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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5 (화)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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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59      
[근대] 대한민국건국강령 (조동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건국강령

조동걸(趙東杰) (국민대학교 명예교수)

1. 머리말
2. 건국강령의 요지
3. 강령의 이론과 특징
4. 강령의 성립성격과 의의
5. 해방후 건국강령의 위상
6. 맺음말

1. 머리말

필자는 1975년 광복 30주년기념 학술심포지움에서「독립운동의 지도이념」이란 주제를 발표한바 있었다. (각주 1) 조동걸, 「독립운동의 지도이념」, 『광복30주년기념 독립운동심포지움논문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15-23쪽.)

거기에서 임시정부 건국강령의 사상적 기초가 된 삼균주의에 대하여 검토하면서 그것이 지도이념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는 점을 추적해 보았다. 그때는 평면적인 분석에 불과하여 역사적 성격을 만족스럽게 도출해내지 못하였다. 그후 광복 50주년을 맞아 그것을 다시 검토하였는데 입체적이면서 역사주의의 관점에 유의하였다. (각주 2) 조동걸, 「大韓民國臨時政府의 建國綱領」, 『韓國의 獨立運動과 光復50周年』, 광복회, 1995 및『韓國近現代史의 理解와 論理』, 지식산업사, 1998, 119-136쪽에 재수록.)

이 글은 위의 글을 보충한 것이다. 그리고 건국강령을 당시의 여러 독립운동 단체의 노선과 비교하면서 독립운동상의 성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해는 오늘날 민족 지성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는 시사를 제공해 줄 것으로 생각한다.

2. 건국강령의 요지

건국강령은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각주 3) 국회도서관,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1974, 21-22쪽 및 韓詩俊 편, 『大韓民國臨時政府 法令集』, 국가보훈처, 1999, 75쪽.)

1931년 4월에 임시정부가 건국 원칙으로 발표한 삼균주의를 구체화한 내용이라고 했다. (각주 4) 建國綱領 제1장 總綱 제6항)

“임시정부는 13년 4월에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얐으니 이른바 「보통선거제도를 실시하야 政權을 均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야 利權을 均하고 공비교육으로 써 學權을 均하며 국내외에 대하야 民族自決의 權을 보장하야 써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불평등을 혁제할지니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소망하고 소수민족이 侵凌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權을 均하야 軒輊이(가) 없게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야 또한 이러하게 한다」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성언이니 우리가 이 제도를 발양광대할 것임”

후일 국무위원회의 결의만으로 효력이 있느냐의 여부로 의정원에서 논란이 있었다. (각주 5) 국회도서관,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문서』, 1974, 291-292쪽.)

그리고 삼균주의가 성립한 시기는 1930년 한국독립당 창립시기와 같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31년이라고 말해 온 것은 임시정부 명의를 사용하여 대외적으로 공표한 시기가 1931년이기 때문인 것 같다(후술).

건국강령의 구성은 제1장 總綱 7개항, 제2장 復國 10개항, 제3장 建國 7개항, 모두 3장 24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 ‘복국’ 항목에 비하여 ‘건국’ 항목이 7개항뿐이므로 적다고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복국기간인 독립운동 기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의도로 해석되지만, 실제의 내용을 보면 ‘건국’의 4ㆍ6ㆍ7항은 다시 세분하여 모두 21개 細項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적은 것이 아니다.

總綱 제1항에서 한국은 반만년이래 민족국가의 고정적 집단이라는 固有主權說을 선언하고 제2항에서 弘益人間의 건국정신과 국가운영 원리를 ‘首尾均平位’에 두고 그래야 ‘興邦保泰平하다’고 했다. 그리고 ‘均平位’는 구체적으로 權力 富力 智力의 三均이라고 했다. (각주 6) ‘三均’이라고 했을때 ‘均等’의 의미는 ‘平等’이라고 했다(1942년 제34회 의회속기록 제7일 조소앙 발언록,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292쪽).)

그를 위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제3항에서 전통시대의 토지 공유제도를 중시하여 土地의 국유화를 선언했다. 주권이나 삼균이나 토지 국유화나 모두 논리의 근거를 전통시대에 두고 있는 것에 대하여 引古說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7)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388쪽(建國綱領修改委員會 會錄).)

제4항에서 독립운동의 민족적 책임을 강조하고 제5항에서 3ㆍ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서 혁명적인 민주제도가 확립되었다는 것과 제6항에서 1931년 4월에 삼균제도를 발표했는데 그것은 1919년 임시정부 수립 당시에 이미 천명한 것이라는 점, (각주 8) 삼균주의를 임시정부 수립 당시에 천명했다는 말은 1919년 4월 11일 의정원에서 ‘大韓民國 臨時憲章 宣布文’을 채택하고 이어 ‘宣誓文’을 통과시켰는데 그 선서문 끝의 ‘政綱’ 제1항을 보면 “民族平等 國家平等 及 人類平等의 大義를 선전함”이라고 밝혀져 있는데 그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제7항에서 삼균은 복국과 건국의 계단을 밟아 실현한다는 점을 밝혔다.

다음에 제2장 復國은 독립운동의 내용으로서 제1항의 복국 제1기는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의 전개를 말하는 것이고, 제2항의 복국 제2기는 독립군의 본토 상륙과 국제적 발언권을 확보하고, 제3항에서 설명하고 있는 복국 제3기는 국토를 완전 탈환하여 복국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복국의 완성은 각국정부와 조약 체결로 이루어진다고 해서 국제적 승인 절차를 전제했는데 그것은 후일 국제관리설이 대두한 문제와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임시정부의 역할을 과신한 것이 아닌가 한다.

