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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8-30 (토)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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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682      
[근대] 유관순열사 (이화여고)
유관순 열사

3·1운동 후 발표된 휴교령에 따라 고향인 충남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天安郡 東面 龍頭理)에 귀향한 유관순은 아우내 만세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1902년 3월 15일 유중권(柳重權)의 5남매 중 2녀로 태어났다. 1916년 공주 감리교 충청도 교구에서 일하던 사엘리스 선교사를 따라 그의 사촌언니 유예도(柳禮道)가 다니던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는데 당시의 학당장은 프라이었다. 교비생으로 공부하는 동안 기독교 교인으로서의 신앙은 깊어 갔고 선생이나 친구들의 세탁을 남 몰래 해주는 등 인정 많고 봉사 정신이 강한 소녀였다.

1919년 고종의 인산을 앞두고 민족 운동이 고조되고 있을 때 유관순 등 이화학당 고등과 학생 5인이 5인 결사대를 조직하고 3월 1일 기숙사 뒷담을 넘어 교외로 진출, 직접 만세 운동 대열에 참가하였고 3월 5일에도 학생 시위 행렬에 참가하여 만세를 부르다가 잡혔으나 곧 석방되고 형사의 눈을 피해 왔다.

3월 10일 휴교령에 따라 사촌언니 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 고향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마침내 아우내 장날인 음력 3월 1일(양력 4월 1일) 정오에 만세를 부르기로 하였다. 음력 2월 그믐에 용두리 뒷산 매봉에서 거사를 재확인하는 봉화를 올린 후 그 이튿날 아우내 장터로 가는 길목에 서서 장터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손수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드디어 정오에 독립 만세 소리가 아오내 장내에 울리자 일본 헌병들은 총검으로 닥치는 대로 발표하고 찌르고 하였다. 이에 격분한 관순의 아버지는 "어째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거하다가 즉사했으며 그 어머니 또한 총검에 찔려 피살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부모를 잃어 버린 그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천안 헌병대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관순 자신이 주모자라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동지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다시 공주 검사국으로 옮겨 가게 되고 이곳에서 같은 만세운동으로 구속된 오빠 관옥(寬玉)을 잠시 만났으나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멀리서 보며 헤어졌다. 7년형을 언도받고 이에 불복 항고하여 서울 복심법원에 이송되었다. 미결수들은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재판 날이 되면 오동 마차에 태워져 정동법원으로 호송되었다. 오동마차는 죄수와 일반시민이 서로 알아볼 수 없게 하기 위하여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재판소의 미결수 대기실은 한 사람이 들어가 앉을까 말까 하는 정도의 작은 칸막이 방이었다. 방이라기보단 한 개의 궤짝이었다. 이 칸막이 궤짝방에서 대기하고 있을 때 옆칸에서 누군가가 똑똑 치면서 "누구십니까? 나 박인덕이요." 관순은 흥분하고 놀라와서 "선생님 저 유관순입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가 왜놈에게 피살된 것을 기억하고 독립운동 계속하겠어요."라는 한두마디 대화를 호송 간수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나직이 교환하였다.

관순보다 먼저 3월 5일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가 재판받기 위해 다른 오동마차에 실려 옆칸 대기실에 있었던 박인덕 선생을 이렇게 기구하게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박인덕은 관순에게 "나는 빌링스 목사님의 보석금으로 내일쯤 나가게 될 터인데 몸 조심하여 뒷날 떳떳이 다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유관순은 복심법원에서 1919년 7월 4일 보안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는 옥중에서도 매일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인 여간수인 야마사끼에게 끌려 나가 모진 매를 맞았다. 그의 만세 선창에 따라 다른 감방에서도 만세를 불러서 관순은 지하 독방으로 이감되었다.

1919년 4월 하순 감옥 안에서 유관순을 만난 독립 운동가 어윤희(魚允姬)씨의 증언에 의하면 "관순은 학교와 가족들이 면회 오지 않는 것을 슬퍼하였고, 10월에 '양명'이란 여자가 출산으로 출옥하였다가 11월에 다시 입감하였는데 관순은 어린애 기저귀를 자기 몸에 감아 체온으로 말려 주었다. 관순의 사망 원인은 아오내 만세운동 때 일인 헌병의 칼에 찔린 상처에서 고름이 계속 나오고 있었는데, 이런 환자에게 야마사끼의 매질이 더하여 이것이 주된 사망 원인인 듯 하다"고 술회하고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에게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을 수여하였고 1972년에 매봉 기슭에 유관순 열사 추모각을 건립하고 매봉에 봉화탑을 세웠으며 선열 동상 건립 위원회에서는 유관순 동상을 태평로에 세웠다가 다시 장충당 공원으로 옮겨 유관순 정신을 선양하고 있다.

한편 유관순의 모교인 이화여고에서는 1963년부터 진주 클럽에서 지령리부락과 자매 결연을 맺고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봉사 활동을 하였으며, 동창회에서도 지령리 부락의 자활을 돕고자 경제적 지원을 한 바 있었다. 1967년에는 지령리에 유관순 기념 교회를 건립하였고, 1974년 교내에 유관순 기념관을 세우는 한편 유관순 정신을 교육하는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1981년부터 학교에서는 각 교실마다 유관순의 초상화 액자를 벽에 걸어 학생들에게 유관순 정신을 교육하는 교육 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또 천안~병천 간 마라톤 대회에도 매년 본교 육상부 학생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3·1절이 되면 본교 교장, 교목, 동창회장, 학생대표들이 병천으로 가서 식전에 참가하고 있다.

1988년 독립 기념관 영내에 유관순 열사 기념 사업 회의 노력으로「유관순 열사 애국 어록비」가 세워졌는데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 소녀 유관순의 기원 -

오오 하나님이시어 이제 시간이 임박하였습니다 원수 왜를 물리쳐 주시고 이 땅에 자유와 독립을 주소서. 내일 거사할 각 대표들에게 더욱 용기와 힘을 주시고 이로 말미암아 이 민족의 행복한 땅이 되게 하소서. 주여 같이 하시고 이 소녀에게 용기와 힘을 주옵소서.

-1919년 3월 31일(음력 2월 그믐) 매봉에서 기도하며-

1920년 10월 12일 사망한 유관순의 시신은 프라이 당장과 월터 선생이 장지 및 장례 절차를 일제 당국이 제시한 조건에 따르기로 하고 인수하였다. 일제 관헌의 엄중한 감시와 경계하에 가족이나 학우들의 참가가 불허된 채 관계자만의 참례로 서울 정동교회에서 입관 예배를 집전하고 이태원 공동 묘지에 매장하였다. 그 후 이태원 공동 묘지가 일제의 군용 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 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실묘되고 말았다.

출전 : 이화여자고등학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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