한 의석확보에 그쳤다.

제12대 국회의원선거는 1985년 1월 23일 공고되어, 그 해 2월 12일 실시되었다. 전국구 92인, 지역구 184인을 선출하는 제12대 총선에는 전국구 71명, 지역구 440명이 입후보하였다. 한편, 전국구의석 배분에서는 민주정의당이 61석, 신한민주당이 17석, 민주한국당이 9석, 한국국민당이 5석을 배분받았다.

2·12총선의 특징은 정통야당을 계승한 신한민주당이 창당한 지 한달 만에 선거에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2당의 지위에 오르고, 뒤에 민주한국당 소속의원을 대거 영입하여 양당제로 복귀하는 경향을 보여준 것이다〔표 2〕.

이상과 같이 역대 국회의원선거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우선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투표율이다. 일반적으로 투표율이 정치참여도 측정의 주요 지수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환경변수가 정치참여에 중요하게 작용하므로, 투표율로 정치참여를 측정하기는 어렵다.

우리 나라의 경우 역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전무후무하게 자유 분위기가 보장되고 유권자의 투표에 대한 정치적 효율감이 가장 충만하였던 제5대 민의원선거시 투표율이 겨우 84.3%이었음을 보면, 자유당하의 90% 이상의 투표율은 자발적 정치참여의 지수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제6대에서 제12대에 이르는 지역별 투표율을 볼 때 제주도·충청북도·강원도가 교대로 전국 최고투표율을 보이고 있는 반면, 서울·인천은 한결같이 최하위의 투표율을 보이고 있다. 이는 기권이 정치적 무지 내지 무관심에서도 비롯되지만, 정치에 대한 혐오·불신 및 비효율감 등이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제헌국회 이후에 계속 하강세를 보여온 투표율이 제10대 이후 다시 상승세를 타서 제12대의 경우는 84.6%로 4·19혁명 직후의 제5대 국회를 육박하고 있다. 그 원인은 흔히 입후보자수의 폭증과 높은 경쟁률 및 열띤 정치참여 등의 필연적 결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제6·제7대의 그것과 비교하였을 때 반드시 그것만이라고 할 수 없는 면도 있다.

입후보자에 대한 당선자 비율을 보면, 제2대 선거가 10.5:1로 가장 경쟁률이 치열하였는데, 이는 제헌국회의원선거시 불참하였던 남북협상파와 일부 중간계열의 참여로 인한 현상이다. 이 선거에서 후보자를 낸 정당 단체만 해도 40개였고 이 중 단 1명의 후보자를 낸 정당과 단체가 무려 18개였다는 점에서 당시 정당 및 단체의 난립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경쟁률은 낮아지는 추세를 보여서 제12대에는 약 2.4:1의 안정된 배율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제13대 선거에서 경쟁률이 4.7:1로 급증하였는데, 이는 야당의 분열로 인하여 초래된 현상이다. 그리고 제10대 국회까지는 후보자를 낸 정당의 숫자가 각각 줄어들다가 제11대 이후 역류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이는 일시적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역대 국회의 정당별 득표율을 보면, 제7대 국회에서 민주공화당이 50.6%, 신한민주당이 32.7%로서 제1당과 제2당의 득표차가 17.9%이었다. 그러다가 제8대에서는 4.3%의 격차를, 제9대에서는 6.1%의 격차를, 그리고 제10대에서 민주공화당과 신한민주당의 격차가 1.1%의 역조현상을 보임으로써 민주공화당 유신정권의 적신호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제11대에 와서는 민정당과 민주한국당의 격차가 14.1%로 다시 벌어졌다. 이는 유신체제 후 제5공화국의 체제변혁적 작업결과와 새로운 선거제도의 메카니즘의 상관관계 속에서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12대 국회는 민주정의당이 35.2%를 득표한 데 비해 신한민주당·민주한국당의 야당권이 각각 29.3%, 19.7%로서 도합 49%를 얻었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⑥ 제6공화국 노태우 정권

제6공화국에서 있었던 선거는 제13대 국회의원선거와 제14대 국회의원선거였다. 제13대 국회에서 민주정의당이 33.9%, 야당인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각각 23.8%, 19.3%, 15.6%를 얻어 제1당과 제2당의 득표차가 10.1%로 벌어졌으나, 이는 야당단일화 실패에 따른 필연적 결과였다.

