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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5 (화)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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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80      
[현대] 삼팔선=38선 누가 그었나 (도진순)
38선 누가 그었나

도진순 (창원대 사학과, 민족통일연구소연구위원)

미, 소의 배후에 일본의 공작이 있었다 38선은 도대체 누가 그었는가. 흔히 냉전의 양진영인 미, 소 양군이 진주하면서 자연스레 그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그뿐일까. 이에 대해 정력적인 연구활동을 펴고 있는 소장 역사학자 도진순 교수는 역사를 대할 때 거시담론만이 아닌 미시적 시각을 가지고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38선 획정을 이런 시각으로 들여다볼 때 예상 외의 추악한 진상이 실체를 드러낸다. 이 글은 도진순 교수가 2000년 8월 27일 일본 도쿄 히도츠바시대학(一橋大學)에서 열린 ‘한일역사공동연구회’ 제3차 심포지엄에서 발표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

1. 머리말

한국의 분단은 흔히 미소 냉전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담론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대단히 불충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거대담론은 대개 관련 행위자의 구체적인 활동과 그 차이를 매몰시킬 뿐 아니라, 종종 역사와의 단절을 야기하기도 한다. 특히 전후의 냉전체제가 전전의 식민체제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것은 민족문제가 관건적 의의를 지니는 아시아에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분단 한반도의 경우 특히 더 그러하다.

38선과 남북분단은 미소 냉전체제의 산물이고, 전전 일제의 식민주의는 단지 역사적 배경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일본이 식민통치의 연장선상에서 한반도의 분단에 모종의 구체적인 변수로 작용하였는가. 이를 규명하기 위해 일본, 조선총독부, 조선주둔군의 종전 구상과 공작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은 비단 일본의 행위를 해명하는 데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한반도 분단의 성격과 주체 나아가 미국의 한반도정책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그간 미국의 대(對)한반도 정책에 대해서는 선의의 '준비부족론' 내지 '선의의 무지론'과 '준비점령론'으로 논쟁이 되어왔다. 현재 소련의 대한정책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대한정책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거나 결여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점차 설득력을 잃고 있지만, 준비점령론 또한 대단히 단순한 구도로 문제점이 적지 않다.

미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3부조정위원회(SWNCC) 등이 대한정책을 여러 가지로 준비·입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실제 집행과는 일단 거리가 있는 준비의 수준이다. 그러한 준비와 무관하게 제24군단이 급하게 남한에 진주하였으며, 제24군단은 한반도의 초기 점령정책에 대해서 거의 준비한 것이 없었다(정병준 1996).

그렇다고 미국의 점령방식이 '선의의 무지론'이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 준비된 것보다 더 억압적인 방식으로 한반도의 점령이 집행되었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일본의 결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종전 전후 일본의 행위를 해명하는 것은 해방에서 분단으로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전환국면에서 역사적 인과관계의 공백을 메우는 중요한 작업이다. 몇 가지 선구적인 업적들을 참고하면서(김기조 1994; 1998; 정병준 1996), 이 문제를 다시 정리해 보자 한다.

2. 일본의 '화평공작'과 조선 영유

1943년 1월 루스벨트와 처칠은 카사블랑카회담에서 독일과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연합국의 정책목표로 결정하고 그해 12월 카이로회담에서 연합국(미·영·중)은 일본에 대해 무조건항복을 촉구하였다. 이 무조건항복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조건부 항복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43년 초부터 일본은 '화평공작'(和平工作)을 통해 나름대로 유리한 조건의 종전대책을 모색해 왔다. 예컨대 재야 화평파인 고노에(近衛) 그룹은 1943년 초 비밀결사 이쓰유카이(乙酉會)를 조직하고 "해외 모든 영토를 포기하되 식량과 자원의 보급원으로 조선과 대만을 보유하는 경우에 항복함으로써, 일본의 파멸을 방지하고 소련 참전 이전에 종전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여기서 일본의 파멸을 방지하기 위해 배후지로 조선을 영유한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실제 일본은 1943∼45년 다양한 화평공작을 진행시켰는데, 그 핵심은 일본본토에서의 국체 유지, 즉 천황제 보존과 아울러 '조선과 대만의 영유'였다. '15년전쟁'으로 획득한 영토는 반환하되, 그 이전에 이미 식민지가 된 지역은 그대로 보유한다는 것이다.

