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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22 (월)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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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040      
[현대] 김정일 (브리)
김정일 金正日 1942. 2. 16 백두산 밀영 또는 러시아-만주 국경지대∼ .

조선노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

북한의 최고지도자.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상무위원, 비서국 비서, 군사위원회 군사위원, 중앙인민위원회 산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등의 직책을 거쳐 1992년 4월 김일성 80회 생일을 맞아 북한군 원수로 최고지휘권을 인수한 데 이어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후 '최고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1997년 10월 조선노동당 총비서에 취임했다.

1998년 9월 '나라의 정치·군사·경제 역량의 총체를 통솔·지휘하는 국가 최고 직책'으로 규정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의 지위를 대내외에 과시했다.

항일무장투쟁 당시인 1942년 2월 16일 항일유격대를 지휘한 김일성과 유격대원 김정숙(金貞淑) 사이에서 태어났다. 8·15해방 후 부모를 따라 입국했으며, 1948년 평양의 남산학교 인민반에 입학했다. 6·25전쟁 중에는 만경대 혁명자유자녀학원에 편입했으며, 그후 삼석인민학교를 거쳐 6·25전쟁 후에 평양 제4인민학교를 졸업했다.

1954년 평양 남산고급중학교에 입학하여 1960년 졸업했다. 남산고급중학시절 이 학교의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위원장은 교사)으로 활동했다. 남산고급중학 졸업 후 당시 외국유학의 풍조 속에서 국내 대학으로 진학을 선택하여 1960년 9월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64년 3월 졸업했다.

졸업논문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군(郡)의 위치와 역할〉이었다. 대학 졸업 후 곧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 배속되어 주로 당의 조직·선전 부문의 일을 담당했다.

조선노동당에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1973년부터 전개된 3대혁명 소조운동을 조직·지도하고 1975년에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을 발기하는 등 새로운 대중운동을 주도하면서 당내의 기반을 넓히는 한편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973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비서국 비서로 선임되었으며, 이듬해인 1974년 2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국 정치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조선노동당의 실권자로서 북한사회 전반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후계자로서의 김정일의 위상이 공적으로 확인된 것은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6차 당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최초로 대중 앞에 자신의 모습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의 당내 서열은 4위였지만 김일성을 빼고는 유일하게 당내 3대 권력기구라 할 수 있는 정치국(상무위원회 상무위원)·비서국(비서)·군사위원회(군사위원)에 모두 참여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2인자의 자리를 굳혔다.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가 끝난 직후 북한의 언론·출판물들에 의해서 '영광스러운 당중앙'이라는 익명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나 곧 북한의 언론·출판물들이 그를 '친애하는 지도자'로 호칭함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공식화되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권력승계작업이 본격화되자 자신의 활동범위를 더욱 확대시켜나갔다. 이때부터 김일성을 대신해서 많은 산업현장과 교육현장, 군대 등을 직접 지도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발언은 북한사회에서 김일성의 발언 못지 않은 무게를 지닌 교시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1980년 그의 활동은 김일성의 역할을 승계하면서 모든 분야에 걸쳐서 나타났으나 조선노동당에서와는 달리 정부기관에서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직책도 맡지 않고 있었다. 이에 그의 모든 기관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기 위해 1990년 5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에서 그는 북한의 최고 지도기관이라고 하는 중앙인민위원회 산하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991년 12월 24일 조선노동당 제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군최고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또한 1992년 4월 15일 김일성은 자신의 80회 생일을 맞아 "우리는 이미 김정일에 의해 모든 일이 운영되고 있다"고 밝혔으며, 같은 달 21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가 공동명의로 김정일에게 원수(元帥) 칭호를 수여했다.

이로써 사실상의 권력승계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의 권력승계 과정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와 체계화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주체사상이 북한사회의 유일사상으로 제시되는 1960년대말부터 이미 주체사상의 유일사상화작업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70년대 이후에는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주체사상에 대하여〉(1982)를 비롯한 많은 주체사상관련 논문을 낸 것으로 북한은 발표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김일성의 후계자로서 그만이 주체사상을 해석할 수 있는 배타적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북한관계 전문가들은 풀이하고 있다.

김일성 사후 3년 3개월 만인 1997년 10월 8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및 중앙군사위원회의 추대를 받은 형식으로 당 총비서직을 승계함으로써 '김정일 시대'를 연 그는, 잇단 가뭄으로 인한 식량난과 경제정책 실패 및 대외적 고립으로 인한 경제난 등의 난제를 수습해야 할 급박한 처지에 놓였다.

김정일이 '최고 지도자'로서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래 북·미관계와 남·북관계에 변화의 조짐이 일었다. 북·미관계는 1994년 10월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 회담에서 북한의 핵개발 포기를 조건으로 한국 표준형 경수로 지원 및 대체에너지 제공을 추진하기 위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설립 합의와 1995년 3월 KEDO 출범, 1998년 7월 북-미 미사일회담 재개 등으로 진전을 보였다.

또한 1994년 7월 8일 사망한 김일성 주석 조문을 둘러싸고 남한에서 벌어진 이른바 '조문파동'과 당시 김영삼 정부의 대북 강경책 등으로 크게 냉각되었던 남북관계도 1998년 2월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대북 연착륙 정책 및 '정경분리 정책'과 맞물려 새 국면을 맞이해,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고 그 결과로 5개 항의 6·15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그는 예술방면에도 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1970년대 초반 〈피바다〉·〈꽃 파는 처녀〉·〈한 자위단원의 운명〉 등의 혁명가극 제작을 주도했다고 하며, 1973년 김정일이 직접 〈영화예술론〉을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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