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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8 (금)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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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대한민국6-경제 (두산)
대한민국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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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l. 경제

1. 자본주의의 성립과 발전

개화사상가(開化思想家)로 알려진 유길준(兪吉濬)은 《서유견문(西遊見聞)》에서 이미 한국에는 오늘날의 주식회사나 합자회사와 같은 사회기업의 제도가 있었다고 지적하면서 장통사(長通社)·연무국(煙務局)·보영사(保社)·혜상국(惠商局)·장춘사(長春社)·광인사(廣印社) 등이 그 본보기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로 미루어 개항기(開港期)에는 상공업 분야에 근대적인 경영방식이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을 시발점으로, 1906년 7월에 있었던 광업법(鑛業法)의 공포를 개항의 완결점으로 볼 수 있다. 1896년 미국이 운산금광(雲山金鑛)의 개발권을 가졌고, 뒤이어 독일·영국·일본 등의 자본이 광업 분야에 진출하였다.

광공업 분야에 선진국가의 자본이 밀려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상업 분야에 대한 진출은 더욱 뚜렷하였다. 이와 같은 외국인 상권(商權)의 신장 추세에 대처하기 위하여 유길준은 《서유견문》에서 서구식의 주식회사 형태의 상사회사(商事會社)를 설립할 것을 강조하였는데, 외국 자본의 진입과 그 신장 추세를 막기 위해서는 근대적인 상법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전통적인 천상적(賤商的) 신분제도가 해체됨에 따라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급격한 증가 추세를 보였다. 1912년에 이르러 한국인의 직업별 인구 구성은 농림업 인구 1,208만 2,520명에 비하여 상업 및 교통운송업 인구가 99만 365명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 3위는 공업 인구로 20만 8,315명이었으며, 자유업 인구가 17만 5,995명이었다. 개항기에 싹튼 상업 종사자의 인구 증가는 1912년에 이르러 농림업 인구 다음가는 비중을 차지하는 결과를 빚었다.

인천·부산·원산·진남포·목포·군산·마산포·성진·신의주·경성(서울)·청진 등 11개소의 개항장이 도시로 발전하여 촌락사회주도형(村落社會主導型)인 한국의 전통사회에 도시사회의 면모가 부각되었다. 개항장에는 촌락사회로부터 유입되는 인구이동 현상이 일어났고, 개항장에 유입된 한국인들은 상공업 등의 새로운 직업에 종사하는 임금노동자라는 직업인으로 변신하였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공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수는 35만 8,205명이고, 상업 및 교통업에 종사하는 한국인수는 97만 1,195명으로 합계 132만 9,400명을 헤아렸다. 이 중에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한국인 수가 91만 8,603명(남자 88만 2,291명, 여자 3만 6,312명)이었으니 상공업 총인구수의 61.6%가 임금노동자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한말에는 민족자본을 투입, 의류품(衣類品)을 근대적 기계생산으로 직조하게 되어 1910년경까지 서울에서 기계적인 방법으로 의류품을 직조하는 공장수가 38개소에 이르렀다. 직기대수는 면포(綿布)공장에 199대, 견포(絹布)공장에 29대, 교직물공장에 29대가 설치되었다.

직공수는 면포 직조공장에 125명, 견포공장에 44명, 교직물공장에 40명이 취업하고 있었다. 이것은 기계적인 방법으로 의류품을 직조하는 이른바 작은 산업혁명의 성격을 지닌 역사의 한 토막으로 볼 수 있는 사실이다. 1923년에 경성상공회의소(京城商工會議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는 11개소의 직포공장이 운영되고 있었다.

주요 직포공장의 경영규모는 대창(大昌)무역주식회사가 20만 원의 자본금에 종업원수 60명이었고, 1911년에 설립된 경성직유회사(京城織維會社)는 15만 원의 자본금에 종업원수 108명이었으며, 1911년에 설립된 경성직물공사(京城織物公司)는 20만 원의 자본금에 81명의 종업원을 거느리는 규모였다.

1910년경에 설립된 38개소의 직포공장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으나, 다만 종로상인들이 경영한 동양염직회사(東洋染織會社)만이 잔존하여 직포 업계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직포업이 처음부터 한국의 민족산업으로 발판을 굳히고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1911년에 설립된 경성직유회사는 1917년에 이르러 김성수(金性洙)가 인수하여 역직기(力織機) 40대를 갖춘 근대적 직포공장의 체모를 갖추었고, 1919년 10월 경성방직주식회사(京城紡織株式會社)로 발전하였다. 한국의 민족자본은 발빠르게 은행업의 경영에 진출하였다.

1897년 한국의 귀족층과 상인층을 상대로 일본인들이 은행업의 경영을 권유하여 한성은행(조흥은행의 전신)이 설립되었는데, 이 때부터 1920년에 이르기까지 민족자본에 의하여 13개의 은행이 설립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접어들자 이들 민족자본 은행들은 강제로 조선상업은행(朝鮮商業銀行)과 조흥은행(朝興銀行)에 통합되었다. 그리고 은행업이 전비조달(戰費調達)의 창구로 이용됨에 따라 민족자본은 모조리 전쟁채권(戰爭債券)으로 휴지화되었다.

2. 국민경제의 기반확립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1945년 8·15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단일 국민경제를 건설하기에는 여러 가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전쟁에 인적·물적 자원이 강제동원되어 민족경제는 황폐된 데다 남북으로 분단되어 생산체제가 혼란을 겪게 되었다. 남한에 남아 있던 생산시설은 일본 내의 산업과 계열화되었고 북한으로부터의 전력공급이 끊겨 가동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한편, 해외로부터 교포들이 유입하고 월남인들이 늘어나 비축물자는 바닥나고 생활필수품은 품귀현상을 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군정 당국은 3년 동안 점령지역구호계획(GARIOA) 자금에 의한 약 4억 6034만 달러를 원조하였다. 이 원조에 의하여 도입된 물자는 식량·피복·직물 등의 생활필수품이 49.2%를 차지했으며 농업용품·석유 등도 들여왔다.

당시 무허가 사무역이 성행하였는데 일본으로부터 품귀물자를 수입하였고, 중국의 마카오·홍콩 등과도 물자교역이 이루어져 긴급한 민생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자유민주체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민경제의 건설을 시도하게 되었다. 이승만정부는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국민 각 계층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였다.

농지개혁을 실시하여 소작제를 철폐시킬 것과 기업활동을 보장하여 개인의 창의를 발휘케 하며, 근로자들에게도 이익이 균점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6·25전쟁까지 2년 간에 걸쳐 실시되어 면방직공업의 시설복구와 개선에 힘써 일제강점기 말의 수준을 능가하기에 이르렀고, 전력은 수력·화력발전소를 건설하여 1948년 말에는 27만 2825만 ㎾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었다. 석탄생산은 정부의 재정금융지원으로 8·15광복 후 대비 5배나 늘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회복세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끝나고 말았다. 남한이 입은 경제적 피해는 생산시설의 42%, 공장건물의 46%가 파괴되는 막대한 것이었고, 사회간접자본을 비롯하여 산업활동의 중추부문을 잃게 되었다. 특히, 한국산업의 심장부로 불리던 경인지방에 밀집해 있었던 섬유공장은 거의 다 파괴되었다.