제4ㆍ5ㆍ6ㆍ7ㆍ8ㆍ9항은 임시정부가 주도할 독립운동의 진행과정을 설명한 것이고, 제10항에서 언급한 복국 완성기에 이르러 임시정부가 건국에 필요한 헌법과 정부조직법과 지방자치법, 그리고 군사ㆍ외교에 관한 법규 공포를 계획하고 있다. 그런 뜻에서 만든 헌법이 1944년의 臨時憲章이었다고 하겠다.

제3장 建國도 3기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제1항의 정부수립을 건국 제1기라 했고, 제2항의 건국 제2기는 삼균주의에 의한 민주제도의 실시단계로서 지방자치의 실현,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를 완성하고, 의무교육과 免費 수학체제를 완성하여 극빈계급까지 생활과 문화 수준의 제고가 보장되는 단계이다. 제3항에서 밝힌 건국 제3기는 군사 교육 행정 생산 교통 위생 경찰 상업 공업 농업 외교 등의 기초가 완비되어 삼균제도가 각분야에서 추진된 완성기를 말한다.

第4項에서는 기본권인 인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했다.

(ㄱ) 권리는 노동권 휴식권 피구제권 피보험권 수학권 등 受益權에 해당하는 권리를 열거했고, 이어 선거권 파면권 입법권 등의 參政權을 명시했다. 수익권 사항을 강조하고 파면권과 입법권을 명시한 것이 주목된다.
(ㄴ) 남녀평등권 선언.
(ㄷ) 신체ㆍ거주ㆍ언론ㆍ출판ㆍ신앙ㆍ집회ㆍ결사ㆍ遊行(이전?)ㆍ시위ㆍ통신 등의 自由權을 명시.
(ㄹ) 선거권은 18세 이상, 피선거권은 23세 이상의 연령제한 외에는 보통 평등 비밀 직접선거의 원칙 천명.
(ㅁ) 준법 납세와 병역의 義務를 규정. 1919년 헌법 제6조에 규정한 교육의 의무는 언급이 없는 것이 이상하다.
(ㅂ) 적의 부역자, 독립운동 방해자, 건국강령 반대자, 정신 결격자, 범죄판결을 받은 자는 선거권 피선거권 박탈.

第5項에서는 정부조직과 지방자치에 대하여 규정했는데 지방자치단체는 道와 郡으로 했다.

第6項에서는 經濟政策의 원칙을 규정했다.

(ㄱ) 중소기업의 私營외에는 모두 국영으로 함.
(ㄴ) 적의 재산과 부역자의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로 함.
(ㄷ) 몰수 재산은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제공함.
(ㄹ) 토지에 관한 매매 양도 저당 상속 조차와 고리대업과 고용농업의 금지.
(ㅁ) 국제무역과 발전소, 대규모의 인쇄 출판 영화 극장의 국유.
(ㅂ) 老幼와 女工의 야간노동 금지, 연령 지대 시간의 불합리한 노동금지.
(ㅅ) 노동자 농민의 무료 醫藥 惠澤. 건강권의 규정으로 볼 수 있다.
(ㅇ) 土地分配는 고용농 소작농 자작농 소지주 중지주의 순서로 우선 분급함.

第7項에서는 敎育의 기본원칙을 규정했다.

(ㄱ) 교육의 기본취지는 혁명공리의 민족정기를 발양하며 국민도덕, 생활지능, 자치능력을 양성.
(ㄴ) 초등교육과 고등(중등)교육의 국비 義務敎育.
(ㄷ) 학령 초과자의 補習敎育과 빈한한 학령자의 의식 제공.
(ㄹ) 학교수는 최소한 1面에 5개 소학과 2개 중학, 1郡에 2개 전문학교, 道에는 1개 대학을 설치.
(ㅁ) 敎科書는 국정으로 하고 무료 배부함.
(ㅂ) 중학과 전문학교에서 國民兵 敎育 실시.
(ㅅ) 공사립학교의 국가 감독과 僑胞敎育에 대한 국가시책을 강조. 누가 보아도 국가통제가 철저한 교육정책의 선언이라고 하겠는데 그것은 식민지시대    의 후속조치 때문으로 이해된다.

3. 강령의 이론과 특징

위의 요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건국강령은 삼균주의의 구현방안이었다. 강령의 총강에 의하면 삼균주의의 사상적 연원은 단군의 弘益人間의 개국정신을 비롯하여 전통시대의 정신사에 있다는 주장이고, 그것이 3.1운동으로 건립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서 혁명적으로 발전하여 1931년 삼균주의로 구체화되었다는 것이다.

총강 제1항에서 한국은 반만년 이래의 고정적 집단이라고 선언한 바와 같이 건국강령의 민족주의는 전통과 근대를 구별하지 않는 국수적이라고 할만큼 역사 민족주의의 논리였다. 그러한 반만년 이래의 고정적 집단이라는 논리는 固有主權說이라고 이름지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과 1919년 길림에서 발표한 大韓獨立宣言書에서 제기한 후 독립운동의 일반논리로 정착하였다. 서구의 국민주권설이 神意에 근거한 폭군추방론이 자연법 사상과 결합하여 형성된 것과 비교하면 대조를 이룬다.

