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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04 (일) 19:25
분 류 사전3
ㆍ조회: 1518      
[현대] 백철 (김재용)
인간탐구론자에서 국민문학론자로

김재용 (문학평론가, 연세대 강사)

백철(白鐵) (창씨명 白矢世哲) (1908∼1985)

약력

1940년 {매일신보} 학예부장
1941년 조선문인협회 간사
1943년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겸 특파원

백철의 생애

중일전쟁과 '동양적 신질서'의 수용

'조국광복을 지향하여 거족적으로 발양된 위대한 3.1 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3.1 문화상의 수상자 중 30% 이상이 친일했다는 사실은 좀체 믿어지지 않지만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이 중 한 사람이 문학평론가 백철이다. 그는 당시 문학가 중 상당히 많이 친일을 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상이 그에게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상을 받는 그 자신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 상을 받음으로써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생각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분위기는 이 시기에서뿐만 아니라 이미 해방 직후부터 그러했던 것이다. 백철은 자서전 {문학과 현실}에서 다음과 같이 해방 직후의 자기 처신과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해방 직후의 큰 난맥상의 하나는 어제까지의 허물은 감쪽같이 숨기고 너나 할 것 없이 하루 아침에 애국자들로 변신을 한 사실들이다. 그런 가운데서 공석에서 자기 반성의 신상발언을 하고 명예스러운 직책을 사퇴한 예는 나의 경우밖에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가 말하는 공석에서의 자기반성이라고 하는 것은 1945년 8월 16일에 열렸던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예비모임 석상에서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이 조직의 서기장 자리를 맡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당시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백철이 가장 두드러지게 친일행각을 한 사람이고 보면 이러한 사퇴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1945년 9월부터 문필활동을 다시 속개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의 반성이라는 것은 극히 얄팍한 것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마치 자신의 재출발의 면죄부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에 3.1 문화상을 수상하고서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살 수 있었고 오히려 자랑할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백철이 친일활동을 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중일전쟁이다. 중일전쟁을 지켜보면서 그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재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현실로 인정하게 된다. 이것을 부정하고 다른 것을 꿈꾸어 보았자 헛일이고 오로지 이 시대적 현실을 인정하는 것만이 진정한 지식인의 길이고 이 속에서 새로운 전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가 얼마나 이 중일전쟁을 큰 시대적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고 또한 이것을 계기로 그가 기존의 세계관과 현실인식을 버리고 친일활동을 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은 1939년 3월 이전에 발표한 여러 글에서 나타나고 있는데 이것이 최초로 또한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1938년 12월에 쓴 [시대적 우연의 수리]라는 글이다.

1937년 7월 노구교 사건으로 시작된 중일전쟁이 일본의 예상과는 다르게 장기전으로 들어가면서, 그 결과 1938년 10월 무한 삼진이 함락된 것을 보면서 쓴 것으로 보이는 이 글에서 그는 일본의 중국 침략이 지니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비판하기보다는 동아시아에서 새롭게 제기되는 전망을 읽어내었다.

"직접 지금 동양의 현실을 두고 볼 때에도 이번 사실이 문학자나 지식인 앞에 결코 무의미한 것만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선 그런 의미에서 한편으로는 이번 사변을 크게 평가하여 동양사가 비상히 비약한다는 일가견을 가지고 있다. 사실 나는 이번 사변에 의하여 북경, 상해, 남경, 서주, 한구 등이 연차 함락되는 보도와 접하고 또는 사실 등을 통하여 지나의 모든 봉건적 성문이 함락되는 광경을 눈앞에 놓고 볼 때에, 우리들의 시야가 훤하게 뚫려지는 이상한 흥분이 내 일신을 전율케 하는 순간이 있다. 여기서 지식인이 눈 앞에 보는 사실에 멎어서 부정적인 요소만을 보는 것은 한 개의 사실주의에 떨어진 근시안적인 판단일 줄 안다. 다른 것은 고사하고 오직 그 봉건적인 성문들이 함락한다는 사실 그것만을 가지고도 이번 정치에 하나의 역사적인 의미를 붙여보는 데 족한 것이다."

일제의 중국 침략을 봉건적 중국을 근대화시킨다고 호도한 총독부의 시각을 그대로 옮기고 있는 이 식민지 조선의 매판적 지식인의 현실 인식은 바로 친일활동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된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할 때의 구실이 또한 이런 것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맹목과 매판성은 명백한 것이다.

