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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4-13 (화)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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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그리스사 (두산)
그리스사 history of Greece

그리스의 역사.

I. 개관

''그리스''는 그리스어로는 헬라스 또는 엘라스, 라틴어로는 그라이키아(Graecia), 영어로는 그리스라고 한다. ''희랍(希臘)''은 헬라스의 한역(漢譯)으로서 한국에서는 차자(借字)로 쓰였다. 고대 그리스인은 동일한 언어 ·종교 ·관습을 가진 민족으로서 자신들을 헬렌(그리스 민족의 先祖)의 자손이라 하여 헬레네스라 자칭하였고,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으며, 이민족을 바르바로이(야만인)라 하여 자신들과 구별하였다.

그리스인의 역사는 약 3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 장구한 기간 중에서도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고전고대로 총칭되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초기에 속하는 BC 8~BC 4세기이다.

서양문화의 근간(根幹)의 하나인 그리스 문화가 독창적으로 크게 융성하였던 때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즉 세계 고대사 중에서도 예외적인 자유시민이 발생하여 그들의 자유로운 사색활동에 따라 독창력 발휘를 가능하게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자유시민의 활동도 그리스인 특유의 공동체적 소국가인 폴리스(도시국가)를 기반으로 하지 않고서는 처음부터 바랄 수 없던 일이었다.

오늘날 고대사 연구가 크게 진전됨에 따라 그리스에서도 폴리스 사회는 원시사회에서 직접 탄생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이전에도 고대 오리엔트 사회와 유사점이 있는 왕국의 병립시대(竝立時代)가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오리엔트형의 고대관료제왕국(古代官僚制王國)의 탄생은 일시적인 현상이었을 뿐, 그것이 멸망한 후에는 얼마 가지 않아서 무수한 폴리스의 병립시대가 나타났다.

그리스의 지형은 80% 이상이 산지여서 가경지(可耕地)라고는 산과 산 사이의 분지(盆地)가 고작이었고, 그 위에 남북을 관통하고 있는 중앙산맥이 다시 동서로 무수한 군소지맥(群小支脈)을 거느려 그야말로 각 지역간의 교통이 종횡으로 분단되어 있었다.

더욱이 이곳은 천연적인 강우에 의지하여 농사와 목축을 행한 지역으로서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이나 중국의 황허강[黃河]유역처럼 치수(治水)와 관개사업(灌漑事業)을 필요로 하지 않아 오리엔트형 통일국가의 성장은 당초부터 크게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수많은 소규모의 고립사회를 형성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립사회(孤立社會)의 형성은 육상활동 무대와 인구의 수용능력을 크게 제한하게 됨으로써 그리스인의 활동방향을 자연히 해상으로 돌려놓았다. 더욱이 그리스는 육로교통이 지극히 불편하였던 반면에, 해안선의 발달과 에게해(海)에서의 해상교통은 크게 발달하였다. BC 8∼BC 6세기에 걸쳐 활발하게 식민활동을 전개하여 지중해 연안과 흑해 연안에 많은 식민시(植民市)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II. 미케네문명시대

그리스인은 인종적으로 에게해 지역의 선주민(先住民)과 인도유럽어족(語族)에 속하는 북방 침입자와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혼합민족이었다. 이들은 그 방언에 따라 아테네인 등이 속하는 동방 방언의 그리스인과 스파르타인 등이 속하는 서방 방언의 그리스인으로 대별되는데, 이 두 파는 동시에 남하하여 정주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자만이 BC 2000년경부터 침입, 그리스 본토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부터 BC 1100년경까지를 미케네 시대라고 하는데, 그것은 펠로폰네소스반도 동부의 미케네에서 강력한 왕국이 나타나 문명의 중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미케네 문명의 선구자는 바로 아카이아계(系)의 초기 그리스인이었으며, 그들은 크레타섬의 크노소스 왕궁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크레타 문명의 영향을 받고 BC 1500년경부터 특색 있는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 문명의 영향과 모방을 위주로 하여 발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대비하여 전략목적의 성벽을 축조하는 등 북방적 요소가 두드러졌던 점에서 크레타 문명과는 구별된다. 즉 평화적이었던 크레타 문명과는 달리 미케네 문명은 전쟁이나 사냥 등 상무적(尙武的)인 제재(題材)와 표현이 많았던 것이 그 특색이었다.

이 시대에 대해서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및 기타의 전설과 몇 가지 유적 등으로 겨우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견이 증대되고, 특히 당시 왕궁에서 사용하던 문서가 출토되어 해독됨으로써 오늘날에는 그 실체를 훨씬 분명하게 파악하게 되었다.

독일의 상인이며 고고학자인 H.슐리만이 1876년에 호메로스가 그의 시(詩)에서 묘사한 트로이의 폐허인 히사를리크 언덕을 발굴하여 경이적인 보물들을 출토해낸 사실이라든지(1870∼90), 1939년 필로스에서 새로이 왕궁터가 발견되고, 또 점토판(粘土板)에 씌어진 많은 문서가 발견된 사실 등이 있다.

