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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2 (화) 23:3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5794      
[현대] 한국 현대 회화 (민족)
회화(현대 회화)

세부항목

회화
회화(삼국·통일신라시대의 회화)
회화(고려시대의 회화)
회화(조선시대의 회화)
회화(근대 회화)
회화(현대 회화)
회화(참고문헌)

한국의 현대 미술은 대체로 두 가지 관점에서 그 기점이 설정되고 있다. 1945년 광복으로부터 그 기점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 그 하나요, 1957년 이른바 운동으로서의 현대 미술의 시작을 그 기점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1945년 기점설은 정치적·사회적인 독립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에서도 독립을 찾았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시대의 장으로서 그 기점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미술 분야에서 과연 1945년을 분계로 해서 이전과 이후가 조형 전반에 걸쳐 뚜렷한 변혁과 발전이 일어났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대답은 극히 부정적일 것이다.

일본의 한 변방 또는 지방 미술로서 유지되었던 한국 미술이 일본의 영향에서 벗어나기에는 좀더 오랜 시일이 요구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부정적 태도를 지탱해 준다. 그러한 점에서 1945년 기점설은 정치적 독립에 수반된 시대적 구획이라는 편이 더욱 부담이 없다. 이에 비한다면 1957년설은 보다 뚜렷한 변혁의 현상을 만날 수 있다. 그 가장 특징적인 현상의 하나는 조형 이념의 결속과 전개에 따른 보다 적극적인 미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1945년 광복 이후에서 1950년 후반에 이르기까지 미술계는 조형 이념 외적인 사태의 연속으로 점철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광복에서부터 6·25 동란까지의 좌우 대립이라는 이데올로기 분쟁 그리고 동란 이후 1961년 5·16 군사 정변에 이르는 시기에 펼쳐졌던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의 분파를 그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1957년을 기점으로 하는 조형 이념의 전개는 오랫동안의 방황에서 그 본연의 자세로 되돌아온 미술 본연의 자각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미술은 어떤 타율적인 것에 속박되지 않는 그 자체의 자율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이 무렵에 와서야 그 정당한 채비를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1945년에서 1957년까지를 준비기로, 그리고 1957년 이후를 전개기로 보고 있으며, 주로 1957년 이후의 활동을 한국 현대 회화의 참다운 전개로 간주하고 있다.

1. 6·25 동란까지

광복 이후 미술계의 가장 커다란 이슈로 등장한 것은 일제 잔재의 극복과 민족 미술의 건설이었다. 식민지 시대를 통하여 의식·무의식적으로 침윤된 일본적 감성은 서양식 조형 사고의 영역뿐 아니라 전통적인 회화 양식 가운데에서도 현저하게 나타났다. 서양의 조형 방법을 일본을 통하여 수용할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 자연 일본적인 해석에 의한 서양의 조형 방법이라는 한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요인이 되었다.

전통적인 회화 분야에서도 저들은 새로운 감각에 의한 양식적 해석을 일찍이 서둘렀으며, 그것이 감각적으로 뒤떨어진 한국의 미술 속에 침윤되기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사실 이 같은 일본적 감성을 하루아침에 벗어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극복하려는 의욕에 비하여 현실이 이를 따라가 주지 않을 때 공소한 관념의 만연을 일으킬 뿐이었다. 또 하나 광복 직후의 미술계 상황은 그것이 1950년대 중반, 즉 동란 이후 수복기까지도 지속되고 있지만, 국제적인 유대 관계를 지니지 못한 일종의 닫힌 고립 지대로서 머물러 있었다.

일본과의 단절은 그나마 지금까지의 정보마저 완전히 두절되었음을 의미하며, 국제 미술의 대열에서 벗어난 것을 말하여 준다. 과거의 반복만이 이 시대 미술의 전체적 양상처럼 보인다. 그 하나의 상징적인 사례로 지적할 만한 것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창설이었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미술가들의 공동의 발표장을 마련해 줄 뿐 아니라 좌우 대립의 이데올로기적 분쟁에서 벗어나 미술가들을 다시 그들의 작업장으로 이끌어 가게 한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비전을 가진 전시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지 못한 채 한갓 조선미술전람회의 연장에 안주해 버렸다는 점이 지적된다. 새로운 시대에 상응되는 이념적 체제를 이루지 못한 채 과거 체제의 답습에 머물렀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시대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가들이 일제의 교육을 통하여 성장하고 일제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지속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성장하였다는 사실에서 그 요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황에서는 어떤 새로운 것의 모델보다는 과거의 모델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이 상정이다. 따라서 광복 이후 한국 회화의 전반적 수준은 일본의 관전을 지향하는 관념적 인상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입체파 이후의 새로운 미학이 일부에서는 없지 않았으나 이들의 힘은 너무 미약한 편이었다. 조형 이념의 전개로서의 운동체로보다는 한 개인의 취향으로밖에 머물러 있지 못하였다.