그러한 한국사적 정통의식은 3.4.5항에서 삼균제도와 토지국유화의 선언도 한국사에 근거한 당위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데에서 더욱 잘 나타나 있다. 제5항에서 3.1운동이 “군주정치의 구각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며 사회의 계급을 소멸하는 제일보의 착수이었다”라는 전통을 포기하는 듯한 표현이 있기는 하나 주권의 귀속이 고유주권설이기 때문에 그것은 주권의 행사 방식이 변혁되었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즉, 전통에 근대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거기에서 건국강령의 논리가 변증법 방식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각주 9) 三均主義나 建國綱領에 대한 연구 목록은 삼균학회,《三均主義硏究論集》18, 1998, 62-97쪽에 일목요연하게 소개되어 있다.)

삼균주의도 총강 제2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弘益人間의 건국정신이나 “首尾가 고루 평위해야 나라가 흥하고 태평을 보전한다”는 고언을 “先民의 明命”또는 사회의 “最高公理”라 하며 근대적 혁명 이념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한국 전통정신에서 연원을 찾았다. 다만 그러한 전통정신을 삼균으로 새롭게 구체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균주의는 혁명이념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삼균주의는 사회주의 성격이라는 것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각주 10) 韓詩俊,「大韓民國臨時政府의 光復후 民族國家建設論」,《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541쪽. 趙東杰, 「趙素昻의 生涯와 民族運動-三均主義와 社會民主主義 사상의 형성을 중심으로」, 『한국현대사의 재조명』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 1998, 139-151쪽.)

그런데도 혁명성을 피하여 전통시대에서 정신적 연원을 찾고 있었던 것은 삼균주의가 강력한 민족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1944년 10월 28일 건국강령 修改委員會 제2차 회의에서 崔東旿 姜弘周 위원으로부터 引古說이 지나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각주 11)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388쪽.)

제2장 ‘復國’항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독립전쟁을 중심한 독립운동의 방략문제, 본토 상륙작전과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는 문제 등이다. 여기에서 임시정부의 기본 방략은 독립전쟁으로 본토를 수복하고 국제적 승인을 받는 국제외교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 외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다음에 독립군의 본토 상륙 작전은 적어도 건국강령이 발표된 1941년부터 임시정부의 숙명적 과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토 수복을 위한 상륙작전이 1945년 초 미군측의 요구에 의한 OSS훈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에 국제적 승인의 획득을 계획한 문제는 좀 구차스럽게 보일 수 있었다. 崔東旿 위원이 “제2시기와 제3시기 내용이 별로 다른 것이 없는 동시에 시기를 나눈 것은 근래 외인이 우리 독립문제에 대하여 상당시기니 무엇이니 하는 등 橫竪說에 영합하는 嫌이 있으므로”(각주 12)『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문서』, 388쪽 하단, 建國綱領 修改委員會 會議錄 (여기서 상당시기 운운하는 것은 1943년 카이로 회담의 결정사항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그의 핵심문제는 1942년부터 미국정가에서 대두한 전후 한반도에 대한 國際管理說(후일 信託統治)을 말하고 있다).) 좋지 않다는 주장처럼 연합국을 과도하게 의식한 규정인 것 같다.

제3장 ‘建國’ 항목은 삼균주의의 실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자유주의 일반 이론과 다른, 당시로서 진보 성향을 가진 조항만을 보기로 한다. 먼저 제4항 기본권 규정을 보면, 受益權의 규정들이 나열되어 있어 주목을 끈다. 1919년 길림의 大韓獨立宣言書와 193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三均主義 자체가 수익권적 성격을 이념으로 한 것이라고 본다면 새로울 것은 없다.

그러나 건국강령에서 수익권의 내용을 노동권, 휴식권, 피구제권, 피보험권, 수학권 등으로 구체화했다는 점에서 그 전의 선언적 문서와는 다른 것이다. 세계적으로 초기 자본주의의 夜警國家 논리를 극복한 수익권의 규정은 1919년 독일의 바이마르헌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면 1919년 같은해부터 시도한 독립운동자의 선구적 의지를 특별히 주목해야 하고 그 의지가 1941년의 건국강령까지 이어졌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피구제권이나 피보험권에 포함되어 있을 健康權의 개념이다. 건국강령이 삼균주의 이념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삼균주의에는 건강권의 내용은 없다. 세계적으로 건강권을 가장 먼저 표방한 것은 소련의 볼세비키 혁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국에서 가장 먼저 규정된 것은 1919년 길림의 대한독립선언에서 ‘老幼 等壽’를 표방한 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각주 13) 趙東杰, 「삼일운동의 이념과 사상」, 『韓國民族主義의 성립과 獨立運動史 硏究』, 지식산업사, 1989, 403쪽.)

대한독립선언에서는 三均이 아니라 四均을 표방했는데 후일 삼균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1941년 건국강령에서 다시 건강권을 규정한 것을 보면 거기에서 四均이 재생되었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4항에서 또 주목할 것은 참정권의 내용에서 罷免權과 立法權을 규정하고 있는 점이다. 입법권은 국민투표제 같은 것일 것이고, 파면권은 국회의원 召還權 같은 것을 노렸을 것이다. 그의 본래 성격은 중세의회의 것이라는 등의 문제는 있으나 존 로크나 몽테스큐 방식의 代議制가 아니라 루쏘 방식의 직접민주제의 의도로 생각되어 강렬한 민주주의 이념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 않고 건국강령의 특징이기도 한 引古說에서 찾는다면 조선시대의 臺諫이나 上訴제도를 근대적으로 활용해 보자는 의도가 있었을런지도 모르는 파면권이었다고 하겠다.