‘선상문자(線狀文字) B’라고 불리는 이 음절문자를 50년 체코슬로바키아의 B.흐로즈니가 처음으로 해독을 시도하고, 52년 영국의 M.벤트리스는 이것이 최고(最古)의 그리스어임을 밝혔으며, 62년에는 미국의 C.H.고든이 그 해독을 크게 진전시킴으로써 오늘날에는 미케네 문명의 윤곽을 보다 자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의 전설이 우리의 추측 이상으로 사실(史實)을 훨씬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발견이 뒷받침해 줌으로써 비로소 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미케네 문명도 왕궁 중심으로 번영하였으므로, BC 1200~BC 1100년 사이에 필로스와 미케네 등의 왕궁이 완전히 파괴되자 그와 동시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 파괴를 자행한 자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BC 1200년경부터 남하하기 시작한 제2의 그리스인의 물결, 즉 도리아인과 같은 서방 방언의 무리들이라는 것이 통설로 전해진다.

III. 암흑시대와 폴리스 성립

BC 2000년경 동방 방언군에 속하는 이오니아인과 아이올리아인(아카이아인 포함)이 남하하여(제1차 남하) 아카이아인의 일부가 미케네 문명을 이룩하고, 이어 BC 1200년경부터 서방 방언군의 도리아인이 급격히 남하하여(제2차 남하) BC 1100년경 철기(鐵器)로써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정복, 미케네 문명을 파괴하였다.

그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미케네 문명의 중심이던 왕궁이 파괴되어 문자가 잊혀짐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문자가 없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BC 1100~BC 750년경까지의 이 시기를 편의상 암흑 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역사의 움직임도 분명하지 못하였고, 또 볼 만한 문화의 발달도 없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대하여 전해주는 문서가 별로 없어 자세히는 알 수 없더라도 문자 그대로 정체된 상태로만 계속된 시기만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리스인이 오리엔트적 영향하에 있던 에게 문명을 청산하고 독자적인 그리스 문화를 이룩해내는 과도기(過渡期)로서의 의미를 지닌 중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실로 이 시기는 뒤의 폴리스 탄생을 위한 오랜 준비기간이었으며, 진실한 의미의 그리스 사회는 이 시기에 서서히 태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암흑시대가 끝나가는 BC 8세기를 전후하여 그리스에서는 토지의 사유화(私有化) 경향이 뚜렷해지며, 대토지 소유자로서의 귀족이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게 됨으로써 미케네 시대의 왕정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변천 과정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듯이 왕가(王家)가 계속된 다른 곳에서도 왕권은 점차 쇠퇴해 갔다.

그리하여 경제적 ·군사적으로 이해(利害)를 같이하는 각 부락의 귀족층은 지배와 집단방위(集團防衛)를 위해 편리한 곳(즉, 아크로폴리스)을 골라 집주(集住:synoikismos)를 시작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폴리스의 성립을 보게 된 것이다.

폴리스의 성립은 당시의 전투에서 불가결했던 전차(戰車)와 말을 소유한 귀족들의 지배권이 확립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테네에서도 왕권이 서서히 제한되어 종교적 지도자로 전락된 반면, 귀족의 지배권은 크게 강화되어 마침내 BC 683년부터는 임기 1년인 9명의 집정관(執政官)이 나와 행정 ·사법 ·군사의 대권을 장악하고 귀족의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스파르타에서는 BC 9세기경 입법자 리쿠르고스에 의해 중심시(中心市) 스파르타에 집주하게 되어 두 왕가에서 나온 2명의 왕을 포함한 3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元老院)과, 모든 스파르타인이 출석하는 민회(民會)의 제도가 정해졌다고 전한다. 이들 중에서 임기 1년인 5명의 최고행정관(ephors)이 선출되어 왕권을 제한하였는데, 이것은 30명의 원로원이 스파르타의 정치를 좌우한 귀족과두정체(貴族寡頭政體)의 하나였다.

원래 스파르타 도시국가의 정식명칭은 라케다이몬(Lakedaimon)으로, 1만 명에 불과한 스파르타인은 자신들보다 10배가 넘는 원주민을 정복하여 그들을 국유노예(hellot)로 하고, 여기에 다시 자신들의 3∼4배나 되는 반자유민(perioichoi:변두리 주민)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참정권(參政權)은 소수의 귀족을 중심으로 한 스파르타인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 스파르타인은 모두 국유노예가 세습적으로 경작하는 분할지(分割地)를 소유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사적(戰士的)인 기질이 매우 강하였다. 그 밖의 다른 폴리스에서도 일반민중(demos)이 민회를 구성한 흔적은 분명하지 않지만, 분할지를 가진 소 자유농민이 널리 깔려 있던 점은 후세 그리스 민주정치의 성립을 이루는 근원이 되었다.

IV. 아르카이크 시대

아르카이크라는 말은 ‘고풍(古風)’이라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흔히 폴리스가 성립된 BC 750년 전후부터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동 ·서 양 세력이 충돌한 BC 500년까지를 가리키며, BC 5∼BC 4세기의 고전 시대(古典時代)보다 더 옛시대를 지칭하기 위한 편의상의 명칭이다.

이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무엇보다도 그리스인이 지중해와 흑해 연안에서 벌인 활발한 식민시(植民市) 건설 활동이었다. 식민시란 모두 독립적인 폴리스로서 로마나 근대의 식민지처럼 본국 경제의 번영만을 위해 존재하는 착취대상이 아니었다.

따라서 식민시 건설은 폴리스 세계의 확대를 의미하였으며, 그들 사이의 해상교역을 발전시킴으로써 마침내는 폴리스 시민의 경제생활뿐만 아니라 정치생활에도 중대한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아르카이크 시대의 후반은 귀족정치하의 폴리스를 크게 동요시킨 시대였다.