연합국은 1948년 7월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의 주권은 혼슈(本州), 홋카이도(北海島), 규슈(九州), 시코쿠(四國) 및 우리가 결정하는 인근 소도서(小島嶼)로 국한된다"고 선언하였지만, 일본은 여전히 본토에서의 천황제 유지와 대만·조선의 영유를 종전의 조건으로 내걸고 있었다.

미국의 원폭투하와 소련참전 이후인 8월 10일 이후에야 일본은 비로소 조선·대만의 영유를 포기하고 천황제 유지만을 조건으로 항복을 제의하였다. 연합국은 천황을 연합국군총사령관에게 복종한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의 항복을 수락하였다.

일본이 조선을 포기함으로써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과 영향력은 이제 끝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연합국의 한반도 점령방식에 모종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일본에 유리하게 하는 것이 남아 있었다. 그것은 다시 38선문제와 관련되는 것과 38 이남지역의 점령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3. 일본군의 분리와 38선

38선에 관해서는 해방 직후부터 현재까지 분분한 주장들이 많이 있지만, 최근의 연구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38선은 미국이 주도하여 소련이 접수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즉 동북아에서 미소냉전체제의 분계선이다. ② 미국의 정책브레인들은 1944년경부터 한반도의 분할을 포함한 군사작전선 및 점령 방식 등에 대해 여러 가지로 검토해 왔다. ③ 그러나 실제 38선이 채택·집행되는 것은 1945년 8월 10∼11일 미국의 3부조정위원회(三部調整委員會)와 휘하의 전략정책단에 의해서 급하게 획정되었다.

이러한 연구로 해서 38선의 획정과정과 전반적인 성격은 상당 부분 해명되었다. 그렇다면 38선과 일본은 무슨 관련이 있는가. 미국이 한반도의 점령방식과 분할에 대해 많이 검토하였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집행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필요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일본의 한반도정책이 한반도의 분할을 연구·검토하는 단계(②)에서 정책으로 실제 집행되는 단계(③)에 어떠한 촉매로서 작용하였는가, 그리고 그것은 한반도의 분단과 38선의 성격(①)에 어떤 성격을 추가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목표이다.

38선은 오랜 단일국가인 한반도를 분단한 선이고 아직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관련자들의 증언은 여러 가지로 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점에 유의하면서 우선 해방 직후 주한미군사령관 하지(J. R. Hodge)의 언급을 보자.

그는 1945년 9월 주둔 직후 38선에 대해 "나 자신이 모르는 만큼 대답할 수 없으며 군문(軍門)에 있는 나보다는 미국 워싱턴 외무성에 직접 관계되는 것"이라 대답하였다({매일신보} 1945. 9. 18; {자료대한민국사} 1,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주둔사령관으로서 이런 중차대한 문제를 회피할 수만 없었던 하지는 11월 국무부의 입장을 밝히는 다음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전 미국 국무성에서는 조선을 미소 양 지대로 분할하게 된 원인을 재차 설명하였다. 즉 일본항복 당시 일본군대의 배치[강조는 인용자. 이하 동일]로 인하여 연합국은 맥아더 대장을 통하여, 북의 38도 이북의 일본군은 소군에, 이남의 일본군은 미군에 각각 항복하라고 지령하였다. ({자유신문}; {서울신문} 1945.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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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주목되는 구절은 '일본군대의 배치'가 38선의 배경(원인)이 되었다는 언급이다. 당시 비슷한 주장은 미국본토에서도 제기되었다. 1949년 6월 16일 미 하원외교위원회의 한국원조 심의를 위한 청문회에서 육군부 기획작전국장 볼트(Bolte) 소장은 38선을 최초로 고안한 자가 누구냐는 추궁에 대해, "일본군의 항복 수락을 위하여, 일본군대의 두 부분간에 분할선을 긋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리는 해방 직후 조선에서 38선이 처음으로 공표될 때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8월 27∼28일 조선군관구 사령부는 "조선 북반부의 정전은 관동군과 소련군 최고사령관의 협정에 따라…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부대의 국지 정전에 관하여 교섭할 상대는 조선군관구 사령관과 합중국 제24군사령관으로 결정되었다"고 발표하였다(森田芳夫 1963, 277쪽; 森田芳夫 1964, 154∼55쪽).

