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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16 (일)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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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790      
[미술] 이집트미술 (한메)
이집트미술 -美術

이집트에서 발생, 발전한 미술.

고대 이집트왕국은 나일강 남쪽의 상(上)이집트와 북쪽의 하(下)이집트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를 지배하는 절대왕을 <상이집트왕>과 <하이집트왕>이라 했으며, 각 지역은 파피루스와 수련(睡蓮)으로 표시했다. 이 이원적 관념(二元的觀念)은 조형예술(造形藝術)의 기본 성격에 영향을 주었다. 천체와 자연을 주관하는 신을 인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믿었는데, 신과 인간의 매개자는 신의 아들 파라오왕이었다.

그들은 영원한 생명과 죽은 뒤의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극진히 장사지냈다. 이 개념은 이크나톤왕의 종교개혁기를 제외하고는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았다. 때문에 미술양식 또한 몇천 년 동안 크게 변화되지 않았다. 제1왕조 이전, 나일강 연변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 선왕조시대의 유적지 델타사·알바다리·게르제유적에서는 채색토기가 발견되었다. 제1∼31왕조까지(BC 3000∼BC 332)의 왕조시대에는 웅장한 무덤·신전·조각·회화·공예 등을 만들었다.

[건축―무덤과 신전]

이집트인은 죽은 자가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무덤은 죽은 사람을 위한 영원한 집이라고 생각했다. 왕조 성립기에는 마스타바(아라비아어로 의자라는 뜻)라는 왕과 귀족의 무덤을 만들었다. 직사각형 기반 위에 햇볕에 말린 벽돌을 띠모양으로 쌓아올리고 지하에 구덩이를 팠다. 그 구덩이를 접해 유체를 안치하는 널방[玄室]과 부속실을 만들고, 벽에는 죽은 자의 모습을 부조했다. 뒤에는 왕 측근자의 묘로 마스타바를 만들었다.

제1∼6왕조까지(BC 3000∼BC 2263)의 고(古)왕국시대는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제3왕조 조세르왕 때의 재상이며 건축가인 임호테프는 석재(石材)와 모르타르를 사용하여 왕을 위한 6계단식 피라미드를 세웠다. 제4왕조 때는 정사각뿔형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카이로 가까이에 있는 기자대지(臺地)에는 북쪽으로부터 쿠푸·카프레·멘카우레왕의 피라미드가 있다. 제일 큰 쿠푸왕 피라미드는 높이가 146m이고, 평균 2.5t의 돌을 230만 개 정도 쌓아올렸다. 각 능선은 동·서·남·북을 가리키고, 또 널방은 피라미드 중앙에 있다.

피라미드에는 예배소·참도(參道)·나일강 연변의 신전이 부속된다. 피라미드 주변에는 왕족과 귀족의 마스타바가 있다. 제5왕조시대는 태양신 라에 대한 신앙이 높았기 때문에 해가 솟는 상징으로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이 거대한 석조건물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이집트 각지에서 석재가 풍부하게 났기 때문이었다. 테베의 통치자가 남북이집트를 통일시킨 제11·12왕조(BC2160∼BC 1785), 즉 중왕국시대에는 피라미드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또한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남아 있는 피라미드가 많지 않다.

테베의 데이르엘바리에 있는 제11왕조 멘투호테프왕의 장제전(葬祭殿)은 이중기단 위에 소형 피라미드를 세워 고대의 이상을 복귀시키고자 했다. 이 시대의 귀족과 고관의 묘는 왕의 피라미드 주변에 두지 않고 출신지 근처에 두었다. 북부에서는 마스타바형식을 따랐으며, 남부에서는 묘중턱을 굴식[橫穴式]으로 파는 암굴묘(岩窟墓)를 만들었는데 베니하산과 아스완에 있는 암굴묘를 그 예로 들 수 있다.

제12왕조 이후 왕조는 쇠퇴했으며, BC 1580년 무렵 통일왕조인 제18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제20왕조까지 약 500년 동안의 신왕국시대는 왕의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았다. 왕의 피라미드에 들어 있는 껴묻거리[副葬品]를 도굴범이 약탈해갔기 때문이었다. 제18왕조 투트모세 1세부터는 왕의 미라를 나일강 서쪽 연안 <왕가의 골짜기>에 입구를 알 수 없게 매장했으며 장제전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세웠다.