그리스인의 식민시 건설은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부족과, 귀족정치하에서 귀족의 대토지소유 경향으로 평민에게 돌아갈 여분의 땅이 없어짐으로써 추진된 것이다. 그들의 식민시 개척기간이 귀족 지배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민주정치가 성립되기 직전인 BC 750∼BC 500년경까지 약 2세기 반 동안이었다는 점은 이와 같은 사실들을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고 있다.

BC 800년경의 그리스의 농민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의 《노동과 나날》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농민 중에는 배를 가지고 교역에 종사하는 자도 있어 상업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였다. 식민은 모두 해로(海路)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식민시는 모두 해안에 건설되었다.

따라서 그 영역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와 에게해의 여러 섬에서 시작하여 시칠리아와 남이탈리아의 마그나 그라이키아(오늘날의 타란토, 크로토네 등 항구 도시의 총칭)를 거쳐 마실리아(오늘날의 마르세유) 및 에스파냐의 여러 도시에 이르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각 지방의 특산물 유통이 크게 진전되고 공업원료인 구리 ·주석 ·철 등이 풍부하게 공급됨으로써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이에 따라 무구(武具)를 싸게 구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사회변혁을 가능하게 했던 중대한 요인이 되었다. 즉 청동무구(靑銅武具)로 중무장한 중장보병시민(重裝步兵市民)이 중소 자유농민 중에서 나오게 되어 그들이 밀집대(密集隊)를 구성하고 싸우는 새 전술이 유행됨으로써 평민의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이는 말을 타고 싸우던 귀족층 기사의 국방상 역할이 저하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전사(戰士)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폴리스의 이와 같은 군사상의 중대 변화는 폴리스 안의 정치에도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더욱이 7세기 후반부터는 리디아의 화폐가 전해져 평민 중에서도 금력을 토대로 한 새로운 부유층이 형성되고 그 부가 토지소유 귀족의 부를 능가하는 상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권도 종래와 같이 귀족의 독점물만은 아니었고, 신흥세력으로 변한 평민도 귀족과 대등한 발언권을 요구함으로써 상호 대립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서 두 계층의 사회적 대립의 완화를 목적으로 한 타협적 개혁안이 절실히 요청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테네의 경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솔론의 개혁안이었다.

화폐경제의 유통과 더불어 빚을 지고 갚지 못하여 노예로 팔리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이것이 중대한 사회문제가 되었으므로, BC 594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솔론은 종래의 부채대장(負債臺帳)의 말소, 인신(人身)을 저당하는 대금(貸金)의 금지 및 토지소유의 상환설정 등의 경제문제에 착수함으로써 시민 공동체의 보존에 힘썼다.

또 해마다 농산물 수입의 크고 작음에 따라 시민의 권리와 의무를 4등급으로 정하여 양(兩) 계층의 대립 완화를 시도하였다(金權政治:Timocracy). 그러나 이것은 처음부터 양 계층의 이해를 미온적으로 절충한 것으로, 그의 중도적인 개혁에는 두 계급이 다같이 불만이었다.

BC 561년 명문출신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이른바 참주정치(僭主政治:Tyrany)를 등장케 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의 일이었다. 참주정치란 크게 보아 솔론의 금권정치와 더불어 민주정치에 이르는 불가결한 하나의 과도적 정치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귀족의 타도가 선행되어야 했고, 또 그러기 위해서는 평민이라는 신흥세력을 자기의 정치기반으로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비록 도시정치의 전통을 유린했다고는 하지만 귀족 타도와 평민의 지위향상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것이 그의 아들 히피아스에 이르러 폭정으로 변하자 BC 510년 그는 추방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광범한 민주정치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본래 솔론계 평민파였던 클레이스테네스는 BC 508년 집권한 후 먼저 귀족세력을 타도하기 위해 종래의 혈연 중심적인 부족구획을 지역적인 10부족구(部族區)로 개편하고, 각 구에서 50명의 대표를 추첨하게 하여 500인 평의회(評議會)를 구성함으로써 이를 전시민이 출석하는 민회(民會)에 대해 상설 정무기관(常設政務機關)으로 삼았다. 그리고 명문의 정치기반을 파괴하고 새로운 참주의 발생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법(陶片追放法:Ostrakismos)을 만들어 중장보병시민을 중심으로 한 민주정치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한편 이 시대에 아테네와 맞설 수 있는 유일하고 강대한 폴리스였던 스파르타에서도 비록 참주는 나오지 않았지만 중대한 변혁이 일어나고 있었다. 중장보병 밀집대의 전술이 스파르타에서는 일찍이 완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BC 8세기 말에 스파르타인은 서쪽의 메세니아 지방을 정복하고 그 주민을 국유노예로 삼았지만, BC 6세기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나 그 진압에 극심한 고전을 겪었다. 스파르타의 극단적인 군국주의와 쇄국주의, 그리고 철저한 근검절약에 입각한 스파르타식 생활양식이 나온 것은 바로 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즉 스파르타 시민은 반자유민이나 국유노예에 대한 수적 열세를 소위 스파르타식 교육을 통한 질적 우세로써 극복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분할지의 소유자였으며 ‘평등자(平等者)’라 불렸다. 두 사람의 왕이 있었지만 이들은 군의 지휘관에 불과했고, BC 6세기 중반경부터 정치의 실권은 매년 시민 중에서 선출된 임기 1년의 최고행정관이 장악하였다.

따라서 스파르타는 다른 폴리스에 앞서 중장보병시민단의 고대 민주정치가 철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맹주로서 그리스 최강의 도시국가가 된 것도 모두 그 군사력을 토대로 한 것이다.