요컨대 종전 당시 조선에서 일본군의 지휘체계가 조선의 남부는 대본영 소속, 북부는 관동군 소속으로 분리되어 이를 기준으로 38선이 획정되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항복을 접수하였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일본군의 분리가 한반도의 분단과 관련되어 있다는 주장은 일찍부터 있었다. 그후 이것을 다시 제기한 사람은 고준석이다. 그에 의하면 1945년 초 일본대본영은 조선군에 대하여 38선 이북의 부대는 관동군사령부의 지휘 하에, 그리고 이남의 군대는… 제17방면군사령부 지휘하에 들어가도록 편성하였는데, 관동군의 증강은 소련군의 대일 참전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고, 17방면군은 미군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며, 그래서 미국정부는 그것을 근거로 미소 양군의 점령 경계선으로 분단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高峻石 1989, 13∼14쪽)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일본의 한 학자는 군사기술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며 비판하였지만(藤城和美 1992, 183∼84쪽), 고준석의 의견에 공감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일본군의 분리가 38선의 배경이 되었다는 이러한 주장에는 몇 가지 검토해야 될 과제가 있다. 소련의 대일 참전에 대비하여 1944년 후반부터 관동군의 작전지역이 한반도까지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45년 8월 10일 이전까지 함경북도, 함경북도와 평안남북도 등 점차 확대되었고, 45년 8월 10일에는 관동군이 전조선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김기조 1994, 129쪽).

때문에 1945년 8월 10일 이전 미국에서 한반도 분할을 검토하던 시기 관동군의 작전지역은 가변적이었고, 38선과 일치하지 않는다. 또 미국에서 38선을 획정하는 1945년 8월 10일 관동군의 작전지역은 오히려 전조선지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바뀌는 시기였다.

따라서 한반도의 일본군의 작전지역 분리가 38선 그 자체의 근거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휘계통이 대소·대미 작전지역으로 나누어진 것이 한반도에서 미소 작전지역을 분리한다는 관념의 배경이 되었을 수는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일본의 의도의 표출로는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당시까지 일본의 목표는 한반도의 영유였기 때문이다.

이상을 종합해서 보면 일본군의 분리가 38선의 배경이 되었다는 하지와 미국측의 설명은 38선문제에 대한 미국측의 책임을 일부 은폐하면서 '하나의 배경'을 슬쩍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일본의 유혹?

그렇다면 일본은 한반도의 분단과 38선획정 논의에서 하나의 '선의의 희생양'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최고사령관이자 한반도의 분단이 본격화되는 1948년에 국무장관을 지냈던 마셜은 1948년 10월 13일 파리에서 한국유엔대표단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38선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군사분계선 38선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는지 대외비로 설명하겠다(explained confidentially). 그것은 1945년 9월[8월의 오기-인용자]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의 자세에 대한 모종의 발견 때문이었다. (FRUS 1948, p. 1314) 당시 한국유엔대표단 어느 누구도 이 중요한 대목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러나 1959년 마셜의 서거 직후 {U. S.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U. S. News & World Report)는 커버스토리로 38선분할에 대한 마셜의 생전 언급을 비교적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나[마셜]는 '외교관들이 모여앉아 한반도를 38선으로 어떻게 분할하였는가'를 비판하는 많은 글들을 읽어보았다. 의원들과 편집인 등 여러 사람들은 '외교관들이 좀더 현명했어야 했다' '외교관들이 [한국]전쟁을 끌어들였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니다. 정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겠소?