더욱 격심한 피해는 전비조달을 위한 재정금융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막대한 재정지출을 중앙은행에서 차입했기 때문에 통화발행액이 격증하여 인플레이션을 가속시켰다. 물가상승은 가히 폭발적이어서 전국 도매물가지수는 1947년을 100으로 할 때 전쟁이 끝난 1953년 말에는 5,446%로 치솟았다.

이러한 경제 여건에서 기업은 장기적인 생산활동보다는 유통부문에 집중하였고 인플레이션 체질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전후복구를 위해서 외국원조를 적극 받아들이기로 한 정부는 1952년 미국과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1954년에는 ‘한국경제원조에 관한 대한민국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과의 조약’을 조인하였다.

1953~1961년 미국으로부터 약 22억 8천만 달러를 무상제공받았고, 부족한 재원은 산업복구국채 및 산업금융채권으로 충당하였다. 이 기간 중 연평균 4.7%의 경제성장률을 보였으며 공업부문의 비중이 1960년에는 20.5%로 커져 산업구조가 개선되었다. 1950년대 후반에 제분·제당업은 급속히 발달하여 1960년대 초에는 생산과잉을 나타냈으며, 섬유·화학·제지·공업 등도 비교적 활발하였으나, 제철·제강·기계 공업 등의 부문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다.

즉, 소비재 위주의 공업건설에 치중하게 되고 기간산업부문은 경시되었으며, 원료의 9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함으로써 건전한 국민경제의 발전에는 문제점을 보였다. 이와 같이, 8·15광복 후부터 1961년까지의 한국경제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시켰으나 미군정 기간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체제를 철폐하였으며, 이승만정부의 12년 간은 자유경제체제를 확립하고 6·25전쟁의 전후복구사업을 통해 국민경제건설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

3. 정부주도 경제개발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들어선 박정희정부는 민생고 해결을 내세워 정부가 국민경제 전반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개발정책을 계획하게 되었으며,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을 정식으로 시작하였다.

그 후 한국경제는 경제개발정책에 의하여 성장·발전을 거듭하였는데 4차례의 5개년계획을 성공리에 마쳤으며, 전두환정부 기간에 시작된 제5차(1982~86)부터는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으로 명칭을 바꿔 추진하였고, 1991년에 제6차(1987~1991)로 마무리되었다.

경제계획은 1950년대 이승만정부와 그 후의 장면내각에 의해서도 입안되었는데,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복구에 중점을 두고 미국의 무상원조를 바탕으로 수입대체산업을 건설하겠다는 정도였다.

이에 비하여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외국자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공업부문을 집중지원해 공산품을 수출한다는 불균형성장전략을 채택하였다. 제1~4차 계획은 기본목표를 자립경제구조의 실현에 두었고, 제3차 계획부터 지역개발의 균형을 이루고자 했으며, 제4차 계획부터는 사회개발을 촉진하고 공업화에 따른 빈부격차를 해소하려고 했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경제안정기조의 정착은 제5차 계획의 기본목표로 제시되었고, 제6차 계획은 경제선진화와 국민의 복리증진을 기조로 삼았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개발전략은 불균형성장론(不均衡成長論)에 기초를 두고 공업을 전략산업으로 집중육성하여 농업 등의 산업에 선도산업의 발전효과가 파급되도록 전략을 펴나갔다.

한편, 제1차 계획에는 대외지향적인 개방체제의 개념이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했으나 제2차 계획 이후 공업화 전략을 꾸준히 추구하였다. 각 계획에서 세웠던 목표와 실적을 대비하면 경제성장률·국내투자율·상품수출증가율 등의 총량적 성장지표들은 제4차 계획기간(1977~1981)을 예외로 하면 목표를 초과달성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국민총생산(GNP) 성장률은 매우 높아 불변가격 기준으로 기간평균 5.8~10%를 실현하였고, 그 규모를 경상가격 기준으로 살펴보면 제1차 계획기간 말인 1966년 말의 37억 달러에서 1991년 말의 292억 달러로 25년 간 7배 가까이 늘어났다.

1인당 국민총생산 역시 같은 기간에 125달러에서 6,757달러로 53배나 격증하였다. 이러한 경제성장은 수출신장에 힘입은 바가 큰데 수출규모는 1966년 말의 2억 5천만 달러에서 1991년 말의 718억 7천만 달러로 286배나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특히, 86년은 무역수지가 흑자를 기록했으며 노태우정부의 1989년까지 이어졌으나 그 후는 과소비 풍조의 만연과 복지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 수입이 수출을 초과하였다.

수출품목은 1960년대에 합성섬유·화학섬유 등 소비재가 주로 수출되었으나 차츰 중간재와 시설재의 비중이 늘어났으며 제6차 계획기간 말에는 경공업제품과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액비율이 38:62로 역전되었다. 이와 같은 수출신장률은 국내의 산업기반보다는 금융·세제면의 각종 특혜를 중심으로 하는 정부의 수출지원정책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취약점이 많았다.

산업구조면에서는 1차산업(농림어업):2차산업(광업·제조업·건설업):3차산업(사회간접자본 기타)의 비율이 1962년의 36.6:6.3:47.1에서 1991년의 7.7:42.9:49.4로 변화하여 30년 간 광공업의 비중이 크게 늘어난 반면 농림어업은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높은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의 고도화를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해외에 의존했기 때문에 총외채는 1991년 말 391억 달러에 달해 원리금을 갚아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결국 외채상환과 이자의 부담으로 외환보유고가 줄어 1997년 IMF체제하에 놓여 국민들의 생활을 급격히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또한 외채차입과 수출신장을 바탕으로 하는 공업화는 여러 가지 취약점을 나타냈다.

저임금에 기초한 수출확대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대시켜 노사 간의 갈등을 낳았고,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도한 투자는 독점자본을 강화시켜 중소기업의 희생을 초래했으며, 산업구조면에서도 수출제일주의는 이농인구의 증가와 농업노동력의 감소를 가져왔다.

그리고 주택보급 등의 사회개발면에서의 계획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여 복지에 대한 기대와 욕구를 증대시켰다. 대외적으로는 국제 자원파동이나 수입규제의 영향을 크게 받을 수밖에 없어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기술개발이 중시되었다.

이렇게 볼 때 한국의 1962년 이후의 경제는 장기적인 건전한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하여 경제규모가 확대되는 양적인 성장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득분배(所得分配)의 불평등과 자원배분(資源配分)의 비효율성을 극복하면서 성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를 남겼다.

이러한 과제에 대응하여 제7차 계획(1992~1996)이 수립되어, 21세기 경제사회의 선진화와 민족통일을 지향하는 기본목표를 잡았으나 김영삼정부의 신경제5개년계획(1993~1997)으로 대체되었다. 이 경제계획은 경제제도의 개혁을 통한 성장잠재력의 극대화를 기본목표로 삼고 있다.

4. 현황과 과제

한국 경제는 세계가 주목하는 고도성장을 이룩하여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둔 신흥공업국(NICS)으로 나서게 되었다. 1987년 경제규모로서는 세계 17위, 무역규모로서는 세계12위 수준에 이르렀고, 1인당 국민소득도 1994년에 1만달러를 넘어섰다. 또한 1986년부터 이른바 3저(三低)현상의 호기를 맞아 수출이 가속화됨으로써 국제수지가 흑자를 기록해 그 동안의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와 외채 압력에서도 벗어나기도 했다.