V. 고전기 아테네 육성

그리스사(史)의 고전기란 BC 5~BC 4세기에 걸치는 폴리스 사회의 최성기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 시대는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대전쟁에 의해 개막되었다. 이오니아 식민시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BC 500~BC 493)이 일어났을 때, 아테네가 이를 원조한 것을 구실삼아 페르시아가 그리스 본토에 대원정을 단행한 것이다.

페르시아는 오리엔트의 통일된 대제국이었던 데 반해, 그리스는 수많은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상식적으로는 페르시아에 대적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BC 490년과 BC 480~BC 479년 등 2번에 걸쳐 아테네군은 페르시아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는 동방 페르시아 전제정치에 대한 서방 폴리스 자유시민단(自由市民團)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로써 그리스의 자유가 수호된 동시에 아테네의 번영과 아울러 그리스 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서양 문명 발전의 기반이 확립되었다.

즉 역사상 세계 최초의 동서전쟁(東西戰爭)이라고도 불리는 페르시아 전쟁에서의 그리스의 승리는 오리엔트적 전제정치로부터 폴리스적 자유와 그 문화를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그리스로 하여금 지중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유럽 문명의 본질을 결정짓게 하였던 점에 세계사적 의의가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그리스가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역사 전반을 통해 볼 때, 시기적으로 그리스인에게 가장 다행한 때에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폴리스 사회의 특색은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어 상호간의 분립 항쟁이 숙명적이었기 때문에, 같은 폴리스의 시민단 중에서도 귀족파와 평민파, 참주파와 반(反)참주파 사이의 싸움이 그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 중에는 때로는 페르시아와 결탁하여 자기 폴리스 또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수호하려는 움직임이 음으로 양으로 계속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리스 제일의 강국인 스파르타와 참주정치를 무너뜨리고 민주정치로의 그 첫발을 내디딘 아테네가 상호협력하여 강대한 외적에 대항하였고, 다른 많은 폴리스도 이에 합세하였던 제1차적 요인이었던 것이다.

또 전술적인 면에서도 BC 490년 마라톤 전투에서의 아테네 육군의 승리와, BC 479년의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의 스파르타 ·아테네 및 기타 연합군의 승리가 말해 주는 것처럼 중장보병의 밀집대 전술이 당시에 이미 완성되어 있어, 페르시아 궁술기병(弓術騎兵)에 의한 전술보다 우월했던 데에도 또다른 승리의 원인이 있었다.

한편 BC 480년에 페르시아 해군은 이미 에게해에 진출하고 있어 이와 같은 육군의 빛나는 승리만으로는 그리스 본토의 독립이 보존될 수가 없었다. 이에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국의 장래가 해군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일찍이 간파하고 해군확장론을 주장하였고, 은광(銀鑛) 개발을 통해 전비(戰費)를 마련함으로써 마침내 대함대를 건조하게 되었고, BC 480년의 살라미스 해전에서 아테네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이 대승은 해군의 지위향상과 관련하여 그리스사상 또다른 중대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실상 중장보병의 육군과 해군은 그것을 담당하는 시민의 계층이 서로 달랐다. 해군을 담당한 자들은 솔론의 재산등급으로 제4급에 해당하는 저소득 대중이었다. 따라서 해군의 발전은 정치의 철저한 민주화를 예측시켜 주는 것이었으며,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와 그에 따른 아테네 상비함대의 활약이 아테네 민주정치의 완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사실을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도 인정하였던 사실이다.

BC 479년 플라타이아이 전투의 결과 페르시아 육군이 그리스 본토에서 전면 후퇴한 이래, BC 431년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될 때까지를 이른바 ‘50년기’라 하는데, 이 반세기 동안은 고대그리스의 최성기인 동시에 아테네의 극성기이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대립은 점차 현저해져 때로는 냉전에서 열전으로 변한 일도 있었지만,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BC 449년 페르시아와 화의(和議)를 맺고 아울러 BC 446년에는 스파르타와 ‘30년의 화약’을 맺음으로써, 이후 15년간 그리스사상 진기한 평화시대를 현출시켰다(페리클레스 시대).

이처럼 아테네가 그리스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BC 477년에 성립된 델로스 동맹의 맹주(盟主)였기 때문이다. 이 동맹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산하의 폴리스와 중립을 지킨 크레타섬의 도리아인 폴리스를 제외한 에게해 주변의 모든 폴리스를 포용하고 있었으며, 융성시에는 참가 폴리스의 수가 200개나 되었다. 그리고 참가 폴리스는 병선(兵船)과 승무원을 파견하거나 아니면 자기 폴리스의 실력에 맞게 공출금을 낼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후에는 점차 화폐 대납방법이 일반적이었다.

이처럼 이 동맹의 자금은 처음에는 델로스섬의 아폴로 신전(神殿)에 예치해두고 여기서 동맹회의도 열었지만, 당시 아테네의 통치자였던 페리클레스는 이 동맹의 금고마저 델로스섬으로부터 아테네로 옮겨 이를 아테네의 재건만을 위해 썼다.

이 결과 아테네는 동맹 여러 폴리스에 군림하는 ‘폭군도시(暴君都市)’로 변하였고, 동맹 여러 폴리스는 아테네에 세금을 바쳐야 하는 납세자 격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물론 이에 대해 몇 폴리스의 반항도 있었지만, 산발적이었고 아테네의 이른바 ‘페리클레스 시대’라는 전에 없었던 번영을 누려 마침내 정치적 ·문화적으로 그리스 문화의 진수를 이루었던 것도 이처럼 동맹 여러 폴리스의 희생으로 가능하였던 것이다.