국제적인 시야에서 볼 때 1945년에서 1950년대에 이르는 한 시기는 뜨거운 추상 미술이 풍미하기 시작한 때이다. 또 그것은 약간의 시차는 있지만 국제적인 현상으로 만연되었다. 이 급진적인 밖에서의 변모에 비하여 안에서의 고여 있는 상황은 이 시대 한국 미술의 고립상을 흥미롭게 보여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2. 6·25 동란 이후

6·25 동란은 미술계의 구조에도 많은 변모를 가져오게 하였다. 동란을 통하여 많은 미술가들이 실종 또는 월북하였으며, 이에 못지 않게 많은 북쪽의 미술가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피난지 부산은 서울에서 내려온 미술가들과 새롭게 남한으로 넘어온 북쪽의 미술가들이 혼류되어 새로운 정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특히, 반공과 구국이라는 이념 아래 전 미술계가 결속되었던 것은 광복 직후 좌우 분쟁 이후의 대동단결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동단결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도 전에 미술가들을 결속시켰던 반공과 구국의 구호는 점차 긴박성을 잃고 추상적인 관념으로 변하면서, 한동안 내부로 잠재되었던 복합적인 미술계 이해 관계가 표면화하기 시작하였다. 1955년 ‘국전분규’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대한미술협회로 결속된 미술계는 다시 한국미술가협회로 이분되었으며, 이 두 단체를 통한 갈등과 반목은 1960년 정부 정책에 의한 단체 통합이 이루어지기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이 시기의 주요 전시 활동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창설(1949년)과 대한미술협회전, 한국미술가협회전 등의 대규모 단체전 그리고 각종 행사의 기념전이 있었으며, 피난시절 몇몇 그룹전이 간헐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미술인 단결과 문화 진흥을 표방한 전국 규모의 전시 체제로서 출발하였다. 고희동·이종우·도상봉·장발·이인성 등 중진 미술인들이 중심이 되었으며, 광복 후 한동안의 미술계 혼란을 수습하는 구심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동란으로 인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는 1회만을 치르고 일시 중단되었다. 1953년 수복 후 2회전이 열리기까지는 대체로 피난지 부산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몇몇 그룹 활동과 행사 기념전이 미술계 활동의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이었다. 후반기동인(後半期同人-김환기·韓默·文信·李俊)·토벽동인(土壁同人-徐成贊·金裸敎·金耕·金潤玟··林湖)·기조동인(其潮同人-孫應星·한묵·朴古石·李仲燮·李鳳商)들의 전시와 1947년에 출범한 신사실파동인(新寫實派同人-김환기·유영국·이규상·장욱진·白榮洙·이중섭)의 전시 등이 피난 시절의 주요 미술 활동으로 기록된다.

개인으로는 이용우·백영수·배운성·남관(南寬)·천경자(千鏡子)·박고석·김환기·김흥수·변관식·박영선·윤식·이중섭전 등이 광복 이후에서 1950년대 중반까지의 주요 개인전이다. 1954년에서부터 점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미술가들의 해외 진출도 특징적인 현상으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폐쇄되었던 미술계가 밖으로 향하여 열리는 하나의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하여 국제적인 미술 동향의 직접적인 체험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남관·김흥수·박영선·김환기·김종하·장두건(張斗建)·함대정(咸大正)·손동진(孫東鎭)·이세득(李世得)·권옥연(權玉淵) 등이 차례로 파리로 떠났다. 이들은 대개 2, 3년의 체재를 끝내고 돌아왔다. 또한 한결같이 새로운 조형 체험을 쌓고 돌아왔다. 이 같은 기성 작가들의 잇따른 해외 체류와 새로운 조형에의 폭넓은 체험은 1957년 이후의 현대 미술 운동의 자양이 될 수 있었다.

