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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30 (수)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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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050      
[고대] 광개토왕릉비 (금석)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

시대 : 고구려
연대 : 414년(장수왕3년)
유형/재질 : 비문 / 응회암(凝灰岩)
문화재지정 : 기타문화재 - 국외
크기 : 높이 6.39m/아래부분 너비 1면 1.48m, 2면 1.35m, 3면 2.00m, 4면 1.46m/기단길이 3.35m, 너비 2.7m
출토지 :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
소재지 : (중국)-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
서체 : 예서(隸書)

개관

광개토왕릉비는 414년(장수왕 3)에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현재 중국 길림성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있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광개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조선시대에 광개토왕릉비를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 황제의 비로 이해하였으며, 1880년 무렵에 이끼와 넝쿨을 제거하고 능비를 새롭게 조사한 결과 광개토왕릉비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능비는 높이 6.39m의 웅장한 화강암으로 서체는 예서(隸書)이다. 글자는 1775자를 새겼는데, 이 가운데 150여 자의 판독이 어렵다. 비의 내용은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추모왕(鄒牟王:동명성왕), 유류왕(儒留王:유리왕), 대주류왕(大朱留王:대무신왕)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적에 관하여 기술하였고, 두번째 부분에서는 광개토왕 일대에 이루어진 정복활동을 기록하였다. 마지막 세번째 부분에서는 능비를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의 숫자와 출신지, 그와 관계된 법령을 서술하였다. 현재 능비에는 광개토왕대의 영토확장과 5세기 고구려의 천하인식, 그리고 삼국과 왜와의 국제관계 등에 관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어 고대사 연구의 일급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신묘년조(辛卯年條)의 기사는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하여 한일 역사학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가. 비의 상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릉비(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는 장수왕 3년(414)에 세워졌다. 능비(陵碑)는 중국의 길림성 집안시(구 집안현) 태왕향(太王鄕) 구화리(九華里) 대비가(大碑街)에 서있다. 능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태왕릉(太王陵)이 있고, 동북쪽 약 1.3km에 장군총이 있다. 비석은 자갈돌이 중간 중간에 박혀 있는 응회암(凝灰岩)인데, 별로 많이 가공치 않은 자연석 그대로의 장방형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높이는 6.39m이며, 윗면과 아래면이 약간 넓고 허리부분이 약간 좁은 모양을 하고 있다. 아래부분의 너비로 계산하면, 제1면(동남방향)이 1.48m, 제2면(서남방향)이 1.35m, 제3면(서북방향)이 2.00m, 제4면(동북방향)이 1.46m이다. 비의 기단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화강암으로서, 여기에 홈을 파고 능비를 세웠다.

비석 각 면의 외곽에 홈을 파서 비문이 들어갈 윤곽을 긋고, 다시 그 내에 세로선을 그어 각 행을 표시하였다. 1면이 11행, 2면이 10행, 3면이 14행, 4면이 9행으로 모두 44행이며, 글자는 1,775자로 여겨진다. 이중 150여 자가 판독 불능 상태이다.

비문의 서체(書體)는 예서(隸書)이다. 그러면서도 초(草)ㆍ해(楷)의 각체(各體)가 부분부분 반영되어 혼합(混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자형(字形)은 정방형(正方形)을 견지하고 있다. 글자의 크기는 균등하지 못해서 큰 것은 길이가 16cm, 작은 것은 약 11cm 정도이다. 다수의 글자는 14~15cm 정도이며, 배합과 간격은 비교적 균등하다.

비문의 내용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고구려국의 기원 전설 및 추모왕(鄒牟王), 유류왕(儒留王), 대주류왕(大朱留王) 등 3대의 왕위계승과 광개토왕의 행장(行狀)에 대한 간략한 기술로 되어 있다. 둘째 부분에는 광개토왕 일대에 행해진 정벌 활동을 담은 훈적(勳績)을 기술하였다. 셋째 부분에선 능비의 수호(守護)를 위한 수묘인(守墓人)의 숫자와 그 출신지 및 그에 관계된 영(令)을 새겨 놓았다. 이 가운데 어느 부분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비문의 성격을 훈적비(勳績碑), 신도비(神道碑) 또는 수묘비(守墓碑) 등으로 규정하는 등 설이 분분하였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형식의 비는 여타의 예가 알려진 바가 없다. 세 요소 모두를 포괄하고 있는 독특한 형식이며, 그 성격 또한 그러하다.

능비의 비면은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후 이끼와 넝쿨을 제거키 위해 지른 불에 의해 크게 손상을 입었다. 그 뒤 거듭된 탁본과 석회를 발라 문자(文字)를 보수(補修)하는 등의 작위(作爲)에 의해 적지 않은 글자가 훼손되었다. 비신(碑身) 자체도 천수백년의 오랜 풍우(風雨)와 화재(火災)로 풍화(風化)되고 균열이 생겼다. 정상부에 균열이 있고, 비신 내부에도 균열이 생겨, 두드리면 궁궁하는 소리가 울려 온다고 한다. 곧 비신 내부에 공동(空洞)이 생긴 것이다.

능비의 보호를 위해 1928년 목조 비각(碑閣)을 세웠는데, 그것을 허물고 다시 1983년 새로 비각을 세웠다. 그리고 1965년 중국문물보호연구소(中國文物保護硏究所)에서 비신(碑身) 정상부의 균열부위를 통해 합성수지 에포킨 등의 접착제를 주입하였다. 그러나 비신의 밑부분에서 공음(孔音)이 여전히 들려 균열된 부분이 완전히 접착되지 못한 상태라서, 1976년과 1979년 두 차례 더 접착제를 주입하였다. 1961년 이래 「광개토왕릉비」를 포함하여 집안평야의 고묘군이 중국의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어 오고 있다.

나. 능비에 대한 옛 기록

능비가 우뚝 서 있는 국내성(國內城)지역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뒤에도 별도(別都)로서 정치ㆍ문화의 주요 중심지였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의 영역이 되어 이곳에 항주(桓州)가 설치되었고, 집안(集安)지역의 고분 중에는 발해시대에 축조된 것이 적지 않다. 그 후 이곳은 금대(金代)에는 동경도(東京道)의 파속부(婆速府) 관할 아래 있었고, 원대(元代)에는 동령로(東寧路)에 속하였는데, 변경의 벽지에 불과하였다. 고려측의 기록에도 이곳에 관한 것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주요 무대에서 벗어나 산간 오지로 되어갔다. 그러다가 고려 말기 공민왕 18년(1369) 12월에 조정에서 일만오천의 군사를 보내 원의 동령부(東寧府)를 공격케 하니, 이듬해 정월 이성계(李成桂) 등이 우라산성(于羅[五女]山城)을 공략하였다. 국내성지역은 일시 고려군의 장악 하에 들어갔었다. 이때 고려인이 이 지역에 대해 알게된 지식은 뒷날 용비어천가에 반영되어졌다. 즉 조선왕조 세종대에 왕실 조상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용비어천가를 편찬하였는데, 그 39장에서 이성계의 동령부 원정의 공적을 찬송하면서 그 주해(註解)에 집안(集安)지역에 황성(皇城)이 있고 그 북쪽 7리 되는 곳에 큰 비석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이 414년 이후 처음 확인되는 능비에 대한 기록이다. 이어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이 지역을 황성평(皇城坪)이라 하였고, 장군총을 황제묘(皇帝墓)라고 하였다. 또한 성현(成俔), 심광언(沈光彦) 등과 같은 조선 사대부들이 만포진에 들러, 강건너 집안지역의 성(城)과 고비(古碑) 및 석총(石塚) 등을 바라보며, 황성(皇城)의 폐허와 국경(國境)의 정경에 대한 감회를 담은 시(詩)를 남기었다. 그러나 그 유적을 여진족의, 금(金)의 것으로 여기었다. 당시 15세기 이후 여진족의 건주야인(建州野人)들이 이 지역에 옮겨와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치 않았던 것 같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서북계(西北界)에 관한 각종 지도에서도 이곳의 지명을 황성평(皇城坪)이라 하였으며, 계속 금(金)의 고도(古都)로 여겼던 것 같다.

