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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06 (금)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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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47      
[근대] 1920년대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민족)
일제강점기(3·1운동 후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

세부항목

일제강점기
일제강점기(1910년대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일제강점기(3·1운동)
일제강점기(3·1운동 후 1920년대의 한국사회의 독립운동)
일제강점기(1930년대 이후의 한국사회와 독립운동)
일제강점기(참고문헌)

(1)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대응

일제는 한국민족의 전민족적 3·1운동에 의하여 큰 타격을 받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써 대책에 부심하였다. 3·1운동의 타격을 받고 일제의 식민지정책은 다음 세가지 방향의 변동을 보였다.

첫째는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정책을 통하여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전선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가혹한 식민지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일제의 문화정치의 내용은 종래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총독을 임명하던 것을 고쳐 문관(文官)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론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필요하면 내정에 한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한국에서 쫓겨날 때까지 총독을 단 한번도 문관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다. 또한, 1920년에 ≪조선일보≫(3월 5일), ≪동아일보≫(4월 1일), ≪시사신보≫(친일신문, 4월 1일)의 창간을 허가하였으나 한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그러므로 일제의 검열은 매우 심하였는데, 삭제·압수·과료처분·정간·폐간 등의 탄압이 극심하여 매월 평균 5, 6건에 이르렀다.

또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할 것처럼 선전한 것도 친일파와 자치운동파를 육성하여 종래 완전독립·절대독립을 목표로 하던 독립운동을 약화시키고, 절대독립의 독립운동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둘째는 경찰관의 수를 대폭증가시키고 독립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한 것이었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로 바꾸었으나 이것은 제복과 제도만을 형식상 바꾼 것이고 여전히 헌병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보통경찰관이 되도록 하였으며, 경찰관서의 수는 1911년 1,602개소(헌병주재소 포함)에서 1920년에는 2,761개소로 격증하고, 경찰관의 수도 1911년 1만3971명(헌병 포함)에서 1920년에는 1만8400명으로 격증하였다.

일제는 극악한 무단탄압 밑에서도 한국민족이 맨손으로도 3·1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경험하고 한국민족을 내심으로 두려워하였으나, 기회만 있으면 그 이전과 마찬가지로 학살만행을 자행하였다. 1920년 10∼12월의 간도일대의 한국인 1만여명에 대한 학살(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과 1923년 9월 일본 관동대지진 때 2만여명의 재일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한, 독립운동가와 지식인·학생들에 대한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셋째는 식량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일본공업화에 소요되는 식량 등을 한국에서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조선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집행하였다.

일제의 이 정책은 목표대로 성공하지 못하고 미곡생산량이 1920년 1270만석에서 1928년에는 1730만석으로 36.2%밖에 증가하지 않았으나, 일본으로의 미곡의 수탈량은 1920년 185만석에서 1928년에는 742만석으로 301.1%나 격증하였다.

그 결과, 미곡의 한국인 국내소비량은 1920년 1085만석에서 1928년에는 988만석으로 10%나 감소되어 한국인은 더욱 부족한 식량을 만주로부터 잡곡을 수입하여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른 부문에서도 일제의 사회·경제적 수탈은 1920년대에 더욱 강화되었다.

3·1운동 이후 한국민족의 항일독립운동이 워낙 맹렬하였으므로 일제는 1920년대에 한국민족의 기세에 밀려 할 수없이 그들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화하기에 급급하였다.

(2) 독립운동의 비약적 발전

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3·1운동에 고취된 한국민족은 임시정부 수립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 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에서 한성정부, 노령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3개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하나의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정체를 채택하여 의정원과 국무원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정권을 계승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것만으로도 한국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국내와의 비밀연락망으로 연통제(聯通制)를 조직하여 국내통치권을 일부 행사하고, 독립운동자금을 국내로부터 공급받았다. 연통제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군감 등의 비밀 행정조직이 만들어져서 국내독립운동을 지도하였으며, 국내인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을 외교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유럽에서의 외교활동과 미국에 구미위원회를 두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8월에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게 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제연맹과 태평양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도 하였다.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사료편찬소를 두어 한일관계사료집을 간행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임시정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② 독립군 무장투쟁의 발전

한국민족은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와 독립역량을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하였다.

1920년말경까지 자발적으로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을 보면, ① 대한독립군, ② 군무도독부, ③ 북로군정서, ④ 국민회군, ⑤ 의군부, ⑥ 대한정의군정사, ⑦ 한민회군, ⑧ 조선독립군, ⑨ 의단, ⑩ 대한독립군비단, ⑪ 광복회군, ⑫ 의민단, ⑬ 흥업단, ⑭ 신민단, ⑮ 광정단, 야단, 혼춘군무부, 국민의사부, 대진단, 백산무사단, 혈성단, 태극단, 노농회, 광영단 등(북간도지방)과, 서로군정서, 신흥학우단, 광한단, 대한독립의용단, 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 천마산대, 보합단, 의성단 등(서간도지방)과, 대한독립군결사대, 대한신민회, 대한독립군 등(노령지방)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洪範圖)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은 선도적으로 ① 1919년 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진입작전을 단행하였으며, ② 1919년 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경찰관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기관을 습격하였고, ③ 1919년 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 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에 크게 고무된 독립군부대들이 이듬해부터는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진입유격전을 감행하였다. 일본군측의 보고에 의하면, 1920년 1월부터 3월까지의 3개월 동안에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진입이 24회에 달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이 32회에 달하였으며, 일제관서와 경찰관주재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소에 달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 독립군은 1920년 6월 4일 삼둔자(三屯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기다리다가 이를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전투이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鳳梧洞)까지 추격해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1920년 6월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사건을 조작하여 출병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 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000명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10월 21일 아침부터 10월 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 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하여 패주시켰다.