우리는 일본의 전문 메시지를 포착했다. 그 메시지는 조선의 일본군사령관으로부터 본국의 일본군사령부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 전문에는 공산군이 조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으며, 미국이 공격하면 그들은 일본군대 전부를 항복시키겠다고 적혀 있었다.

그들은 공산군이 그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두려워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걱정은 온당한 것이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조선 진격을 계획하였지만, 맥아더는 조선 침공에 적어도 1개 군단이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그의 군대는 널리 산재해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전보를 포착했을 때, 우리는 적은 부대로도 조선에 진격할 수 있겠다고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은 전략정책단을 중심으로 44년 이후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다각도로 연구·검토한 바 있다. 그러나 종전 직전 문제는 실제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가 하는 진공속도가 현실적인 쟁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마셜의 언급은 38선과 관련하여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전해 주고 있다.

첫째, 미군은 38선획정 이전에도 한반도를 방기하거나 소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작전전개를 검토하였다. 사실 마셜은 포츠담회담 당시에도 조선에 미군을 상륙시키는 계획을 언급한 바 있다. 둘째, 그러나 종전이 임박해지기까지 맥아더사령관 휘하의 군대들이 한반도에서 멀리 산재해 있어서 한반도 상륙 작전을 현실적으로 실행하지 못하였다.

셋째, 그때 "미국이 조선을 공격하면 일본군대를 항복시키겠다"는 일본군의 전문을 통해 한반도에서 미군의 작전이 가능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넷째, 일본군이 그러한 전문을 보낸 이유는 소련군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마셜의 증언은 이처럼 중요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고, 또한 첫번째, 두번째와 네번째 등은 당시의 현실 및 최근의 연구성과와 부합하는 것들이다. 다만 38선과 결정적으로 관련되는 셋째부분을 뒷받침할 전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8월 종전 전후의 일본문서들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지만, 일본의 '종전대책'으로 그 태반이 소각·망실되어 찾을 수 없다(김기조 1994, 23쪽).

조선총독부의 경우도 종전 직후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이 비밀문서를 소각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1주일이나 계속되었다. 실제 대화숙장(大和塾長)이자 경성보호관찰소장이던 나카사키 유조(長崎祐三)는 1946년 3월 공문서류 훼기(毁棄)와 자금횡령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기도 하였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비슷한 내용의 전문이라도 추적하는 수밖에 없다. 마셜의 발언으로 봐서는 그 전문의 발송시각은 소련군이 참전하는 동경기준시 8월 9일 오전 00: 05(미국 EST 8월 8일 오후 10시 05분) 이후, 미국 3부조정위원회에서 한반도 분할선을 지시하는 미국 동부표준시(EST) 8월 10일 오후 9시(동경기준시 8월 11일 오전 11시) 이전으로, 시간은 2일 11시간(59시간) 정도이다(김기조 1994, 273쪽)이다. 그중 일본대본영이 조선의 제17방면군에 보낸 8월 9일자 전문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7방면군은 관동군의 전투서열에 들어갈 것, 예속 변경시간은 8월 10일 6시로 함… 관동군의 주작전을 대소 작전으로 지향하여 본토 조선을 보위함. 그 동안 남조선 방면에서는 최소한의 병력을 가지고 미군의 내공에 대비할 것.

이 전문에는 일본이 38선을 의도하거나 한반도 남부에 미군주둔을 직접 유혹했다는 언급은 없다. 그러나 17방면군의 전투서열을 관동군으로 바꾸어 대소방어에 주력하고 그간 주력하였던 남부지역의 대미방어선에는 최소 병력만 남긴다고 표명한 점, 즉 강경한 대소정책과 유화적인 대미정책으로 구별하고 있는 점은 마셜의 언급과 궤를 같이한다.