1988년 말 총외채규모는 312억 달러이나 대외자산 239억 달러를 감안한 순 외채 규모는 73억 달러이다. 그러나 경제규모의 팽창과 함께 세계 속의 지위 상승에 따라 우리 경제는 종전과 다른 새로운 국내외의 여건변화에 직면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세계무역기구의 출범으로 GSP (일반특혜관세제도)와 같은 국제무역의 특혜가 사라진 반면, 발전단계에 상응하는 책임과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특히 국제수지 흑자가 대폭 확대됨에 따라 선진국의 한국상품 수입규제와 아울러 원화의 절상, 국내시장 개방 압력이 거세졌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1980년대의 민주화·자율화 과정에서 그 동안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온 농민·근로자·중소기업·영세민 계층의 소득 보상 요구가 높아졌으며 복지와 균형문제가 선결해야할 과제로 등장하였다. 특히 임금인상과 새로운 노사관계의 정립과정에서 기업의 수출경쟁력이 약화되었으며, 흑자에 따른 잉여자금의 확대가 부동산 투기 등으로 유동화되면서 인플레 압력을 높이는 가운데 개방화에 따른 수입소비재 유입과 과소비풍조 확산의 우려를 낳았다.

후발공업국이 선진경제 진입에 성공한 예는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 경제는 과거 일본의 예와는 달리 국제경제 환경이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 속에 선진경제로의 진입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향후 도래하는 국제화·민주화·지방화 추세에 대응하여 구조조정 과정의 충격을 최소화하고 동태적인 수출경쟁력의 비교우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최대의 과제이다.

따라서 국제화에 따른 국내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자율화·민주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복지요구와 성장력을 조화시키면서, 안정·균형 성장을 지속하여 국민경제의 질적 발전을 꾀하여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립 체질강화와 부동산투자 등의 투기심리 근절, 그리고 첨단기술부문에 대한 연구개발투기의 확충이 중요하다. 이러한 과제를 순조롭게 해결한다면 향후 21세기에는 선진경제로 진입하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1998년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발생한 외환 유동성 부족의 경제위기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었으나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 등 국제 기구로부터 유동성 자금을 지원받으면서 경제 정책에 대해서도 국제통화기금과의 합의하에 외화유동성 확보,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 등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외환 금융 시장이 안정을 되찾고 뒤이어 실물경제도 개선되는 움직임을 나타냈다. 그러나 2001년 9월 일어난 미국항공기 테러사태로 인해 세계경제가 매우 어려워지면서 한국경제도 함께 어려운 상황을 맞고 있다.

5. 산업

(1) 성장과 구조

한국의 경제는 8·15광복 이후 1961년까지의 국민경제의 기반성립기와 1962년 이후의 정부주도의 경제개발기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961년 이전은 6·25전쟁의 피해복구에 힘써 경제성장률은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58년의 6% 미만이 가장 높은 기록이었으나, 1962년을 기점으로 하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성공적 추진으로 경제규모가 놀랍게 늘어나 1994년에는 세계 11위, 무역규모는 세계 12위 수준에 이르렀고, 1인당 국민총생산(GNP)도 1995년에 1만 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1997년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놓여 경제 상황이 많이 악화되었고 1998년 1인당국민총생산은 6,800달러로 낮아졌다. 이후 온국민의 노력으로 2001년 8월에 IMF 관리체제를 마감하게 되었으나 같은해 9월 발생한 미국 항공기 테러사건의 여파로 세계경제 상황이 악화됨과 함께 한국경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산업구조(産業構造)면에서는 1차산업의 비중이 급속히 떨어진 데 비하여 2차산업의 비중이 증대하여 1993년 말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의 비율은 7.1:41.0:51.9로 선진공업국의 구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개발전략이 수출주도형 공업에 치중한 결과 산업부문 간 또는 동일부문 내에서도 불균형 성장이 불가피하게 나타났으며, 수출산업과 내수산업 간에도 격차가 벌어졌다.

또한 부존자원과 자본이 빈약한 상황 속에서 추진되어 온 외향적 성장 전략으로 인해 한국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한 국제수지의 적자가능성을 안고 있는 취약면이 지적되고 있다.

(2) 농업

한국의 농업은 생활의 근간으로서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바, 그 기원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개더미[貝塚]·분묘·집터[住居址] 등에서 출토된 석기류·골제품을 보면 이미 BC 4~BC 2세기에 원시적 농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한사군의 설치로 고조선의 농경기술이 혁신되었음은 낙랑고분에서 나온 철제농구로 짐작할 수 있다.

한편, 한반도 중남부에 정착한 한민족은 BC 4∼BC 3세기경 북방문화와 벼농사[稻作]의 전래로 농업을 급진적으로 발전시켰는데 이 시대에 이미 육도작(陸稻作)이 시작된 것 같다. 이어 수도(水稻)가 들어와 삼국시대에 크게 발달하였다. 신라에서는 농업과 관련이 깊은 기상학·천문학의 발달로 이미 농경문화를 확립시켰다.

고려시대에는 돌려짓기방식[輪作方式]·계단식 경작을 채택, 양곡증산과 농토확장에 주력하였다. 또 14세기 초에는 원나라에서 목면(木綿)이 전래되어 한국의 의생활(衣生活)의 주류를 이루었고, 목축업의 효시라 할 목마장(牧馬場)이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농업기술과 농업경영면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전기의 융성에 비해 중기에는 제도상의 모순의 표면화와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위축되었고, 다시 세도정치로 인한 삼정문란 등으로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19세기 개화기에 이르러서는 일제 자본주의의 침투로 토지의 약탈이 시작되더니 급기야는 국권피탈로 전국 농지가 일제의 전쟁식량기지화되었다.

이후 신품종의 도입, 일제 농기구의 보급, 비료공장의 건설 등으로 농업발달을 기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그들의 원시적 자본축적이 목적이었으므로 영농계층의 영세화가 가속되어 전 농가의 83%가 소작인으로 몰락하였다. 8·15광복 후의 혼란기를 극복하고 성립된 이승만정부는 1949년 ‘농지개혁법’을 공포·실시하였으나 농민을 곤궁으로부터 해방시킬 수는 없었고, 농업국이면서도 식량부족 타개를 외곡도입에 의존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1962년부터 실시된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더불어 비로소 농촌근대화작업이 구체화되었는데, 박정희정부는 다수확 신품종의 개발과 보급, 농기구의 기계화 등과 함께 농촌 새마을운동을 적극 추진한 결과 1977년에는 식량자급체제로 들어섰고 농가경제도 도시와 같은 수준으로 향상되어 갔다.

그러나 토지이용면에서 볼 때 경지는 1968년에 231만 9000ha로 최고를 기록한 이후 계속 감소추세인데, 1997년 현재 전체 국토면적의 19.4%에 불과하고 재배작물도 곡류에 치우쳐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식량자급도도 1986년 44.5%, 1993년 33.9%, 2000년 29.7%로 점차 하락세에 있다.