또 페리클레스에 의해 고대그리스 민주정치의 격식을 모두 갖춘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으며, 이것은 BC 5세기 전반 이래 몇 차례의 개혁을 거침으로써 완성되었는데, 그 주요한 특색은 다음과 같다.

① 국정의 최고결정권은 민회(시민총회)에 있었으며, 성년 남자시민의 거수에 의한 다수결로 의안을 결정하였다. 의안은 500명 평의회가 예심한 후에 제안되지만, 이 평의회원도 시민 자원자 중에서 매년 추첨에 의해 선출될 뿐 다같이 시민의 대표였다.

② 관리자격은 솔론이 제정한 제3급 이상이며, 재산이 전혀 없는 자가 아니면 최고관인 9명의 집정관직도 지원할 수가 있었다.

③ 관리의 임기는 모두가 1년이며, 이는 시민 각자가 교대로 관직을 맡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시민 사이에 치자(治者)와 피치자(被治者)의 차별을 만들지 않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④ 관리선출은 선거로써가 아니라 추첨에 의해서였다. 이는 시민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를 보장할 수는 있었지만, 중우정치(衆愚政治)가 될 확률도 있었던 것으로, 이것이 아테네 민주정치와 로마공화정치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⑤ 따라서 일반시민도 추첨에 따라 최고관 이하의 관직에 취임할 수 있었다. 임기가 끝나면 집무보고를 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만일 부정이 있을 경우에는 재판에 회부되었다.

⑥ 그렇지만 누구나가 최고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관리의 권위는 곧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BC 5세기경부터 국가의 안위를 맡는 장군의 직책만은 매년 10명씩 선거제로 뽑아 다른 관리와는 달리 중임(重任)을 허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더욱이 장군의 직책은 다른 직책과는 달리 그 책무가 무거울 뿐만 아니라, 자비지출(自費支出)을 해야 할 경우도 많아서 자연히 명문이나 부자가 입후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몇 차례 중임하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국정상에서도 발언권이 강해져서 지도적 정치가로서의 지위를 굳혀갔던 것이다. 전후 15년간에 걸쳐 이 자리를 차지했던 페리클레스가 그 가장 좋은 예이다.

⑦ 민중재판소의 배심원도 시민의 희망자 중에서 추첨되었고, 이들의 다수결에 의한 판결로써 재판하는 관습도 생기게 되었다. 아테네 시민 사이의 민사소송은 물론, 델로스 동맹의 폴리스 내부의 중대사건까지도 이들 시민들이 재판하였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아테네 민주정치에서는 모든 것을 결정함에 있어 투표보다도 추첨을 중시하였다. 이는 시민 누구에게나 동일한 기회를 보장하려는 의도의 표현으로서 극단적 민주정치의 성격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민주정치는 부녀자와 노예를 제외한 어디까지나 성년 남자시민만의 민주정치였고, 대의제(代議制)가 아닌 전체적인 정치참여라는 점에서 근대 민주정치와 구별된다. ‘50년기’에는 바로 이와 같은 아테네식의 민주정치가 그리스 전토에 유행한 시기였다. 다만 스파르타만은 쇄국주의를 견지하고 외부의 민주화 경향의 영향을 배척하고 있었을 뿐이다.

VI. 폴리스 시민과 구성

고대그리스의 역사를 움직인 사람은 성년 남자시민, 즉 폴리스의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폴리스의 주민으로서는 이들 시민 이외에도 그들의 처자가 있었고, 또 재류외인(在留外人)과 해방노예가 있었는데, 이들도 모두가 자유인들이었으며, 그 밑에 자유가 없는 다수의 노예가 있었다. 이들 노예는 BC 5세기에 들어와 그 수가 크게 증가되었는데, 이는 전쟁포로가 상품처럼 매매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폴리스는 성벽 내부의 시가부(市街部:중심부)와 그 외곽인 전원부(田園部:교외)로 구분되고, 시민은 여기에 분산 거주하고 있었다. 시가부는 정치·경제의 중심을 이루어 주로 귀족·상인이 살았고, 전원부에는 농민들이 노예·반자유민과 더불어 거주하고 있었다. 시민이라고 하여 반드시 시가에서만 거주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민생활의 중심은 역시 시가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크로폴리스 주변은 폴리스의 심장부를 이루고 있었다.

폴리스란 본래 그 성립 당시의 사회적 불안에 따른 자기방위의 필요성이 그 성립요인의 하나여서, 언덕에 피난처로 구축된 아크로폴리스는 수호신의 신전을 모신 시민생활과 가장 가까운 장소였다. 정치·경제의 중심인 아고라(Agora:廣場)와 공회당 등은 모두가 이 근처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폴리스 생활을 통해 시민은 원숙한 그리스 문화와 민주정치를 확립한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는 시민의 경제적 번영에 수반되는 여가(餘暇) 없이는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시민에게서 여가란 고도의 정신활동과 정치에 대한 직접참여를 가능케 한 시간적·정신적 여유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가를 시민에게 향락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이 바로 노예였다. 그리스인의 빛나는 업적은 노예경제(奴隸經濟)라는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박고서야 비로소 그 광채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VII. 고전기 폴리스 사회쇠퇴

오늘날에 전해진 그리스 고전은 문학 ·사학 ·철학을 막론하고 대부분 아테네 시민이나 그 거류인에 의해 씌어진 것인데, 그 연대는 대부분 BC 431년의 펠로폰네소스 전쟁 발발 이후에 속한다. 아테네인은 이 27년간의 장기 전쟁 속에서도 그들의 연극 창작활동을 계속하였다.