이것은 일본이 8월 9일부터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적극 모색하였다는 주장과도 일치한다. 또한 미국은 제17방면군이 앞의 전문지시를 실시한 내용을 대본영에 보고한 전문을 포착·해독하여, 8월 10일 오후 2시 25분(EST. 동경표준시 8월 11일 오전 4시 25분)에 워싱턴에 보고하였다(김기조 1994, 283∼91쪽). 그리고 그날 저녁 38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이 전문에는 "일본이 38선을 의도하거나 한반도 남부에 미군주둔을 직접 유혹했다"는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관련 전문을 찾아내는 것이 여전히 과제이다. 때문에 전문 발송일은 8월 10일이 유력하며, 그럴 경우 앞의 8월 9일자 대본영 전문의 답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8월 10일 오전 9시 30분경 도쿄방송은 "일본정부가 천황페하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포츠담선언을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하였으며,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군도 이 방송을 들어 일본이 조선을 포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부터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소련군의 경성점령이었다.

이것은 조선총독부와 여운형의 교섭과정, 뒤에서 살펴볼 종전 직후 일본대본영과 조선주둔군의 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모리다(森田)는 조선주둔군에서 포츠담선언 수락을 인지한 이후 "일본군대가 미군에 항복하여 소련군의 남조선점령을 모면할 수 있겠다"는 전문을 대본영으로 보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써는 그 전문을 확인할 수 없다.

8월 10일 이후 미군의 한반도 공습이 중지되었다는 것도 일본의 대미정책 전환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경성일보}의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미군 전투기는 1944년 7월부터 한반도 상공에 나타나기 시작하여 1945년 들어와서는 거의 매일 공격하였다. 1945년 8월 9일에도 B25 5개 편대 34기가 공습하여 그중 1기가 격추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8월 10일 이후에는 미군 비행기가 한 대도 나타나지 않았다. 반면 소련 비행기들은 8월 9일부터 공격을 시작하여 8월 14일까지 계속되었다(森田芳夫 1963, 10, 70∼98, 109∼12쪽). 육지전에서도 남과 북의 상황은 현격하게 달랐다. 북부에서 소련군과 일본군의 전투는 8·15 이후에도 닷새 동안 계속되었지만, 남부의 일본군은 미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적극 협조하였고, 더욱이 소련군의 공격에 맥아더가 빨리 개입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5. 일본과 미군의 결합

38선문제에 대한 일본의 개입과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직도 확정적 언급을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자료를 더 발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종전 직후 일본정부와 일본대본영,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가기 위해 미군과 접촉하였다는 것은 구체적인 전문들이 남아 있다.

8월 10일 조선총독부는 단파방송으로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것을, 다시 말해 조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되었다. 조선을 버릴 경우에도 그들에게 차선의 선택은 남아 있었다. 조선인들에 대한 무마정책과 점령군인 미군에 대한 접근이었다.

먼저 조선총독부는 종전대책으로 유력한 조선인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는 공작을 추진하였다. 그들이 제일 먼저 선택한 사람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듯 온건우파의 송진우였다. 8월 12일 엔도(遠藤) 정무총감은 니시히로(西廣) 경무국장을 송진우에게 보내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한 송진우의 입장도 유보적이었지만 조선총독부의 송진우에 대한 접촉도 점차 소극적이 되었는데,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가 남진하고 있는 소련군 때문이었다.

8월 14일 밤 11시경 조선총독부는 통신사를 통해 이튿날 일본이 항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총독부의 상황은 더욱 다급해졌고,간부들은 심야 대책회의를 거쳐 조선인정치범 석방 등을 결정하였다. 다음날 오전 6시 엔도 정무총감은 여운형과 적극 교섭하여 조선인에 의한 치안유지를 당부하였다(여운홍 1967, 136쪽; 서중석 1991, 199쪽).