따라서 관개시설 확충에 의한 전천후 영농, 영농의 기계화, 단위수확량의 증대, 특산품 개발 등을 통한 농업 구조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1999년 현재 농가인구는 420만 9799명, 농가수 138만 1637호, 총인구에서 농업인구는 9.0%를 차지한다.

2000년 농가 호당 평균 소득은 2307만 2000원, 농가부채는 1701만 1000원이다. 정부에서는 농업위기 극복을 위해 농산물 유통구조개선과 수급안정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였고, 친환경농업 및 지식농업기반을 구축하였다.

(3) 축산업

한국의 가축은 옛날부터 축력이용(畜力利用)을 위해 사육되어 왔으나 식용을 위한 축산정책은 일제강점기에 일종의 수탈수단으로 그 기반이 구축되었다. 8·15광복 후 1958년의 축산부흥5개년계획으로 가축의 양적 증식뿐만 아니라 사료자원의 개발, 기술향상 및 방역사업의 강화, 목초지 조성의 추진, 유통구조의 정비 등으로 축산업의 발달을 도모하여 1960년대 이후로는 유축농업이라는 부업적 위치에서 탈피하여 기업화·산업화의 방향으로 대형화되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유가공제품의 개발로 일반대중의 수요 또한 증대되었다.

1998년 한국에서 생산되는 육류의 총생산량은 167만 9000톤으로 세계 209국 중 25위이고, 쇠고기 생산량은 37만 6000톤(세계 27위), 돼지고기 생산량은 93만 9000톤(세계 19위)이다. 우유 총생산량은 202만 7000톤으로 세계 195국 중 42위이며, 계란 생산량은 45만 5000톤(세계 19위)이다.

(4) 임업

1788년 정조(正祖)는 송금절목(松禁節目)이라는 산림보호령을 반포(頒布)하고 조림사업에 힘썼다. 그러나 1865년 청나라가 압록강·두만강 일대 원시림에 대한 벌채권을 주장한 이래 러시아·일본이 그에 합세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군용확보를 위한 벌채와 군용목재의 확보, 6·25전쟁으로 인한 전화(戰火) 등으로 한국의 산림은 황폐화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51년 산림보호 임시조치법이 공포되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1961년 산림보호법 제정 이후 비로소 적극적인 산림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연탄·토탄 등의 사용을 권장하여 임산물의 연료사용에 대체하고, 임정기술(林政技術)의 개발·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제1차 치산녹화(治山綠化) 10개년계획을 4년 앞당겨 1978년에 완수한 박정희정부는 1979년부터 제2차 10개년계획을 추진하였다.

1994년 말 현재 한국의 삼림면적은 645만 6000ha, 입목축적은 2억 9580㎥로서 ha당 축적은 46㎥에 불과하였으나 1999년에는 삼림면적 643만ha, 입목축적 3억 8775만 8222㎥, ha당 축적 60.3㎥로 늘어났다(1994년 말 독일 266㎥, 일본 124㎥).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2030년대에는 산림면적과 입목축적이 560만 ha 대 4억 1600만㎥로, ha당 입목축적은 74.4㎥가 되며, 이때의 목재생산 기대량은 연간 1300만 ㎥에 달하게 된다.

(5) 수산업

한국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좋은 조건임에도, 예로부터 뱃사람을 경시하는 풍조와 일제의 수탈정책으로 인하여 수산업 또한 낙후성·영세성을 면하지 못하다가, 1958년 원양어업의 시작과 더불어 수산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어선 보유는 동력선의 경우 1967년의 1만 989척, 17만 9117 톤에서 1993년 7만 2838척, 90만 3912톤, 1999년 8만 7502척, 98만 6339톤으로, 척수 796%, 톤수 550%가 증가한 데 비해 무동력선은 척수·톤수가 모두 감소되고 있어 어선의 대형화·동력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업별로는 2000년 현재 원양어선 0.6%, 연근해어선 71.57%, 양식어선 21.23%, 내수면어선 3.82%, 기타 2.67%로 연근해어업과 양식어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어획량의 경우 1998년 말 총 283만 5015M/T으로 그중 일반해면어업이 46.15%, 천해양식업이 27.41%. 원양어업이 25.48%를 차지하고 있다. 수산물 수출액은 1988년의 20억 4730만 6000달러 이후 계속 줄어들고 있으며 1998년에는 13억 6901만 4000달러이다.

수산업은 200해리 경제수역 선포, 유가(油價) 인상, 좌초된 유조선의 기름유출, 그리고 적조(赤潮)현상 등의 악재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었으며, 최근에도 주변국과의 어업협정에 따른 어장축소와 자원감소로 인하여 수산물 생산량 및 생산성이 계속 감소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양수산부는 과감한 구조조정과 경영여건 개선을 통한 수산업의 전환점 마련할 계획이며, 어업의 생산성 향상 및 적정자원 관리를 위해 2004년까지 전체 근해어선 5054척 중 25% 수준인 1300여 척을 줄일 계획이다.

1994년 11월 유엔해양법협약의 발효로 바다 관할권이 12해리에서 200해리까지 확대되었으나, 한일간의 거리가 400해리가 채 되지 않아 바다 경계선을 별도로 정해야 했다. 한일 양국은 바다경계선을 확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협상을 했으나 서로가 대립해 합의점을 찾지 못하다 일본측이 1998년 1월 일방적으로 기존 어업 협정을 파기했다.

이에 따라 두 나라는 새로운 상황에 맞게 영토문제와는 별도로 어업협정을 우선 체결하기로 하였다. 1999년 3월 쌍끌이어업, 볶어채낚기, 갈치채낚기 등의 입어척수(총137척)를 추가로 확보하였다. 2001년도 해양수산부 예산은 2000년에 비하여 9.9% 증가한 2조 2871억 원이며, 해양경찰청 예산도 9.9% 증가한 4329억 원이다. 어가인구 31만 명이 생산하는 수산 총생산액은 국내총생산의 0.5%를 차지한다.

(6) 광공업

지질적 특성으로 백금과 석유를 제외한 다종다량의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었으나 19세기까지는 광업개발이 순조롭지 못한 데다가 한말의 광업정책의 결여로 광산채굴특권을 열강에게 내주었다. 거기에 1915년 일제의 조선광업령 공포로 한국의 광업은 일본인이 거의 독점하여, 그들의 약탈은 금의 경우 32만 4636㎏에 이르렀는데, 이는 1970년대 한국의 연평균 산금량 593㎏의 547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이전까지 한국 광업은 극도의 침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1960년대 초부터 수요가 증가하였고, 2차에 걸친 석유파동과 정부의 ‘석탄생산극대화정책’으로 증산이 거듭되어 1988년도에는 2429만 5000톤으로 정점에 이르렀으나 그후 유가(油價) 하락, 가스연료의 보급, 국민의 청정(淸淨)에너지 선호 등으로 수요 및 생산량이 크게 감소하는 추세에 있다.