한편, 13대의 경우 나타나는 특징은 득표율에서 앞선 통일민주당이 59석의 의석밖에 차지하지 못하여 70석을 차지한 평화민주당에 이어 원내 제3당으로 전락한 점이다〔표 3〕. 그리고 전통적으로 내려온 ‘여촌야도’의 투표경향이 제11대 국회에 한해서 ‘여촌여도’의 현상으로 나타났으나 이는 일시적 현상으로 제12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제14대 국회의원선거의 경우는 삼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이 38.5%, 민주당 29.2%, 통일국민당 17.4%를 얻었다. 역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기복은 있었다지만, 득표율과 도시화율의 상관관계(즉, 여촌야도 현상:여당이 농촌에서 높은 지지를 얻고 야당은 도시에서 높은 지지를 얻는 현상)는 14대 선거에서도 대체적으로 나타났음을 이 당시의 경험적 분석들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과거와 비교하여 여촌야도의 현상은 약화되었다. 이는 대도시 및 중소도시의 선거구가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여당이 비록 농촌에서 높은 지지를 받더라도 도시에서 저조한 지지를 상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촌야도는 이제 더 이상 여당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적다.

⑦ 김영삼 정권

김영삼 정권하에서 실시된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시기적으로 국회의원선거가 제1차 4대 지방선거(광역단체장, 기초단체장, 광역의회의원, 기초의회의원) 이후에 실시되었다.

제15대 국회의원선거는 지역주의 구도의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 선거였다. 여당인 신한국당이 34.5%, 새정치국민회의가 25.3%, 그리고 자유민주연합이 얻은 16.2%의 지지율은 각각 영남·호남, 그리고 충청을 기반으로 한 지지율이었다.

이러한 지역주의라는 정치문화적 정향은 제도적으로 국회의원선거에서의 소선거구제와 맞물려 있어 더욱 확고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⑧ 김대중 정권

2000년 4월 13일에 치른 제16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이 38.9%, 새천년민주당이 35.8%, 자유민주연합 9.8%, 민국당이 3.6%를 얻었다. 정당별 의석분포는 한나라 133석, 새천년민주당 115석, 자유민주연합 17석으로 한나라당이 원내제1당을 확보하였다.

지역구도는 계속되었고, 양당제가 정착되었다. 시민운동단체의 낙선운동이 이슈가 되었으며, 선거 후에 사법적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2001년 공동여당의 한 축인 자유민주연합이 공조를 파기하여 정국은 여소야대(與小野大)로 전환되었고, 2001년 10월25일의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모두 당선시켜, 과반에서 1석이 부족한 136석을 확보하였다.

끝으로, 역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사회적 배경을 편의상 연령·학력·직업에 따라 살펴보면, 연령별 분포는 대체로 35세에서 55세까지의 인사가 주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체제가 지속되면 될수록 국회의원의 고령화현상이 두드러지면서 보수적인 경향과 과두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제1·제2대는 국회의 형성 초기이므로 논외로 하고, 제3대부터 제5대까지는 평균연령이 높아지다가 제6대에 낮아지고, 제10대까지 다시 높아지다가, 제11대에 다시 낮아진 뒤 제12대에 다시 상승되는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즉, 개혁 초기의 강경한 변혁입법이 점차 온건·보수화되는 현상과 연령분포의 상승현상이 일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학력별 분포의 경우는 일관해서 고학력화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제헌국회에서 제4대 국회에 이르는 동안의 중학교졸업 이하의 학력은 30∼40%선을 상회한 바 있으나 제8대 이후에는 0.5% 안팎이다.

반면에 대학교졸업의 경우는 제헌부터 제5대 국회까지는 40%선에 머무르던 것이 제6대 국회 이후 60%선, 그리고 제10대 국회 이후로는 90%선을 상회(제13대는 92.4%)하고 있으며, 특히 제9대 이후로는 대학원 졸업도 40%선에 이르고 있다.

교육의 기회가 경제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때, 의원충원의 편재성은 한국의회의 보수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의 하나로 해석될 수도 있다.