이후 그는 [이상주의의 신문학](1939. 1)과 [시국과 문화문제의 해방](1939. 4) 등에서 같은 견해를 여러번 되풀이하고 있다. 그 후 그가 쓴 소설 [전망]에서 이러한 견해는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매일신보의 학예부장과 본격적 친일활동

무한 삼진의 함락을 보면서 동양의 신질서의 전망을 읽은 백철에게 이제 친일은 본질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그가 1939년 3월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행로였다. 친일지였던 {매일신보}에 입사하는 것이 더 이상 반민족적인 것이 아니라 새롭게 전개되는 신질서의 전망에 참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가 후일 이를 두고 '보호색'이라고 주장했지만 그가 쓴 글을 읽어 보면 이것은 단지 변명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매일신보사는 경성일보사로부터 독립하면서 그 산하에 {국민신보}라는 일문 주간지를 내게 되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일하게 된다. 그 후 1940년 1월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으로 발탁되어 거기서 1943년 베이징 지사장으로 전근갈 때까지 계속적으로 친일 언론활동과 문필활동을 하게 된다.

매일신보사에 입사한 후에 그가 쓴 글을 검토해 보면 이제 더이상 새로운 세계의 '현실 인식'은 문제가 되지 않고 새롭게 전개되는 '현실을 옹호'하는 것만 남게 된다. 이 작업 중 그가 제일 먼저 하는 문필활동은 당시 중일전쟁을 취재하여 쓴 글을 평가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일본인들이 중일전쟁을 취재한 전쟁문학을 평가하는 [전장문학 일고]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의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는 글은 황군위문작가단의 일원인 박영희와 임학수가 쓴 {전선기행}과 {전선시집}을 각각 평하는 글이다. 주지하다시피 이 황군위문작가단은 황군을 위문하기 위해 조직된 것으로, 1939년 4월에 조선인 문인 중에서 김동인, 박영희, 임학수 세 사람이 중일전쟁터를 방문하였다.

일본인들이 전쟁터를 방문하여 막 책을 낼 무렵이었는데, 이에 반도문인들도 참가하여야 한다는 명목으로 일제 총독부의 강요와 당시 경성부내의 출판사의 후원으로 성사되었다. 전쟁터를 방문하고 난 후 박영희는 {전선기행}을, 임학수는 {전선시집}을 각각 발간하였다. 백철은 이것을 평하는 독후감을 1939년 10월 4일자 및 15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하였다.

전쟁을 고취하는 문학을 주장하던 그는 1940년 1월에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한층 더 여러 방면으로 친일활동을 하게 된다. 이 때는 개인적인 문필활동 차원이 아니라 매일신보사 학예부장의 지위로 여러 친일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오면 그는 모든 저널리즘이 신체제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논지의 글인 [신체제와 저널리즘]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기에 그의 친일활동 가운데는 문학활동이 아닌 저널리스트로서의 친일활동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것에 해당하는 것이 [천황폐하어친열 특별관함식배관근기]({삼천리}, 1940. 12), [내선 유연(內鮮由緣)이 깊은 부소산성(扶蘇山城)]({문장}, 1941. 3), [제국 해군의 위용](1941. 5. 27) 등이다.

[천황폐하어친열 특별관함식배관근기]는 일본 국왕이 전함을 돌아보는 장면을 직접 취재한 글인데 여기서 그는 반도인으로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적고 있다.

[내선 유연이 깊은 부소산성]은 당시 일본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내선일체의 전통으로 일제에 의해 선전되어 오던 부여성지에 신궁을 만드는 것에 문화인 약 30명이 근로봉사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을 적고 있는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이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 내선일체의 사상을 구현하는 뜻깊은 일이라고 칭찬해 마지 않는다.

[제국 해군의 위용]은 일제 해군의 제36회 해군 기념일을 맞이하여 일제 해군을 칭송하는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나는 이 장관(壯觀)을 앞에 두고 오직 황홀한 감탄 속에 제국 해군의 위관을 예찬하는 가운데 더욱이 아(我) 제국이 사변 처리중에 지나 연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확보한 나머지 오히려 이만한 기세를 국내 해상에 거느리고 있다는 데 다시금 제국의 국민된 긍지와 행복을 일신에 느끼는 것이었다"라는 친일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 시기의 이런 저널리스트로서의 친일활동에 대해서는 부인하기 어려웠던지 훗날 자서전 속에서도 백철은 이 대목만은 인정하고 만다. 물론 여기에 참석하게 된 것이 우연한 친구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고 변명하고 있지만, 자신의 생애에 있어 치부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저널리스트로서의 친일활동을 하는 한편 그는 친일적 문단활동도 꾸준히 하였다. 조선문인협회에 참가하여 그는 열심히 친일 강연활동을 했다. 1939년 12월 조선문인협회 주최의 문학의 밤에서 그는 '전쟁문학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그 후 1940년 11월에는 사상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전국 순회강연에서 '총력운동과 선전의 임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1941년 8월의 조선문인협회 재조직에서는 간사로 선임되기도 한다. 1941년 2월에 조직된 친일 미술가 조직인 조선미술가협회의 이사로 일하기도 한다. 이렇게 친일 문단활동과 저널리스트활동을 하던 그가 1941년 11월 {국민문학}이 창간되면서부터는 다시 친일 비평활동을 한다.