민회나 민중재판소에서의 변론자유를 배경으로 나온 정치연설 ·법정연설 등 현존 작품도 대부분 BC 4세기에 속하며,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적 ·정치학적 작품도 대개 이 무렵에 씌어졌다. 따라서 현존 고전에 관한 한, BC 5세기 말 이후가 오히려 그리스의 최성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의 폴리스 사회 내부에는 폴리스 본질의 쇠퇴를 의미하는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실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폴리스 사회 붕괴의 발단이 된 그리스사상 일대 비극이었다.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육군국과 해군국, 귀족제와 민주제, 농업국과 상업국으로서의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어, 전쟁은 처음에는 이 양대 폴리스 간의 패권다툼으로 시작되었으나, 이것은 곧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의 싸움으로 발전됨으로써 전쟁의 피해도 그리스 전국으로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스파르타는 마침내 자기 체제의 유지를 위해 민족적인 배신도 서슴지 않고 감행하여 페르시아 제국의 자금을 끌어들여 해군을 건설하고 아테네를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아테네가 항복하고, 델로스 동맹도 아울러 붕괴되고 말았다. 전쟁의 결과 먼저 아테네의 피해는 극히 참담하였다.

무역은 마비되고, 민주제는 전복되었으며, 질병으로 인구마저 감소되었다. 그리고 성벽의 파괴, 모든 해외 소유지의 포기, 대부분의 해군력 폐기 등을 강요당함으로써 아테네는 이제 스파르타의 예속국으로 전락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한편 전승국 스파르타는 한때 그리스의 패자(覇者)가 되어 전성을 누렸으나, 전쟁의 후유증과 농업경제체제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점, 그리고 군국적 보수주의 등으로 마침내 동맹국 내의 반발을 초래하고 말았다. 이것이 코린토스 ·테베 ·아테네 ·아르고스 등이 페르시아의 후원을 얻어 동맹하여 스파르타의 패권에 대항한 이른바 코린토스 전쟁(BC 395~BC 386년)이다.

이에 스파르타는 BC 386년 페르시아와 이른바 ‘안탈키다스 화약’을 맺고 페르시아 대왕의 힘을 빌려 이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리고 그 대가로 소아시아의 그리스 식민시를 페르시아령(領)으로 넘겨 주는 반민족 행위를 자행하였다.

그리하여 스파르타에 대한 그리스인의 반감이 최고조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파르타가 각 폴리스에 대한 간섭을 늦추지 않자, 이번에는 지난날의 동맹국이었던 테베가 다시 스파르타에 도전하여 에파미논다스와 펠로피다스의 지휘하에 BC 371년 레우크트라 전투에서 불패(不敗)를 자랑하던 스파르타 육군을 격파하고 대승하였다. 그러나 테베도 BC 362년 에파미논다스의 죽음과 더불어 쇠퇴함으로써 이후 폴리스 상호간의 분열과 항쟁이 계속되어 다시 전(全)폴리스의 단결을 시도할 기력을 잃고 말았다.

또, 이 같은 폴리스 사이의 분열과 항쟁 속에서 중견시민이 몰락하고 빈민과 노예가 늘어나 용병(傭兵) 사용이 성해짐으로써, 시민 개병(皆兵)을 원칙으로 하던 폴리스 사회는 내부로부터 해체되어 가기 시작하였다. 페르시아 제국이 풍부한 자금으로 그리스인 정치가를 매수하여 폴리스 상호간의 분립과 항쟁을 조장시킨 것도 정세를 더욱 악화시킨 또다른 요인이었다. BC 359년 그리스 북방의 마케도니아에서는 필리포스 2세(재위 BC 359∼BC 336)가 즉위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그리스로 밀고 내려왔는데, 이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을 이용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당시 그리스 본토에서는 마케도니아에 대한 항전을 부르짖는 데모스테네스파(派)와 마케도니아에 동조하여 페르시아를 토벌하기 위한 동맹을 결성하자는 이소크라테스의 초(超)폴리스적 주장을 내세운 파로 갈려 있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군이 BC 346년에 일단 중부 그리스로 진공하여 들어오자 데모스테네스가 중심이 되어 마침내 아테네 ·테베의 반(反)마케도니아 동맹을 성립시켜 필리포스 2세의 침략군을 맞이하였지만, BC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대패하고 자유와 독립의 폴리스 세계는 이로써 끝나고 말았다.

즉 필리포스 2세의 그리스 지배는 여기서 시작되었고, 폴리스는 이후 독립된 정치단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이제 필리포스 2세의 힘으로 조직된 헬라스 동맹(일명 코린토스 동맹)에 따른 스파르타를 제외한 본토의 폴리스가 차례로 통일됨으로써 고대그리스 시대는 그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VIII. 헬레니즘시대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BC 336∼BC 323)이 페르시아 원정을 시작한 BC 334년부터 로마의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동부 지중해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BC 30년까지의 약 300년간을 그리스사상 헬레니즘 시대라고 한다. 필리포스의 페르시아 정복 계획은 BC 336년 그가 암살됨으로써 좌절되고, 그의 뒤를 계승한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실천한 것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3만 5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서아시아의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을 정복하고, 계속 동진(東進)하여 BC 331년에는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군을 굴복시켰다. 이로써 그리스 문화의 동진을 가로막고 있던 큰 장벽이 제거된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인(마케도니아인 포함)은 이제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내륙에까지 진출이 가능해졌다.

