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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5 (목) 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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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85      
[근대] 스크랜튼 답사기 (이덕주)
잊혀진 기억 속의 스크랜튼을 찾아서

-2002년 여름 일본 도쿄와 고베 답사기-

이덕주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스크랜튼'에만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동안 일본 여행을 서너 번 다녀왔지만 모두 세미나 혹은 공적인 일로 다녀오는 것이어서 공적인 일정이 끝나거나 도중에 짬을 내서 개인적으로 가 보고 싶은 곳을 들렀지만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고 얻은 결과도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면서 '방학'이라는 특수한 휴식 공간을 가질 수 있어 이번에 맘먹고 일본 여행을 계획하였습니다.

여행 준비

이번 여행의 목적은 1917년부터 1922년 사이에 이루어진 스크랜튼의 일본 행적 찾기였습니다. 스크랜튼(William Benton Scranton, 1856-1922)은 1885년 5월 한국 선교사로 내한해서 시병원과  아현, 상동, 동대문교회 등을 설립하고 전덕기를 비롯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길러냈습니다.

그러나 1907년 '친일파' 해리스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함께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한 후 성공회로 교직을 옮긴 후 서울과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 간 후 1922년 별세하였습니다.

오랫동안 잊혀 왔던 스크랜튼의 묘지는 1992년 고베에 있는 청년학생센터의 히다(飛田雄一)의 도움으로 당시 동지사에서 공부하고 있던 서정민 선생에 의해 처음 소재가 확인 된 후, 재일대한기독교회 관계자들과 감리교의 윤춘병 감독과 아현교회 및 상동교회 교인들이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한국인들의 순례 장소가 되었고 1999년 6월에는 아현교회에서 묘지에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민중 선교'의 맥을 창시한 대표적인 선교사였던 스크랜튼의 생애를 정리하는 중에 항상 문제되는 것은 1907년 감리교 선교사직을 사임한 이후 행적이었습니다. 그 중에도 일본 고베로 건너 간 이후 별세하기까지 5년간의 마지막 행적이 의문투성이였습니다.

왜 일본 고베로 갔는가? 일본에 가서 무슨 일을 했는가? 그동안 이 시기 스크랜튼의 행적을 찾기 위해 일본에 있는 친구나 학자들에게 여러 차례 자료 문의를 해 보았으나 별로 효과가 없었으며 돌아온 대답은 "직접 와서 찾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일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몇 가지 준비를 했습니다. 스크랜튼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고베 상황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찾았습니다. 먼저 외국인인 스크랜튼의 행적을 일본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이나 잡지에서 찾기로 했습니다.

백오인사건(1911년)에 관한 자료를 보다가 고베에서 발행된 영자 신문, Kobe Chronicle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삼일운동 관계 자료를 보다가 도쿄에서 발행된 Japan Advertiser이란 영자 신문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두 종류 영자 신문에 스크랜튼의 별세에 관한 기록이 나올 가능성이 있기에 이 신문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다행이 도쿄 니마츠(二松)대학에 계신 세리가와(芹川哲世) 교수께서 두 종류 신문이 도쿄 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도쿄부터 먼저 가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스크랜튼이 1907년 이후 성공회 교인으로 옮겼기에 고베에서도 성공회에 출석했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가 별세하였다면 당연히 고베의 성공회 성당에서 장례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베에서 오래된 성공회를 찾아 보기로 했습니다. 매년 발행되는 일본 기독교 연감을 찾았더니 고베에는 1876년에 설립된 성미가엘교회가 제일 오래된 성공회 교회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선 그 교회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일본 여행은 도쿄를 거쳐 고베를 들르는 것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시간이 되면 도쿄에 있는 성공회 계통 대학인 릿교(立敎)대학 자료실을 찾아 그곳에서 고베 성공회 관련 자료를 찾아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은 스크랜튼 관련 기사

이번 일본 여행에는 한국교회사문헌연구원의 심한보(沈漢輔) 선생이 동행했습니다. 오랜 친구이자 맘이 통하기에 지루한 여행을 가볍게 할 겸 심 선생님께 동행을 요청했는데, 언제나처럼 흔쾌히 동의해 주셨습니다. 경비는 최소한으로 하기 위해 도쿄에선 민박을 하기로 하고 고베에선 우리 학교 대선배이신 김덕화(金德化) 목사님께서 시무하고 계신 고베동부교회 게스트룸에 묵기로 했습니다. 민중 선교사를 찾아 순례하는 여행에 호화스런 호텔에 묵을 수는 없지요. 게다가 일본 물가가 좀 비쌉니까?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첫째 날, 8월 11일, 주일 오후 5시 비행기로 출발했습니다. 나리따 공항까지 마중나온 세리가와 교수의 안내로 지하철 가나메죠(要町)에 있는 민박집 '국제회관'에 들었습니다. 문경에 살다가 19살 때 결혼해서 남편 따라 일본에 와 갖은 고생을 한 끝에 빌딩을 마련하게 된 재일동포 할머니께서 운영하는 민박집이었습니다. 길가 방을 주어 시끄러웠지만 견딜 만 했습니다.