국민문학론자로의 변모와 베이징행

1941년 {국민문학}이 창간된 후 문단의 일부가 국민문학 논의에 들어갈 때 백철 역시 이에 빠지지 않고 참가한다. 이 무렵에 들어 그는 비평가로서의 자신의 직분을 친일적으로 다시 활용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일단 국민문학을 주장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국민문학 논의에 참가하지 않거나, 혹은 참가하더라도 다소 비판적이거나 현상기술적인 차원에서 그치고 마는 반면, 백철은 국민문학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가 친일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피할 수 없는 증거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백철이 국민문학론을 주장했다는 점을 넘어서 어떤 논리로 그것을 옹호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최재서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국민문학론'을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국민문학론을 주장한다는 사실만으로 이 시기 백철의 친일 논리의 특징을 제대로 해명하기는 힘들다.

백철은 1942년 1월 {국민문학}에 일문으로 된 논문 [낡음과 새로움]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여러 가지 자기 나름의 주장을 한다. 그 가운데 백철의 친일 국민문학론의 특징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개성론이다. 당시의 국민문학론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일본 국가주의에 복무하는 문학이다.

그렇게 되면서 이른바 서구의 근대가 이룩한 개인주의와 자유주의마저 배척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국가주의에 배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국민문학론에서 개성의 배척은 일반적으로 주창되었다.

그런데 백철은 개성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것 중에서 취해야 할 부분은 이어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이 글에서 펼쳤다. 언뜻보면 당시 국가주의에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주장을 좀더 깊이 살펴보면 일반적인 어설픈 국가주의의 국민문학론보다 더 철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국민이 국체의 관념으로 돌아가서 국민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국민이 국가라고 하는 전체관념 속에 자기를 막연히 해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국민으로서의 입장을 깨닫는 것이다. 즉, 국민으로서 올바르게 국체와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는 국민으로서의 자기 입장을 뚜렷하게 깨닫고 자기의 입장에서 발휘할 수 있는 데까지의 재능을 죄다 발휘해야 한다. 국가에 대한 봉공과 직역에 있어서 자기를 발휘하는 일이 표리가 일치해야 하는 것은 국민의 개인적 입장을 바르게 이해함에서이다. 그런데 국민이 각자의 입장을 깨닫지 않고 국가에의 봉사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추종일 뿐이며 국책에의 진실한 협력이라고 할 수 없다.({국민문학}, 1942. 1)

백철의 견해에 의하면 개성이 배제된 국가주의, 즉 내면화되고 육화되지 못한 국민문학론이나 국가주의보다는 개성에 매개된 국민문학론이나 국가주의가 훨씬 더 엄밀한 국책에의 호응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같은 글에 표현된 '일본적인 것을 체내에 받아들여 충분히 씹고 소화하여 문학 속의 살아있는 생명의 흐름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논리적으로 해명한 부분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국민문학론을 논하는 이 시기 백철의 친일활동의 특징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논지는 이후에 발표된 [문학의 이상성]({동양지광}, 1942. 6.7), [결의의 시대]({국민문학}, 1942. 11)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이러한 문학활동 이외에 저널리스트로서도 열심히 행하였다.

1943년 봄에 그는 매일신보 베이징 지사장 겸 특파원 자격으로 베이징으로 향한다. 그는 이것을 도피행이라고 자서전에서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베이징에 도착하여 활동하고 있을 때 그곳은 조선과는 달리 연안 지방의 독립 활동가들이 드나들 수 있었던 상황이라 조선 내에서 느끼지 못하는 긴박함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을 것이고 세계의 현실이 그 동안 자신이 인식했던 것처럼 진행되고 있지만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전황이 일본에게 불리한 쪽으로 진행되는 것을 알아차리고 눈치만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와 비슷한 행로를 걸었던 최재서가 국내에서 더 친일화하는 것과는 달리 더 이상 강한 친일활동을 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기 그의 베이징행을 단순히 도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점철된 백철의 친일활동은 그의 말처럼 해방 직후 공석에서의 신상발언으로 '면죄부'를 받고, 그 후 곧 문단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그리고는 3.1 문화상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받을 정도로 '명사'로 활약하였다.

참고 문헌

"친일파 99인 백철 편"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1993년 돌베개
백 철, [戰場文學一考], {人文平論}, 1939. 10.
______, [內鮮由緣이 깊은 扶蘇山城], {文章}, 1941. 3.
______, [舊さと新しさ], {國民文學}, 1942. 1

출전 :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사-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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