끝으로 직업별 분포를 보면, 초기에는 농업과 무직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후기(제6대 이후)로 갈수록 직업정치인과 무직이 증가되는 현상을 나타낸다.

초기에 농업출신이 많았던 것은 일제치하에 농촌에 묻혀 있거나 생계를 그 곳에 의존하였던 잠재 엘리트들이 광복과 함께 정치적 수평선 위로 올랐기 때문이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줄어드는 것은 도시화·공업화 등의 사회변화 요인과 정치의 직업화현상이 작용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반면 정치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직업정치인제도가 확립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며, 이것은 동시에 입법엘리트의 순환 내지 사회의 상향적 이동이 그만큼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제12대 국회는 정치인출신이 전체의 79.7%이며, 지역구 184명만 보면 재선 이상이 143명으로 77.8%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우리 나라의 국회의원은 제13대로 올수록 대체로 정당배경을 가지고 있는 대졸 이상의 전문적 지식의 소유자로서 정치를 직업으로 삼고자 하는 주로 40대의 보수·중도적 정치인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제14대와 제15대 국회의원선거에서도 지속되었다. 제14대를 보면 대졸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가 92.9%였으며, 제15대의 경우는 93.6%에 이르렀다. 직업은 제14대의 경우 80.6%였으며, 제15대의 경우 77.5%, 제16대 지역구 당선자의 경우 76%로서 고학력 직업정치인의 입법 엘리트 현상이 제도화되어가고 있다.

(2) 대통령선거

① 제1공화국

1948년 5월 31일 처음으로 소집된 제헌국회는 곧 대한민국수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하였다. 당초 권력구조를 내각책임제로 하였으나, 건국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이승만의 반대로 결국 헌법기초위원들은 이승만의 뜻에 따라 대통령책임제로 헌법의 틀을 바꾸었고, 그 해 6월 23일 국회본회의에서 이를 상정, 통과시킨 뒤에 당시 국회의장인 이승만이 7월 17일 이 헌법을 서명,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헌법〉은 발효되었다.

새 헌법에 따라 〈정부조직법〉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이 〈정부조직법〉에 따라 국회는 그 해 7월 20일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의 간접선거에 들어갔다. 재적의원 198인 중 출석의원 196인에 의하여 무기명투표로 시행한 결과 이승만이 180표를 얻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부통령선거에 있어서는 제1차 투표 결과 당선자가 없어 최고득표자인 2인에 대하여 결선투표를 한 결과 이시영(李始榮)이 초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뒤 초대 부통령 이시영이 사임함으로써 1951년 5월 16일 제2대 국회에서 제2대 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는 3차 결선투표까지 거친 끝에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김성수(金性洙)가 근소한 차로 제2대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초대 대통령의 임기만료를 8개월 여 앞둔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재선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발췌개헌을 통하여 대통령·부통령간접선거는 직접선거로 전환되었다. 또 직접선거의 절차법으로서 〈대통령·부통령선거법〉이 제정, 공포되어 그 해 8월 5일 제2대 대통령·제3대 부통령선거를 실시할 것을 공고하였다.

제2대 대통령과 제3대 부통령은 이승만과 함태영(咸台永)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3대 대통령·제4대 부통령선거는 1956년 5월 15일 실시되었으며, 선거법은 제2대 정·부통령선거법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장면(張勉)이 각각 당선되었다.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선거는 1960년 3월 15일 실시되어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기붕(李起鵬)이 각각 당선되었다.

이 선거는 우리의 선거사상 악명높은 부정선거로 4·19혁명을 유발하게 한 원인이 되었고 결국 1960년 4월 26일 국회 결의에 따라 무효가 되었다.

② 제2공화국

허정(許政) 과도정부의 관리하에 이루어진 1960년 7월 29일 총선결과 최초로 민·참의원이 구성된 뒤 제2공화국 내각책임제하의 간선제 대통령선거는 그 해 8월 12일 민·참의원 양원합동회의에서 실시되었다.