왕묘는 입구로부터 길게 뻗은 통로 위에 깊은 함정이 있고, 각주(角柱)가 있는 방과 앞방·널방이 이어지는 형식이다. 널방에는 미라를 넣은 돌널[石棺]이 있고, 내장(內臟)을 담은 카노피스 용기와 껴묻거리를 두는 작은 방이 별도로 있다. 입구는 신중하게 처리되었으나 왕가의 골짜기에 있는 왕묘는 모두 도굴당했다.

그 가운데 투탕카멘왕묘만이 약탈당하지 않았으며, 1922년 영국의 H.카터가 발견했다. 왕들의 미라만은 신관(神官)들이 옮기어 19세기 말 발견될 때까지 안전했다. 신에 대한 제사와 죽은 파라오에 대한 공양을 목적으로 세운 장제전은 왕가의 골짜기에서 멀리 떨어진 나일강가 사막의 대지기슭이나 평지에 세웠다. 장제전은 탑문(塔門)·중정(中庭)·주랑현관(柱廊玄關)·열주실(列柱室)·내진(內陣)·창고를 갖춘 전형적인 신왕국 신전형식의 건축물로서, 마디나트하브에 있는 람세스 3세 장제전이 이 형식이다.

특이한 장제전으로는 데이르엘바리에 있는 제18왕조 핫솁수트여왕의 장제전을 들 수 있다. 경사로가 이어진 3단 테라스로 되어 있는데 하단테라스는 앞뜰이며, 중정테라스에는 앞에 주랑을 배치했고, 상단테라스 안에는 아멘신을 모시고 있다. 중왕국시대의 신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현존하는 신전은 신왕국시대와 말기에 세워진 것이 대부분이다. 전형적인 신전윤곽은 테베의 카르나크 콘스신전에서 볼 수 있다. 앞에는 오벨리스크를 세운 탑문이 있으며, 중정에는 좌우에 열주를 세워 만든 현관이 있다. 현관 끝은 열주실이며, 그 다음은 신관과 왕만 들어갈 수 있다.

특정한 축제일에 달의 신인 콘스 신상(神像)을 운반하는 성주(聖舟)를 모시는 방이 있고 안쪽 벽에는 신상을 모시는 지성소(至聖所)와 3개의 방이 줄지어 있다. 카르나크신전들의 중심을 이루는 아멘대신전과 룩소르신전은 규모가 크고 복잡하지만 기본 요소는 콘스신전과 같다. 룩소르신전에서는 아멘호테프 3세가 세운, 꽃이 피어 있는 파피루스와 피지 않은 파피루스기둥이 특이하다. 높이 16m의 원주열은 주랑 측벽에 투탕카멘왕이 오페드축제 내용을 새긴 얕은 부조와 함께 신전 중에서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

이집트건축의 특징인 열주에는 각기둥과 원기둥이 있다. 네모난 기둥에는 여신 하토르의 머리를 부조하여 기둥 머리에 얹은 것과 수의를 걸친 왕의 모습으로 만든 기둥이 있다. 원기둥에는 얼굴이 8개 또는 16개 있는 프로토도릭기둥과 각종 식물을 본뜬 기둥 등이 있다. 제19왕조 람세스 2세는 룩소르 제2탑문 앞에 2개의 오벨리스크와 6개의 거상(巨像)을 세웠다. 오벨리스크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에 증정되어 현재 파리 콩코르드광장에 있다.

그 밖에 신왕국의 신전양식은 덴데라·에드푸·필라에 등 말기 신전에도 답습되었다. 사막대지에서 나일강 연안에 이르는 지방에서는, 강의 벼랑을 파서 암굴신전을 만들었는데, 아스완하이댐을 만들기 위해 일부만 이동시킨 아부심벨신전은 람세스 2세가 건조했다. 람세스 2세는 멤피스·아비도스·카르나크·룩소르 등에도 신전을 신축, 증축했으며 다른 왕의 이름을 깎아내고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그는 고대 이집트 왕 중에서 가장 많은 건조물을 축조했으나 이름의 개찬자(改竄者)라는 불명예를 남겼다. 무덤이나 신전은 석재를 사용하여 지었으나 일반 주택과 왕궁은 햇볕에 말린 벽돌이나 목재를 사용했다. 제18왕조 아멘호테프 3세가 테베의 서(西)말카타에 지은 궁전과 관인들의 집단주택지 흔적이 남아 있다.