다. 능비의 재발견(再發見)

17세기 이후 청의 봉금정책(封禁政策)에 따라 이 지역은 사실상 주민이 살지 않았다가, 19세기 후반 이후 인구의 유입과 개간이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1876년에 회인현(懷仁縣)이 설치되었다. 이어 1880년 무렵 「광개토왕릉비」가 재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능비의 표면은 두터운 이끼로 덮혀 있었는데, 이를 소똥을 발라 불을 질러 태워서 제거하였다. 그에 따라 비면(碑面)에 큰 손상이 가해졌다.

능비의 재발견 이후 탁본(拓本)이 행해졌으나, 비면의 요철이 심하고 탁본 재료와 기술의 부족으로 원석(原石) 정탁(精拓)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행해진 것은 비면에 종이를 붙이고 가볍게 두드려 글자의 윤곽을 뜬 뒤 글자가 없는 자리에 먹을 칠하는 이른바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거나, 또는 글자의 윤곽을 모사(模寫)한 뒤에 빈 자리에 묵을 칠하는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었다. 이러한 것은 자의적이든 아니든 간에 글자에 대한 오독(誤讀)이나 조작이 가능한 것이다. 그 뒤 북경의 금석문 애호가들에게 능비의 존재가 알려져, 1880년 후반 전문 탁공(拓工)을 북경에서 파견해 원석탁본(原石拓本)을 뜨게 하였다. 현재 알려진 원석 탁본 중 그 제작년대를 명기한 발문(跋文)이 있는 것으로서는 임창순(任昌淳) 소장본이 유명하다. 1889년 이운종(李雲從)이 탁본한 것이다. 그 뒤 언젠가부터 능비에 석회(石灰)가 발라졌고, 그런 상태에서 탁본이 행해졌다. 20세기 이후의 것은 이러한 석회탁본(石灰拓本)이었다. 한편 1907년에는 일본군이 능비를 일본으로 반출하려는 기도가 있었다.

라. 능비 연구사

능비의 내용 자체에 대해 먼저 본격적인 관심을 보였던 것은 일본측이었다. 1880년 청에 파견된 일본 육군의 스파이 주구경신(酒勾景信) 중위가 집안지역으로부터 능비의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이라기도 하고 묵수곽전본(墨水廓塡本)이라기도 하는 것을 가지고 1883년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어 약 5년간 일본 육군참모본부에서 비문에 관한 연구가 비밀리에 진행되어, 1888년 그 결과를 세상에 공포하였다. 그 뒤 일본인 학자들에 의한 연구가 이어졌다. 그 주된 관심은 신묘년조(辛卯年條)를 중심으로 한 고대한일관계사의 측면이었고, 능비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는 결정적 증거로 강조되었다. 한편 중국학계에서도 능비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었으나, 역사연구와 결부된 본격적인 논의는 미미하였다.

우리 학인들의 능비에 대한 거론은, 1910년대에 신채호(申采浩)의 현지답사와 간략한 언급이 있었다. 그 뒤 아마도 1930년대 말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지는 정인보(鄭寅普)의 연구가 이에 대한 본격적인 첫 시도였다. 정인보(鄭寅普)의 연구는 신묘년조(辛卯年條)의 기사를 일본학계의 통설과는 달리, '渡海破'의 주어를 고구려로 보아 재해석하는 것이었고, 이른바 '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다.