이 오리엔트 세계의 대하유역(大河流域)은 에게해 일대와는 전혀 다른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어 폴리스와는 다른 원리에 입각한 사회가 수천 년간이나 존속하여, 전통문화가 뿌리 깊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스인이 진출한 곳은 바로 이와 같은 지역으로서, 여기서 그리스풍(風) 문화와 오리엔트 고유문화와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그리스풍 문화’가 탄생된 것이다.

한편 많은 그리스인이 가난한 그리스 본토를 버리고 동방의 신천지를 찾아 이주함에 따라 번영의 중심도 자연히 동방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은 그가 33세의 젊은 나이로 죽은 뒤, 분란의 시대를 거쳐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왕국으로 갈라졌다. 이 결과 이들 강력한 왕국에 둘러싸인 그리스 본토에서는 인구감소와 경제쇠퇴가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시민 사이의 빈부의 차가 심화되고, 특히 빈민의 부채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북방의 마케도니아 안티고노스 왕가(王家)의 지배하에 들어간 그리스인은 폴리스의 독립과 자위(自衛)를 위해 중부 그리스에서는 아이톨리아 동맹을,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부에서는 아카이아 동맹을 결성하고 활약한 것이 큰 특색이었다.

또 스파르타가 끝까지 폴리스로서 독립을 보존하기는 했지만, BC 3세기 후반에도 분립 ·항쟁이 끊이지 않았다. BC 2세기에 들어서자 이미 로마의 힘이 이곳에 미쳐 BC 146년에 아카이아 동맹의 중심인 코린토스가 로마군에게 완전 파괴되었으며, 그 후 그리스는 사실상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IX. 로마통치하의 그리스

BC 27년 로마제국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재위 BC 30∼AD 14)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칭을 받고 로마의 대권을 장악한 이래,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반도는 완전히 로마의 속주(屬州:아카이아)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리스는 로마의 통치하에 들어간 뒤에야 비로소 장기간의 평화를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평화란 어디까지나 정치적 독립의 완전상실을 대상(代償)으로 한 것으로서 그야말로 노예상태에서의 평화였던 것이다. 사회사 ·문화사적으로 본다면, 로마 시대의 그리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로마는 도시의 유산자층(有産者層)을 지주(支柱)로 하여 그 지배를 강화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던 관계로 폴리스 시대의 민회(民會) 활동은 자취를 감추고, 유산시민의 도시참사회(都市參事會)가 로마 제국의 지방자치와 징세(徵稅)의 책임을 맡았다.

도시 내부의 사회 ·경제 사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헬레니즘 시대 이래의 추세가 서서히 진행되어 소작제도를 통한 대토지 소유제도가 발달되어 간 것 같다. 문화적으로도 그리스어는 지중해 동부의 언어로서 산문 ·역사 ·소설 등에 있어 그리스인의 역할이 매우 컸다.

X. 비잔틴시대

로마제국 말기와 비잔틴(동로마) 제국 초기의 그리스는 문화적으로도 더 이상 지도적 위치를 유지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성을 지닐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다. 다만 교회만이 동로마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의 우상숭배금지령(726)에 따라 로마 교회와 대립함으로써 뚜렷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었다(11세기 중반에 그리스 정교회로 독립).

한편 인구의 감소로 도시가 황폐해져서 가난한 농촌으로 변하여 잔존 도시로 인구가 집중되었다. 또한 이민족의 침입은 이와 같은 경제적 쇠퇴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격이 되었다. 3세기 후반에 고트족을 선두로 알라리크의 서(西)고트, 아틸라가 이끈 훈족, 게이세리쿠스의 반달족 등이 뒤를 이어 그리스를 침범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최종적으로 그 땅에 눌러앉은 슬라브족이었다. 슬라브족은 6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남침하기 시작하여, 8세기 전반에 걸쳐 대소 집단이 파상적으로 침입, 정주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리를 잡자 곧 목축과 농경에 종사하였다. 이에 그리스인은 근방의 섬이나 남이탈리아 ·시칠리아로 도망하는 자들까지 나왔으며, 대부분은 근접하기 힘든 산간지대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침입한 슬라브인의 수가 많았다고 하여 그리스인의 슬라브화(化)가 완전히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다. 슬라브인에 대한 비잔틴 지배의 확립에 따른 군관구제도(軍管區制度)의 도입과 더불어 비록 숫자적으로는 열세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월등히 높은 그리스 주민을 통한 슬라브인 동화(同化)가 반대로 진전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10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리스 주민과 이주해온 슬라브인을 식별할 수가 없는 형세가 되고 말았다. 슬라브인을 대신하여 10세기의 그리스인을 위협한 것은 아라비아인과 불가리아인이었다. 아라비아인은 해적으로서 크레타 ·시칠리아 ·남이탈리아의 근거지로부터 연안의 여러 도시를 습격하였고, 불가리아인은 줄곧 그리스 침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11세기와 12세기 전반의 그리스는 비교적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맞이한 셈이었다. 테베와 코린토스 등 도시에서는 견직물(絹織物) 생산이 활발했으며, 농촌에서는 경지화(耕地化) 작업이 크게 진전되었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번영도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12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그리스는 다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소농민이 대지주에게 예속되고, 해적과 도적떼가 횡행하는가 하면, 시칠리아의 노르만인(바이킹족)이 테베 ·코린토스의 견직물 공업을 파괴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인에게 가장 큰 시련을 안겨준 것은 제4차 십자군 원정(1202∼04)이었다. 이를 인솔한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1세와 몽페라 백작 보니파스가 베네치아 통령 단돌로와 모의, 점령목표를 본래의 이집트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바꾸어 마침내 1204년에 이를 점령함으로써 이 도시는 무서운 약탈과 폭압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는 보두앵을 황제로 하는 라틴 제국이 건설되어 아테네와 펠로폰네소스에 여러 개의 군주국가가 세워졌으며, 또한 베네치아를 통해서도 지중해 동부의 여러 지역을 포용하는 일대 식민제국이 건설되었다. 실로 이러한 상황은 비잔틴 제국의 재건 없이는 수습할 수 없었으며, 이 작업은 이후 몇 세기를 두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14세기 말에는 투르크군의 그리스 침입이 다시 시작되었다.