대통령은 “국가원수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헌법상 규정되었으며, 대통령선거도 “대통령은 양원합동회의에서 선거하고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투표를 얻어 당선된다. 제1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제2차 투표를 행하고 제2차 투표에서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출석과 재석의원 과반수의 투표를 얻은 자를 당선자로 한다.”는 헌법규정에 의하였다. 선거 결과는 윤보선이 압도적 다수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③ 제3공화국

2년 동안의 헌정중단상태에 종지부를 찍은 제3공화국 수립작업은 1963년 1월 1일을 기하여 정치활동이 재개됨으로써 본격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앞서 1962년 12월 17일 실시된 국민투표로 확정되고 그 해 12월 26일 공포된 개정헌법에 의하여 내각책임제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중심제로 환원되었으며, 대통령의 선거도 국민에 의한 직접선거로 변경되어 1963년 10월 15일 제5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전 정치상황의 특징은, 첫째 민주공화당의 사전조직과 그에 따른 진통, 둘째 당시 최고회의의장 박정희의 민정불참선언(2·27선언), 셋째 박정희의 민정불참 번의와 민주공화당의 총재 및 대통령후보지명수락, 넷째 윤보선을 중심으로 한 민정당의 창당 등이었다.

선거전은 실질적으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와 민정당의 윤보선의 대결이었다. 특히, 그 대결은 박정희후보의 사상에 대하여 윤보선후보가 전주 유세를 시작으로 이의를 제기한, 이른바 사상논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앞서의 선거가 공명선거논쟁으로 크게 붐볐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10·15선거는 철저하게 사상논쟁으로 시종하였던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46.6%를 얻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제6대 국회 마지막 정기국회에서 〈국회의원선거법〉의 개정과 함께 〈대통령선거법〉도 개정하여 1966년 12월 14일 공포하였다.

이 개정선거법에 따라 1967년 5월 3일 실시한 제6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51.4%를 얻어 제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1년의 제7대 대통령선거를 2년 앞두고 조국근대화의 계속적인 추진을 위한 인물이라는 명분으로 박정희에게 3선을 허용하기 위한 헌법개정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는 1969년 7월 25일 “개헌문제를 통해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을 묻겠다.”라고 선언하고 민주공화당이 빠른 시일 안에 개헌안을 발의해줄 것을 희망하였다.

박정희는 특별담화에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되면 나와 정부에 대한 신임으로 간주하고, 부결되면 국민의 불신임으로 간주하여 즉각 물러서겠다.”는 태도를 밝혔다.

이와 같은 박정희의 담화에 따라, 현직 대통령으로 하여금 3차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그 밖에 국회의원의 국무위원 겸직을 허용하며, 대통령탄핵소추에 있어 국회의 의결능력을 높여 대통령의 권위를 보호하는 조처를 강구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이 제출되었다.

그 해 9월 9일 국회특별회의실에서 통과된 뒤 곧이어 헌법절차에 따라 그 해 10월 17일 국민투표에서 가결, 확정되었다. 이로써 대통령의 3차 연임의 길이 트이고, 민주공화당은 1971년의 양대 선거체제로 들어갔다. 이에 야당인 신민당은 1970년 1월 26일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유진산(柳珍山)을 당수로 선출, 3선개헌 이후 6개월간의 국회등원 거부투쟁에 종지부를 찍고 원내투쟁으로 전략을 바꾸어 제73회 임시국회에 등원, 정부와 여당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

이와 같이 선거채비를 정비한 여야는 1970년 12월 정기국회 종료를 며칠 앞두고 국민투표 이후 1년간 끌어오던 선거관계법개정협상에 합의를 보았다. 이리하여 제7대 국회에서 〈국회의원선거법〉과 〈대통령선거법〉이 두 차례의 개정을 보게 되었다.

이 개정선거법으로 1971년 4월 27일 실시한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후보가 유효투표총수의 53.2%를 얻어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후보를 누르고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④ 제4공화국(유신체제)

1972년 10월 17일 대통령특별선언에 따라 그 해 11월 21일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유신헌법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에 의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그 해 12월 15일 실시되었다.

한편, 정부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실시되기에 앞서 동 대의원 선거법과 이 법의 시행령 및 통일주체국민회의법을 공포하였다.