해방 후 능비연구는 당분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일본학계에선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대한 연구를 위시한 전전(戰前)의 일본고대사연구에서 보인 문제점들에 대한 광범위한 자체 비판이 있었으나 「광개토왕릉비문」은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뒷받침하고 일본 고대국가 발달과정을 증언하는 부동(不動)의 지표(指標)로서 간주되어, 그 존재와 그리고 비문의 내용에 대한 기존의 일본학계의 통설이 더욱 강조되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수곡제이랑(水谷悌二郞)이 능비의 판독을 정밀히 한 「호태왕비고(好太王碑考)」를 발표하여(1959), 능비 연구에 새로운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그 뒤 60년대 중반 북한학계에서 정인보의 학설을 계승한 박시형의 능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가 발표되었다. 이는 고대한일관계사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을 촉구하는 김석형의 『초기조일관계사』와 함께, 능비에 대한 재론을 촉발하였다. 그런 면은 이진희의 비문조작설의 발표에 의해 증폭되었다. 특히 이진희의 설은 능비 연구의 출발점인 비문 판독 자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함에 따라, 광범위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능비의 발견 경위, 각종 현전 탁본이 만들어진 시기, 비문 조작여부, 판독상의 문제, 비문 해석상의 문제 등등 능비에 관한 여러 측면이 재론되게 되었고, 그리고 현장답사와 능비의 재조사, 각종 원석 탁본에 대한 검토 등이 행해졌다. 그에 따라 왕건군(王健群), 무전행남(武田幸男) 등의 저서와 많은 논문들이 남북한, 일본, 중국, 대만학계에서 발표되었다. 현재까지 능비에 관한 논문과 저서는 수백 편에 달하며, 그 연구사만으로도 단행본이 출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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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논문) 徐建新, 1993, 「王培眞「好太王碑原石拓本的新發見及其硏究」」『世界歷史』2
64. (논문) 徐建新, 1993, 「高句麗好太王碑硏究史槪述」『世界史硏究同態』10
65. (논문) 耿鐵華, 1993, 「集安高句麗歷史與好太王碑」『高句麗硏究文集』(耿鐵華ㆍ孫仁杰 편) 延邊大 出版社
66. (논문) 橫山昭一, 1993, 「東京都目黑區所藏拓本について」『廣開土王碑と古代日本』, 東京都目黑區敎育委員會編, 學生社
67. (논문) 鈴木靖民, 1993, 「四五世紀の高句麗と倭」『廣開土王碑と古代日本』, 東京都目黑區敎育委員會編, 學生社
68. (논문) 浜田耕策, 1993, 「高句麗廣開土王碑硏究の步み」『廣開土王碑と古代日本』, 東京都目黑區敎育委員會編 學生社
69. (논문) 武田幸男, 1993, 「碑文からみた四五世紀の高句麗」『廣開土王碑と古代日本』, 東京都目黑區敎育委員會編, 學生社
70. (논문) 武田幸男, 1993, 「その後の廣開土王碑硏究」『年報朝鮮學』3
71. (논문) 李亨求, 1993, 「廣開土王陵碑 硏究 -所謂 辛卯年記事와 庚子年記事를 中心으로-」『國史館論叢』45, 국사편찬위원회
72. (단행본) 朴眞奭, 1993, 『호태왕비와 고대조일관계연구』, 연변대학출판사 ; 1993, 서광학술자료사
73. (단행본) 白崎昭一郞, 1993, 『廣開土王碑文の硏究』 吉川弘文館
74. (단행본) 東京都目黑區敎育委員會編, 1993, 『廣開土王碑と古代日本』, 學生社
75. (논문) 李鍾旭, 1992, 「廣開土王陵碑의 辛卯年條에 대한 해석」『韓國上古史學報』10, 한국상고학회
76. (논문) 李進熙, 1992, 「廣開土王陵碑をめぐる論爭」『靑丘學術論集』2, 韓國文化硏究振興財團
77. (논문) 李進熙, 1992, 「廣開土大王陵碑를 둘러싼 近年의 論爭」『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論叢 韓國史學論叢』
78. (논문) 王健群, 1992, 「集安高句麗好太王碑」『中國文物報』1992, 3, 8
79. (논문) 王會庵, 1992, 「漫話'好太王碑」『中國文物報』1992, 4, 12
80. (논문) 耿鐵華, 1992, 「好太王碑'辛卯年'句考釋」『考古與文物』1992-4
81. (논문) 武田幸男, 1992, 「中國最初期の廣開土王碑文硏究 -傅雲龍と王志修の場合-」『西巖趙恒來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아세아문화사
82. (논문) 松原孝俊, 1992, 「神話學から見た「廣開土王碑文」」『朝鮮學報』145, 朝鮮學會
83. (논문) 李鍾旭, 1992, 「廣開土王陵碑 및 『三國史記』에 보이는 '倭兵'의 正體」『한국사시민강좌』11, 일조각
84. (단행본)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1992,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85. (논문) 耿鐵華(엄성흠 역), 1991, 「高句麗好太王碑」『中國學界의 高句麗史 認識』, 대륙연구소 출판부 ; 1984, 『文物天地』1984-6 ; 1985, 「高句麗好太王碑及び高句麗王朝と好太王について」『市民の古代』7
86. (논문) 王健群(엄성흠 역), 1991, 「好太王碑'의 발견과 탑본」『中國學界의 高句麗史 認識』, 대륙연구소 출판부 ; 1983, 「好太王碑的發現和捶拓」『社會科學戰線』1983-4
87. (논문) 金昌鎬, 1991, 「廣開土大王碑 辛卯年條의 再檢討--日本學界의 任那日本府說에 대한 反論(2)」『鄕土史硏究』3, 한국향토사연구협의회
88. (논문) 劉永智(엄성흠 역), 1991, 「好太王碑의 발견에 관한 몇 가지 문제」『中國學界의 高句麗史 認識』, 대륙연구소출판부 ; 1985, 「好太王碑的發現及其他」『社會科學戰線』1985-1 ; 1985,ꡔ『季刊邪馬台國』26
89. (논문) 王仲殊, 1991, 「再論好太王碑文辛卯年條的釋讀」『考古』1991-12
90. (논문) 高寬敏, 1991, 「廣開土王碑文のいわゆる辛卯年條について」『年報』2, 大坂經法大ㆍアジア硏
91. (단행본) 星野良作, 1991, 『廣開土王碑硏究の軌跡』, 吉川弘文館
92. (논문) 孔錫龜, 1990, 「廣開土王陵碑의 東夫餘에 대한 考察」『韓國史硏究』70, 한국사연구회
93. (논문) 李藤龍, 1990, 「廣開土大王碑文에 쓰인 '烟'字의 語彙的 意味」『碧史李佑成敎授停年退職紀念論叢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창작과 비평사
94. (논문) 박진석, 1990, 「호태왕비문을 통하여 본 주몽왕과 그의 출신」『조선학연구』2
95. (논문) 王仲殊, 1990, 「關于好太王碑文辛卯年條的釋讀」『考古』1990-11
96. (논문) 耿鐵華, 1990, 「好太王碑的保護與現狀」『文博』1990-2
97. (논문) 丁少山, 1900, 「好太王碑攷釋」『高麗國永樂好太王碑釋文纂攷』
98. (논문) 鈴木靖民, 1990, 「廣開土王碑文の「倭」關係記事 -最近の硏究成果をめぐって-」『東アジア古文書の史的硏究』, 唐代史硏究會編 刀水書院
99. (논문) 浜田耕策, 1990, 「朝鮮に傳わった廣開土王陵碑文 -「增補文獻備考」所載碑文の淵源-」『東アジア古文書の史的硏究』, 唐代史硏究會編 刀水書院
100. (논문) 浜田耕策, 1990, 「故足立幸一氏寄贈の京都府立福知山高校所藏の廣開土王碑拓本について」『學習院大學東洋文化硏究所調査硏究報告』24
101. (논문) 白崎昭一郞, 1990, 「廣開土王碑拓本の編年」『福井考古學會會誌』8
102. (논문) 高寬民, 1990, 「榮樂10年, 高句麗廣開土王の新羅救援戰につい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7, 朝鮮史硏究會
103. (논문) 朴鐘大, 1990, 「日本의 廣開土王陵碑文硏究와 任那問題論證分析」『加羅文化』8, 경남대 가라문화연구소
104. (논문) 전대준, 1990, 「『삼국사기』와 「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숙신의 정체」『력사과학』 1990-2(134)
105. (논문) 金賢淑, 1989, 「廣開土王碑를 통해 본 高句麗守墓人의 社會的 性格」『韓國史硏究』65, 한국사연구회
106. (논문) 박진석, 1989, 「호태왕비문을 통하여 본 임나일본부의 존재여부 문제(1)」『력사과학』1989-1ㆍ2
107. (논문) 孫進己, 1989, 「好太王碑」『 東北古史資料叢編』2
108. (논문) 耿鐵華, 1989, 「高句麗好太王碑 -兼記高句麗王朝和好太王」『文物天地』1989-6
109. (논문) 星野良作, 1989, 「酒匂景信將來の廣開土王陵碑文の一考察 -碑文最末'倭'字の由來をめぐって」『硏究と評論』
110. (논문) 白崎昭一郞, 1989~1992, 「好太王碑文考證 (1)~(10)」『古代日本海文化』18~26, 古代日本海文化硏究會
111. (논문) 笠井倭人, 1989, 「好太王碑水谷拓本の一考察」『日本歷史』497
112. (논문) 山尾幸久, 1989, 「高句麗廣開土王碑銘の史料批判」『古代日朝關係』, 塙書房
113. (단행본)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廣開土王碑硏究序說-, 岩波書店
114. (논문) 盧泰敦, 1988, 「5세기 金石文에 보이는 高句麗人의 天下觀」『韓國史論』19, 서울대 국사학과