이 자리에서 엔도가 "적어도 17일 오후 2시경까지 소련군이 경성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하고, 이튿날 여운형을 다시 만나 "미국이 조선 남단의 부산-목포 지역을 점령할 것이며, 반도의 나머지는 소련군이 점령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총독부는 미소 양군이 한반도에 진주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그 경계가 38도선이라는 것은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즉 그때까지 조선총독부는 경성에 소련군이 진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좌파인 여운형을 선택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8월 21일 만주 연길에서 소련군과 일본군이 무장해제협정을 맺을 때까지, 조선총독부는 '남부조선'에 대한 별다른 지침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러나 곧 복음이 들려왔다. 8월 20일 가와베(河邊虎四郞) 대장이 마닐라로 가서 맥아더 사령관으로부터 38선이 포함된 [일반명령 1호]를 수교하였고, 8월 21일 그가 귀국한 다음날(8. 22) 일본 내무차관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에게 "조선에서 일본군 무장해제는 38선 이북은 소련이, 이남은 미군이 하게 된다"고 타전하였다(山名酒喜男 1956; 森田芳夫 1964, 154쪽). 즉 총독부가 38선의 존재와 경성 지역이 미군에 의해 점령된다고 하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았던 것은 8월 22일 이후이다.

바로 이때부터 조선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은 무슨 근거에서인지 조선인에게 위탁하던 수세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다시 일본군이 전면에 나서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8월 23일 조선총독부 총독은 국장회의에서 "치안유지는 제국경찰이 담당한다"고 밝혔고, 일본군은 조선인의 협조를 당부하는 전단을 살포하였다(森田芳夫 1963, 19쪽; 샤브쉬나 1996, 92쪽).

이후 조선인의 해방감은 두드러지게 위축되었다. 예컨대 8월 16∼24일 해방 1주일 동안 694건에 해당하던 조선인의 식민통치기구와 신사에 대한 공격이 8월 24일 이후에는 단 한 건도 없었다(森田芳夫 1963, 13∼15쪽). "해방은 16일 하루뿐이었다"는 안재홍의 개탄은 이러한 기막힌 역전의 함축적인 표현이었다(안재홍 1948).

이제 일본은 소련을 이유로 미국과 결합하기 시작하였다. 맥아더사령부가 있는 마닐라와 도쿄 사이에는 많은 메시지가 교환되었으며(트루먼 1968, 452쪽), 경성의 조선주둔군 최고사령관과 미 24군단사령관 사이에도 끊임없이 메시지가 오고 갔다(정병준 1996; HUSAFIK p. 57). 한국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주고받은 이 메시지들은 초기 미군정의 대한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은 일본인"이라던 하지 사령관의 고백(로터바치 1983, 40쪽; 콩트 1988, 34쪽)은 무서운 진실이었다.

8월 22일 38선의 존재와 미군의 주둔을 알고 난 이후 조선총독부는 '군의 무장해제 이후의 치안유지'에 대한 각별한 우려를 본국 내무대신과 육군대신에게 전달하였고(森田芳夫 1963, 18∼19쪽), 이를 토대로 8월 23일 일본대본영은 마닐라의 연합군 최고사령관에게 제1신의 전문을 보냈다.

만주 내몽고 및 북조선에서 일본군대의 무장해제가 진행중인데… 일본 군대와 민간인들이 여러 곳에서 불법적인 총격·약탈·폭행·강간 등으로 희생당하고 있으며 그로 해서 법과 질서의 유지가 거의 불가능하므로, 일본인들이 안전한 장소로 이송될 때까지 우리 군대가 무장을 계속 유지하도록 허가해 달라.

맥아더는 이 전문을 24군단에 바로 전달하지는 않았지만(정병준 1996), 8월 24일 24군단 사령관 하지에게 남한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어느 시기까지 총독부 관리들을 최대한 이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HUSAMGIK vol. 1, p. 27). 같은 날 조선총독부에서는 미군과 사전교섭을 위해 비밀자료 [희망사항] 13개조를 작성하였다(山名酒喜男 1963, 20∼21쪽).

이 13개조는 "미군이 상륙하여 입성할 때 조선인의 폭동화를 저지하는 데 각별한 배려" 운운한 제1조를 비롯하여 조선에 대한 일방적인 적대정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8월 28일 일본 정부 명의로 연합국 사령관에게 제2신을 타전하였다.