제8대 대통령선거를 위한 통일주체국민회의집회가 그 해 12월 23일로 공고되어 후보등록 마감날인 그 해 12월 22일 곽상훈(郭尙勳) 등 515명의 대의원은 박정희를 제8대 대통령후보로 추천하였고, 선거 결과 재적대의원 전원인 재석 2,359명 중에서 박정희 후보가 2,357표, 무효 2표로 제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72년 12월 17일 대통령취임식을 시발로 유신체제 제1기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상황은 유신헌법의 반민주성을 들어 야당을 중심으로 한 일부 사회인사 및 학생들에 의한 개헌투쟁이 격화되었다(1974년 1월 8일 개헌주장 등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하였다). 이에 대해서 박정희는 1975년 1월 22일 특별담화를 발표 “현행헌법에 대한 찬반과 정부의 신임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선언하였으며, 그 해 2월 12일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이 투표 결과는 부정·불법투개표의 시비를 남겨 놓은 채 유신헌법과 정부에 대한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나타났다. 이에 박정희는 북한공산체제와 극한적인 대치상황이 계속되는 동안 유신체제는 변경할 수 없으며, 이를 더욱 견고히 구축하겠다는 소신을 밝히면서 강력하게 시정을 펴왔다(1975년 5월 13일 개헌주장을 금지하는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

이에 대한 끈질긴 반체제인사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제8대 대통령의 6년간의 임기만료까지 유신체제는 그대로 지속되었고 1978년 7월 6일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여 재적대의원 2,581명 중 2,578명이 참석하여 무효 1표를 제외한 찬성으로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대여강경노선을 주장해오던 김영삼(金泳三)이 야당인 신민당총재로 선출됨에 따라 여러 해 동안 긴급조치 제9호에 의하여 금기사항이었던 개헌투쟁의 재연, YH사건, 신민당의 가처분사건, 국회에서의 김영삼의원의 제명, 이에 따른 부산·마산의 사태 및 이로 인한 이 지역에 대한 비상계엄의 선포 등, 정국은 혼란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0·26사태가 발생하여 당시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가 헌법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권한대행으로 취임, 1979년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유신체제로 대표되는 제4공화국이 막을 내리고 최규하대통령권한대행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가 등장하였다.

과도정부의 정치일정공약에 따라 1979년 12월 6일 제10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어 단독입후보한 최규하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최규하는 당선 다음날 국무회의의결을 거쳐 긴급조치 제9호를 그 해 12월 8일 0시를 기하여 해제함으로써 기존 유신체제로부터 탈피, 새로운 정치체제를 모색하기 위한 첫 움직임을 보였다.

정국의 불안과 혼미 속에 5·17계엄조치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설치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1980년 5월 31일 설치되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위기극복과 함께 광범위한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규하는 취임 9개월 만인 1980년 8월 16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그 뒤를 이어 국보위상임위원장인 전두환(全斗煥)이 예편하고 1980년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에서 절대 다수표를 얻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9월 1일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⑤ 제5공화국

정부는 헌법개정심의회를 통한 개헌작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여 1980년 9월 9일 개헌시안을 확정하여 같은 달 29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이를 대통령이 발의하였다. 이 개헌안이 1980년 10월 22일 국민투표를 거쳐 같은 달 27일 공포됨으로써 제5공화국 출범의 기틀이 되었다.

제12대 대통령선거는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으로 1981년 2월 25일 이루어져, 선거인단의 90.2%에 해당하는 4,755표를 얻은 전두환후보가 당선되어, 그 해 3월 3일 취임하였다.

⑥ 제6공화국 노태우(盧泰愚) 정권

1987년 대통령선거 직선제 개헌으로 인하여 실시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계기로 하여 한국사회가 이른바 절차적 의미에서 민주화과정을 밟아가고 있으며, 그 결과 선거의 정치적인 의미가 증대되는 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노태우 후보는 8,282,738표(36.6%)의 유효득표를 기록하면서 야권분열에 따른 김영삼(6,337,581)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⑦ 김영삼(金泳三)정권

제14대 대통령선거의 특이할 만한 점은 경제문제를 강조하는 한국사회의 성공한 기업가 정주영(鄭周永)이 출마하였다는 점이다. 한국은 그 동안 군사정권아래서 야당의 정권도전이 민주화요구 문제와 같은 ‘스타일 이슈(style issue:추상적, 상징적인 수준의 이슈)’에 치중되어 왔는데, 제14대 대선에서 기업가 정주영의 출마는 야당의 선거쟁점에 경제적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함으로써 이른바 ‘포지션 이슈(position issue:구체적인 수준의 이슈)’가 선거에 등장하였다.