115. (논문) 賈士金, 1988, 「集安の歷史文物と高句麗遺跡」『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四,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 讀賣新聞社
116. (논문) 佐伯有淸, 1988, 「解說 [實事求是]のために」『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四,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 讀賣新聞社
117. (논문) 千寬宇, 1988, 「광개토왕의 정복활동」『韓國史市民講座』3, 일조각
118. (논문) 채희국, 1988, 「광개토왕릉비문의 해석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력사과학』1988-2(126)
119. (논문) 趙仁成, 1988, 「廣開土王陵碑를 통해 본 高句麗의 守墓制」『韓國史市民講座』3, 일조각
120. (논문) 李亨求, 1988, 「廣開土王陵碑 碑文의 특징」『韓國史 市民講座』3, 일조각
121. (논문) 李道學, 1988, 「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 지식산업사
122. (논문) 李基東, 1988, 「광개토왕비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韓國史市民講座』3, 일조각
123. (논문) 손영종, 1988, 「광개토왕릉비 왜관계기사의 올바른 해석을 위하여」『력사과학』1988-2
124. (논문) 徐榮洙,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下)」『歷史學報』120, 역사학회
125. (논문) 耿鐵華, 1988, 「好太王碑的國烟看烟及其身分問題」『求是學刊』1988-4
126. (논문) 耿鐵華, 1988, 「好太王碑發見時期について 新たな檢討」『市民の古代』10
127. (논문) 中小路駿逸, 1988, 「好太王碑文私見」『市民の古代』10
128. (논문) 佐竹保子, 1988, 「中國碑文文字におけゐ三百年代後半の轉換 -廣開土王碑の文子との關連-」『シンポジウム日本文化と東アジア』
129. (논문) 王健群, 1988, 「好太王碑硏究に關するいくつかの問題」『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 讀賣新聞社
130. (논문) 鈴木靖民, 1988, 「好太王碑の倭の記事と倭の實體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讀買テレビ放送編』, 木耳社
131. (논문) 浜田耕策, 1988, 「好太王碑をめぐる爭點 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讀買テレビ放送編』, 木耳社
132. (논문) 武田幸男, 1988, 「好太王の時代 -4ㆍ5世紀の高句麗と東アジア-好太王碑と集安の壁畵古墳 -躍動する高句麗文化-」『讀買テレビ放送編』, 木耳社
133. (논문) 武田幸男, 1988, 「廣開土王碑の拓本を求めて」『朝鮮學報』126, 朝鮮學會
134. (논문) 方基東, 1988, 「千秋墓, 太王陵, 將軍塚」『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 讀賣新聞社
135. (논문) 耿鐵華, 1988, 「好太王碑火前無完整拓本」『考古與文物』1988-1 ; 1988, 「好太王碑は火で燒かれる以前に完全な拓本ながつた」『市民の古代』10
136. (논문) 徐榮洙, 1988,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中)」『歷史學報』119, 역사학회
137. (논문) 王健群, 1988, 「好太王碑硏究に關するいくつかの問題」『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四,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 讀賣新聞社
138. (논문) 方起東, 1988, 「千秋墓, 太王陵, 將軍塚」『好太王碑と高句麗遺蹟』-四,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 讀賣新聞社
139. (단행본) 武田幸男, 1988, 『廣開土王碑原石拓本集成』, 東京大出版會
140. (논문) 延敏洙, 1987, 「廣開土王碑에 보이는 倭關係記事의 檢討」『東國史學』21, 동국사학회
141. (논문) 福宿南嶋, 1987, 「好太王碑文を讀む」『書道硏究』1
142. (논문) 山田宗睦, 1987, 「「好太王碑論爭の解明」 書評」『市民の古代』9
143. (논문) 星野良作, 1987, 「酒匂景信將來の廣開土王碑文」『東アジア古代文化』50
144. (논문) 千歲龍彦, 1987, 「好太王碑の諸問題 -藤田右治「好太王碑論爭の解明」を讀んで」『古代史の硏究』7, 關西大ㆍ古代史硏究會
145. (논문) 星野良作, 1987, 「酒匂景信將來の廣開土王碑文の復元的硏究」『東アジアの日本--考古美術篇 -』
146. (논문) 比田井南谷, 1987, 「わが好太王碑拓本考」『書道硏究』1
147. (논문) 武田幸男, 1987, 「廣開土王碑の百濟と倭」『百濟硏究』17, 忠南大 百濟硏究所
148. (논문) 조희승, 1987, 「광개토왕릉비문에 대한 몇가지 문제」『조선고고연구』21
149. (논문) 古畑徹, 1987, 「廣開土王碑の發見ㆍ採拓に關する若干の史料紹介」『朝鮮學報』123, 朝鮮學會
150. (논문) 金子鷗亭, 1987, 「好太王碑の書について」『書道硏究』1
151. (논문) 김유철, 1986, 「고구려의 광개토왕릉비에 나타난 왜의 성격」『력사과학』1986-1(117)
152. (논문) 徐榮洙, 1986, 「『광개토대왕비 신연구』서평」『精神文化硏究』29
153. (논문) 劉永智, 1986, 「「高句麗碑出土記」芻議」『學術硏究叢刊』1986-4
154. (논문) 王健群, 1986, 「申采浩對好太王碑的論述和他的輯安紀聞」『博物館硏究』1986-3
155. (논문) 羅繼祖 외, 1986, 「簡談好太王碑字體」『博物館硏究』1986-1
156. (논문) 鈴木英夫, 1986, 「廣開土王碑文加羅關係記事の基礎的硏究」『千葉史學』8
157. (논문) 浜田耕策, 1986, 「高句麗廣開土王陵墓比定論の再檢討」『朝鮮學報』119ㆍ120, 朝鮮學會
158. (논문) 福宿孝夫, 1986ㆍ1989, 「好太王碑の文字硏究 -字體の考察と書體の史的解明 (1)~(6)」『紀要』60~65, 宮崎大 敎育ㆍ人文科學
159. (논문) 武田幸男, 1986, 「講演 : 好太王碑の難しさ」『會報』27, 近代詩文書作家協會
160. (논문) 古田武彦, 1986, 「好太王碑の資料批判 -共和國(北朝鮮)と學者に問う-」『紀要』20, 昭和藥科大
161. (논문) 손영종, 1986, 「광개토왕릉비문에 보이는 '수묘인연호'의 계급적 성격과 립역방식에 대하여」『력사과학』1986-3
162. (논문) 李基東, 1986, 「廣開土王陵碑文에 보이는 百濟關係記事의 檢討」『百濟硏究』17, 충남대 백제연구소
163. (논문) 손영종, 1986, 「광개토왕릉비를 통하여 본 고구려의 령역」『력사과학』1986-2(118)
164. (단행본) 藤田友治 著ㆍ 古田武彦 解說, 1986, 『好太王碑論爭の解明』 -改ざん說を否定する-, 新泉社
165. (단행본) 李亨求 ㆍ朴魯嬉, 1986,『廣開土大王陵碑新硏究』, 同和出版公社
166. (단행본) 藤田友治 著ㆍ 古田武彦 解說, 1986, 『好太王碑論爭の解明』-改ざん說を否定する-, 神泉社
167. (논문) 閔泳珪, 1985, 「鄭薝園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校錄幷序」『東方學志』46ㆍ47ㆍ48합집, 연세대 국학연구원
168. (논문) 朴性鳳, 1985, 「廣開土好太王期의 內政整備에 대하여」『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정음문화사
169. (논문) 李亨求, 1985,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僞字考 -中國 王健群의 論文을 보고-」『千寬宇先生還曆紀念 韓國史學論叢』, 정음문화사
170. (논문) 劉永智, 1985, 「好太王碑的發見及其他」『社會科學戰線』1985-1
171. (논문) 劉永智, 1985, 「好太王碑の發見およびその他」『季刊邪馬台國』26
172. (논문) 王健群, 1985, 「和好太王碑硏究有關的幾個問題」『博物館硏究』1985-1
173. (논문) 吳琦幸, 1985, 「叶昌熾與好太王碑硏究」『社會科學戰線』1985-4
174. (논문) 高明士, 1985, 「高句麗好太王碑硏究の近況を展望する」『季刊邪馬台國』26
175. (논문) 高洁, 1985, 「在長春召開的好太王碑討論會」『博物館硏究』1985-4
176. (논문) 高句麗史硏究會, 1985, 「現代語譯 廣開土王碑文」『季刊邪馬台國』23
177. (논문) 李進熙, 1985, 「好太王碑を現地に訪ねて」『季刊三千里』 44
178. (논문) 李進熙, 1985, 「最近の廣開土王陵碑にかんする論爭 -王健群氏の新說と國際シンポジウム-」『玄岩 申國柱博士華甲記念 韓國學論叢』, 東國大
179. (논문) 李進熙,(何桂玲譯) 1985, 「廣開土王陵碑文解析的攻防戰」『韓國硏究』7
180. (논문) 李進熙, 1985, 「廣開土王陵碑文の共同調査 -四ㆍ五世紀の東アジアと日本-好太王碑を中心に-」『アジア公論』14-7
181. (논문) 鈴木靖民, 1985, 「好太王碑文の倭記事」『東アジアの古代文化』44
182. (논문) 辛澄惠, 1985, 「廣開土王碑と朝鮮族」『季刊三千里』43
183. (논문) 西嶋定生, 1985, 「廣開土王碑文辛卯年條の讀み方について」『三上次男博士喜壽記念論文集 -歷史編-』, 平凡社
184. (논문) 上田正昭ㆍ李進熙, 1985, 「(對談)好太王碑と近代史學」『季刊三千里』42
185. (논문) 山田宗睦, 1985, 「討論 好太王碑をめぐって」『市民の古代』7
186. (논문) 藤田友治, 1985, 「好太王碑の新たな論爭點 -倭の正體と守墓人制度について-」『市民の古代』7
187. (논문) 旗田巍, 1985, 「廣開土大王碑文と古代日韓關係史」『高句麗文化展』