국민의 의무 규정에서 교육의 의무가 제외되어 있는 것은 의외이다. 1919년 헌장 제6조에서 납세와 병역의 의무에 앞서 교육의 의무를 규정했으므로 (각주 14) 제6조 大韓民國의 인민은 敎育 納稅 及 兵役의 義務가 유함.)

더욱 이해되지 않는다. 때문에 1944년의 헌장에서도 교육의 의무가 제외되고 말았다. 그것이 헌법 이론의 수준 탓인지 아니면 삼균주의가 교육문제를 별도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이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번잡스러웠던 탓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두 가지 이유가 복합된 것이 아닌가 한다.

다음에 제5항의 지방자치에서 郡을 기초단체로 규정한 것은 역사적 근거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기억할 만 하다. 조선시대의 행정 단위가 郡이었고 鄕會나 場市등의 생활 단위도 郡이었다는 사실에 충실한 구상이었다. 그런데 일제하에서는 1914년에 식민수탈의 극대화를 위한 행정개혁으로 面 중심체제를 강제하여 전통적 郡과 里洞 단위의 생활 전통을 파괴했다. 그것을 모르고 또는 식민지시대의 청산을 거부하던 自由黨 시절의 자치는 面을 기초단체로 했던 과오를 범하여 지방자치를 혼란으로 몰고 갔던 사실은 지금이라도 반성해야 할 것이다.

삼균주의의 평등 이념은 제6항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중소기업만 私營으로 하고 거의 모든 경제관계를 국가 통제하에 둔다고 했다. 그리고 토지는 국유화한다고 했다. 평면적으로 보면 사회주의 성격의 건국강령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그의 논리를 전통시대의 역사에서 찾고 있어 근대사회의 혁명적 성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즉, 遵聖祖 至公 分授之法, 革後人 私有兼倂之弊(총강 제3항)가 전통이라는 것이다. 『高麗史』의 내용, 특히 私田改革의 기사를 인용하면서 광복할 조국의 토지국유화를 합리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논리는 전근대의 公田制와 근대의 토지분배론을 동일시한 것으로 사회주의의 혁명 이론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지만 중국의 大同思想처럼 전통사상에서 근대 논리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은 주목해야 한다. 전통부정 의식이 지배적이던 당시 지식인의 일반적 경향과는 달리, 새 조국의 건국원리를 전통시대에서 찾고 있는 논리는 강렬한 민족주의의 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44년 건국강령 수개위원회에서 引古說이 지나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그것은 전통적 논거가 있고, 현실적으로는 토지분배의 여론에 밀려 인고설의 비판이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또 1942년 12월 26일 約憲改定委員會 제5차 회의에서는 좌파정당의 대표였던 민족혁명당의 申榮三이 “토지국유 강령은 전민족 동원에 방해가 된다”고 문제를 제기했을 때 정부측의 조소앙은 “자본주의 사회를 건설한다면 따라올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각주 15)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325쪽.)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연장되어 해방정국에서 조선공산당 보다 임시정부의 토지정책이 더 과격했던 한때가 연출되기도 했다.

1931년 4월 임시정부 선언에서 삼균주의가 대외적으로 공표될 때 “國有로써 利權을 고르게 하고”라고 표현한 후, 임시정부 주변의 우파 정당인 한국독립당(趙素昻)이나 한국국민당(金九) 그리고 두 당과 조선혁명당의 3당이 통합한 1940년의 한국독립당(金九)이 모두 좌파의 논리인 토지국유와 대기업의 국유화를 표방하고 있어 그것은 좌우파의 구별 없이 임시정부 또는 독립운동의 이념으로 정착하였다. (각주 16) 趙東杰, 「中國關內에서 전개된 한국독립운동의 특징」, 『韓國近現代史의 理解와 論理』, 113-116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기업의 국유화를 시도한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케인즈 경제학이 대두하고 미국의 뉴딜정책이 성공한 후, 수정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1940년대에는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대기업의 국유화를 시도하고 있었으므로 그것만으로 사회주의 정책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케인즈 경제학은 일제하에 간행된 『新東亞』나 해방후 『學風』에도 소개되고 있던 것을 보면, 한국 지식인에게도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48년 제헌 헌법도 후술하는 바와 같이 자본주의의 수정노선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건국강령이 통제경제를 지향했던 것은 세계 경제공황 이후 시세의 조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토지의 국유화를 계획한 것은 사회주의 정책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引古說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새로운 혁명성이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회주의라고 해도 한국식 사회주의를 구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므로 삼균주의는 사회주의적이면서도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제6항의 구성에서 (ㅂ)과 (ㅅ)의 老幼. 여자. 노동자의 권익 규정은 당연하기는 하지만, 제4항의 受益權 규정에서나 아니면 사회정책 항목을 별도로 설정하여 규정할 법했다. 제7항 교육정책의 규정은 교육을 국가 관리하에 둔다는 것이 특징이다. 내용을 보면 독립군 교육제도와도 같은 계획이었다. 아마도 식민지에서 광복한 처지를 예상한 것이 아닌가 한다.

