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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2 (화) 21:57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0344      
[조선] 조선 시대의 회화 (민족)
회화(조선시대의 회화)

세부항목

회화
회화(삼국·통일신라시대의 회화)
회화(고려시대의 회화)
회화(조선시대의 회화)
회화(근대 회화)
회화(현대 회화)
회화(참고문헌)

한국 미술사상 회화가 가장 발전하였던 때는 조선 시대라 하겠다. 이 시대에는 조직화된 도화서(圖畵署)를 중심으로 다수의 훌륭한 화원들이 배출되었고, 이들과 아울러 상당수의 사대부 화가들이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억불 숭유 정책 때문인지 고려 시대에 한몫을 하던 승려 화가들의 활동은 극히 쇠퇴하였다.

조선 시대의 회화는 고려시대보다도 더욱 다양해졌다. 또한 한국화 현상을 더욱 뚜렷하게 형성하였다. 이러한 한국화 현상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구도·공간 처리·필묵법·준법(齧法)·수지법(樹枝法) 등에 현저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대의 회화도 송·원·명·청의 중국 회화를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소화하여 독자적인 양식을 형성하였다. 또 일본의 수묵화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이렇게 확립된 한국적 화풍이 시종 강한 전통을 유지하였다. 조선시대의 회화는 많은 변화를 거듭하였으니, 양식적 변천에 따라 대략 ① 초기(1392∼1550년경), ② 중기(1550∼1700년경), ③ 후기(1700∼1850년경), ④ 말기(1850∼1910년경)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초기의 회화

조선 시대의 회화 발달과 관련하여 맨 먼저 관심의 대상이 되는 시기는 초기, 그중에서도 세종조를 중심으로 한 15세기이다. 이 시기에 이미 안견(安堅)과 강희안(姜希顔)을 비롯한 거장들이 배출되어 격조 높은 한국적 화풍을 성취하고, 후대의 회화 발전을 위한 토대를 굳건히 하였다. 이때에 형성된 한국화풍의 전통은 초기의 성종조를 거쳐 중종 말년과 명종 초년까지 지속되었다. 그 뒤로도 중기 회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고려 시대에 축적되었던 중국의 화적(畵跡)이 다수 전승된 이외에 연경(燕京)을 중심으로 한 명나라와의 회화 교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주요 화풍들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한국적 화풍의 형성에 토대가 되었다.

① 북송의 이성(李成)과 곽희(郭熙)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이른바 이곽파 또는 곽희파 화풍, ② 남송의 화원 마원(馬遠)과 하규(夏珪)가 형성한 마하파 화풍을 비롯한 원체 화풍(院體畵風), ③ 명대의 원체 화풍, ④ 저장성(浙江省) 출신인 대진(戴進)을 중심으로 명초에 이룩된 절파 화풍, ⑤ 북송의 미불(米連)·미우인(米友仁) 부자에 의하여 창시되고 원대의 고극공(高克恭) 등에 의하여 계승된 미법 산수 화풍(米法山水畵風) 등이다.

조선 초기의 화가들은 이러한 화풍들을 철저히 소화하고 수용하여 중국 회화와는 완연히 구분되는 특색 있는 양식을 발전시켰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최대 거장인 안견은 그 좋은 예이다. 그의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나 전칭 작품인 〈사시팔경도 四時八景圖〉 등을 보면, 그가 곽희파 화풍을 토대로 자성일가(自成一家)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쪽에 치우친 편파 구도, 몇 개의 흩어진 경군(景群)들로 이루어진 구성, 넓은 공간과 여백을 중요시하는 공간 관념, 대각선 운동의 효율적인 운용 그리고 개성이 강한 필묵법 등은 안견이 형성한 화풍의 특색을 잘 반영하여 준다.

이러한 화풍은 16세기 전반에 양팽손(梁彭孫)과 그 밖의 화원들에 의하여 추종이 되었고, 그 뒤의 조선 중기 화단에서도 끈질기게 추종이 되었다. 이처럼 안견파 화풍은 조선 시대 회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안견이 대성하게 된 배경에는 그를 비호한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이론과 중국화 소장품이 큰 구실을 하였다.

세종조를 무대로 안견과 동시에 활약한 사대부 화가 강희안 역시 크게 주목된다. 그는 명대의 원체 화풍과 절파 화풍을 수용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사관수도 高士觀水圖〉에서 볼 수 있듯이 문기(文氣)에 넘치는 자신의 화풍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그가 대담하게 수용하였던 절파 화풍은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야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마하파 화풍은 안견파의 그림들에 부분적으로 수용된 이외에 이상좌(李上佐)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송하보월도 松下步月圖〉 등에서 그 면목이 엿보이고 있다.

이밖에 최숙창(崔叔昌)·이장손(李長孫)·서문보(徐文寶) 등 15세기 말경의 화원들에 의하여 원대 고극공 계통의 미법 산수화가 그려졌음이, 일본에서 발견된 작품들에 의해서 밝혀지게 되어 큰 주목을 끈다. 이 점은 남종 문인화의 한 지류인 미법산수의 동전(東傳)이 종전의 통념과는 달리 1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말해 준다.