188. (논문) 宮崎雅弘, 1985, 「高句麗廣開土王碑に見える「倭」について」『季刊邪馬台國』26
189. (논문) 古畑徹, 1985, 「(批評ㆍ紹介) 王健群著"好太王碑の硏究"」『東洋史硏究』44-2
190. (논문) 古田武彦, 1985, 「好太王碑と九州王朝」『市民の古代』7
191. (논문) 古田武彦, 1985, 「中國の好太王碑硏究の意義と問題點 -王健群氏に問う-」『市民の古代』7
192. (논문) 古田武彦, 1985, 「疑考ㆍ好太王碑 -王健群說をめぐって-」『古代史を疑う』, 駸駸堂出版
193. (논문) 崔文誠, 1985, 「最近 廣開土王陵碑 硏究의 動向과 그 論爭點(1)」『慶州史學』4, 경주사학회
194. (논문) 朴鐘大, 1985, 「廣開土王陵碑文 解釋의 問題點 (上) -日本學界의 對倭記錄에 대한 釋文을 中心으로-」『加羅文化』3, 경남대 가라문화연구소
195. (단행본) 金根洙 編, 1985, 『廣開土王碑 硏究資料集』, 永信아카데미 韓國學硏究所
196. (단행본) 三上次男, 1985, 『シンポジウム好太王碑』
197. (단행본) 李進熙, 1985, 『好太王碑の謎』-日本古代史を書きかえる-, 講談社
198. (단행본) 寺田隆信ㆍ井上秀雄 編, 1985, 『好太王碑探訪記』, 日本放送出版協會
199. (논문) 金瑛河, 1984, 「廣開土大王碑와 倭 -辛卯年記事의 缺字補入을 중심으로-」『弘益史學』창간호, 홍익대 사학회
200. (논문) 久保田穰, 1984, 「一辯護士の見た李進熙氏の「廣開土王陵碑」の硏究」『季刊邪馬台國』22
201. (논문) 無記名, 1984, 「好太王碑六年丙申(三九六年)ㆍ八年戊申(三九八年)條の考釋」『季刊邪馬台國』22
202. (논문) 白崎昭一郞, 1984, 「廣開土王碑は何を語ゐか」『季刊邪馬台國』22
203. (논문) 鯨淸, 1984, 「入門ㆍ廣開土王碑をめぐゐ論爭」『季刊邪馬台國』22
204. (논문) 高明士, 1984, 「勞貞一院士を訪ね高句麗好太王碑を談ず」『季刊邪馬台國』22
205. (논문) 明智, 1984, 「「廣開土境平安好太王陵碑文釋略」初評」『學術硏究叢刊』1984-1
206. (논문) 高明士, 1984, 「臺灣所藏的高句麗好太王碑拓本」『韓國史硏究』45 ; 1984, 「臺灣所藏の高句麗好太王碑拓本」『季刊邪馬台國』22
207. (논문) 高明士, 1984, 「臺灣所藏的高句麗好太王碑拓本 補述 -兼述好太王碑硏究送況」『韓國學報』4
208. (논문) 耿鐵華, 1984, 「高句麗好太王碑」『文物天地』1984-6
209. (논문) 井上秀雄, 1984, 「廣開土王碑の現地に立つ」『季刊邪馬台國』22
210. (논문) 藤田友治, 1984, 「好太王碑論爭の決着 -中國側現地調査ㆍ王論文の意義と古田說について」『市民の古代』6
211. (논문) 李進熙, 1984, 「日本에서의 廣開土王陵碑 硏究」『東方學志』43, 연세대 국학연구원
212. (단행본) 韓國篆刻學硏究會, 1984, 『廣開土大王碑』
213. (단행본) 王健群, 1984, 『好太王碑硏究』, 吉林人民出版社 ; 1984, 『好太王碑の硏究』, 雄渾社 ; 1985, 『廣開土王碑 硏究』, 역민사
214. (논문) 旗田巍, 1983, 「廣開土王陵碑文の諸問題」『日本人の韓國觀』
215. (논문) 藤田友治, 1983, 「好太王碑改削說への反證」『市民の古代』5
216. (논문) 星野良作, 1983, 「廣開土王碑文硏究の新展開 -李亨求氏の新說に接して-」『日本古代政治史論考』(佐伯有淸編), 吉川弘文館
217. (논문) 王健群, 1983, 「廣開土王碑六年丙申ㆍ八年戊戌條考釋」『學習與探素』4
218. (논문) 王健群, 1983, 「好太王碑的發現和捶石」『社會科學戰線』1983-4 ; 1984 「好太王碑の發見と採石」『季刊邪馬台國』22
219. (논문) 高明士, 1983, 「訪勞貞一院士談高句麗好太王碑」『韓國學報』3
220. (논문) 劉永智, 1983, 「關于'好太王碑'論爭的問題」『東北史硏究』1983-1
221. (논문) 王健群, 1983, 「好太王碑文譯注(上ㆍ下)」『博物館硏究』1983-1, 3
222. (논문) 高明士, 1983, 「臺灣所藏的高句麗好太王碑拓本」『韓國學報』(臺灣) ; 1984, 『季刊邪馬台國』22
223. (논문) 星野良作, 1983, 「廣開土王碑文硏究の新しい展開」『廣場』113(1月)
224. (논문) 白崎昭一郞, 1983, 「廣開土王碑の問題點」『藤澤一先生古稀紀念古文化論叢』
225. (논문) 徐榮洙, 1982, 「廣開土大王陵碑文의 征服記事 再檢討(上)」『歷史學報』96, 역사학회
226. (논문) 金子鷗亭, 1982, 「好太王碑ㆍ爨寶子碑」『古碑帖臨書精選』2-24 日貿出版
227. (논문) 劉永智, 1982, 「好太王碑'辛卯年'記事初探」『學術硏究叢刊』1982-6
228. (논문) 王健群, 1982, 「好太王碑乙未年紀事考釋」『博物館硏究』1982-1
229. (논문) 李進熙(李基東譯), 1982, 「變造된 碑文」『廣開土王陵碑의 探求』, 일조각
230. (논문) 浜田耕策, 1982, 「好太王碑文の一二の問題」『歷史公論』77
231. (논문) 佐伯有淸, 1982, 「明治二十一年本"高句麗古碑考"の成立」『名古屋大學日本史論集』下, 吉川弘文館
232. (단행본) 李進熙(李基東譯), 1982, 『廣開土王陵碑의 探求』, 일조각
233. (논문) 田中俊明, 1981, 「高句麗の金石文 -硏究の現狀と主題-」『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234. (논문) 金廷學, 1981, 「廣開土王碑文에 나타난 韓日關係」『日本學』1, 동국대 일본학연구소
235. (논문) 金永萬, 1981, 「增補文獻備考本 廣開土王碑銘에 대하여 -廣開土王碑文의 新硏究(2)-」『新羅加耶文化』12, 영남대 신라가야문화연구소
236. (논문) 長正統, 1981, 「九州大學所藏好太王碑拓本の外的硏究」『朝鮮學報』99ㆍ100, 朝鮮學會
237. (논문) 段成桂, 1981, 「好太王碑 略述」『書法』1981-3
238. (논문) 末松保和, 1981, 「好太王碑文硏究の流れ -水谷悌二郞氏の硏究を中心として」『東アジア世界における日本古代史講座』3 ; 1996 『高句麗と朝鮮古代史』, 吉川弘文館
239. (논문) 李亨求 외, 1981, 「廣開土王陵碑文의 所謂辛卯年記事에 對하여 -僞作 "倭"字考-」『東方學志』29, 연세대 국학연구원 ; 1982, 「廣開土王陵碑文のいわゆる辛卯年記事」『アジア公論』 11ㆍ12月
240. (단행본) 朴魯姬, 1981, 『廣開土大王陵碑文字考及其硏究』
241. (논문) 金永萬, 1980, 「廣開土王陵碑의 新硏究(1)」『新羅加耶文化』11. 영남대 신라가야문화연구소
242. (논문) 坂元義種, 1980, 「好太王碑文--碑文第二段の記述法からみた辛卯年記事を中心に」『ゼミナ-ル日本古代史』下, 光文社
243. (논문) 沈載完. 1980. 「廣開土王碑 書體攷」『新羅伽倻文化』11, 영남대 신라가야문화연구소
244. (논문) 鄭杜熙, 1980, 「廣開土王陵碑辛卯年記事の再檢討」『アジア公論』24
245. (단행본) 權敬愛, 1980, 『廣開土王陵碑文解釋의 再整理』
246. (단행본) 李進熙, 1980, 『廣開土王碑と七支刀』, 學生社
247. (논문) 朴性鳳, 1979, 「廣開土好太王期 高句麗 南進의 性格」『韓國史硏究』27, 한국사연구회
248. (논문) 鄭杜熙, 1979, 「廣開土王碑文 辛卯年記事의 再檢討」『歷史學報』82, 역사학회
249. (논문) 武田幸男, 1979, 「廣開土王碑からみた高句麗の領域支配」『東洋文化硏究所紀要』78, 東京大 東洋文化硏究所
250. (논문) 武田幸男, 1979, 「高句麗廣開土王期の對外關係記事」『三上次男頌壽紀念東洋史ㆍ考古學論集』
251. (논문) 千寬宇, 1979, 「廣開土大陵碑文 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일조각
252. (논문) 末松保和, 1978, 「好太王碑と私」『末松保和古稀紀念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 ; 1996, 『高句麗と朝鮮古代史』, 吉川弘文館
253. (논문) 友田吉之助, 1978, 「好太王碑文と顓頊曆紀年法」『紀要』1, 鳥根医大
254. (논문) 笠井倭人, 1978, 「廣開土王碑に對るす石炭塗付作戰說への疑問」『末松保和古稀紀念 古代東アツア史論集』上, 吉川弘文館
255. (논문) 武田幸男, 1978, 「廣開土王碑文辛卯年條の再吟味」『井上光貞博士還曆紀念 古代史論叢』上 吉川弘文館
256. (논문) 武田幸男, 1978, 「高句麗好太王碑にみえる歸王について」『末松保和古稀紀念 古代東アジア史論集』上
257. (논문) 旗田巍, 1977, 「廣開土王陵碑の諸問題」『好太王碑と任那日本府』
258. (논문) 金仁顥, 1977, 「廣開土王碑の改ざんについて -金鍾武博士の新しい見解は誤り-」『アジア公論』6-5
259. (논문) 金鍾武, 1977, 「好太王碑について」『韓』60, 韓國硏究院
260. (논문) 末松保和, 1977, 「好太王碑硏究の落穗」『日本歷史』368, 日本歷史學會
261. (논문) 中塚明, 1977, 「近代日本學史における朝鮮問題 -とくに「廣開土王陵碑」をめぐって」『好太王碑と任那日本府』(李進熙著), 學生社
262. (논문) 佐伯有淸, 1977, 「廣開土王碑文硏究への警醒」『古代の東アジアと日本』
263. (논문) 星野良作, 1977, 「日本古代史の基本的問題--廣開土王碑の謎」『任那と日本』
264. (논문) 末松保和, 1977, 「水谷悌二郞著 「好太王碑考」解說」『好太王碑考』, 開明書院
265. (논문) 金仁顥, 1977, 「好太王碑文の改ざんの直接證據」『東アジアの古代文化』15
266. (단행본) 文定昌, 1977, 『廣開土大王勳績碑文論』, 백문당
267. (단행본) 佐伯有淸, 1977, 『七支刀と廣開土王碑』
268. (논문) 高斗東, 1976, 「廣開土王陵碑文詳釋」『月刊文化財』52, 월간문화재사
269. (논문) 李進熙, 1976, 「好太王碑と近代史學」『季刊三千里』7
270. (논문) 岡田英弘, 1976, 「廣開土王と仁德天皇」『倭國の時代 -現代史としての日本古代史-』
271. (단행본) 佐伯有淸, 1976, 『廣開土王碑と參謀本部』, 吉川弘文館