둘째 날, 8월 12일 아침부터 서둘러 지하철로 나가타죠(永田町)에 내려 국회도서관으로 갔습니다. 세리가와 교수가 친절하게 안내와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신관 4층에 있는 신문 잡지 자료실로 갔습니다. 소장 자료 목록에서 Japan Chronicle(Kobe Chronicle의 개제)와 Japan Advertiser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귀중 자료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2개 롤 이상을 동시에 열람 청구할 수 없고 복사도 1회 10매 이상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함께 간 사람이 셋이기에 6개 롤을 청구 할 수 있어 우선 스크랜튼이 고베에 왔다는 기사가 실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Japan Chronicle 1917년도 치를 보기로 하고 두 달씩 되어 있는 Japan Chronicle 마이크로필름을 3월부터 12월까지 6개 롤을 청구했습니다. 그걸 마이크로필름 리더기 앞에 갖다 놓고 보려니 앞이 캄캄했습니다. 양도 양이려니와 깨알 같은 신문 기사에서 'Scranton' 활자를 찾아내기란 말 그대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동전 찾기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심호흡을 하고 "도와주세요." 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손이 가는대로 마이크로필름 롤을 잡았는데 1917년 11월부터 12월까지 내용이 담긴 롤이었습니다. 필름을 걸고 돌리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매일 8면씩 발행했던 신문 기사를 읽어나갔습니다. 처음엔 일부터 천천히 돌리면서 읽어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천천히 읽으면서 자료와 친숙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기사가, 어떤 식으로 실렸는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신문에 익숙해지면서 필름 돌리는 속도가 빨라졌어요. 내 관심은 매일같이 신문 8면에 나오는 호텔 투숙객 명단이었습니다. 스크랜튼이 고베에 처음 왔을 땐 당연히 호텔에 묵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당시 고베에 외국인이 투숙할 수 있는 호텔은 두 군데, 오리엔탈(Oriental)호텔과 토아(Tor)호텔이었습니다. 신문은 매일 이 두 호텔의 투숙객 명단을 수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필름을 돌리던 중 어느 순간 'Scranton Dr & Mrs.' 라는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어요. 토아호텔 투숙객 명단 속에 들어 있는 스크랜튼 부부의 이름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 순간의 기쁨과 놀라움이란! 이름을 처음 발견한 신문의 앞 뒤 날짜를 찾아 가며 확인한 결과 스크랜튼 부부는 1917년 11월 8일부터 16일까지 10일 동안 토아호텔에 머물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1월 18일 이후 투숙객 명단에서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동안 머물 집을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지요. 이것으로 스크랜튼이 고베에 온 정확한 날짜(1917년 11월 8일)을 알게 된 것입니다.

도착한 날짜를 확인 한 다음에는 그의 별세와 관련된 기사를 찾아야 했습니다.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신문을 다 보려면 1주일을 보아도 힘들 것입니다. 빌려 온 필름을 반납하고 스크랜튼이 별세한 1922년 3월 치 Japan Chronicle과 Japan Advertiser를 청구하면서 같은 시기 고베에서 발행된 일본어 <神戶新聞>도 청구했습니다. 혹시 일본 신문에도 별세 기사가 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지요.

기대했던 대로 Japan Chronicle에서 그의 별세 및 장례식과 관련된 기사를 3건 찾아 있습니다. 그리고  Japan Advertiser에서도 별세 기사와 함께 그의 말년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神戶新聞>에서는 아무런 기사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Japan Chronicle과 Japan Advertiser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스크랜튼이 고베에 온 후에 고베의 외국인촌으로 통하는 야마모토도리(山本通) 니죠메(二丁目)에 살면서 미국 영사관 고문 의사로 일하는 한편, 고베에 있는 외국인 전용병원(International Hospital of Kobe)도 자문으로 돕다가 별세하기 1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몸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폐렴으로 2주간 고생하다가 별세하여 그가 출석하던 올세인츠교회(All Saint's Church)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가츠가노(春日野) 외국인 묘지에 매장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족으로는 부인과 네 딸이 있었는데 딸들은 모두 외교관 부인이 되어 첫째는 중국 봉천의 영국 영사 포터(Porter) 부인, 둘째는 일본 나가사키의 미국 영사 커티스(Curtice) 부인, 셋째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영국 영사 패튼(Paton) 부인, 넷째는 대만 대북의 영국 영사 버틀러(Butler) 부인이 되었습니다. 장례식엔 부인과 과부가 된 둘째 딸만 참석했으며 장례 미사는 올세인츠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브라이들(G.A. Bridle) 신부가 집전했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집전했던 브라이들 신부는 '부재열'이란 한국 이름으로 알려 진 영국성공회의 한국 선교사였습니다. 1897년 내한해서 1900년 서울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서울과 수원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한국을 떠났는데, 그가 일본 고베로 가서 올세인츠교회를 담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써 브라이들과 스크랜튼은 이미 한국에 있을 때 같은 성공회 교인으로 교분을 나누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런 관계로 스크랜튼의 장례식을 브라이들 신부가 집전한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올세인츠교회는 영국성공회에서 1898년 고베 거주 외국인을 위해 설립된 교회입니다.