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독립전쟁이다.

청산리독립전쟁의 대승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노령일대의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한국민족 독립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 12월에 밀산(密山)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갔다가 1920년 6월에 자유시사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신민부(1924)·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국민부(國民府)(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1운동 후 1919년 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金元鳳)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예컨대 ①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년 3월), ② 부산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9월), ③ 밀양경찰서 투탄사건(1920년 12월), ④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년 9월), ⑤ 일본군대장 다나카(田中義一) 총살저격사건 (1922년 3월), ⑥ 종로경찰서 투탄사건(1923년 1월), ⑦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우체국·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년 3월), ⑧ 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1923년 12월), ⑨ 일본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년 1월), ⑩ 의열단 군자금사건(1925년 10월), ⑪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사건(1926년 12월)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③ 국내의 민족문화운동과 실력양성운동

국내에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문학부문에서도 ≪창조≫(1919)·≪폐허≫(1920)·≪백조≫(1922)·≪조선문단≫(1924)·≪조선문예≫(1929)·≪조선시단≫(1929)·≪문예공론≫(1929)·≪예술운동≫(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어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시조가 현대화되어 부흥되고 민족고전들이 간행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국사연구에 있어서도 박은식(朴殷植)이 중국에서 ≪한국통사 韓國痛史≫(1915)·≪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를 저술하여 근대사를 정립하고, 신채호(申采浩)가 일찍이 〈독사신론 讀史新論〉(1908)을 저술한 이래 망명한 뒤에도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사학을 확립시켰으며, 정인보(鄭寅普)가 국내에서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국사연구들은 일제가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를 조직하여 식민주의사관에 의거하여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에 대항하여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고,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장기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에서 민족교육의 열기가 고양되었으며, 1922년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가 조직되어 민립대학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할수없이 그 무마책과 회유책으로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민족실업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3년에 조선물산장려회가 창립되어 전국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면서 1930년대까지 민족산업진흥운동을 전개하였다.

④ 6·10만세운동

한국민족은 1926년 4월 조선왕조 마지막 국왕 순종이 죽자 그 장례일인 6월 10일 대규모 독립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3·1운동의 경험에 의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던 일제군경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는 수많은 인사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고, 인쇄된 격문을 압수하였다. 심지어는 장례에 참석하러 상경하는 것도 엄금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 10일 서울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을 벌여 서울만은 3·1운동 때와 같이 철시와 시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위로 200여명의 학생이 검거되었다.

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의 발전

3·1운동 후 1920년대에는 농민운동도 크게 고양되었다. 농민들은 농민조합·농우회(農友會)·소작인조합 등의 농민단체를 조직하면서 주로 활발한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1922년에는 소작쟁의가 24건에 참가인원수 2,539명이던 것이, 1925년에는 204건에 참가인원수 4,002명, 1930년에는 726건에 참가인원수 1만3012명으로 급증하였다. 소작쟁의는 특히 일본인 지주의 대농장에서 많이 일어났다. 또한 노동운동도 1920년에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가 조직되고, 이어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쟁의는 1921년에 36건에 참가인원수 3,403명, 1926년에는 81건에 5,984명, 1931년에는 205건에 2만1180명으로 급증하였다. 노동파업도 활발히 전개되어, 1921년에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파업, 1923년에 서울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 1929년의 원산노동자의 총파업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비단 노동자·농민들의 권익향상뿐만 아니라 일제 지주와 공장주에 대항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것이었다.

⑥ 신간회운동과 민족협동전선운동

3·1운동 후 1920년대 초에는 민족독립운동에 두개의 큰 과제가 발생하였다. 그 하나는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기만적 ‘문화정책’에 휘말려 완전독립·절대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제국내의 ‘자치’를 주장하는 이른바 ‘자치론’이 대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운동이 강력히 대두하여 민족주의독립운동과 사회주의독립운동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연합하여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였다.

신간회는 급속히 발전하여 전국에 141개 지회와 3만9410명의 회원을 가진 강력한 민족운동단체가 되었다. 신간회는 ① 완전독립·절대독립옹호, ② 자치론과 일제에의 타협주의 타도, ③ 민족의 대동단결 결성, ④ 한국인 착취기관철폐, ⑤ 일본의 이민정책반대, ⑥ 한국인 본위의 민족교육실시, ⑦ 한국어 교육의 실시, ⑧ 과학사상 연구의 자유, ⑨ 한국인에 대한 특수취체법의 철폐, ⑩ 소작쟁의 지원, ⑪ 노동쟁의 지원, ⑫ 학생독립운동 지원 등의 민족운동을 전개하고, 당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한국민족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되자, 1927년 5월에는 여성자매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조직되어 여성독립운동의 단일전선이 결성되었다. 또한 해외에서도 그 해 11월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促成會)가 조직되어 민족주의독립운동과 사회주의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민족운동전선의 통일은 한국민족의 독립쟁취에 대하여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이 사회주의자들에게 신간회로부터의 탈퇴를 지시하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복종함으로써 신간회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 5월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⑦ 광주학생독립운동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이 충돌하여 일제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학생만 검거하자 광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검거된 학생의 석방, 민족차별의 철폐, 약소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 학생시위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시위운동에 참가한 학교가 194개교, 학생은 5만4000명에 달하였다. 이로 인하여 퇴학처분을 당한 학생이 582명, 무기정학을 당한 학생이 2,330명, 피검자가 1,642명에 달하였다.

신간회도 조사단을 파견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주학생사건에서 비롯된 1929∼1930년의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을 요구하는 최대의 시위운동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 막강하게 고양되어 일제는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하였다.

<신용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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