북조선상황은 8월 23일 이래 최악의 것으로 돌변했고, 일본거류민의 생명·재산은 임박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이 비참한 상황을 치유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결국 상황은 남조선에까지 확산될 우려가 있다. 그리하여 평화질서 유지와 관련하여 현지 일본당국을 극도의 곤란 속에 빠뜨릴 것이다.

따라서 ① 현지 일본정부 당국은 남조선에서 일본당국으로부터 평화·질서 유지 책임을 떠맡을 연합군의 조속한 상륙을 열렬히 기다리며, ② 연합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진행시키고 일본인의 손에서 행정기구를 이양해 가기 전에 현재의 정확한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 주길 긴급히 희망한다.(번호와 밑줄은 인용자)

"연합군의 조속한 상륙을 열렬히 기다리고 있다"며 적군의 조기 진주를 요청하는 유례 없는 내용은 앞서 언급한 마셜의 증언을 상기시킨다. 이튿날(8. 29) 맥아더는 이 전문을 미 24군단에 타전하였고, 일본정부에는 이 전문에 대한 답변으로 "① 24군단이 남한점령을 위해 9월 7일 상륙하며, ② 조선주둔 일본군사령관이 8월 31일부터 24군단과 무선연락을 취하라"는 [메시지 Z-646]을 보냈다(정병준, 1996).

맥아더의 [메시지 Z-646]에 따라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조선주둔 일본군 최고사령관과 미 24군단사령관 사이에는 적어도 40회 이상의 메시지가 끊임없이 왕복하였다(정병준 1996; HUSAFIK p. 57)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보낸 전문의 제1기조는 조선총독부의 [희망사항] 1조와 마찬가지로 조선인의 폭동화를 우려하는 적대정책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일본군 유지정책이었다.

① 이곳의 평화와 질서를 혼란시킴으로써 상황의 이득을 얻으려고 음모를 꾸미는 공산주의자들과 독립선동가들이 조선인들 사이에 존재한다. 귀부대의 점령·수송을 완료할 때까지 경찰과 헌병을 그대로 유지하는 외에 평화·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일본군이 필요하다 (1945. 9. 1).

② 조선인폭도가 경찰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고, 군수품약탈·파업을 벌이고 있다. 수송과 통신은 두절되거나 연착되었다. 군대가 지원해 주지 않으면 경찰은 무력한 상태이다(1945. 9. 1). (정병준 1996)

결국 이 전문의 희망대로 일본군은 존속하였고, 무력을 보유하는 '행복한 철수'를 보장받았다(森田芳夫 1963, 347∼48, 513쪽).

9월 초 상륙에 앞서 미군은 전단을 살포하였다. 그 전단에는 "사회 안정과 질서를 파괴하는 자 등은 사형을 포함한 엄벌에 처한다"는 억압적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으며, 주민들은 미군이 도대체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 매우 의아해하는 눈길로 전단을 읽어갔다(샤브쉬나 1996, 97∼98쪽). 이것을 처음 본 조선인들은 경악했지만, 일본의 8∼9월 전문들과 조선총독부의 '종전대책'에서 누누이 강조된 내용이었다. 더욱이 조선주둔군 사령관이 미 24군단사령관에게 보낸 전문을 보면 놀랍게도 전단살포 전후 서로 긴밀하게 협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데 효과적일 것으로 보이는 귀하의 메시지들의 일부를 공개하고 싶다 (1945. 9. 2 이후 일자 미상).

② 투하된 귀측의 메시지에 대한 조선인들의 반응은 평화·질서유지란 측면에서 상당히 양호한 결과를 초래했다. 만약 귀하가 미군의 조선점령 완료시까지 일본사령관이 평화와 질서를 유지할 책임을 지니며 또한 약탈·소요·폭동 혹은 파괴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계엄령에 따라 처벌된다는 취지의 전단을 투하함으로써 대중들에게 통지한다면, 우리는 향후로도 이런 유형의 메시지를 반길 것이다(1945. 9. 3).