[환조(丸彫)]

환조로는 신상을 비롯하여 신전이나 무덤 속에 모신 왕과 귀족의 상, 소형인물상 등이 있다. 그 재료는 돌·금속·나무·상아·도자기 등이다. 돌은 섬록암(閃綠岩)·화강암(花崗岩)·각력암(角礫岩) 등 단단한 돌과 석회암·사암·앨러배스터(雪花石膏) 등 연결성 돌을 사용했다. 금속은 구리나 청동을 사용했고 목재는 아카시아·무화과나무 등 이집트산 외에 수입된 침엽수를 사용했다.

고대 이집트조각은 장례나 숭배의식을 위해 만들어졌으며, 분묘형식이 발달함에 따라 거대한 인물상을 예배소에 모시게 되었다. 고왕국시대부터 시작된 이러한 조각상은 고인의 영혼이 담기도록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제작자 임호테프의 이름이 새겨진 고왕국시대의 조세르왕좌상(제3왕조, 카이로미술관)은 최초의 등신상(等身像)이다. 또한 고왕국시대의 라호테프와 네페르트 부부상(夫婦像;제4왕조, 카이로)은 아직 선명한 채색이 남아 있으며 옥안(玉眼)이 현실감을 높이고 있다.

카프레왕좌상(제4왕조, 카이로)은 왕의 위엄을 표현한 걸작품이고 멘카우레왕과 왕비의 입상(제4왕조, 보스턴미술관)은 품위 있는 부부상의 전형적 작품이다. 이집트조각의 특색은 입상의 경우 얼굴이 정면이며 양다리를 가지런히 하거나 왼발을 반 걸음 앞으로 내민 형태로서, 좌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부부상 가운데는 부인이 남편의 등을 감싸고 있는 것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집트조각은 동작이 많지 않으며, 동작을 나타내는 조각은 그 인물의 직업이나 신분을 표시한 경우가 많다. 제5왕조시대의 목조 촌장상(카이로)과 책상다리를 한 서기상(書記像, 루브르미술관) 등이 대표적이다. 중왕국시대는 조각이 북쪽 멤피스파와 남쪽 테베파로 나누어졌다. 고왕국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멤피스파는 하우바라에서 출토된 아메넴헤트 3세의 좌상(카이로)과 같이 세련되었으나 유형적이다. 테베파는 거칠고 강한 수법에 멤피스파의 사실수법을 받아들여 인물의 성격묘사를 하고 있다.

신왕국시대 전반에 만든 상은 우아하나 생기가 없다. 이 시대의 조각으로는 투트모세 3세의 입상(카이로)과 호화스러운 신전에 어울리는 거상 아멘호테프 3세와 그 왕비 티이의 좌상을 들 수 있다. 신왕국 후기 아멘호테프 4세는 태양신 아톤을 믿고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이크나톤으로 개명하고 오늘날의 아마르나로 도읍을 옮겼다. 이후 아마르나예술이 발생했으며, 왕비 네페르티티의 흉상(베를린국립미술관)과 같은 세련된 작품이 나왔다.

이크나톤의 종교혁명은 다음 왕인 투탕카멘왕이 도읍을 테베로 옮긴 뒤 끝났으나 아마르나시대의 예술활동은 한동안 이어졌다. 제19왕조 때는 람세스 2세 좌상(토리노고대미술관)과 같이 정교한 작품도 있었으나, 왕이 각지 신전에 바친 상은 예술적이지 못했다. 제20왕조 이후 석상은 쇠퇴했으나 청동조각은 크게 발달했다. 제22왕조 왕비의 입상(루브르)은 의상 세부에 금을 상감(象嵌)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그 밖에 인물표정을 날카롭게 표현한 멘투엠헤트의 상(제25왕조 무렵, 카이로)과 신관의 머리(제30왕조 무렵, 베를린) 등이 있다.