3. 1957년 이후

1957년을 현대 미술의 기점으로 설정하는 가장 구체적인 단서는 이해에 발족된 이념적 그룹에서 발견할 수 있다. 같은 해에 네 개의 단체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그것도 각기 뚜렷한 명분과 색채를 띠고 나타났다는 것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었다. 창작미술가협회·모던아트협회·신조형파·현대미술가협회가 1957년에 출범한 단체들이었다. 창작미술가협회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발판으로 활약하고 있던 중견 작가들이면서도 새로운 감각을 추구하려는 모임이었다. 모던아트협회와 신조형파는 입체파 이후의 미학에 바탕을 둔 온건한 혁신을 꾀한 그룹이었다.

이에 비하면 현대미술가협회는 20대의 젊은 세대들에 의하여 결속되고 추진되었으며, 과감한 실험적 에너지의 분출을 보여 주었다. 이들에 의하여 전후에 새로운 추상미술이 수용되었으며, 그것은 또한 뜨거운 반응 속에서 화단을 풍미하게 되었다. 새로운 이념적 결속이 추진되어 가던 이 시기에 시대의 변혁을 더욱 구체적으로 다져 주었던 것이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현대작가초대전이었다. 앞서의 그룹전들이 소단위라면 이 초대전은 현대 작가 전체를 대상으로 그때그때 초대 작가의 범위를 정하는 대단위 종합전이었다.

당시 보수적 미학의 아성을 쌓고 있던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도전하는 강력한 재야적(在野的)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출범하고 있는 소단위 그룹들에 의하여 현대 미술 운동이 싹트기 시작하였다면, 1959년을 고비로 현대 미술 운동은 그 성숙기에 접어들어 갔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초대전은 국제적으로 보편화하고 있던 추상 표현주의(액션 페인팅)의 급격한 만연을 주도하였던 발판으로서도 주요한 역사적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 초대전은 1970년대 초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 사이 미술계 구조의 변혁과 다양한 경향의 대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색되어 갔다.

추상 표현주의로 대변되는 현대 미술 운동의 열기는 1960년대 중반에 오면서 식어가기 시작하여 1960년대 후반에 와서 새로운 모색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67년에 기획된 청년작가연립전은 이 새로운 모색의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 연립전이 모체가 되어 1969년에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가 결성되어 1950년대와 1960년대 초의 현대미술가협회와 현대작가초대전이 담당하였던 전위적 활동의 구심체 구실을 떠맡았다.

A.G.전은 ‘전위 예술에의 강한 의식을 전제로 비전 빈곤의 한국 화단에 새로운 조형 질서를 모색, 창조한다.’는 열의로 몇 차례에 걸친 테마전과 이념지의 발간을 시도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구·서울·광주·부산·춘천·청주·전주 등지에서 현대 미술제가 열려 지금까지 서울 중심의 현대 미술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는 현상을 보였다.

1970년대에 두드러진 또 하나의 현상은 현대 작가들의 해외로의 적극적인 진출이다. 국제전에의 참여는 19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와 파리청년작가비엔날레로 출발되어 카뉴국제회화제·인도트리엔날레·동경비엔날레·동경판화비엔날레 등으로 늘어났다. 이밖에 개별적으로 각종 국제 규모의 전시에 출품하는 작가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한국 현대 미술의 기획적인 소개는 유럽과 일본 등지에서 간헐적으로 있었다. 특히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해진 것이 1970년대의 두드러진 현상의 하나이다. 1977년 동경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의 단면전(斷面展)’은 한국 현대 미술의 신선한 이미지를 일본에 심어 준 계기가 되었다.

4. 현대의 한국화·양화

회화는 전통적 양식인 한국화와 근대 이후 수용된 양화로 크게 분류된다. 양화는 다시 경향별로 자연주의적 사실(寫實)과 표현주의적인 구상(具象)에 대비되는 추상과 비구상으로 나누어진다. 1957년 이후 현대 회화를 이상과 같은 양식과 경향에 따라 분류해 본다.

[한국화]

전통적 회화 양식인 한국화는 광복 직후에 이른바 일본적 색채의 배제라는 진통을 겪는다. 그리고 1950년대에 들어와서는 전통적 남종 산수와 문인화적 발상의 수묵 담채가 크게 부상되었다. 일본화적 색채의 배제와 아울러 민족 미술의 건설이라는 구호는 자연 전통에의 복귀와 전통적·양식적 특성을 현대적 감각으로 해석하려는 두 개의 방향을 낳았다.