끝으로 삼균제도를 종합해서 볼 때 동양적 또는 한국적 이상주의를 근대 논리로 재구성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가 하면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종합적인 규정이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삼균이라고 해도 교육은 수익권의 규정에 포함하고 사회보장체제에 대한 규정을 두어서 정치 경제 사회의 민주화를 구조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재적 역량인 智力을 더 중시하여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구조화하였다. 이것은 삼균주의가 역사적 引古性을 강하게 가진 나머지 한국사의 文治 전통에 집착한 탓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렇게 보면 사회구성체적 이론을 중시하는 사회주의와 거리가 먼 삼균주의의 성격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국가관리 이론을 크게 수용한 점은 부정해서 안될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측면을 종합해 보면 삼균주의는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의 논리라고 할 것이다.

4. 강령의 성립성격과 의의

이와 같이 건국강령은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 전통에 근거하여 논리를 전개한 점이 특징이다. 그것을 당시에는 引古說이라 했다. 그러한 전통사적 근거에 의하여 固有主權說을 고집하였다. 그러므로 근대 민주주의 이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國民主權說의 주장은 없다. 그리고 건국강령의 중심 사상인 三均主義도 전통시대에서 논리의 근거를 찾아 설명했다. 한국사의 개별성을 강조한 이론이라고 하겠다.

1) 건국강령의 성립 배경

건국강령의 초안자가 趙素昻이라는 것은 알려진 일이다. 조소앙의 논리는 오래전부터 위에서 지적한 引古說이 특징이고 固有主權說과 均等主義가 특징이었다.  고유주권설은 1917년 大同團結宣言에서 비롯된 것이고, (각주 17) 趙東杰, 「臨時政府 수립을 위한 1917년의 大同團結宣言」, 『韓國民族主義의 성립과 獨立運動史硏究』, 314쪽.)

균등주의는 1919년 吉林에서 발표한 大韓獨立宣言書에서 고유주권설과 함께 제기한 것이 구체적 선례였다. 거기에서는 老幼等壽로 표현된 健康權까지 4균을 주장하였다. 즉, 권력. 부력, 지력. 체력의 4균을 주장하였다(전술). 그와 같은 균등주의를 기초하여 上海에서  발표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는 제3조에서 “남여 귀천 급 빈부의 계급이 無하고 일체 평등임”이라고 규정하였다. (각주 18)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3쪽.)

후일 삼균주의가 제기되었을 때 삼균의 다른 일면인 人均 族均 國均의 논리는 구한말 지식인의 문서에서도 부분적으로 찾아 볼 수 있지만 직접적으로는 민족평등. 국가평등. 인류평등을 선언한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헌장과 함께 발표한 宣誓文의 政綱 제1항에서 근거를 찾아 볼 수 있다. (각주 19) 韓詩俊 편,『大韓民國臨時政府法令集』, 國家報勳處, 1999, 42쪽.)

이러한 문서들이 모두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주 20) 趙素昻의 사회주의 지향성은 1914년부터 엿보이고 1917년 상해에서 申圭植과 더불어 朝鮮社會黨을 결성하면서 궤도에 오른듯이 보인다. 거기에서 보여준 사회주의는 사회민주주의였다. 그러한 사회민주주의 사상은 1919년부터 2년간 유럽에 머물면서 볼쉐비키 사회주의와는 별도로 제2인터네쇼날의 재건을 목표했던 국제사회당대회에서 활약하는 가운데 확립되어 갔다. 사회민주주의도 독일 사민당 노선보다 영국 노동당 의원들과 밀접히 교유하면서 우파성이 강한 영국식 사회민주주의에 기운 경향이 있었다(조동걸, 「조소앙의 생애와 민족운동」, 『한국현대사의 재조명』2, 140-144쪽).)

삼균주의가 대외적으로 표현된 것은 1931년 4월에 발표한 大韓民國臨時政府 宣言이었다. 건국강령의 총강 제6항에서 “임시정부는 13년(1931) 4월에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라는 말이 그것이다.

“民族均等主義란 것은 국내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권리를 고루 누리는 것을 말한다. 무엇으로 고르게 할 것인가. 普通選擧로써 政權을 고르게 하며, 國有로써 利權을 고르게 하며, 公費로써 學權을 고르게 한다. 국외에 대하여는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불평등을 제거한다.”

(각주 21) 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資料』3, 211쪽(번역). 「均等制度之民主的獨立國家」 獨立黨 依此而爲主義焉爲信條焉 主義之根於民衆本於意識之所由來 遠且深矣. 本政府以獨立黨, 爲根幹, 獨立黨以民國全體, 爲基礎, 而固執均等主義, 均等主義, 早由民族全體之共同要求而發生焉, 則本政府之主義與政策, 根於此而始得決定, 要約之爲--「民族均等主義」, 民族均等主義者, 「在國內人與人, 均享利權之謂」, 何以均之, 曰普選以均政權, 國有以均利權, 公費以均學權, 對國外, 保障民族自決之權, 以除族與族國與國之不平等, 故因此而實現於國內, 則特權階級, 立見消亡, 小數民族, 危其侵凌, 無論爲政治爲經濟之敎育, 均其利權, 無所軒輕, 對同異族, 亦復如是, 本政府根據民族均等主義而獨立運動之政策矣.)