이로써 고베에 가서 확인 할 내용이 확정된 셈입니다. 스크랜튼이 고베에 와서 처음 묵었던 토아호텔, 그가 살았다는 야마모토도리 니죠메, 그가 출석했고, 장례식이 거행되었다는 올세인츠교회, 그가 근무했던 고베 외국인병원 등입니다. 무엇보다 그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을 찾았으면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신문 기사는 그가 살았던 동네 이름만 밝혀 줄 뿐 번지가 없어 기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국회 도서관에서 의외의 성과를 얻은 후 남은 시간은 참고 열람실에서 한국 교회사 관련 도서 목록을 확인하는 것으로 페관 시간을 맞추었습니다. 특히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는 '동양문고'(東洋文庫) 자료 목록에는 한국 초기 교회 관련 자료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다음 도쿄 방문 때 찾아 볼 곳으로 마음에 새겨 두었습니다.

이수정이 세례받은 로게츠죠교회를 찾아서

둘째 날, 8월 13일, 본래 이 날은 성공회 계통의 릿교(立敎)대학 도서관과 자료실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 소장된 일본 성공회 관련 자료에서 혹시 스크랜튼 관련 자료가 나올까 하는 기대감 때문입니다. 다행히 릿교대학은 숙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케부쿠로(池袋)에 있어 걸어서 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해 보니 행정 직원들이 휴가를 떠나 도서관을 볼 수 없었습니다.

역사 자료를 따로 보관하고 있는 릿교대학 니자시(新座市) 분교 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릿교대학 자료 확인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신 지난 일본 여행 때(2000년 8월) 미완의 것으로 남겨 두었던 로게츠죠(露月町) 교회 자리를 찾기로 하였습니다.

로게츠죠교회는 1883년 5월, 그 유명한 이수정(李樹庭)이 세례 받은 교회입니다. 그 동안 이수정의 행적과 관련하여 한국 교인들이 도라노몬(虎之門)에 있는 시바(芝)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이 교회가 로게츠죠교회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수정이 세례 받은 그 교회는 아닙니다.

시바교회는 1874년 도쿄에 처음 설립된 제일장로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 교회가 1876년 로게츠죠교회와 긴자(銀座)교회로 나뉘었고 그 후 로게츠죠교회는 1879년 설립된 또 다른 교회 도라몬교회와 1884년 7월 합해지면서 오늘의 시바교회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수정이 출석하고 세례를 받은 교회는 합해지기 직전의 로게츠죠교회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로게츠죠교회의 위치를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없었습니다. 지금은 로게츠죠란 지명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 여행 때 1880년대 도쿄 지도를 수록한 책자를 구해 지금 신바시역(新橋驛) 근처에 로게츠죠라는 동네가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첫째 날 저녁, 시내 서점에 들러 두꺼운 <東京 古地名辭典>을 (너무 비싸 살 염두는 못 내고) 펴서 '로게츠죠' 항목을 펼쳐 보았더니, "지금의 미나쿠(港區) 히가리신바시(東新橋) 니죠메(二丁目)와 신바시(新橋) 시죠메(四丁目), 고죠메(五丁目) 일대가 료게츠죠였다."는 기록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로게츠죠 교회가 있던 동네는 확인한 셈입니다.

로게츠죠교회 자리를 찾는 일은 세리가와 교수보다 제가 앞장을 섰습니다. 지도를 펼쳐 들고(답사에 지도는 필수입니다. 어느 곳을 가든 그 곳 현지 지도를 구입하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일입니다. 번지까지 나오는 자세한 지도가 좋습니다.) 신바시역 부근을 걸었습니다.