1957년을 전후로 한 미술계 전반의 의식 혁명은 한국화 영역에도 깊은 자극을 주었다. 그 결과 양화의 추상 표현주의와 맥락되는 대담한 표현 실험이 등장하게 되었다. 중견 화가들로 구성, 1957년에 발족된 백양회(白陽會)는 소재 관념에서의 탈피와 서구적 조형체험의 원용이라는 점에서 전통적 양식의 현대적 재해석이라는 입장을 보여 주었다.

젊은 세대들로 구성, 1960년대에 출범하고 있는 묵림회(墨林會)는 더욱 적극적인 입장에서 전통적 매재의 실험을 다양화하였다. 특히 이들의 실험은 동시대 추상 표현주의와 정신적인 유대를 형성하면서 한국화를 오랜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백양회는 국내전뿐 아니라 대만·일본 등지에서 해외전을 가져 한국화가 지니고 있는 독자적인 영역과 그 가능성을 진단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중견 작가들로 구성된 백양회는 한국화가 처하여 있는 오랜 전통적 관념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감각의 조형성을 추구하려는 지속적 관심을 보여 주었다. 특히 김기창·박내현(朴崍賢) 부부의 대담한 소재 해석과 표현의 추이는 새 세대의 한국 화가들에게 많은 감명을 주었다. 양화 분야와 같이 현대작가초대전에서의 한국화 분야는 실험적인 경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실험 정신은 자연히 한국화와 양화라는 장르 개념을 뛰어넘는 회화로서의 자각 현상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면, 굳이 한국화나 양화라는 개념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회화라는 동일한 개념 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자는 것이 한국화나 양화의 범주를 벗어난 의식의 공통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지 않는 수묵의 흘림이나 발묵(潑墨 : 글씨나 그림에서 먹물이 번져 퍼지게 함)의 기법적 현상에서 일어나는 표현의 진폭은 액션 페인팅의 정신과 상통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화나 양화의 장르적 개념의 극복은 더욱 확대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화에서의 추상 내지 비구상이라는 말은 이 무렵부터 등장하였다. 그것이 그대로 화단의 현실에 적용되어 이른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동양화 비구상부가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실험적 추세와 대응되는 과거 형식에의 안주 역시 꾸준한 명맥을 지탱하였다. 주로 중진급 작가들이 전통적인 남화산수를 지속하였다. 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한 남종 산수의 분포도 한국 화단의 일각을 형성해 주었다.

한국 화단의 중진급 작가들은 안중식과 조석진의 서화미술회 문하생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전통적 양식에 바탕을 두면서도 각기 개성적인 세계를 형성하였다는 점에서 돋보였다. 이상범과 변관식은 사경(寫景)을 통하여 한국 전형의 산수미를 완성시킨 점에서 크게 평가되고 있다. 노수현·허백련·박승무 등은 고답적인 관념미를 통하여 한국화의 정신적인 일면을 고수한 예로 남아 있다.

김은호는 홀로 공교(工巧)한 필법의 세계를 추구하여 한국의 또 다른 일면을 대표해 주었다. 이밖에 수묵 산수 계열로는 배렴과 허건이 역시 독자적인 세계를 열었다. 전통적인 소재와 방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비단 1957년 이후의 현상만은 아니다. 이미 광복 직후부터 이러한 움직임은 잠재되어 왔다. 그 하나의 커다란 맥으로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의 장우성을 중심으로 한 문인화적 발상의 수묵 계열을 들 수 있다. 문인화의 고답적인 정신 세계를 지향하면서도 소재의 해석과 표현의 방법에 있어서는 현대적 감각을 추구하였다. 이 계열의 작가로는 박노수(朴魯壽)·서세옥(徐世鈺)·장운상(張雲祥)·민경갑(閔庚甲)·전영화(全榮華)·신영상(辛永常)·송영방(宋榮邦)·이종상(李鍾祥) 등을 꼽을 수 있다.