후기왕조시대에는 주조기술이 발달하여 호루스신의 독수리와 바스테트여신의 고양이 등 많은 소형신수(小形神獸)의 상을 만들었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는 이집트인의 종교적 이상을 표현한 조각을 기본형으로 하여 발전된 그레코로만식 작품이 유행했다.

[부조와 회화]

부조로는 고왕국시대 이전 신전에 바쳤던 팔레트가 있다. 남북 이집트의 통일을 표현한 나르메르왕의 팔레트(제1왕조)가 중요하다. 피라미드의 널방은 부조로 장식되어 있으며, 우나스왕의 피라미드교서(敎書;제5왕조, 사카라)가 주목된다. 제5왕조 때는 귀족의 무덤 벽에 고인(故人)이 내세에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부조했다. 뱃놀이하는 모습과 농부·뱃사공·직인(職人)의 일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새겼으며 신전과 장제전에는 왕의 전기(傳記)와 신을 예배하고 신으로부터 은혜받는 왕의 모습을 그렸다.

그레코로만시대의 부조는 윤곽이 부드러워졌으나 인체의 해부학적 정확성은 없어졌다. 회화는 부조와 마찬가지로 많은 색을 이용했다. 주요 안료(顔料)는 대자의 빨강, 황토의 노랑, 감청석(紺靑石) 또는 유리 원료가 되는 청색 프리트의 파랑, 공작석(孔雀石) 또는 녹색(綠色) 프리트의 녹색, 그을음의 검댕, 백악(白堊)이나 석고(石膏)의 흰색 등이다. 전색제(展色劑)로는 아교류·수지·달걀흰자위 등을 사용했다.

고왕국시대의 메이돔에서 출토된 오리(제4왕조, 카이로)는 깃털이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중왕국시대에는 호족의 묘에도 벽화를 그렸으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데 반해 신왕국시대의 벽화는 보존상태가 좋아서, 테베에 있는 왕과 귀족의 무덤 벽화는 색이 선명하여 그릴 당시의 모양을 보존하고 있다. 벽화의 주제는 장례, 미라에 영혼을 불어넣는 의식, 신들의 영접을 받는 고인의 모습 등이다. 이러한 저승안내서는 종교문서의 연구자료로 중요하다.

파피루스의 그림 두루마리에는 고인을 저승으로 보낼 때 주의할 점을 모은 《사자(死者)의 서》가 있다. 아마르나시대에는 왕 일가가 둘러앉은 모습과 아톤신앙과 연관되는 자연 속의 새와 짐승 등을 그렸다. 데이르엘마디나의 공인(工人)과 하급관리 묘에도 공양을 받는 죽은 이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수렵도·어로도나 고인이 가족·친지들과 식사하는 장연도(葬宴圖) 등을 통해서는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인물을 그린 것은 영원히 불멸하는 인체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집트회화는 서유럽의 원근법·투시도법과는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발달되었는데 표현방법은 부조와 동일하다. 즉 3차원의 입체세계를 평면예술로 표현했다. 옆모습의 윤곽을 그린 얼굴에 한쪽 눈썹과 눈을 앞에서 본 것과 같이 그리며 양어깨는 정면에서, 가슴과 허리는 옆에서, 엉덩이는 약간 뒤쪽에서, 발은 옆에서 본 것과 같이 그렸다. 이 방법을 정면성법칙 또는 변동시점묘사법이라고 한다. 이 묘사법은 실제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닌 관념적 묘사법이며, 제3왕조 초기에 확립되었다. 인물의 비례는 주먹길이를 기준으로, 머리털이 난 이마에서부터 발바닥까지를 18, 이마에서 어깨까지를 2로 정하는 원시예술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회화는 무덤의 벽화뿐 아니라 목관·파피루스·도자기에도 그렸다. 나무로 만든 널[棺]이 일반화된 것은 고왕국 말부터이며, 위조문짝과 그 위에 큰 눈을 그렸는데, 이것은 죽은 자가 누운 채로 외계를 살피게 하기 위한 것이다. 오스트라카는 석회암이나 도자기 조각으로 공책이나 계산서 대신 사용되었으며 종교적 정경(情景)과 세속적 일상생활이 그러져 있다.