또한 지하자원의 북한지역 편재, 광업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연탄광업의 편중 등으로 영세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으며, 그나마 탄층의 심부화(深部化)가 가속되어 채탄조건이 날로 악화되고 있고, 정부에서도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을 수립, 전국 총 25개 탄광(1995) 중 경제성이 기대되는 10여 개 대규모 능률탄광에 의한 적정생산을 유지하고 경제성이 없는 다른 비능률탄광은 폐광화를 유도하고 있어, 1989년 말 이후 폐광이 급속히 확산되어 탄광산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석탄의 경우 전국 매장량이 1998년 현재 14억 5171만 7000톤에 달하나 가채량은 약 7억 톤이다.

한편 공업분야에서는 1960년대 이후 근대공업으로의 탈바꿈이 시작되었는데, 1960년대에는 산업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동력증산과 시멘트·화학비료·합성섬유와 기타 수입대체산업의 육성에 주력하였고, 1970년대에는 화학·기계·철강 등 중화학공업에 역점을 둔 기간산업 육성에 주력한 결과 신흥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1990년대를 이끄는 공업은 전자공업으로 컴퓨터와 반도체 산업의 발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전기기기, 자동차, 기계 섬유, 통신기기, 철강 등이 내수와 수출에 앞장서고 있어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7) 상업

한국의 상업은 신라 때의 동시(東市)·서시(西市)를 중심으로 한 좌상(坐商)의 성립과 향시(鄕市)의 설치, 고려시대의 상설시장인 시전(市廛)의 건립, 조선시대의 공랑(公廊)·경시전(京市廛)의 경영 등으로 유지·발전되어 왔으며, 국민총생산의 신장에 따라 급성장하여 도·소매업 전체의 연간판매액은 1993년 146조 4152억 원, 1998년 275조 2222억 3200만 원에 이른다.

1997년 현재 도매업 대 소매업의 구성비율을 보면, 종사자수는 28.1% 대 71.9%, 사업체수는 15.1% 대 84.9%, 판매액은 57.5% 대 42.5%로 도매업의 대형화와 소매업의 영세성이 매우 대조적이며, 도·소매업체의 31.3%(1998)가 서울·부산에 집중되는 이중적·파행적(跛行的)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최근에는 시장개방에 대비하여 규모를 대형화하면서 주차장 등 편의시설을 넓혀나가고 있고, 대형 저가할인매장과 편의점(CVS)도 늘어나 유통구조의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6. 재정

8·15광복 후 1950년대까지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세입이 충당되어 이승만정부의 재정역할은 제대로 수행되지 못했다. 1960~1970년대는 생산능력의 증대를 위한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었고, 1980년대의 재정의 역할은 생활의 질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사회개발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교육, 사회보장 및 복지, 주택 및 지역사회개발 지출이 증대하여 경직성 경비가 총세출의 70% 이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한국의 재정 규모는 국가의 경제적 기능이 확대됨에 따라 팽창일로에 있는데, 중앙정부의 일반회계 세출규모가 1963년 728억 원에서 1993년 37조 2680억 원으로 511배가 증가하였다. 재정수지는1970년대까지 만성적인 적자를 면하지 못하였으며, 재정적자의 보전은 1970년대 중반까지 한은차입과 차관도입에 의존하다가 1970년대 후반 이후에는 주로 국채발행에 의존하였다.

1980년대 이후 안정기조하의 예산 편성으로 1984년부터 일반정부(중앙 및 지방자치단체) 재정수지가 흑자로 돌아섰으며, 통합재정(세출 및 순융자) 수지도 1987~1988년 흑자로 돌아섰으나 그 이후는 복지지출 증대로 다시 재정적자를 기록하였다. 1989년 이후 통합재정 수지는 1992년까지 재정적자를 보이다가 1993년부터 1996년까지 흑자를 나타냈으며, 1997년부터 1999년까지는 다시 적자를 기록하였다.

1993년 7월에 발표된 신경제5개년계획에 포함된 재정개혁 방향은 조세의 공평성과 효율성을 제고하여 국가경쟁력 제고와 국민편익을 증대시킨다는 것이었다. 우선 재정기능의 정상화를 위하여 1992년 19.4%이던 조세부담률을 1997년에 22~32% 수준까지 높여 재정능력을 확충하기로 하였고, 둘째는 소득세기능 및 재산과세를 강화하고 소비과세의 개선을 도모하여 세제의 개혁을 단행하며, 마지막으로 재정제도의 운용방식에서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여 효율적인 재정운용을 뒷받침하도록 재정제도의 효율화를 추구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역개발을 위한 국가 전체의 가용 재원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지역개발종합계획’ 제도도 도입한다는 것이다.

7. 무역

한국은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경제성장에 따른 무역규모도 크게 증가하였다. 교역규모는 1962년 4억 8000만 달러에서 1994년 1984억 달러로 약 412배나 증가하였다. 수출의 경우 같은 기간 중에 5500만 달러에서 1994년 960억 달러로 1,745배가 늘어났고, 수입은 또한 4억 달러에서 1994년 1023억 달러로 255배 증가하였다.

무역수지는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적자에 시달렸으나 1987년부터는 3저(低)현상의 호기를 맞아 수출이 급증하여 흑자로 돌아서는 전환기를 맞았다. 그러나 1990년 이후 임금의 급상승과 후발개도국의 급성장 등으로 대내외 수출여건이 악화되면서 다시 적자로 반전되었다.

한국의 수출은 1960~1970년대 초반까지 섬유·합판·신발류 등 경공업 제품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 1988년까지 철강·기계·선박·전자제품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리고 1989년부터는 신발류 등의 수출이 부진을 보인 반면 전자제품(반도체 등)·섬유제품·기계류(자동차 등) 등의 수출이 큰 폭으로 늘어나면서 수출 주종품목으로 부상하고 있다.

수출시장별로는 과거 한국의 수출 증대에 크게 기여한 미국·일본·EC(European Community:유럽공동체) 등 3대 선진국 시장에 대한 수출 비중이 1989년 이후 크게 낮아지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과 동남아시아 등 개도국에 대한 수출 비중은 증가하고 있다. 한편 수입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기계류의 비중은 1974년 27%에서 1994년 36.5%로 증가하였다.

수입시장별로는 대일(對日)비중이 1994년 중 24.8%로 일본에 대한 수입의존도가 여전히 높고 대중국(對中國)비중이 5%로 급증하고 있다. 따라서, WTO(World Trade Organization:세계무역기구) 체제와 환경보전을 내세우는 급변하는 교역여건에서 건실한 수출증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수출 주체인 기업이 과감한 기술개발투자를 통하여 제품의 고부가가치화 및 고급화, 품질개선과 신제품개발 등을 적극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수입자본재의 국산화 추진 및 이를 위한 기술개발, 그리고 수입선 다변화도 시급한 과제이다.

1998년 수출은 동남아시아의 경제위기, 일본경제의 침체, 국제금융시장의 불안 등으로 1997년에 비해 2.8% 감소한 1323억 10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수입은 마이너스 성장에 따른 소비, 투자의 내수위축으로 1997년 대비 35.5% 감소한 932억 8000만 달러를 기록하여 2년 연속 감소세를 보였다. 해외여행자수가 크게 감소하여 여행수지가 흑자를 기록하고 수입물량의 감소로 운임지급이 크게 줄어 운수수지도 흑자를 기록하였다.