1960년에 창립된 묵림회는 문인화적 발상의 수묵 계열이 중심이 된 단체이다. 이들에 의하여 수묵의 다양한 표현적 실험이 이루어졌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서세옥·박세원(朴世元)·장운상·장선백·민경갑·전영화·이영찬·남궁훈(南宮勳) 등으로 출발한 묵림회는 1965년까지 존속되다가 해체되었다. 이를 모체로 다시 형성된 것이 한국화회였다. 출발에 있어서 여러 경향의 작가들이 혼성되었던 청토회(靑土會, 1963년 발족)는 점차 남종 산수 계통의 작가들로 재정비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밖에 홍익대학교 동문들의 모임인 신수회(新樹會)가 1963년에 창립전을 열었다. 전통적인 남종 산수나 수묵 실험의 계열에 다같이 동떨어진 채색 위주의 작품을 시도하였던 작가로 천경자와 박생광(朴生光)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이 보여 준 채색을 통한 실험적 추세 역시 한국화의 오랜 소재 관념과 재료 해석의 안이성에서 탈피하는 현대적 방법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양화]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양화단의 분포를 살펴보면 전전(戰前) 세대와 새롭게 등장한 광복후 세대가 혼성되면서 점차 전후 세대가 부상해 가는 일종의 세대 교체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현대미술가협회와 현대작가초대전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현대 미술 운동의 추진력은 전후 세대에 의하여 주도되고 있었다. 그리고 작가들의 수도 전전 세대를 앞지르는 현상을 보였다. 이 같은 현상은 자연 지금까지 양화계의 단일한 구조에 변혁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이념의 분파 작용과 더불어 더욱 풍부한 편성을 독려한 것이 되었다.

1957년을 기점으로 하여 당시 양화계를 살펴보면 자연주의적인 사실 계열과 표현주의적인 사실 계열이 전전 세대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입체파 이후의 이른바 새로운 감각의 근대적 조형은 수적으로 극히 열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1947년에 창립된 신사실파와 1957년에 창립된 모던아트협회가 입체파 이후의 조형 체험을 지닌 작가들의 모임이었다. 그밖에는 극히 몇몇 작가들이 이 같은 조형 체험을 바탕으로 하였을 뿐이다.

1957년에 창립된 창작미술협회는 계보로 보아서는 표현주의적인 사실 계열에 속하였다. 그러면서도 소재에의 정감적 해석과 새로운 감각의 확대로 점차 환원적인 상형의 세계로 진전되어 가는 추세를 보였다. 이 가운데 상당수가 환원적인 방법을 통하여 대상성에서 벗어나 비구상의 세계로 탈바꿈하였다. 유경채(柳景埰)·고화흠(高和欽)·이봉상·이준(李俊) 등이 비구상의 세계로 전환하였으다. 박항섭(朴恒燮)·최영림·박창돈(朴昌敦)·홍종명(洪鍾鳴)·황유엽 등은 비록 대상성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각적 진실보다는 표현적 추세가 강한 경향을 지속해 나갔다. 이들은 자연주의적 사실 계열과 다른 구상 개념을 진척시켜 나갔다. 1968년 구상전(具象展)은 이들에 의하여 결성될 수 있었다. 모던아트협회는 자연주의 계열에서 벗어나 근대적 조형 방법을 모색해 온 작가들의 모임체였다. 유영국·한묵·이규상·황염수·박고석 등으로 출발, 점차로 정규·김경·문신·정점식·천경자 등이 참여하여 1961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가운데 유영국·이규상은 김환기와 더불어 전전부터 순수 추상의 세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김환기·유영국의 작품에는 일시 대상을 굴절시킨 반추상적 경향도 보여 주었다. 모던아트협회·현대미술가협회 등과 같은 시기에 출발한 신조형파는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정신을 구현하자는 종합적인 조형 운동을 지향하였다. 화가뿐 아니라 건축가·실내 디자이너 등이 참여하였던 것도 이와 같은 단체의 색채를 말하여 준다.

현대미술가협회는 전후 세대들에 의하여 구성된 단체였다. 그 출발에서는 김영환(金永煥)·이철(李哲)·김종휘(金鍾輝)·장성순(張成旬)·김청관(金靑繫)·문우식(文友植)·김창렬(金昌烈)·하인두(河麟斗)가 참여하였다. 뒤에 일부가 탈퇴하고 새로 김서봉(金瑞鳳)·조동훈(趙東薰)·김충선(金忠善)·나병재(羅丙宰)·조용민(趙鏞鋌)·이수헌(李樹軒)·이양로(李亮魯)·전상수(田相秀)·박서보(朴栖甫) 등이 가담하였다. 1961년 해체되기까지 일년에 거의 두 차례씩의 전시를 통하여 새 시대의 주도적인 발판을 구축해 나갔다. 이 회원들의 대부분은 또 현대작가초대전에서의 중심적인 작가들이였다. 그리고 사실상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걸친 한 시기의 현대 미술을 대표해 주고 있다.