[공예]

풍부한 소재와 재능을 갖고 있던 이집트인은 공예분야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공예품에는 석기·도자기·금공예품·목공예품·상아제품(象牙製品)·섬유제품 등이 있다. 신전과 무덤의 벽화 및 부조의 주제가 된 다양한 직업과 풍속을 통해 당시의 공예 제작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 공예품은 수련·파피루스·종려나무 등의 식물과 매·코브라·투구벌레·염소·인간 등 자연계에 있는 동물 및 웰레즈(생명)·이브(심장)·앙크(재생) 등 이집트의 상징적인 도형을 주제로 한다. 이 밖에 단순한 기하학적 모양의 로제타(둥근 꽃), 지그재그, 소용돌이 등이 있다. 이들은 복잡하게 조합되었고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었기 때문에 조형미 외에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석기로는 선왕조시대 후기 부싯돌로 만든 손칼이 특히 아름답다. 선왕조시대에는 석제용기에 단단한 돌을 사용하였으나 왕조시대에는 반투명하고 세공하기 쉬운 앨러배스터로 단지 등을 만들었다. 제1왕조 무렵에는 팔레트가 나왔다. 팔레트는 본래 화장용 안료를 가는 석판이었지만 뒤에는 전체를 돋을새김하여 신전에 바치는 데 사용되었다. 이집트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도자기는 발달되지 않았다.

왕조시대에는 석영가루를 탄산나트륨이나 소금물로 다지고 잿물[釉藥]을 입힌 일종의 도자기를 만들었다. 이 잿물은 밝은 남빛이다. 중왕국시대에는 이 푸른 잿물을 입힌 소동물상(小動物像)과 이 잿물 위에 흑색잿물을 칠하여 수련을 그린 화분 및 부적류를 껴묻거리로 만들었다. 신왕국시대에는 이 푸른 잿물을 이용해 고배(高杯)와 작은 상(像), 타일 등의 건축재료를 만들었다. 잿물은 청색 외에 녹색·흰색·노랑 등이 있다. 잿물을 단독으로 세공한 것이 유리이다.

제18왕조 투트모세 3세의 이름이 있는 다리 붙은 잔이 있으며 테베와 텔알아마르나에서는 유리공장 자리가 발견되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랏빛과 노랑 줄무늬가 있는 물고기모양의 단지는 아마르나시대의 자연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의 유리는 색은 있으나 투명하지 않았으며 보석이나 귀석 대용품이었던 것 같다. 입김으로 불어 만드는 유리가공 기법이나 서랭법은 알려지지 않았다. 금속막대 끝에 넝마를 감고 녹아 있는 유리를 감아붙였다가 식은 뒤에 속을 긁어내어 화장접시·단지·병·잔 등을 만들었다.

이집트에서 가장 일찍 발견, 이용된 비금속(卑金屬)인 구리는 바다리기부터 있었다. 서아시아가 기원인 청동은 중왕국시대에 보급되었다. 구리·청동의 가공 기법으로는 주조·단조·땜·금은입히기 등이 있다. 귀금속으로는 금이 일찍부터 알려졌다. 나일강 동쪽 연안에서부터 홍해에 걸쳐 금광이 있었고, 금은장식품에 이용되어 단지의 테두리를 두르거나 돌칼의 자루를 장식하기도 했다.

카이로미술관에 있는 부싯돌로 된 손칼은 자루가 동물과 식물무늬를 새긴 금박판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무늬를 통해 당시 이집트의 섬세한 감각과 조금기술(彫金技術)을 알 수 있다. 제1왕조 제르왕비의 팔찌는 청금석·터키석·자수정(紫水晶) 등을 주금(鑄金)기술과 조금기술을 이용해 만든 것이다. 금을 많이 사용한 공예품으로는 투탕카멘왕 금관(金棺, 제18왕조)이 있고 목공품으로는 배 모형이 있다. 배는 이집트인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종류는 작은 어선에서 선실과 돛을 갖춘 배 등 다양했다.

그러나 주된 목공품은 가구였으며 침대·의자·스툴 등의 다리에는 동물의 다리모양을 새기어 조형미를 살렸다. 가구 구조는 합리적이며 침대는 튼튼한 나무틀에 식물섬유 네트를 깔고, 그 위에 기하학적으로 접을 수 있게 한 아마포(亞麻布)를 깔았다. 가구 이외의 목공품에는 숟가락·거울집·작은 상자 등이 있다.

<김경수>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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