XI. 투르크지배하의 그리스

15세기 중엽 여러 개의 봉건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그리스 땅은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을 받음으로써 그 대부분이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 1503년에 그리스는 투르크 영내의 한 주(州)로 전락해 버렸고, 그리스 주변 여러 도서(島嶼)에 굳건한 거점을 가지고 있던 베네치아도 끝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투르크의 그리스 통치는 한마디로 비참한 압제로 일관된 것이었다. 우선 철저한 수탈을 통해 대부분의 토지를 투르크인의 소유로 만들어 놓았고, 그럼으로써 농업생산은 완전히 황폐화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반해 상업은 투르크인이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분야여서 그리스인의 상당수는 상업분야로 진출하게 되었다. 더욱이 베네치아의 지배는 그리스인에게 상업에 대한 이해를 가지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후퇴는 내외에 대한 그리스인의 상업상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높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업을 그리스인에게 맡겼던 것은 투르크로서도 필요한 일이었으므로 그리스인의 일부는 투르크에서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투르크는 유럽을 스스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17세기 후반 이후 이른바 ‘파나리오(Fanariot)’라는 통역을 기용하고 이들에게 외교를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에게 트란실바니아를 내줌으로써 투르크로 하여금 유럽 지배로부터 후퇴의 첫걸음을 내딛게 한 1699년의 카를로비츠화약도 파나리오였던 A.마브로코르다토스에 의해 체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투르크 치하의 그리스에는 ‘클레프트(kleft)’라는 일종의 비적(匪賊)이 있었다. 이것은 도적 ·강도 등을 의미하였지만 그 실체는 외국인 지배에 대해 저항하는 그리스인의 정치적 성격을 띤, 말하자면 애국적인 의적(義賊)이었다. 그들은 산간벽지에서 출몰하여 투르크 정부와 그 호족 등 주로 외국인만을 골라서 약탈을 감행하였다.

따라서 투르크 정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10여 개 지역에서 현지 주민으로 조직된 경찰대를 배치하였다. 이것이 바로 ‘아르마톨(Armatol)’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클레프트를 진압해야 할 아르마톨이 클레프트와 더불어 반(反)투르크 운동을 전개하였고, 여기에 그리스 정교의 성직자까지 참가하여 민족적 저항을 계속해 나갔다.

XII. 그리스 독립운동

18세기에 이르러 투르크는 유럽세력의 대두와 더불어 자국 세력의 약세가 노출되자, 그 반동으로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에 대한 압제를 새로이 강화해 나갔다. 그리고 발칸반도의 여러 민족을 서로 바꾸어 지배시킴으로써 상호대립을 촉진시키는 간교한 통치기술도 구사하여, 그들은 루마니아 지방(몰다비아 ·와라키아)을 파나리오에게 맡겨서 지배시키는 한편, 그리스의 질서유지는 반대로 알바니아인에게 위임하였다. 아르마톨이 클레프트와 합세하여 투르크 지배에 항거한 것은 바로 이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더욱이 1770년에는 모레아(펠로폰네소스)반도에서 반란의 불길이 타올랐고, 이것은 다시 러시아의 사주를 받아 더한층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 반란은 러시아의 방임과 지도자 및 지도이념의 결여로 실패로 끝나 결국 그리스에서 수만 명이 학살되고, 투르크 제국의 앞잡이였던 알바니아 군대의 약탈과 폭행을 한껏 당하는 비참한 운명으로 빠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태와는 달리 그리스의 민족운동은 계속 각처의 민족진영으로부터 성원을 받아 오히려 크게 고조되어 갔다.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중립을 지킨 투르크의 보호하에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자기지위를 크게 향상시킨 그리스 상인이 이때부터 반(反)투르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을 중심으로 한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게 된 파리 ·런던 ·오데사 ·마르세유 등 각처의 그리스 상인들은 앞을 다투어 본국의 학교 건립에 자금을 제공하여 교육열을 진작시켰고, 독립을 위한 준비를 갖추었다.

1814년 러시아의 오데사에서 결성된 ‘헤타이리아 필리케’도 그리스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그리스 상인의 애국적 비밀결사였다. 이 결사를 중심으로 A.입실란티스를 받들고 21년 독립전쟁의 봉화를 올렸다. 그 후 30년 런던조약으로 독립이 인정되고, 32년 바이에른왕 루드비히 1세의 왕자 오토 1세가 17세로 그리스의 왕이 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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