현대미술가협회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추상 표현주의를 시도하였던 작가들로는 한봉덕(韓奉德)·김훈(金薰)·이세득(李世得)·김병기(金秉騏)·강용운(姜龍雲)·장석수(張石水)·양수아(梁秀雅)·김영주(金永周) 등 전전 세대와 이수재(李壽在)·김상대(金相大)·이명의(李明儀)·이일녕(李逸寧)·정창섭(丁昌燮) 등 전후 세대의 작가들을 꼽을 수 있다. 1958년경부터 부분적으로 시도되었던 추상 표현주의는 1960년에 접어들면서 어느덧 현대 미술의 중심적 경향으로서 풍미하였다. 이 뜨거운 파상 효과는 일부 자연주의 계열의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일시나마 추상적 경향으로 경도되는 현상을 빚기도 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상 미술이 수용된 것도 이 같은 시대적 추세를 반영한 일례였다.

이 급격한 추상 미술의 파급은 급기야 자연주의 계열의 작가들에게 재정비와 결속을 가져오게 하였다. 1958년 목우회(木友會)의 창립이 그것이다. 이 단체는 당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 위원급의 원로 및 중진 작가들이 중심이 된 자연주의적 사실 계열의 유일한 집결체였다. 창립 당시의 회원은 이종우·도상봉·이병규·박득순·이마동·박상옥·손응성·이동훈·최덕휴·심형구·김종하·김형구(金亨球)·김인승(金仁承)·박광진(朴洸眞)·박희만(朴喜滿)·나희균(羅喜均) 등이었다.

나중에 여기에 가담하였거나 아니면 독자적으로 활동한 작가 가운데 자연주의적 사실과 표현주의적 사실 계열의 작가로는 임직순(任直淳)·이종무(李種武)·윤중식·김원·오지호·김창락(金昌洛)·김숙진(金叔鎭) 등을 들 수 있다. 자연주의적 바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자적인 시각과 화풍을 전개하였던 작가로는 1956년에 작고한 이중섭과 박수근·장욱진 등이 특이한 세계를 펼쳐 보여 주었다.

자연주의 계열과 전후 추상 계열의 예각적인 대립 양상은 1960년 전후의 구상·추상 논쟁을 야기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제적인 추세와 같이 역시 전후 추상의 세력화가 미술계의 중심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60년에 창립된 1960년미술협회는 4·19를 겪은 가장 젊은 세대로 출발하였으나 그들이 추구한 것은 전후의 뜨거운 추상이었다. 1961년에 현대미술가협회와 연합전을 가지고 다음 해 악뛰엘이라는 새로운 단체로 발전적 해체를 단행한 것도 이념의 동질에서 가능하였던 현상이었다. 정상화(鄭相和)·하인두·전상수·김종학·박서보·김봉태(金鳳台)·김창렬·장성순·조용익(趙容翊)·윤명로(尹明老) 등이 악뛰엘 창립에 가담하였다.

추상 표현주의의 포화 상태는 악뛰엘로 인한 젊은 세대의 재결속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탈출구를 모색하지 못하였다. 추상 표현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는 즉물적 표현, 네오다다적 경향, 해프닝과 행위 예술, 기하학적·시각적 추상 등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경향은 1967년 청년작가연립전에서 A.G. 그룹으로 이어져 1970년대 초반에까지 지속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다시 개념 예술, 미니멀리즘이 표면에 부상되었다. 그리고 추상 표현주의의 시대와는 달리 다양한 경향과 색채가 혼합을 이루는 양상을 보였다.

양화계는 지금 극사실주의의 대두와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자각, 창작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 등 국제적인 추세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의 수용의 태세에서 벗어나 한국 독자의 조형 방법의 모색이 미술계 일각에서 서둘러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양화가 도입된 이래 70년이 경과하고 있다는, 말하자면 수용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오광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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