위의 글은 임시정부가 中國 國民政府에 제출한 특히 東三省에서 자행되고 있는 한인교포의 탄압에 대하여 선처를 호소하는 내용을 비롯한 한중 양국의 유대를 강조한 장문중의 한 토막이다. 제출서에는 당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趙琬九ㆍ趙素昻ㆍ李東寧ㆍ金澈 ㆍ金九가 차례로 연서하였다. 그리고 전해인 30년 1월에는 李東寧. 安昌浩 등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했는데, 때마침 안창호는 大公主義를 제창하고 있어 (각주 22) 趙東杰, 「민족운동에서 島山 安昌浩의 업적과 특징」, 『韓國近現代史의 理解와 論理』, 238-239쪽.)

한국독립당 강령을 중심한 토론이 광범하게 진행되었을 것을 추측케 한다. 그러한 토론과 합의의 산물이 한국독립당의 黨義 黨綱이었는데, 당의에서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新民主國을 건설하여서…”라고 (각주 23) 金正柱, 『朝鮮統治史料』10, 東京 韓國史料硏究所, 1971, 698쪽(번역).)했다.

그렇다면 위에 소개한 1931년의 임시정부 선언은 1930년에 만든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에 기초하여 만들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의ㆍ당강의 기초위원은 李東寧ㆍ安昌浩ㆍ李裕弼ㆍ金枓奉ㆍ安恭根ㆍ趙琬九ㆍ趙素昻 등 7명이었다. (각주 24) 韓詩俊,「上海韓國獨立黨硏究」,『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 史學論叢』, 1989, 615쪽.)

그러한 인사들이 당의. 당강을 만든 1930년은 1926년부터 국내외 독립운동 거리를 휩쓴 민족유일당운동이 국내의 新幹會외에는 모두 와해되던 가운데 上海에서도 1929년에 무산되고 만 다음해라는 점, (각주 25) 金喜坤,「1920년대 임시정부의 협동전선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한울, 1995, 41쪽.) 그리고 경제공황이 세계 자본주의를 강타하고 있던 때라는 점을 감안하면, 누구에게나 삼균주의 방식의 사고가 대두할 가능성이 많았다는 조건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安昌浩의 大公主義에 대한 분명한 문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1938년 그가 작고했을 때 임시정부가 있던 長沙에서 추모대회가 열렸는데 그때의 문서에 안창호가 “민족평등ㆍ정치평등ㆍ경제평등ㆍ교육평등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려던 (각주 26) 旅湘韓人 追悼安島山先生大會籌備處編印, 「韓國革命領袖 安昌浩先生四十年革命奮鬪史略」, 『島山安昌浩資料集』3, 독립기념관, 1992, 264쪽.) 혁명영수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다.

그것을 보면 안창호의 대공주의도 삼균주의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당의. 당강의 기초위원은 아니었더라도 당시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의 지도급 인사였던 金九의 의견도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31년 중국정부에 보낸 임시정부 문서에 김구도 서명했을 뿐 아니라 1935년 김구가 창건한 한국국민당도 삼균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각주 27) 趙凡來,「韓國國民黨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4, 1990, 380쪽 ; 韓詩俊,「趙素昻의 三均主義」,《韓國史市民講座》10, 일조각, 1992, 112쪽.)

한국국민당을 창건한 김구가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남의 것을 차용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건국강령의 핵심인 삼균주의는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이 창건되면서 당의ㆍ당강을 결정하는 가운데 구체적으로 합의하고 확립된 독립운동의 이념이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안창호의 대공주의와 조소앙의 균등주의가 이론적 기초가 된 것으로 보인다.

1932년 4월 尹奉吉의 의거를 계기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上海를 떠나 杭州로 갔다.(그때 김구와 이동녕은 嘉興으로, 안창호와 이유필은 체포되어 국내로, 杭州의 한국독립당은 조소앙이 이끌고 있었다)1935년 7월에는 한국독립당이 의열단(金元鳳)이 주도한 민족혁명당(金奎植ㆍ김원봉)에 합류하면서 스스로 해체하였다. 그때 민족혁명당에 합류한 한국독립당의 김두봉 조소앙 최석순 등의 영향인 듯, 삼균주의는 민족혁명당의 이념이 되었다. 그의 黨義를 보면 (각주 28) 金正明, 『朝鮮獨立運動』2, 原書房 540쪽.)

고유주권설이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것과 안창호처럼 균등을 평등으로 표현한 것이 다른 점이다. (각주 29) 그래서 安昌浩가 작고한후 漢口에 있던 민족혁명당이 長沙에 있던 임시정부 보다 먼저 추모대회를 열었을런지 모른다.)

그런데 그해 9월에는 조소앙이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고, 11월에는 김구. 이동녕이 한국국민당을 결성하였다. 각당의 강령을 보면 모두 삼균주의를 표방하였다. 이제 삼균주의는 모든 정당의 공유물이 되었다. 각당간에는 이념의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1941년에 건국강령을 만들 때 삼균주의는 무리 없이 기본사상이 되었고, 1942년 민족혁명당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뒤에도 삼균주의를 핵심으로 한 건국강령이 거부되지 않았던 것이다. 민족혁명당 쪽에서 引古說과 土地國有說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바 있었으나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2) 역사적 의의

이상과 같이 건국강령은 삼균주의의 행동강령과도 같이 성립한 것이다. 건국강령이 공표된 뒤인 1942년 延安에서 결성한 조선독립동맹(金枓奉)도 이념상 큰 차이가 없었다. (각주 30)「華北朝鮮獨立同盟綱領」, 金正明,『朝鮮獨立運動』5, 原書房, 1968, 992쪽.)