2000년에는 미국경제의 장기호황과 중국경제의 견실한 성장, 개도국 경제의 회복 등에 힘입어 총수출이 1722억 6800만 달러로 1999년보다 19.9% 늘어났다. 수입은 설비투자 증가 등 국내경기회복과 국제유가 급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1999년보다 34.0% 늘어난 1604억 8100만 달러였으며, 117억 8700만 달러의 무역흑자를 나타냈다.

8. 금융

1950년대 중반 은행법의 시행 등으로 금융제도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1960년대 들어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시와 함께 이의 효율적인 지원기능을 담당하는 금융체제로 발전해 갔다. 1970년대 들어 경제체질강화를 위해 8·3긴급경제조치를 단행함과 동시에 단자회사·상호신용금고·종합금융회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의 신설·정비를 통해 사금융의 제도금융권 흡수와 금융구조의 다원화가 추진되었고, 1980년대 들어서는 경제 운영방식이 민간시장 기능 중시로 바뀌면서 시중은행이 민영화되고,금융시장의 진입규제도 완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금융부문은 상업정책의 주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여 경제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이에는 정부의 금융기관에 대한 과도한 개입이 따랐고,지나친 관권의 개입으로 자금분배상의 왜곡, 금융기관의 비효율적인 경영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이에 따라 1990년대 들어 금융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노태우정부는 금융개혁을 단행하였다. 우선 정부는 1991년 8월 4단계 금리자유화계획을 발표하여 추진하였으며, 1992년 1월에는 주식시장을 개방하여 일부 국내 상장주식의 일정한도 내 외국인투자를 허용하였다.

또한 1993년 6월 신경제5개년계획과 제3단계 금융자율화 및 시장개방계획을 발표하여 1997년까지의 금융개혁과 시장개방일정을 제시하고, 같은 해 8월에는 모든 금융기관과의 거래에서 실명(實名)을 의무화함으로써 금융거래정보의 비밀을 보장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고, 금리자유화가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이러한 금융개혁과 금융시장개방은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경제협력개발기구)의 가입일정 등에 따라 그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1998년은 유사 이래 최대규모의 금융구조조정이 이루어진 한 해였다. 어려운 경제여건에도 불구하고 퇴출, 합병 등 대대적인 금융구조조정이 이루어진 것은 근본적인 개혁만이 경제 회복이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외환위기 발생 이후 1998년 4월까지의 기간은 본격적인 구조조정보다는 외환시장의 안정에 주력한 시기였고 그후 본격적인 금융구조조정을 추진하였다.

보다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금융감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1998년 4월 재정경제부, 은행감독원, 증권감독원, 보험감독원으로 분산된 금융감독기능을 금융감독위원회 및 금융감독원으로 통합하였다. 2000년부터는 제2차 금융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다.

9. 교통

한국의 도로교통은 삼국시대부터 역원제(驛院制)와 함께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전국의 간선교통은 서울[漢城]을 중심으로 방사상(放射狀) 형태를 이루어 의주·경흥·평해(경북 울진)·동래·제주·강화 등의 6개 방면으로 발달하였다. 1900년대 초 옛길이 신작로(新作路)로 바뀌고, 이어 1911년에 관용 자동차 2대가 도입되면서 자동차 교통시대가 열렸다. 또 1912년에는 택시·버스 교통이, 1928년경부터는 화물자동차 교통이 형성되었다.

6·25전쟁을 계기로 군사적 목적에 의하여 확장된 남한의 도로는 1962년 이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크게 발전하여 산업도로·고속도로·관광도로 등이 건설되었다. 수송의 고속화와 지역 간의 연계성을 증대시켜 전국을 1일생활권으로 묶은 고속도로는 1968년 12월 경인고속도로를 시작으로, 1970년대에 경부·호남·남해·영동·구마 등의 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그 후 동해·부마·올림픽고속도로 등이 계속 건설되었다.

1989년 10월 대구~춘천 간 중앙고속도로, 1991년 12월 인천~목포 간 해안고속도로가 각각 착공되어 교통량의 분산과 지역발전에 큰 기여를 할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도로교통량은 수도권·부산·대구·광주·대전 등의 대도시 및 그 주변지역과 대구∼부산, 포항∼부산∼마산, 서울∼춘천 등의 구간에 집중되어 있고, 고속도로는 경인·경부·구마 고속도로에 집중되어 있다.

2000년 현재 남한의 고속도로 총연장은 2,131.2㎞에 달하고, 2004년까지는 3,500㎞를 신설할 예정이다. 도로는 2000년 현재 총연장 8만 8775㎞(포장 6만 7265.5㎞)이다. 2000년 현재 전국의 자동차수는 총 1205만 9276대로 1999년보다 약 9만 대가 늘었다.

철도교통은 1899년 9월 노량진∼제물포 33.2km의 경인선 개통으로 시작되었고, 1900년 7월 현재의 서울역까지 연장되었다. 그후 일제는 대륙침략과 식민지 수탈을 목적으로 1905년 이후 경부선·경의선·호남선·경원선·중앙선 등을 건설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경부선과 경의선을 복선화(複線化)하였다.

8·15광복 후 남한에서는 산업개발, 지역 간의 상호결합 및 각 경제권 간의 신속한 교통연락을 위하여 태백선·영동선·3비인입선·호남정유선·종합제철선 등의 산업철도(産業鐵道)를 건설하고, 충북선과 경북선을 연장하였으며 경인선과 호남선 일부를 복선화하였다.

철도 형태는 서울을 중심으로 8·15광복 전에는 X자형을, 그 후에는 방사상 형태를 이루었고, 지형상의 특수성 때문에 중앙선의 죽령에 루프식, 영동선의 통리∼나한정 구간에 스위치백식, 개마고원의 장진선·부전선에 인클라인식 등의 특이한 형태도 있다. 철도교통은 전철화(電鐵化)로 큰 변화를 가져왔다. 1973년 이후 청량리∼제천∼고한∼백산 간, 철암∼북평 간 산업선이 전철화되어 무연탄·각종 광산물 등을 신속하고 안전하게 대량으로 소비시장에 운반하고 있다.

또한 1974년 이후 서울∼인천, 서울∼수원 및 신설동∼잠실종합운동장 간의 개통에 이어, 서울순환철도(2호선), 당고개~금정,지축~오리, 산본~안산 간 등의 지하철이 완성되어 서울에 집중되어 있는 인구 및 산업시설의 분산과 함께 새로이 도시교외 지역을 형성하고 있으며, 1999년 현재도 수도권 및 부산에 지하철이 확충 또는 신설되고 있다.

철도교통은 주로 무연탄·시멘트·유류·광석·비료·양곡 등 중량이 큰 화물을 수송한다. 철도 총연장은 광복 당시 전국 32개 노선에 6,362km(남한 3,642km)였다. 화물수송은 중앙선·영동선·태백선·경부선 등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1992년 6월 착공되어 2003년 완공 예정인 경부고속철도는 서울~부산 간을 2시간에 달릴 수 있는 초고속 수송수단으로 경부선 수송능력의 2배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며, 기존 철도와 고속도로의 여객수요를 대량 흡수하여 고속도로의 운행속도 향상과 기존 철도를 화물 위주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1998년 현재 철도 총연장은 6580.2㎞이고 이중 영업노선은 3,124㎞, 전철은 661.3㎞이다. 2000년 현재 철도 영업노선은 3,123㎞이다.