로게츠죠라 불렸던 동네 일대는 천황의 별궁인 하마리규(浜離宮)에서 멀지 않은 해안가에 있었는데 지금은 빌딩과 상점 건물들이 들어 차 옛 모습을 보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히가리신바시 니죠메로부터 신바시 시죠메, 고죠메 일대를 걸으면서 이수정이 걸어 다녔던 길의 풍경을 상상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온 김에 시바교회를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시바교회는 일본의 대표적인 장로교 계통 교회의 하나로 일제 말기 한국 교회에는 부정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도미타미츠루(富田滿) 목사가 담임했던 곳이기도 합니다. 미리 연락을 취하지 않았기에 교회 문이 닫혀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 교회 문은 열려 있었고 담임자인 야마모토(山本尙忠) 목사까지 있어 불청객을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부임한 지 4개월 밖에 도지 않은 목사님은 오히려 우리한테서 이수정에 관한 야기를 흥미롭게 들었습니다. 그에게서 로게츠죠교회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임이 있었는지 마침 교회에 와 있던 노인 장로님 한 분이 합석했는데 이 분은 2대째 시바 교회를 섬겨 오신 분으로 어려서 어른들에게 로게츠죠라는 마을 이름을 들었다면서 그 곳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분이 알려 준 곳은 신바시 산죠메(三丁目) 16번지 일대였습니다. 신바시역에서 멀지 않은 예스런 골목길 안에 있는 조그만 동네였습니다. 아까 본 빌딩 거리보다는 한층 로게츠죠 교회가 있었음직한 동네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정확치는 않습니다. 장로님 말씀대로 미나쿠(港區) 구청 자료실에 가서 1880년대 이 지역 관련 자료를 찾아보는 것 외엔 로게츠죠 교회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내기란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전보다는 더욱 가깝게 로게츠죠 교회에 다가 간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기로 작정하면 그것은 욕심이지요.

그 날 오후 늦은 시간은 간다(神田)에 있는 고서점을 돌았습니다. 특히 기독교 관계 고서만 취급하는 유아이(友愛)서점을 방문해서 필요한 책들을 골랐습니다. 그런데 우연찮게도 거기서 고베에 가면 방문하려고 했던 성미가엘교회의 <백년사 이야기>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책에서 스크랜튼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올세인츠교회에 관한 기록을 읽었습니다. 올세인츠교회는 영국 성공회에서 1876년 고베 거주하는 영국인들을 위한 외국인 교회로 설립하였다가 1945년 폐쇄되었고 그 기능이 성미가엘교회로 흡수되었다는 기록이었습니다. 그리고 올세인츠교회가 지금 고베 세무서 자리에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음은 고베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식사는 심한보 선생님의 소개로 알게 된 고려서점의 박광수(朴光洙) 사장님과 함께 하였는데, 이 분은 평북 정주 출신으로 해방 직후 월남하여 이 곳 일본에서 한국학 전문 서점인 고려서점을 창업하여 일본에 한국 관련 자료를 보급하고 역으로 일본에 있는 한국 관련 자료를 국내로 보급해 오신 문화 사업가였습니다. 이 분 서점과 자료실에서 중국과 북한에서 발행된 서적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참으로 좋았습니다.

아오야마학원 자료실에서

셋째 날, 8월 14일, 도쿄에서 마지막 날인데 이 날은 감리교회 자료가 있다는 아오야마(靑山)학원 자료센터를 찾아갔습니다. 시부야(涉谷)에 있는 아오야마학원은 새 건물이 몇 개 들어섰지만 일제시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옛 본관 앞에는 한국 감리교회사와 관계 깊은 매클레이(R.S. Maclay)와 가우처(Goucher) 기념 부조가 서 있었고 그 오른 편으로 박물관을 겸한 역사 자료실이 있었습니다.

하루 전에 연락을 해 놓았기에 직원들이 친절하게 맞이해 주었고 귀중 자료실을 개방해 주어 필요한 자료를 복사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동안 보고 싶었던 일본 감리교회 연회록과 총회록, 일본 주재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선교 보고서(마이크로필름), 일본에서 간행된 기독교 잡지 <護敎> <六合雜誌> 원본들과 영문 선교 잡지 를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 동안 미국에 갈 때 마다 보려고 했던 감리교 계통 세계 선교 잡지, 를 만난 순간 감격했습니다. 우선 일본 감리교 1회 총회록(1884년)에서 일본 교회가 매클레이의 요청에 따라 한국 감리교 선교 개척을 위해 선교비를 지급하기로 결의한 내용이 실린 부분을 읽을 수 있었고 에서 한국 관련 기사를 찾아 복사하였습니다.

동행했던 심한보 선생은 자료 진열장에서 1906년 일본 감리교회의 한국 전도에 관련한 귀중 문서를 찾아 내 복사하였습니다. 그 자료에 의하면 일본 감리교회는 1907년에 이미 서울과 평양에 교회를 건립하고 일본인 목사를 파송하여 활발한 전도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한국 안에서 이루어진 일본인 선교 역사)도 한국 교회사에서 연구할 내용입니다. 또 개인적으로 전영택 목사를 연구하고 있는 세리가와 교수는 전영택이 아오야마 졸업생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역대 졸업식 순서지를 찾아 거기 실린 한국인 졸업자 명단을 적어 나갔습니다. 전영택 외에 김재준, 김정준, 김동명 등 낯익은 이름들이 보였습니다.

그 날 우리 셋은 서로 협력하며 5백 매 이상을 복사하였습니다. 시간이 없어 자료실을 충분히 보지 못했지만 3일 정도 시간을 내서 찬찬히 살펴보면 한국 교회사와 관련하여 더욱 재미있는 자료들이 발견될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훗날을 기약하고 아쉬운 발걸음으로 나왔습니다.