272. (논문) 千寬宇, 1975, 「廣開土王陵碑의 解釋問題」『韓國史의 再照明』, 독서신문사
273. (논문) 金在鵬, 1975, 「私の日本古代史硏究 -好太王碑文と私-」『朝日アジアレビュ-』23
274. (논문) 林屋辰三郞, 1975, 「古代の日本と朝鮮 -廣開土王陵碑前後-」『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26
275. (논문) 佐藤治郞, 1975, 「讀書ノ-ト 佐伯有淸著 "硏究史廣開土王碑"」『歷史評論』302
276. (논문) 泊勝美, 1975, 「高句麗好太王碑の謎」『任那日本府はなかった』
277. (논문) 金在鵬, 1975, 「好太王碑文の敍法と解釋」『日本古代國家と朝鮮』
278. (논문) 平野邦雄, 1975, 「大和王權と朝鮮 -廣開土王陵碑の問題點-」『岩波講座日本歷史』1(原始および古代 1)
279. (논문) 古田武彦, 1974, 「直接證據と間接證據 -好太王碑文」『酒切本の來歷--東アジアの古代文化』3
280. (논문) 武田幸男 외, 1974, 「座談會 廣開土王陵碑と古代東アジア」『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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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 (논문) 佐伯有淸, 1974, 「高句麗廣開土王碑文硏究と紀年論爭 -參謀本部の古代日朝關係史觀」『古代朝鮮と日本』, 龍溪書舍
288. (논문) 李進熙, 1974, 「皇國史觀は克服されたか -廣開土王陵碑の問題をめぐって-」『歷史と文學』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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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 (논문) 佐伯有淸, 1973, 「高句麗廣開土王碑をめぐる諸問題 -李進熙氏の所論によせて」『歷史學硏究』401, 歷史學硏究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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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논문) 水井哲雄, 1973, 「高句麗廣開土大王碑文の將來者をめくる一.二の史料追加にいて」『日本歷史』295, 日本歷史學會
307. (논문) 梅原末治, 1973, 「高句麗廣開土王陵碑に關する旣往の調査と李進熙氏の同碑の新說について -付 その王陵なと-」『日本歷史』302, 日本歷史學會
308. (논문) 金鐘武, 1973, 「わたしが見た廣開土王碑 -碑文僞造の可能性と少ない-」『アジア公論』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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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논문) 佐伯有淸, 1973, 「高句麗廣開土王の碑文と日本」『古代史の謎探る』; 1974, 『古代の朝鮮と日本』, 學生社
311. (논문) 旗田巍, 1973, 「廣開土王陵碑文の諸問題」『アジアレビュ一』14
312. (논문) 古田武彦, 1973, 「好太王碑文'改削'說への批判 -李進熙氏「廣開土王の硏究」について-」『史學雜誌』82-8, 東京大
313. (논문) 千寬宇, 1973, 「廣開土王陵碑と任那問題」『韓』2-3, 韓國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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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 (논문) 旗田巍, 1972, 「僞作の思想史的意味 -好太王碑文と『南淵書』」『讀賣新聞』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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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 (논문) 中塚明, 1971, 「近代日本史學史における朝鮮問題 -とくに「廣開土王陵碑」をめぐって」『思想』5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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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 (논문) 太田亮, 1928, 「高麗好太王碑」『日韓古代史資料』
380. (논문) 今西龍, 1927, 「廣開土境好太王陵碑に就いて」『朝鮮古史の硏究』
381. (논문) 今西龍, 1927, 「廣開土境好太王陵碑に就いて」『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382. (논문) 靑柳南冥, 1927, 「好太王古碑の說明」『朝鮮國寶遺物及古蹟大全』
383. (논문) 金毓黻, 1925, 「高句麗好太王碑釋文」『遼東文獻徵略』
384. (논문) 羅叔言, 1925, 「高麗好太王碑跋」『遼東文獻徵略』 ; 1934 『奉天通志』
385. (논문) 葛城末治, 1923, 「廣開土王陵碑圖販ㆍ釋文ㆍ解說」『書道全集』6
386. (논문) 歐陽輔, 1923, 「高麗好太王碑」『集古求眞』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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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 (논문) 鄭文焯, 1922, 「高麗國永榮好太王碑釋文纂攷」『海東金石苑補遺』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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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0. (논문) 鄭文, 1920, 「高麗國永樂好太王碑文簒考」『州交通圖書館大山房全書本』
391. (논문) 黑板勝美, 1919, 「好太王碑に就て」『歷史地理』32-5
392. (논문) 藤田亮策, 1918, 「滿洲國安東省輯安縣に於けゐ高句麗遺蹟の調査」『靑丘學叢』23, 靑丘學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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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논문) 種村宗人, 1915, 「高句麗好太王碑說明」『日本古代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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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논문) 楊守敬, 1909, 「高句麗廣開土好太王談德碑跋」『高麗好太王碑』, 增訂寰宇貞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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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논문) 羅振玉, 1909, 「高麗好太王碑釋文及拓本」『神州國光集』9
412. (단행본) 上海有正書局, 1909, 『舊拓好太王碑』
413. (논문) 羅振玉, 1908, 「高麗好太王碑釋文」『國粹學報』4-10
414. (논문) 羅振玉, 1908, 「好太王碑」『俑廬日札』
415. (논문) 羅振玉, 1907, 「高麗好太王陵碑跋」『唐風樓金石文字跋尾』
416. (논문) 浜田耕作, 1906, 「高句麗好太王碑の話」『早稻田興風學會雜誌』10-3
417. (논문) 白鳥庫吉, 1905, 「滿洲地名談 -附好太王の碑文に就て」『白鳥庫吉全集』第5卷
418. (논문) 白鳥庫吉, 1905, 「好太王の碑文に就いて」『中央公論』20-8
419. (논문) 榮禧, 1903, 「高句麗永樂好太王墓碑讕言」『古高句麗永樂大王墓碑文攷』
420. (논문) 盛昱, 1900, 「好太王碑釋文纂攷」『高麗國永樂好太王碑釋文纂攷』
421. (논문) 吳重熹, 1900, 「高麗永樂好太王碑釋文纂攷後跋」『高麗國永樂好太王碑釋文纂攷』
422. (논문) 鄭文焯, 1900, 「高麗國永樂好太王碑跋」 高麗國永樂好太王碑釋文纂攷』
423. (논문) 三宅米吉, 1898, 「高麗古碑考」『考古學會雜誌』2-1 ; 1929, 『三宅米吉著述集』下
424. (논문) 三宅米吉, 1898, 「高麗古碑考(續き) 古瓦銘榻寫附」『考古學會雜誌』2-2 ; 1929 『三宅米吉著述集』下
425. (논문) 三宅米吉, 1898, 「高麗古碑考追加」『考古學會雜誌』2-5 ; 1929, 『三宅米吉著述集』下
426. (논문) 王志修, 1895, 「高句麗永樂大王碑攷」『高句麗永樂好太王古碑歌攷』
427. (논문) 那珂通世, 1893, 「高句麗古碑考」『史學雜誌』47~49, 東京大 ; 1915, 『那珂通世遺書』, 大日本圖書株式會社 ; 1958, 『外交繹史』, 岩波書店
428. (논문) 管政友, 1891, 「高麗好太王碑銘考」『史學雜誌』2-9ㆍ10ㆍ11ㆍ12, 東京大
429. (논문) 徐樹釣, 1890, 「高句麗好太王碑釋文」『寶鴨齋題跋』卷上
430. (논문) 酒匂景信, 1889, 「高句麗古碑」『會餘錄』第5集
431. (논문) 橫井忠直, 1889, 「高句麗古碑(寫眞石版)ㆍ高句麗碑出土記ㆍ高句麗古碑考ㆍ高句麗古碑釋文」『亞細亞協會會餘錄』5
432. (논문) 邨岡良弼, 1888, 「高句麗古碑」『如蘭社話』8