하천은 내륙교통(內陸交通)이 발달하기 전에 주요 내륙교통로의 구실을 하였다. 이에 따라 하천 연변에는 도(渡)·진(津)·포(浦) 등의 문자가 붙은 도진취락(渡津聚落)이 발달하였다. 대동강 연안의 평양·송림, 한강 연안의 서울·충주·여주·양화진, 금강 연안의 공주·부여, 압록강 연안의 의주·만포, 예성강 연안의 벽란도, 낙동강 연안의 구포·안동, 금강 연안의 부강·강경, 영산강 연안의 영산포, 섬진강 연안의 하동 등은 하천을 끼고 발달한 도읍들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내륙수운은 계절에 따른 수량의 변화 및 중부지방 이북의 하천이 겨울에 결빙되는 등의 불리한 여건 외에, 도로·철도 등의 육상교통 수단에 그 기능이 넘어가면서 급격히 쇠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해상교통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3포(제물포·부산·원산)가 개항되면서 시작되었다. 1984년에는 조운을 원활히 하기 위해 운송국(運送局)을 설치하고 창룡호(536톤)·현익호(709톤)·해룡호(1,027톤) 등 증기선 3척을 독일에서 구입하였다.

일제는 대외 통상무역의 신장과 대륙침략 정책의 일환으로 1915년 이후 원산∼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하여 일본·중국 방면의 대외항로를 개설하였으며, 1930년 이후는 일본과 대륙의 거리를 단축시키기 위하여 청진·나진·웅기 등을 발전시켰다.

광복 이후 해상교통은 1957년경부터 원양어업(遠洋漁業)에 발맞추어 새로운 활기를 띠었으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경제건설과 무역신장에 힘입어 물동량이 급증함에 따라 부산·인천항이 확장되었고, 동해·울산·포항·삼일항 및 군산외항 등이 건설되었다.

현재 연안항로는 육지와 황해 및 남해도서 간에 많고 부산∼제주, 목포∼제주, 목포∼홍도, 포항∼울릉도 등의 항로에는 최신형 쾌속정(快速艇)이 운항되고 있으며, 인천∼백령도, 군산∼어청도, 목포~흑산도 등의 노선에는 명령항로(命令航路)가 개설되어 있다.

국제선으로는 1970년 6월 부산∼시모노세키[下關]의 부관연락선(釜關連絡船)이 개통되어 운항되고 있다. 화물수송은 동남아·중동지방·북아메리카·일본 등지와 빈번하다. 2000년의 등록선박은 6494척에 615만 2793톤이고 하역 능력은 포항·부산·인천·동해 등의 항구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항공교통은 1929년 4월 일본항공회사(JAL)가 도쿄[東京]에서 서울·대구·평양 등지에 화물과 우편물의 정기수송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8·15광복 후 1948년 10월 대한국민항공사(Korean National Airlines:KNA)가 설립되어 서울~부산 간을 중심으로 국내선을, 1954년 이후 서울∼타이베이[臺北]∼홍콩을 잇는 국제선을 운항하였다. KNA는 1962년에 대한항공(Korea Airlines)으로 이름을 바꾸어 국영으로 운영되다가, 1969년 한진상사가 인수하여 다시 민영이 되었다.

특히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개최를 앞두고 1988년 2월 아시아나항공이 설립, 12월부터 국내선에 취항하면서 2개 회사의 경쟁시대로 접어들었다. 1989년 시행된 해외여행 자유화 시책으로 항공수요가 급증하여 김포국제공항 등이 포화상태에 있다. 한편 영종도와 용유도 사이의 간석지를 매립하여 1992년 11월 착공된 영종국제공항은 동북아시아 최대·최첨단 시설 갖춘 인천국제공항으로서 2001년에 1차로 개항했다.

2001년 2월 현재 한국과 항공협정을 체결한 나라는 모두 77개국으로 아시아 22개국, 중동 10개국, 아프리카 10개국, 미주 7개국, 유럽 25개국, 오세아니아 3개국이다. 1999년 항공기 보유대수는 모두 259대로 수송기 157대, 경비행기 34대 등이다. 2000년 국제항공의 운송량은 승객이 1950만 5000명, 화물이 195만 1000톤으로 1999년에 비하여 각각 16.2%, 13.4% 증가하였다.

10. 통신

전신·전화가 발명되기 전에는 한국에서 통신수단으로 역원제·봉수제 등이 있었으나, 현대적 의미의 통신은 1884년 4월 22일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치되고, 그 해 11월 18일 최초로 5종의 우표를 발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갑신정변으로 인해 잠시 침체되었다가 1895년 6월 서울과 인천에 우체사(郵遞司)를 설치하면서 우편사업이 재개되었다.

1897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된 만국우편연합(UPU) 제5차 총회에서 연합의 개정조약에 서명하였고, 1900년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함과 동시에 선진국과 동일한 제도 아래 외국과의 우편업무가 개시되었으며, 그 관리기구인 통신원(通信院)이 설치되어 우체국의 증설, 우표의 국내인쇄, 우편엽서 등을 취급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식민 위주의 통신정책이 시행되었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우편업무도 체신부가 관장하여 자주적 우편사업을 운영하게 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1면(面) 1우체국 정책’을 추진하여 8·15광복 당시 646개이던 우체국이 1966년에는 1,728개국으로 늘어났다. 1983년 우편취급소 제도를 시행한 이후 1995년 현재 우체국은 3,394곳에 이른다.

1970년 7월 1일부터는 5자리 우편번호제가 실시되었고, 1988년에는 이용자 중심의 6자리 번호체계로 개편하였다. 경제성장과 함께 발전한 우편서비스는 현재 우편주문판매·국내특급우편·민원우편·전자우편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다. 1994년 8월에는 만국우편연합 제21차 총회가 서울에서 열려 172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서울우편전략’을 채택하였으며, 1~4종으로 분류되던 우편물이 1994년 10월부터 빠른우편과 보통우편 2종류로 종별체계를 간소화시켰다.

한편 근대적 전신·전화 체계는 1885년 9월 28일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신시설 개통과, 1902년 3월 20일 한성과 제물포 간의 전화가 개통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해 6월에는 한성전화소에서 전화교환업무를 개시하여 시내전화업무가 시작되었으나 1905년 4월 한·일통신협정의 체결로 통신권을 일본에게 빼앗겼다.

1945년 12월 한·미 간 최초의 국제직통무선전화가 개통되었으나 6·25전쟁으로 인해 전신·전화 시설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52년 1월 국제전기통신연합(ITU)에 가입하였으며, 1965년 12월 가입전신(텔렉스) 업무를 개시하여 경제개발을 위한 효과적인 통신인프라 조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70년에는 위성통신지구국 운영을 시작하고 전화청약 우선순위제도 및 전화가입 청약가납금제도를 시행하여 백색·청색 전화제도가 실시되었다.

1971년 3월 서울~부산 간 장거리자동전화(DDD)가 개통되었으며, 1975년 11월에는 가입전화 시설이 100만 회선을 돌파하였다. 그 후 지속적인 전화수요에 대처하고 전기통신분야를 국가전략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1982년 1월 1일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족되었으며, 3월에는 데이터 통신 서비스를 위한 한국데이터통신(주) 가 설립되었다.