고베 로코산의 스크랜튼 묘지

넷째 날, 8월 15일, 광복절에 아침 일찍 신간센(新幹線) 열차를 타고 고베로 옮겼습니다.  처음 생각은 고베의 청년학생센터에 숙소를 정하고 한국말을 잘 하는 그 곳 히다 관장의 도움을 받아 고베 지역 답사를 할 계획이었는데, 우리가 고베를 방문하는 기간에 일본 최대 명절인 '오봉'(우리의 추석 같은 절기)이어서 청년학생센터가 문을 닫고 히다 관장 역시 중국 남경에 출장을 가는 관계로 고베동부교회에 숙박 요청을 하였던 것입니다.

다행히 고베동부교회 김덕화 목사님께서 "내 집처럼 생각하고 편히 지내라." 허락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역까지 마중 나와 주셨고 지은 지 3년도 안된 동부교회 게스트룸은 편하고 깨끗했습니다.

교회는 1995년 고베대지진 이후 이 곳 히쿠도리(日暮通) 록조메(六丁目)로 옮겨 새 예배당을 지었는데 교회가 위치한 곳은 1920-30년대 그 유명한 가가와도요히코(賀川豊彦)가 빈민 선교를 실시했던 개울가였습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가가와 기념관이 있다니 시간을 내서라도 한 번 들러볼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에 곧바로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고베에서 해운업을 하시는 조순원(趙舜元) 장로님께서 친절하게 안내 겸 통역으로 동행해 주셨습니다. 우선 로코산(六甲山)에 있는 외국인공원묘지의 스크랜튼의 무덤을 찾아가 헌화하고 그 옆에, 1920-30년대 한국에서 화동한 바 있는 영(L.L. Young) 선교사의 무덤도 찾아 묵념했습니다. 본래 이 분들은 고베 시내 가츠가노 공원 묘지에 묻혔었는데 고베 도시를 개발하면서 1961년 이 곳 로코산 꼭대기로 옮겨 온 것입니다.

묘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스크랜튼이 살았다는 야마모토도리 니죠메와 올세인츠교회가 있었다는 고베세무소를 둘러보고 올세인츠교회 역사를 흡수한 성미가엘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성미가엘교회에서 혹시 올세인츠교회 교적부 같은 것이 남아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고베 방문의 최종 목적은 스크랜튼이 살았던 집터를 확인하는 것이었는데 교적부에 그런 기록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성미가엘교회 신부님은 없고 부인이 나와 우리 방문 목적을 알고는 후에 교회 자료를 찾아 본 후 있으면 연락을 주겠노라는 말을 듣고 돌아왔습니다. 교회 옆에 고베교구 사무실이 있었지만 문이 닫혀 있었습니다. 비록 원하는 자료를 얻지는 못했지만 스크랜튼이 살았던 동네를 다닌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웠습니다.

스크랜튼이 살던 동네, 다니던 교회

다섯째 날, 8월 16일 고베동부교회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한국 교회의 대표적 토착 신앙의 하나인 새벽기도회는 이 곳에도 여지없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게스트룸에 묵는 손님은 새벽기도회에 간증을 해야 한다는 불문율에 따라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이 날 안내는 교토에 있는 김도형 목사가 와서 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김도형 목사는 금년 봄에 우리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고 일본 선교사로 파송받아 막 선교사 생활을 시작한 새내기 목사였습니다. 산노미야(三宮) 역에서 만난 김도형 목사와 박시내 부부는 참으로 건강해 보였습니다. 이 둘을 데리고 제일 먼저 로코산 스크랜튼 묘지로 갔습니다. 어제 갔던 곳이지만 새내기 선교사를 스크랜튼에게 안내하여 '선교사 신고식'을 치르려는 의도였습니다.

묘지에서 내려와 본격적인 답사에 들어갔습니다. 처음 찾을 곳은 스크랜튼이 1917년 11월 고베에 도착해서 처음 10일간 묵은 '토아호텔'(Tor Hotel)이었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그 호텔 자리를 찾기 위해 비슷한 이름의 '토아로드호텔'(Tor Road Hotel)을 찾아 갔습니다.