이는 한국선거에서도 서구 선진 민주주의사회에서의 유권자의 투표행위인 ‘경제투표(economic voting)’의 가능성을 논할 수 있다는 의미를 보여주었으나 정주영의 경제대통령으로의 바람몰이는 김영삼·김대중에 이은 3등후보가 됨으로써 좌절되었다.

⑧ 김대중(金大中) 정권

1997년 12월 18일에 행해진 제15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정치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여당과 야당의 정권교체라는 의미있는 선거였다. 한국민들은 국가자존까지 위태롭게 한 김영삼 정부의 경제실정과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에 분노하면서 야당후보인 김대중을 선택하여 헌정사상 50여 년만에 처음으로 야당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되었다.

비록 김대중후보의 승리가 여당분열(이회창후보와 이인제후보)과 지역구도가 맞물린 것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이 당시 부동표에 대한 경험적 분석은 여당의 이회창후보가 부동표공략에 실패하였으며, 그 실패한 원인이 궁극적으로 한국민은 결국 변화를 택하는 길만이 경제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며 나아가 안정을 가져오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역대 대통령 선거의 투표 결과를 분석해 보면, 7번 실시한 간선제의 경우는 투표율이 매우 높지만, 6번 실시한 직선제의 경우는 현저하게 낮아지는 현상을 보인다. 더욱이 직선제의 경우, 초기에는 높았으나 점차로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며 대도시의 투표율 역시 동일한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제13대의 경우 투표율이 다시 급증하였다. 또한, 당선자 득표율의 경우, 직선제에서 가장 높은 득표율로 당선된 것은 이승만후보로 74.6%의 득표율을 기록한 제2대 대통령선거의 경우인 데 반하여 가장 낮은 득표율로 당선된 것은 노태우후보로 36.6%를 얻은 제13대 대통령선거의 경우였다.

그러나 간선제의 경우는 거의 100%에 가까운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 당시 한국정치체제의 성격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나타내준다.

처음으로 직선제가 실시되었던 제2·제3·제4(무효화)대 대통령선거의 경우, 당선자의 득표율이 높았던 것은 이승만의 권위주의와 더불어 자유롭지 못하였던 선거분위기 때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는 제5·제6·제7대 대통령직선제가 치열한 선거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도리어 낮았고 또 당선자의 득표율이 차점자와 비교해서 근소한 차이였다는 사실로도 미루어 알 수 있다〔표 4〕.

특히, 제5대 대통령선거부터 입후보자는 반드시 소속정당의 추천을 받도록 함으로써 무소속 출마가 없어지자 선거전은 실제상 여당후보자와 제1야당 후보자의 대결로 압축되었다.

그리하여 제5대선거의 경우 5명의 입후보자가 출마하여 경쟁하였으나 사실상의 선거전은 민주공화당과 민정당의 각축전으로 박정희후보가 윤보선후보를 470만2640표(46.6%) 대 454만6614표(45.1%)의 아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뒤 제6·제7대 선거에서도 역시 이러한 현상은 계속되어 당선자와 차점자의 차이는 거의 10% 내외였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지방간 투표성향의 차이로 제5대 선거(1963)시에는 여야의 지지도 분포현상이 남북으로 갈라져 나타난 데 반하여, 제6대(1967)·제7대(1971) 선거시에는 동서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13대 선거에서는 이 같이 여야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대신 자기 지방출신의 후보자를 지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다음으로 간선제의 경우를 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국회의원에 의해 실시된 초대와 제4대의 경우로서 각각 재적의원의 91.8%, 80.4%의 득표율로 이승만과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둘째는 제8대에서 제11대에 이르는 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서 단일입후보자(박정희)에게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표를 던진 바 있다. 이는 그 당시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떠한 방법으로 어떠한 분위기 속에서 구성되었는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는 1981년 2월 25일에 실시한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제12대 선거이다. 여기서는 제8대 이후 처음으로 4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였으나 선거인단 자격에 정당원의 출마가 허용된 상황이었고, 선거인단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였으므로 이들에 의한 투표 결과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였다.

<박승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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