1983년 8월 미국·일본 등 24개국 27개 지역에 국제자동전화(IDD)가 개통되었으며 전신전화가입 청약가납금제도가 폐지되었다. 같은 해 12월 전기통신기본법과 공중전기통신사업법이 제정되었다.

1984년 3월에는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 서비스 제공을 위하여 한국이동통신서비스(주)가 설립되어 같은 해 5월 7일 서울에서 자동방식의 차량전화가 개통되는 등 새로운 개념의 무선통신 서비스가 도입되기 시작하였고, 1986년 3월에는 전화번호표시방식의 무선호출서비스도 개시되었다.

이후 지속적인 기술개발과 정보화 사회를 위한 통신전략의 개념 아래 정부의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져 1987년 가입전화시설 1000만 회선을 달성하였으며, 1993년에는 2000만 회선을 돌파하여 세계 제8위의 통신시설 보유국이 되어 1가구 1전화시대로부터 개인이 전화를 보유하는 개인통신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1998년에는 가입전화시설 2310만 회선, 이동통신 860만 개를 돌파하였다.

한편 1994년 12월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개편되어 국가 정보기반 구축과 산업경쟁력 강화를 도모하고 21세기 정보화시대에 대비한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에 주력하고 있으며, 전기통신에 이어 정보통신이 통신산업의 중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정보가 전기통신과 컴퓨터 기술에 의해 처리되면서 전기통신은 정보통신으로 확대되어 불리게 되었으며, 다양한 정보의 통신을 가능하게 하는 B-ISDN(광역종합정보통신망), IN(지능망시스템)의 확대와 이동통신의 주류인 아날로그 셀룰러시스템에서 디지털로 전환된 디지털이동통신시스템으로 통신서비스의 전체수요가 차츰 발전하고 있다.

또한 1995년 8월 국내 최초의 통신·방송 복합위성인 무궁화호가 발사되어 한국 통신역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기통신사업은 국가기간산업으로서 독점사업자 체제를 유지해왔으며, 1990년 7월 체신부의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에 따라 한국통신은 정보통신사업에, 데이콤은 국제 음성통신사업에 참여하여 본격적인 경쟁체제를 출범시켰다.

정보통신부는 1998년의 통신시장 전면개방에 대비하여 1995년 7월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하고 1995년 하반기 중에는 국제전화·개인휴대통신·주파수공용통신·발신전용휴대전화·무선데이터통신·무선호출·전용회선사업 등에 대한 신규사업자의 참여를 허용하고, 1996년에는 시외전화·위성통신서비스·저궤도 위성통신에도 신규진출을 허용하는 등 완전한 경쟁체제로 바뀌었다.

한편 21세기 국가경쟁력의 핵심기반이 될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계획인 KII (Korea Information Infrastructure) 계획을 수립하고 1994~2015년까지 광케이블망 구축사업과 ATM(비동기모드)교환망을 단계적으로 도입하게 되며, 이러한 국가 초고속정보통신망을 통해 전자민원·입체영상회의·원격의료·원격교육·주문형 비디오·전자도서관·지리정보시스템·슈퍼컴퓨터 간 병렬처리 데이터 전송·고화질(高畵質) TV의 영상정보통신서비스 등이 현재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시범 실시되고 있다.

11. 국민생활

한국사회는 지난 30여년간 산업화와 그에 따른 도시화로 인하여 전통적인 한국인의 삶의 양식으로 크게 변모 되어왔다. 우리나라 산업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낮아져 농촌은 인구감소와 함께 낙후현상을 경험하고 상대적으로 도시는 팽창되어 산업시설의 집중과 인구과밀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촌향도와 도시중심의 사회개발에 따른 도시의 과대성장과 인구집중은 각종 도시문제를 야기시키고 도시하류층을 형성시키기도 하였으나 한편에서는 도시생활의 확대팽창으로 많은 국민들이 보다 양질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하였다.

한편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조직과 가치관은 새로운 가치관과 사회조직의 원리로 대체되었다. 친족이나 지역연고성의 비중은 약화되고 합리적이고 공식적인 원리가 점차 사회조직의 원리로 정착되고 있으며, 출산률의 저하와 사회이동의 증가에 따라 가족형태는 소규모 핵가족이, 그리고 가족내 관계는 가부장권의 약화와 여성의 지위향상에 따른 평등한 가족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등 가족, 여성, 결혼등에 대한 새로운 관념이 등장하였다.

한편 지난 30여년간의 경제성장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가능케 하였으나, 지역간 불균형발전, 도농(都農)간 빈부격차와 격차의 심화에 따른 사회심리적 소외현상과 갈등을 야기시키고 있다. 대중매체의 발전과 확대보급은 전국민이 균등하게 폭넓고 다양한 사회문화생활의 영위를 가능하게 하며, 지리적 폐쇄성을 극복하여 국민생활을 하나의 의식과 관심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정치적 이유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정부의 확대 강화되어왔다. 경제성장을 위한 국민의 동원, 각종의 혁신을 위한 새마을운동과 같은 관주도의 운동이나 정치적 필요에 의한 행정력을 강화시켜 관료행정이 국민생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였으며, 또한 사회의 다양한 조직들도 점차 관료적 형태를 띄어감에 따라 전사회의 관료제화가 심화되고 있다.

한편 국민들의 의식수준 향상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민주주의가 점차 확대발전되어, 1993년에는 민간정부가 출현되고, 1995년에는 지방자치가 실시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한 기틀을 다져놓았다. 생활, 교육, 의식 수준의 향상은 사회각종 부문에서 관이나 특정계층 편의 위주의 일방적인 관행보다는 주민의 적그적인 의사표현과 참여를 통한 환경운동, 시민운동 등의 보다 낳은 삶에 대한 요구와 주인의식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한국사회에 현대적인 삶이 파급되면서 이에 따른 대중사회의 특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급격한 도시화에 따른 농촌의 고령화와 낙후, 소비나 향략중심의 도시문화가 매스미디어를 통해 급속하게 확대되면서 나타나는 가종 비행과 사회문제, 급속한 산업화에서 오는 환경파괴, 정치적 격변속에서의 지역간 대결, 빈부격차의 심화에서 오는 계층간 위화감, 서구문화의 급속한 유입에따른 가치관의 혼란 등의 부작용을 유발하였다.

일부 부유층의 과소비와 향량적 문화, 서구문화의 무절제한 수용, 사회에서의 심리적 좌절과 감정적 유대 등이 확산되고 있다. 한편 중류계층의 확대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욕구는 각종 오락과 여가활동의 확대를 통한 각종 문화 와 레저산업, 프로스포츠 활성화 등 대중문화현상이 확대팽창되고 있다.

지난 30여년 동안의 경제적 발전에 따른 풍요로운 생활,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구의 충족, 서구문화의 급격한 유입과 전통문화의 파괴 등 국민생활의 변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급격한 한국인들의 생활변화는 주로 물량적인 확대와 팽창이 중심을 차지하는바, 앞으로는 물량적인 측면 뿐 아니라 한국인의 삶의 질을 진정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질적인 측면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지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요구된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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