토아로드는 고베 번화가인 산노미야역에서 외국인촌으로 알려진 기타노(北耶)에 이르는 2차선 도로를 의미하는데 길 양쪽으로 이국풍 건물들이 즐비하여 고베에서 제일 유명한 관광 명소의 하나입니다. 토아로드 길 가에 있는 토아로드호텔을 찾아 직원에게 문의한 결과 지금 호텔은 1990년에 지은 것이고 옛날 있던 토아호텔은 지금 외국인구락부로 바뀌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기타노에 있는 외국인 구락부를 찾아 갔습니다. 정문에는 고베클럽이란 간판이 붙었고 지금도 외국인만 출입할 수 있는 외국인 전용 호텔 겸 휴양소였습니다. 일본인이 아닌 우리는 당당하게 그곳에 들어갔고 그 곳 안내 직원을 통해 "옛 날 토아호텔이 바로 이곳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클럽 안내 책자를 보여 주는데 거기에 따르면 이 외교 클럽은 1869년 토아호텔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가 1942년 옛 건물이 불 타 없어졌고, 전쟁 후(1945년)에는 미군 소유가 되어 외국인 클럽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스크랜튼이 처음 묵었던 호텔이 바로 이 곳이었습니다. 비록 건물은 그 때 것이 아니지만 그가 보았고 만졌을 고목들이 여기 저기 있어 그 곳에서 적지 않은 흥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호텔을 나오니 바로 멀지 않은 곳에 그가 살았던 야마모토도리 니죠메 일대가 보였습니다. 외국인 집단촌에 어울리는 이국풍 건물들이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번지를 알 수 없기에 정확한 집터를 찾을 수는 없고 다만 스크랜튼이 걸어 다녔을 니죠메(二丁目), 산죠메(三丁目) 일대를 걸어 다녔는데, 35도가 넘는 뜨거운 여름 날씨에 뒤를 따라 오는 일행들이 피곤해 보였습니다.

여기 저기 다니며 골목과 거리 모퉁이를 촬영하다가 야마모토도리 산죠메 5번지에 있는 '니진칸'(異人館)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벨기에 사람 슈에케가 1896년 지어 지금도 외국인이 살고 있는 집인데 한 사람당 5백엔(우리나라 돈으로 5천원 정도)이란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갈 필요까지 있느냐는 심한보 선생의 무언의 항의를 무시하고 들어갔습니다.

관람객들에게 개방하고 있는 1층엔 당시 서양인들의 생활 모습을 보여 주는 식탁과 거실, 부엌과 정원이 옛 모습 그대로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 곳 정원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이런 집에 살았을 스크랜튼 가족을 떠올렸습니다. 스크랜튼의 집도 이 곳에서 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니진칸 정원 벤치에 앉아 잠시 명상할 때 어디선가 그분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이제 왔는가? 한국의 친구여."

니진칸을 나와 스크랜튼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던 올세인츠교회 터를 찾아 갔습니다. 교회는 없어졌지만 그 자리는 지금 고베 세무서가 자리잡고 있는 나가야마테도리(中山手通) 산죠메(三丁目), 이케다(生田) 경찰서와 이케다(生田) 신사와 붙어 있는 큰 길가였습니다. 길 건너편에는 고베 한국영사관이 있었습니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

오전 답사를 마치고 서둘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심한보 선생님과 친한 오사카의 이청일(李淸一) 목사님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중심 지도자의 한 분으로 개인적으로는 돌아가신 교회사가 오윤태(吳允台) 목사님의 사위이기도 한데 재일대한기독교회 역사 정리를 위해 노력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 분과 2시간 동안 교회사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분께서 "일본 교회사에서는 재일 한국인 교회 역사를 비중있게 다루어 주고 있는데 한국 교회사에서 재일대한기독교회 역사가 너무 소홀하게 취급되고 있어 섭섭하다."는 말씀을 듣고 동의하면서 앞으로 한국 교회사는 한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한국인들의 교회 역사만 다룰 것이 아니라 일본과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이루어진 한인 교포들의 교회 역사와 함께 한국 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외국인 선교 역사도 다루어야 할 것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시 서둘러 교토로 갔습니다. 김도형 목사 부부는 우리 일행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싶어 했지만 쿄토에 있는 이다이스미(井田泉) 신부를 만나는 일이 더 급했습니다. 릿교대학과 성공회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던 이다 신부님은 12년 전 도쿄 도미사카센터에서 있었던 사와마사히코 추모 기념세미나 때 나의 논문 발표에 통역을 해 주신 분입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4년 전 우울증으로 학교를 떠나 고생을 하시다가 작년부터 교토 부활교회에 부임하여 목회를 하고 계신 분입니다. 교회로 찾아 가니 마침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주재하고 계셨습니다.