관련 금석문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덕흥리고분묘지명ㆍ묵서명(德興里古墳墓誌銘墨書銘)
광개토왕호우(廣開土王壺杅)
태왕릉출토전명(太王陵出土塼銘)
모두루묘지명(牟頭婁墓誌銘)

판독문


(第一面)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郎剖卵降世生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郎鄒牟王爲我連葭浮龜應聲卽爲」
連葭浮龜然後造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王於忽本東履」
龍頁昇天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大朱留王紹承基業遝至十七世孫國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號爲永樂大王恩澤洽于皇天武威振被四海掃除▨▨庶寧其業國富民殷五穀豊熟昊天不」
弔卅有九寔駕棄國以甲寅年九月廿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焉其詞曰」
永樂五年歲在乙未王以稗麗不▨▨人躬率往討過富山負山至鹽水上破其三部洛六七百營牛馬群」
羊不可稱數於是旋駕因過襄平道東來▨城力城北豊五備▨遊觀土境田獵而還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軍討伐殘國軍▨▨」
首攻取寧八城臼模盧城各模盧城幹氐利城▨▨城閣彌城牟盧城彌沙城▨舍蔦城阿旦城古利城▨」
利城雜珍城奧利城勾牟城古模耶羅城頁▨▨▨▨城▨而耶羅城瑑城於利城▨▨城豆奴城沸▨▨」

(第二面)
利城彌鄒城也利城太山韓城掃加城敦拔城▨▨▨城婁賣城散那城那旦城細城牟婁城于婁城蘇灰」
城燕婁城析支利城巖門▨城林城▨▨▨▨▨▨▨利城就鄒城▨拔城古牟婁城閏奴城貫奴城彡穰」
城曾▨城▨▨盧城仇天城▨▨▨▨▨其國城殘不服義敢出百戰王威赫怒渡阿利水遣刺迫城▨▨」
歸穴▨便圍城而殘主困逼獻出男女生口一千人細布千匹跪王自誓從今以後永爲奴客太王恩赦▨」
迷之愆錄其後順之誠於是得五十八城村七百將殘主弟幷大臣十人旋師還都八年戊戌敎遣偏師觀」
愼土谷因便抄得莫▨羅城加太羅谷男女三百餘人自此以來朝貢論事九年己亥百殘違誓與倭和」
通王巡下平穰而新羅遣使白王云倭人滿其國境潰破城池以奴客爲民歸王請命太王恩慈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官軍方至倭賊退」
       ▨▨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城卽歸服安羅人戌兵▨新羅城▨城倭寇大潰城▨」
                ▨▨盡▨▨▨安羅人戌兵新▨▨▨▨其▨▨▨▨▨▨▨言」

(第三面)
▨▨▨▨▨▨▨▨▨▨▨▨▨▨▨▨▨▨▨▨▨▨▨▨▨▨辭▨▨▨▨▨▨▨▨▨▨▨▨▨潰」
▨▨▨▨安羅人戌兵昔新羅寐錦未有身來論事▨國上廣開土境好太王▨▨▨▨寐錦▨▨僕勾」
▨▨▨▨朝貢十四年甲辰而倭不軌侵入帶方界▨▨▨▨▨石城▨連船▨▨▨王躬率▨▨從平穰」
▨▨▨鋒相遇王幢要截盪刺倭寇潰敗斬煞無數十七年丁未敎遣步騎五萬▨▨▨▨▨▨▨▨▨師」
▨▨合戰斬煞蕩盡所獲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還破沙溝城婁城▨住城▨城▨▨▨▨▨」
▨城廿年庚戌東夫餘舊是鄒牟王屬民中叛不貢王躬率往討軍到餘城而餘▨國駭▨▨▨▨▨▨▨」
▨▨王恩普覆於是旋還又其慕化隨官來者味仇婁鴨盧卑斯麻鴨盧椯社婁鴨盧肅斯舍鴨盧▨▨▨」
鴨盧凡所攻破城六十四村一千四百守墓人烟戶賣句余民國烟二看烟三東海賈國烟三看烟五敦城」
民四家盡爲看烟于城一家爲看烟碑利城二家爲國烟平穰城民國烟一看烟十訾連二家爲看烟俳婁」
人國烟一看烟卌三梁谷二家爲看烟梁城二家爲看烟安夫連廿二家爲看烟改谷三家爲看烟新城三」
家爲看烟南蘇城一家爲國烟新來韓穢沙水城國烟一看烟一牟婁城二家爲看烟豆比鴨岑韓五家爲」
看烟勾牟客頭二家爲看烟求底韓一家爲看烟舍蔦城韓穢國烟三看烟廿一古模耶羅城一家爲看烟」
炅古城國烟一看烟三客賢韓一家爲看烟阿旦城雜珍城合十家爲看烟巴奴城韓九家爲看烟臼模盧」
城四家爲看烟各模盧城二家爲看烟牟水城三家爲看烟幹氐利城國烟一看烟三彌鄒城國烟一看烟

(第四面)
    七也利城三家爲看烟豆奴城國烟一看烟二奧利城國烟一看烟八須鄒城國烟二看烟五百」
殘南居韓國烟一看烟五太山韓城六家爲看烟農賣城國烟一看烟七閏奴城國烟二看烟廿二古牟婁」
城國烟二看烟八瑑城國烟一看烟八味城六家爲看烟就咨城五家爲看烟彡穰城廿四家爲看烟散那」
城一家爲國烟那旦城一家爲看烟勾牟城一家爲看烟於利城八家爲看烟比利城三家爲看烟細城三」
家爲看烟國上廣開土境好太王存時敎言祖王先王但敎取遠近舊民守墓洒掃吾慮舊民轉當羸劣」
若吾萬年之後安守墓者但取吾躬巡所略來韓穢令備洒掃言敎如此是以如敎令取韓穢二百廿家慮」
其不知法則復取舊民一百十家合新舊守墓戶國烟卅看烟三百都合三百卅家自上祖先王以來墓上」
不安石碑致使守墓人烟戶差錯唯國上廣開土境好太王盡爲祖先王墓上立碑銘其烟戶不令差錯」
又制守墓人自今以後不得更相轉賣雖有富足之者亦不得擅買其有違令賣者刑之買人制令守墓之」

[출전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판독자 : 노태돈

해석문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王은) 북부여(北夫餘)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 : 水神)의 따님이었다.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성(聖)스러운 … 이 있었다(5字 不明).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었다. 왕이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河伯)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鄒牟王)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여라"라고 하였다. 말이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서,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상(山上)에 성(城)을 쌓고 도읍(都邑)을 세웠다. 왕이 왕위에 싫증을 내니, (하늘님이) 황룡(黃龍)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였다. (이에) 왕은 홀본(忽本)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世子) 유류왕(儒留王)은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大朱留王)은 왕업(王業)을 계승하여 발전시키었다.

17세손(世孫)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였다. (王의) 은택(恩澤)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무(威武)는 사해(四海)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니, 백성이 각기 그 생업에 힘쓰고 편안히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유족해졌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어여삐 여기지 아니하여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니,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 을유(乙酉)에 산릉(山陵)으로 모시었다. 이에 비를 세워 그 공훈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한다. 그 말씀[詞]은 아래와 같다.