한편 보수적 반대가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임시정부내에서 가장 보수 성향을 보였던 趙琬九의 견해를 추적해 보았더니 그도 건국강령의 옹호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942년부터 의정원의 約憲修改委員會 위원으로서 새 헌법에 건국강령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회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주 31)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299쪽.)

그때 만든 헌법이 1944년의 임시헌장이다. 임시헌장에서는 그 전문에서 自由 平等 進步를 기본정신이라고 선언하면서 제30조 1항에서 국무위원회는 “복국과 건국의 방책을 의결함”이라고 건국강령의 헌법상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렇게 보면 1930년 이후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주요 독립운동 단체간에는 적어도 문자상의 이념적 차이는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념은 건국강령이 대변한다고 보아 좋을 것이다. 그렇다고 독립운동자 각자의 사상의 차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차이가 있었더라도 하나의 건국방책을 추구했던 것은 敵前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마당이었으므로, 특히 광복을 눈앞에 둔 마당에서, 가야할 길은 통일전선이었으므로 그의 의지적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통일전선이 마음에도 없는 외형의 포장일수는 없었다. 통일이니 단결이니 하는 것은 독립변수가 아니라 종속변수이기 때문에 통일전선을 가능하게 만든 독립변수로서의 존재가 있어야 했다. 즉, 모든 단체가 승인할 수 있는 건국강령이 있었으므로 통일전선도 형성될 수 있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 개인의 사상과는 다소의 차이가 있어도 민족이 지향할 중심개념을 세워 포용의 광장을 마련한 것이다.

포용의 광장이 있었으므로 1940년에 3당이 합당한 한국독립당을 결성할 수 있었고, 42년에는 민족혁명당을 임시정부가 수용할 수 있었고, 1945년에는 임시정부 주석 金九와 연안의 독립동맹 金枓奉과 통일전선에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주 32) 趙東杰, 「白凡 金九의 統一國家樹立運動」, 『한국근현대사의 이해와 논리』, 363-366쪽.)

오늘날의 통일문제도 먼저 건국강령과 같은 통일강령을 마련할 작업이 중요하다는 것을 역사적 교훈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다.
       
5. 해방후 건국강령의 위상

건국강령으로 민족 광장은 마련되었지만 1945년 해방을 맞자 美蘇의 패권주의에 의하여 민족국가 형성의 광복은 차단되고 분단을 당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1944년 10월 26일 건국강령 修改委員會에서 조소앙이 “건국강령은 … 美의 배경을 가진 파가 먼저 세력을 잡으면 반듯이 美式 데모크라시 정강을 세울 것이고 蘇의 배경을 가진 세력이 선다면 역시 그러할 것이니 … 임시정부를 중심하고 製出한 이 강령이 과도기에 適宜하다”고 (각주 33) 『大韓民國臨時政府 議政院文書』, 389쪽.) 우려를 했지만 美式과 蘇式이 남북을 분단하여 각각 들어설 것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을 예상했다면 ‘과도기에 적의’한 것이 아니라 미소의 패권적 지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건국강령이 중요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또 미국식이든 소련식이든 어느 것이 지배하더라도 건국강령의 중도적 이념으로 좌우 극단화를 막아야 한다고 했을 것이다. 과도기에 적의하다고 말한 이면에는 바로 그러한 의도가 숨어 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건국강령은 美式과 蘇式에 눌려 남북에서 모두 외면 당하고 말았던가. 해방공간의 위상과 남북 분단정부 수립시기의 처지는 어떠했던가.

해방후 미군정 당국은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환국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환국하자마자 개인자격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방송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임시정부의 건국강령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다만 다른 정당과 함께 정당운동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분단정부가 수립된후에도 그랬던가.

그것을 알아보기 위하여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위원이던 兪鎭午의 『憲法解義』(1949)를 읽어보았다. 건국강령이 얼마나 반영되었던가를 보기 위해서였다. 거기에서 헌법을 기초할 때 참고한 10가지 문서 가운데 임시정부의 건국강령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각주 34) 兪鎭午, 『新稿 憲法解義』, 탐구당, 1952, 26쪽.)

그리고 전문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라고 임시정부에 기초한 대한민국이라는 점과 균등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을 선언했다.

내용을 보면, 건국강령이 규정한 국민투표제 같은 입법권이나 국회의원 소환권 같은 파면권은 없이 철저하게 간접민주제를 표방하고 있지만, 자유권은 말할것 없고 수익권도 제16조에서 24조까지 교육권. 여성 및 노유권. 노동권까지 폭넓게 규정되어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토지국유화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제15조에서 “재산권은 보장된다 … 재산권의 사용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여야 한다.”라고 자본주의 체제를 선언하면서도 私有財産神聖不可侵이나 契約自由의 原則 같은 아담 스미스 방식의 초기 자본주의 체제는 거부하였다. 그래서 경제원칙을 규정한 제6장을 보니 제84조에서 “경제질서는 생활의 기본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사회정의의 실현과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함을 기본으로 삼는다”라고 했다.