③ 귀측이 메시지를 투하한 직후 라디오방송을 통해, 또한 중요지점에 포스터를 부착하는 방식으로 남조선 전역에 이를 알릴 의도이다. 조선인·일본인 모두가 이 내용을 보게 되면 평온을 유지할 것으로 확신한다(1945. 9. 3). (정병준 1996)

일본측의 희망대로 9월 7일 미군 선발대가 도착하여 총독부 관리의 긴밀히 회동하여 초기 점령정책의 골격을 잡았다. 특히 선발대장 해리스(C. Harris) 중장은 일본인 총독과 총감을 그대로 두는 통치방법을 제시하여 총독부관리들이 오히려 민심이반을 이유로 조선인 유력자의 활용을 건의할 정도로 미국은 일본에 우호적이었다(도진순 1997, 32쪽).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 아무것도 모르는 조선군중들은 화환과 기를 들고 환영하였다. 이들에게 일본군이 발포하여 조선인 보안대원 2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에 의해 이 사건에 대한 재판이 열렸으나, 조선인들이 '환영금지' '외출금지'를 어겼기 때문에 일본 경찰대원의 발포가 합법이라고 판결하였다.

조선인측은 보안대원은 경찰의 협력단체라며 재심을 요구하였지만, 미군은 이를 기각하였다(森田芳夫 1963, 274∼75쪽; Gosfield & Hurwood 1969, pp. 92∼93). 이처럼 [희망사항] 제1조와 전문들의 제1 기조로써 강조한 바 "미군 상륙시 조선인의 폭동화"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군의 발포에 의해 실현되었다.

9월 9일 오후 4시 조선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왔을 때, "일장기는 내렸지만 일본정권은 보존되었다"고 지적하였다({경성일보} 1945. 9. 10). 냉전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식민이 재생하고 있었다는 것은 한반도 분단사를 이해하는데 참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친일파'가 소련과 북한에 맞서는 '우익'의 이름으로 등장하여 단정을 추진하였다.

6. 맺음말

해방 조선에서 이러한 불행의 연속은 냉전이란 이름으로 일본이 미군과 결합함으로써 만들어진 구조의 반영이었다. 38선은 결국 남북의 분단정부 수립으로 귀결되었는데, 분단정부 수립 구상의 씨앗이 뿌려진 곳도 일본 도쿄였다.

1945년 10월 13∼15일 맥아더, 하지, 이승만은 도쿄에서 극비리에 회동하여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한 반대와 남한만의 과도정부 수립을 협의하였다. 38선에 대한 비밀증언을 남긴 바 있는 마셜 국무장관은 1947년 1월 29일 맥아더의 건의를 받아들여 "남한만으로 한정된 정부(definite Government)를 조직하여 남한경제를 일본에 연결시키는 계획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한반도의 분단은 공공연하게 세계정치의 표면으로 부상하였으며, 조선에서 해방은 분단으로 가는 막간극으로 변질되었다. 한반도의 분단에는 일본이 있었으며, 이것은 분단이 단지 냉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식민과 결합된 것이라는 징표이다. 분단을 반대하던 진영의 구호가 '통일' '독립'으로 짝을 이룬 것은 이러한 연유였다.

한반도에서 분단은 산하를 갈랐을 뿐만 아니라 민족과 국가를 갈라놓았으며 결국은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분단개입은 필연적으로 전쟁개입으로 이어졌다. '한국전쟁'으로 일본경제는 역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더욱이 그것은 단지 지정학적 이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의 피를 먹고 자란 것이었다.

지금도 일본은 한반도 전쟁발발시 가장 중요한 기지로 준비되고 있으며, 그 개입 정도는 5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가 될 것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전쟁은 반세기 전과는 달리 일본열도의 재부흥이 아니라 동북아의 대재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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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순

도진순 교수(42)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 석ㆍ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전 월간 『말』 『한국사연구』 편집위원을 역임했고 현재는 창원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 『한국현대사』 『한국민족주의와 남북관계』,『분단의 내일 통일의 역사』(당대) 등이 있다.

출전 : 웹진 한국현대사-다시 읽는 현대사-38선 누가 그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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