패려(稗麗)가 고구려인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므로), 영락(永樂) 5년 을미(乙未)에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부산(富山), 부산(負山)을 지나 염수(鹽水)에 이르러 그 3개 부락(部洛) 600~700영(營)을 격파하니, 노획한 소ㆍ말ㆍ양의 수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이에 王이 행차를 돌려 양평도(襄平道)를 지나 동으로 ▨성(▨城), 역성(力城), 북풍(北豊), 오비▨(五備▨)로 오면서 영토를 시찰하고, 수렵을 한 후에 돌아왔다. 백잔(百殘), 신라(新羅)는 옛부터 고구려 속민(屬民)으로 조공(朝貢)을 해왔다. 그런데 왜가 신묘년(辛卯年)(391년)에 건너와 백잔(百殘)을 파(破)하고 (2字缺) 신라(新羅) … 하여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영락(永樂) 6년(396년) 병신(丙申)에 왕이 친히 군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3字 不明)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首都)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百殘軍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주((百)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천 명과 세포(細布) 천 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百殘主가 저지른) 앞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百殘主)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고 수도로 개선하였다.

영락 8년(398년) 무술(戊戌)에 한 부대의 군사를 파견하여 백신(帛愼 :息愼, 肅愼) 토곡(土谷)을 관찰(觀察), 순시(巡視)하였으며 그 때에 (이 지역에 살던 저항적인) 모▨라성(莫▨羅城) 가태라곡(加太羅谷)의 남녀 삼백여 인을 잡아왔다. 이 이후로 (帛愼은 고구려 조정에) 조공(朝貢)을 하고 (그 내부의 일을) 보고하며 (고구려의) 명(命)을 받았다.

영락(永樂) 9年(399년) 기해(己亥)에 백잔(百殘)이 맹서를 어기고 왜(倭)와 화통하였다. (이에) 왕이 평양으로 행차하여 내려갔다. 그때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아뢰기를, "왜인(倭人)이 그 국경(國境)에 가득 차 성지(城池)를 부수고 노객(奴客)으로 하여금 왜(倭)의 민(民)으로 삼으려 하니 이에 왕께 귀의(歸依)하여 구원을 요청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왕(太王)이 은혜롭고 자애로워 신라왕의 충성을 갸륵히 여겨, 신라 사신을 보내면서 (고구려측의) 계책을 (알려주어) 돌아가서 고하게 하였다.

10년(400년) 경자(庚子)에 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고구려군이)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新羅城 : 國都)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官軍)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고구려군이)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任那加羅)의 종벌성(從拔城)에 이르니 성(城)이 곧 항복하였다. 안라인 수병(安羅人戍兵) … 신라성(新羅城) ▨성(▨城) …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이하 77자 중 거의 대부분이 불명. 대체로 고구려군의 원정에 따른 임나가라지역에서의 전투와 정세변동을 서술하였을 것이다). 옛적에는 신라 매금(寐錦)이 몸소 고구려에 와서 보고를 하며 청명(聽命)을 한 일이 없었는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대(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代)에 이르러 (이번의 원정으로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니) 신라 매금이 … 하여 (스스로 와서) 조공(朝貢)하였다.

14년(404년) 갑진(甲辰)에 왜(倭)가 법도(法度)를 지키지 않고 대방(帶方) 지역에 침입하였다. … 석성(石城) (을 공격하고 … ), 연선(連船 : 水軍을 동원하였다는 뜻인 듯) … (이에 왕이 군대를 끌고) 평양을 거쳐 ( … 로 나아가) 서로 맞부딪치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하였다. (왜구를)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20년(410년) 경술(庚戌), 동부여는 옛적에 추모왕의 속민(屬民)이었는데, 중간에 배반하여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게 되었다. 왕이 친히 군대를 끌고가 토벌하였다. 고구려군이 여성(餘城 : 동부여의 왕성)에 도달하자, 동부여의 온나라가 놀라 두려워하여 (투항하였다). 왕의 은덕이 동부여의 모든 곳에 두루 미치게 되었다. 이에 개선을 하였다. 이때에 왕의 교화를 사모하여 개선군(凱旋軍)을 따라 함께 온 자는 미구루압로(味仇婁鴨盧), 비사마압로(卑斯麻鴨盧), 타사루압로(椯社婁鴨盧), 숙사사압로(肅斯舍鴨盧), ▨▨▨압로(▨▨▨鴨盧)였다. 무릇 공파(攻破)한 성(城)이 64개, 촌(村)이 1,400이었다.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 연호(烟戶)(의 그 出身地와 戶數는 다음과 같이 한다.) 매구여(賣句余) 민은 국연(國烟)이 2가(家), 간연(看烟)이 3가(家). 동해고(東海賈)는 국연이 3가, 간연이 5가. 돈성(敦城)의 民은 4가(家)가 다 간연. 우성(于城)의 1가는 간연으로, 비리성(碑利城)의 2가는 국연. 평양성민(平穰城民)은 국연 1가, 간연 10가(家). 자련(訾連)의 2가(家)는 간연. 배루인(俳婁人)은 국연 1가, 간연 43가. 양곡(梁谷) 2가는 간연. 양성(梁城) 2가는 간연. 안부련(安夫連)의 22가는 간연. 개곡(改谷)의 3가는 간연. 신성(新城)의 3가는 간연. 남소성(南蘇城)의 1가는 국연. 새로 약취(略取)해온 한(韓)과 예(穢)(의 烟戶는 다음과 같다.) 사수성(沙水城)은 국연 1가, 간연 1가. 모루성(牟婁城)의 2가는 간연. 두비압잠(豆比鴨岑) 한(韓)의 5가는 간연. 구모객두(勾牟客頭)의 2가는 간연. 구저한(求底韓)의 1가는 간연. 사조성(舍蔦城)의 한예(韓穢)는 국연 3가, 간연 21가. 고모야라성(古模耶羅城)의 1가는 간연. 경고성(炅古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객현한(客賢韓)의 1가는 간연. 아단성(阿旦城)과 잡진성(雜珍城)은 합하여 10가가 간연. 파노성(巴奴城) 한(韓)은 9가가 간연. 구모로성(臼模盧城)의 4가는 간연. 각모로성(各模盧城)의 2가는 간연. 모수성(牟水城)의 3가는 간연. 간저리성(幹氐利城)은 국연 1가, 간연 3가. 미추성(彌鄒城)은 국연 1가, 간연이 7가. 야리성(也利城)은 3가가 간연. 두노성(豆奴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2가. 오리성(奧利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수추성(須鄒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5가. 백잔남거한(百殘南居韓)은 국연이 1가, 간연이 5가. 태산한성(太山韓城)의 6가는 간연. 풍매성(農賣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7가. 윤노성(閏奴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22가. 고무루성(古牟婁城)은 국연이 2가, 간연이 8가. 전성(瑑城)은 국연이 1가, 간연이 8가. 미성(味城)은 6가가 간연.

취자성(就咨城)은 5가가 간연. 삼양성(彡穰城)은 24가가 간연. 산나성(散那城)은 1가가 국연. 나단성(那旦城)은 1가가 간연(看烟). 구모성(勾牟城)은 1가가 간연. 어리성(於利城)의 8가는 간연. 비리성(比利城)의 3가는 간연. 세성(細城)의 3가는 간연.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이 살아 계실 때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ㆍ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舊民) 110가(家)를 더 데려왔다. 신(新)ㆍ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家)이고 간연(看烟)이 300가(家)로서, 도합(都合) 330가(家)이다.

선조(先祖) 왕들 이래로 능묘에 석비(石碑)를 세우지 않았기 떄문에 수묘인 연호(烟戶)들이 섞갈리게 되었다. 오직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好太王)께서 선조(先祖) 왕들을 위해 묘상(墓上)에 비(碑)를 세우고 그 연호(烟戶)를 새겨 기록하여 착오가 없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왕께서 규정을 제정하시어, '수묘인을 이제부터 다시 서로 팔아넘기지 못하며, 비록 부유한 자가 있을 지라도 또한 함부로 사들이지 못할 것이니, 만약 이 법령을 위반하는 자가 있으면, 판 자는 형벌을 받을 것이고, 산 자는 자신이 수묘(守墓)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출전 : 『譯註 韓國古代金石文』Ⅰ(1992)], 해석자 : 노태돈

출전 :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2005, 국립문화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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