그리고 86조에서 “農地는 농민에게 분배”한다고 선언하고 85ㆍ87조에서 資源性 기업과 公共性 기업은 국유로 한다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수정자본주의를 지향한 헌법으로서 건국강령과 크게 먼 것도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상의 문자 표현이 실제에 어떠했던가. 처음에는 건국강령의 정신을 세우기 위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들고, 재정 경제의 조정을 위하여 정부조직법상 기획처도 두었고, 농지개혁도 추진하였다. 그리고 학계에서도 가령 『學風』(을유문화사)에서 수정자본주의의 길을 촉진하기 위하여 케인즈경제학에 대한 논설을 소개하는 한편, 사회주의 관련 토론도 1949년 전반까지 게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미군정이래 득세한 친일파들이 이승만과의 결탁에 성공하면서 정국은 극우 분위기로 변질해 갔다. 1949년으로 접어들면서 이승만 정권은 친일정권으로 변하는 듯 하더니 드디어 그해 6월에는 반민특위사건을 일으켰고 백범 암살사건으로 이어졌다. 그때 국회프락치사건도 조작되었다.

그리하여 독립운동의 광복 분위기는 사라지고 공포의 긴장이 감도는 속에서 건국강령 같은 논의는 잠복하고 말았다. 대학에서는 微視경제학만 강의되었다. 그 정도이니 기획경제를 말하면 대학 교수도 좌파로 몰렸다. 그러니 국영기업은 정상배의 농간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그와 같이 헌법의 문자 표현과 실제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문자로 표현된 이상은 친일정권과 그 하수인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6. 맺음말

建國綱領은 1941년 11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발표한 것이다. 1931년 4월에 임시정부가 건국원칙으로 대외 선언한 三均主義를 구체화한 내용이다. 삼균주의가 성립한 것은 그 전해인 1930년 1월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당의. 당강을 결정할 때, 조소앙의 균등주의와 안창호의 대공주의를 중심으로 토의하면서 당의. 당강의 기초위원인 이동녕ㆍ안창호ㆍ이유필ㆍ김두봉ㆍ안공근ㆍ조완구ㆍ조소앙 등이 협의 확정한 것이다. 건국강령은 제1장 총강 7개항, 제2장 복국 10개항, 제3장 건국 7개항, 모두 21개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 <總綱>은 예에 따른 총론이다. 거기에서 한국은 반만년의 고정적 집단이라는 고유주권설을 선언하고 삼균주의와 토지국유화를 주장했다. 삼균주의와 토지국유화도 고유주권설처럼, 한국의 전통 사상에 근거한 민주제도로 구상한 것이다. 즉, 弘益人間의 정신이 만들어낸 首尾 均平位하면 興邦 保泰平하다는 교훈에 근거하여 權力. 富力. 智力의 삼균을 주장했고, 聖祖의 至公 分授之法에 따라 후세에 私有兼倂之弊를 혁파한 전통에 근거하여 토지국유화를 주장했다.

고유주권설은 국수적일 만큼 민족주의 집념이 강한 논리이다. 또 삼균주의와 토지국유화의 논리는 사회주의와 비슷한 주장인데 그것을 전통사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므로 사회주의 혁명사상이 될 수는 없다. 사상은 그렇더라도 현실은 사회주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강력한 민족주의를 강조한 점이 특징이다.

제2장 <復國>은 독립운동 방략을 설명한 내용이다. 주목할 것은 독립군이 본토에 진격하여 일제를 구축하고 국제적 승인을 얻어 독립운동을 완성한다는 것이다. 본토 상륙작전이 임시정부가 1941년에 계획한 숙명적 과제였다는 것을 알수 있고, 국제관계를 과도하게 의식한 것이 특징이다.

제3장 <建國>은 삼균주의를 구체적으로 규정한 내용이다. 광복 후 헌법에 규정할 주요사항을 열거했다. 7개항 중 4ㆍ6ㆍ7항목은 다시 21개 細項으로 구성하여 상론하였다. 자유권과 참정권외에 受益權의 규정을 강조하고 토지와 대기업의 국유 국영을 규정하는 등 경제와 교육의 국가관리를 규정했다.

얼핏 보기에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것 같은데 논리의 근거를 전통시대에 둔 외에도 중소기업의 사유를 규정한 것이나 특히 사회주의의 특성이기도 한 사회구성체적 규정을 외면한 것으로 보아 수정자본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정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건국강령은 독립운동 방략인 동시에 해방정국에서 미국과 소련식 정치 이념을 견제하면서 임시정부의 수정자본주의 또는 민주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계산 밑에 만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미소의 점령과 지배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1948년의 제헌 헌법을 보면 건국강령의 정신을 상당히 반영하고 있었다. 헌법 전문에도 반영되어 있지만 수익권 규정을 강화한 점, 특히 제6장 경제조항에서 農地의 농민소유 선언, 資源性기업과 公共性기업의 국유화 선언 등은 건국강령의 정신과 비슷한 규정이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정책이나 사회 현실은 초기 자본주의를 지향하고 있었다. 특히 친일파의 농간으로 1949년 6월 반민특위사건과 백범 김구의 암살사건 이후에는 반공을 핑계삼아 극우논리가 지배하여 기획경제를 찬양하는 발언은 대학 강의에서도 좌익으로 몰렸다. 결국 헌법상의 문자는 실제와 무관한 문자로 존재할 뿐이었다.

통일을 눈앞에 둔 오늘, 또 토지 공개념이 일반화되고 있는 오늘, 건국강령이  의도하던, 미국식과 소련식 정책을 동시에 견제하면서 한국 나름의 길을 닦고 실현하려던 그 건국강령의 정신은, 세계화 속에 분해되지 않는 한국의 길을 세우기 위해서도, 통일의 지표를 세우기 위해서도, 소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다시 음미해야 할 것이다.

출전 : 국가보훈처-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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