8월 한 달 동안 매주 금요일 저녁에 세계 평화를 위한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는데, 우리 일행이 방문했던 8월 16일 저녁 기도회에는 비록 30여 명 정도만 참석했지만 자료집에는 주기철 목사에 관한 신문 기사가 실려 있었고, 군국주의화되어 가는 일본의 현재 상황과 이라크를 침공하려는 미국의 무력 도발을 우려하며 인류의 참된 평화를 기원하는 진지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직 완전히 건강이 회복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기도회를 인도하는 이다 신부님의 모습에서 성직자의 경건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도회가 끝난 후 이다 신부님은 나를 회중 앞으로 끌어 내 간단한 인사말을 하도록 시간을 주었습니다. 나는 "1945년 8월 15일, 같은 날임에도 일본과 한국, 두 민족에겐 전혀 다른 날이었다. 한 민족은 땅을 치며 울었고 한 민족은 춤추며 기뻐했다. 그 후 반세기 동안 두 민족 사이에 갈등과 반목의 세월이 흘렀다. 아직 일본과 한국 사이에 진정한 화해와 편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주기철 목사처럼, 구ㅡ리고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처럼,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일본과 한국에 있는 이상, 전쟁과 폭력을 이길 참된 평화의 날이 올 것이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기도회를 마치고 친교 시간에, 나이 팔십이 넘은 일본 부인이 저를 찾아 와 인사를 하면서 "나도 15세 때 정신대에 끌려 나가 북해도 공장에서 이했는데, 그 때 그 곳에서 1백여 명 조선여성들과 함께 생활했다. 이름은 기억할 수 없지만 8월 15일 바로 그 날, 당신 말처럼 나와 같은 방을 쓰던 그 조선 처녀는 저고리(일본인 할머니는 정확하게 일본말로 '조고리'리고 발음했습니다)를 꺼내 입고 춤을 추며 노래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하면서, 그날 느낌을 시로 쓴 것이 있어 보내주겠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 기도회에 참석한 청년들 중에는 어눌한 우리말로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다 신부님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다 신부님의 한국 사랑에 머리가 숙여졌습니다.

그 날 저녁 교토역에서 김도형 목사 부부가 대접하는 생선 초밥을 먹고 밤늦게 고베로 돌아왔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찾아낸 스크랜튼 집 주소

8월 17일, 토요일, 일본 여행의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칸사이 공항에서 오후 3시 비행기로 돌아가야 했기에 오전 시간 밖에 없어 이 날은 가벼운 마음으로 가가와 기념관만 방문하기로 하였습니다. 조순원 장로님께서 다시 나와 우리 일정을 돕기로 하였고 교회에서 멀지 않은 가가와기념관을 찾아 갔습니다.

그런데 기념관 문은 닫혔고 건물을 같이 쓰고 있는 유치원 직원은 기념관 관장에게 물어볼 터이니 한 시간 후에 다시 연락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기념관 안에 있는 자료들을 보려는 계획이 무산되자 난감했지만 순간적으로 고베시 역사박물관이 떠올랐습니다. 어제 기타노의 고베 외국인 구락부를 방문했을 때 그 곳 직원이 지나가듯 "고베에 거주했던 외국인에 관한 자료를 알려면 고베시 역사박물관을 찾아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조순원 장로님은 순발력 있게 차를 역사박물관으로 몰았고 우리 일행은 5백엔씩 주고 박물관에 입장했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안내석에 있는 직원에게 사정을 말했더니 전화로 박물관 자료실로 연결해 주어 3층에 있는 박물관 학예실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다이레이코(田井玲子) 연구원을 만났고 그는 우리 사정을 들은 후 "이곳에는 당신들이 찾는 자료는 없지만 혹시 고베시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Japan Directory를 보면 거기에 정보가 있을지 모르겠다." 고 하면서 직접 도서관에 전화를 해서 방문 허락을 받아 주었고 담당 직원 이름까지 적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박물관을 나왔습니다. 동행했던 심한보 선생님은 전시된 유물들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나오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했지만 시간을 아끼기 위해 뒤돌아 볼 틈도 없었습니다. 그 사이 가가와기념관에서는 "한 시간 후에 방문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고베시 중앙도서관을 찾아 갔습니다. 4층 고문헌 자료실의 우에하라(上原良藏) 주간이 우리를 맞았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청년학생센터의 히다 선생과 몇 해 전 별세하여 그 많은 자료를 이 도서관에 기증한 청구문고의 한석희(韓晳羲) 선생을 잘 안다면서 우리가 요구한 자료를 갖다 주었습니다.

가져 온 자료는 1918년 고베 헤럴드사에서 발행한 The Kansai Directory 1918-1919 for Kobem Osaka, Kioto와 1921년 고베 상공인회에서 발행 Kobe Guide: Every Man's Directory 1921-1922, 두 권이었습니다. 이 책들은 고베와 교토, 오사카 지역에 있던 외국인들에 관한 정보를 담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외국인 연감 같은 것입니다. 받자마자 펼쳐 읽으며 'Scranton' 활자가 나오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베시 외국인 거주자 명단 가운데 스크랜튼의 이름과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료에 의하면 스크랜튼은 고베에 온 직후인 1918년 당시 우라마치(浦町) 41번지에 살고 있었고 별세 직전인 1921년에는 야마모토도리 산죠메(山本通 三丁目) 40번지에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도쿄 국회도서관에서 찾은 Kobe Chronicle에 언급된 '야마모토도리 니죠메'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근무했던 외국인 병원의 주소는 물론 그가 출석했던 올세인츠교회 주소도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걸 발견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오 주여, 감사합니다." 하며 옆에 있던 심한보 선생과 조순원 장로님을 껴안았습니다. 자료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저를 보고 도사관 직원들도 함께 기뻐했습니다. 필요한 부분을 복사해서 받은 후 너무 기뻐 우에하라 주간에게 연신 "Thank you, I found out at last!"를 외쳤습니다. 우에하라는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윗층에 있는 한석희 문고를 보여 주겠노라고 제안했지만 가가와기념관 방문 약속 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훗날 다시 오겠다며 서둘러 헤어졌습니다.

다시 차를 몰아 가가와기념관으로 갔습니다. 관장은 나오지 않고 대신 기념관 부속 유아이(友愛) 유치원 원장이 우리를 맞아 건물 4층에 있는 자료실로 안내했습니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 곳엔 가가와 친필 족자를 비롯하여 가가와가 발행했던 <雲柱> 잡지, 그리고 그가 소장하고 있던 도서 자료들이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상당수 있었습니다.

가가와는 일제시대 우리나라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한국 교회에도 영향을 끼친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고베 빈민굴을 중심으로 민중 계층과 생활을 함께 한 가난한 자의 성자였습니다. 그는 또한 일본 기독교계에서 보기 드물게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접목시켜 일본식 기독교사회주의를 구현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이기도 합니다. 요즘 내 학문적 관심 영역의 하나인 기독교 사회주의 분야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기에 다음에 차분하게 살펴 볼 부분이라 생각하고 아쉽지만 곧바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끝나지 않은 답사 여행

말 그대로 '초치기',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긴박감 속에 이루어진 마지막 날 오전의 답사 여행이었습니다. 불과 2시간 만에 가가와기념관에서 출발하여 고베시 역사박물관과 고베시 중앙도서관, 그리고 다시 가가와기념관에 이르는 여정을 소화하였고 그 사이 고베 답사의 근본 목적인 스크랜튼의 마지막 거주지 주소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가가와기념관을 나오면서 조순원 장로님에게 "스크랜튼이 마지막 살았던 '야마모토도리 산죠메 40번지'를 찾아보자."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습니다. 바쁜 토요일에 열심히 차를 몰아 준 조순원 장로님께 미안한 것도 있었지만, 1920년대 주소와 지금 주소가 달라졌을 것이란 생각도 들면서 어차피 가도 옛 주소 가지고는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고, 멋모르고 일본까지 따라와 관광은 하지 않고 뜨거운 태양 볕에 연신 땀을 흘리며 따라 다니는 심한보 선생(그는 이번 여행을 극기 훈련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의 얼굴 표정에서 "식사는 제 때 해야 하지 않느냐?"는 항의성 메시지를 읽고 더 이상의 욕심은 내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남은 것은 다음 여행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 우리는 칸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 버스가 떠나는 산노미야역 부근 우동집으로 갔습니다.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도 조순원 장로님께 뒷일을 부탁했습니다. 스크랜튼이 살았다는 우라마치 41번지와 야마모토토리 산죠메 40번지의 현재 주소를 확인하고 그 집터를 사진 찍어 보내줄 것, 스크랜튼이 살았던 동네가 속한 쥬오쿠(中央區) 구청 사무실에 혹시 옛날 거주인 제적부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것, 스크랜튼이 근무했다는 고베외국인병원(조순원 장로님은 어딘가 전화를 걸어보더니 그 병원이 이름을 海星병원으로 바꾸어 지금도 운영하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을 찾아 옛날 직원 명부가 있는지 확인해 줄 것, 성미가엘교회에 연락을 해서 부탁한 교인 명부 자료가 있는지 확인해 줄 것 등을 부탁했습니다.

조 장로님은 자기 사업도 바쁠 터인데도 부탁한 일을 최선을 다해 돕겠노라 약속해 주었습니다.
점심을 마친 후 조 장로님과 인사를 나눈 후 칸사이공항으로 가는 리무진에 몸을 싣는 순간, 피곤이 몰려오면서 곤한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도쿄에서도 그랬지만 고베에서도 이루어진 모든 과정이 내 계획이라기보다는 보이지 않는 그 분의 손길에 끌려 이루어진 신비스런 여행이었습니다.

막연한 기대감만 갖고 떠난 여행이었는데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가는 곳마다 그 분께서 만나게 해 주신 선한 사람들 때문입니다. 이 분들에게 진 '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더욱 진실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던 스크랜튼을 더욱 깊이 알고 사랑하는 일이 남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고베를 다시 한번 방문하여 그가 살았던 집을 찾아보고, 스크랜튼이 태어난 미국 뉴헤븐 생가를 찾는 일, 영국과 미국 외무성을 통해 스크랜튼의 사위였던 외교관들의 후손을 찾는 일, 그리고 1907년 선교사직 사임 이후 운산과 직산, 대련에 남아 있는 스크랜튼의 행적을 조사하여 그의 생애 공백을 메우는 일입니다.

언제쯤 만족할 만큼 자료를 얻어 그의 전기를 쓸 수 있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때까지는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스크랜튼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질수록 그 분이 자료 찾는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기에 불안하지 않습니다. 이번 답사 여행에서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사모하는 만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는 만큼 묻게 되고, 묻는 만큼 답은 나온다."

출전 : 이덕주 목사의 스크랜튼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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