조선 초기에는 이렇게 몇 가지 화풍을 토대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다. 16세기에 이르면 산수화의 형태는 더욱 다듬어지고 공간은 더욱 넓어지며, 필벽(筆癖)은 더욱 토속화되어 단선점준(短線點齧) 등의 한국적 준법의 발생을 보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16세기의 화가들은 이미 한국화된 15세기의 화풍에 집착하는 전통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

이것은 세종조 이래의 조선 초기의 문화가 뿌리를 깊이 내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믿어진다. 또한 조선 초기에는 〈금강산도〉·〈삼각산도〉 등이 화원들에 의하여 활발하게 제작되어 실경 산수화의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밖에 이 시대에는 이암(李巖)의 강아지 그림,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등 한국적 정서가 짙게 발현된 화풍이 자리를 잡았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회화는 중국 회화를 선별적으로 받아들여 한국적 화풍을 이루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의 회화가 송대·원대 회화를 모방하는 데 그쳤다고 막연하게 믿던 종래의 통념은 이제 마땅히 불식되어야 한다.

조선 초기의 회화는 또한 일본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의 수묵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일본 수묵 산수화의 비조인 슈분(周文)과 그의 추종자들의 작품들에는 조선 초기 회화의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이밖에도 수문(秀文)과 문청(文淸)은 조선 초기의 회화를 일본에 전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였던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2. 중기의 회화

조선 중기는 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정묘호란 등의 극도로 파괴적인 대란이 속발하고 사색당쟁이 계속되어 정치적으로는 매우 불안한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색 있는 한국적 화풍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이 시대에는, ① 조선 초기에 강희안 등에 수용되기 시작한 절파계 화풍이 김제(金廂)·이경윤(李慶胤)·김명국(金明國) 등에 의하여 크게 유행하였다. ②이정근(李正根)·이흥효(李興孝)·이징(李澄) 등에 의하여 조선 초기의 안견파 화풍이 추종되고 있었다. ③ 김식(金廂)·조속(趙速) 등에 의하여 영모나 화조화 부문에 애틋한 서정적 세계의 한국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④ 묵죽·묵매·묵포도 등에서도 이정(李霆)·어몽룡(魚夢龍)·황집중(黃執中) 등의 대가들이 꽃을 피웠다. ⑤ 이밖에도 중국 남종 문인화가 전래되어 소극적으로나마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정치적으로 혼란하였던 조선 중기에 이처럼 회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 초기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전해졌기 때문이라고 믿어진다. 사실상 중기의 화가들은 안견파 화풍을 비롯한 조선 초기의 회화 전통에 집착하는 경향이 현저하였다.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면서도 전통의 토대 위에 수용하였던 것이다.

중기의 회화에서 또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선 왕조적인 정취를 짙게 풍겨주는 영모와 화조화가 발달하였던 사실이다. 달무리진 눈매와 퉁퉁한 몸매를 보여 주는 김식의 소 그림, 애잔한 느낌을 자아내는 조속과 지운(之耘) 부자의 수묵 화조화 등은 그 대표적인 예들이다. 그리고 이정의 묵죽, 어몽룡의 묵매, 황집중의 묵포도 등에도 한국화 현상이 현저히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의 회화도 조선 초기 회화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가미하면서 조선 중기 특유의 양식을 발달시켰다. 그러나 정치적 혼란과 보수적 경향 때문이었는지 이미 들어와 있던 남종화풍은 적극적으로 유행하지는 못하였다.

3. 후기의 회화

조선 후기는 특히 두드러진 새로운 경향의 회화를 발전시킨 시대이다. 가장 한국적이고도 민족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화풍들이 이 시대에 풍미하였다. 이러한 후기의 회화는 세종조 때부터 꽃피웠던 조선 초기의 회화와 비교되는 훌륭한 것이었다. 초기의 회화가 송대·원대 회화의 영향을 바탕으로 한국적 특성을 형성하였다. 이에 반하여 후기의 회화는 명대·청대 회화를 수용하면서 보다 뚜렷한 민족적 자아 의식을 발현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회화가 발전하게 된 것은 새로운 회화 기법과 사상의 수용 및 시대적 배경에 연유한 것으로 믿어진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 팽배했던 자아 의식은 조선 후기의 문화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한국의 산천과 한국인의 생활상을 소재로 다룬 조선 후기의 회화는 특히 주목된다. 그리고 이 시대에는 청나라의 강희(康熙, 1662∼1722년)·옹정(雍正, 1723∼1735년)·건륭(乾隆, 1736∼1795년) 연간의 중국 회화와 그곳에 전래되어 있던 서양화풍이 전해져 조선 후기 회화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의 탄생’에 기반을 둔 이 시대 회화의 조류로는, ① 조선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절파계 화풍이 쇠퇴하고 그 대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된 점. ② 남종화법을 토대로 한반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천을 독특한 화풍으로 표현하는 진경 산수화가 정선 일파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발달한 사실. ③ 조선 후기인들의 생활상과 애정을 해학적으로 다룬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와 신윤복(申潤福) 등에 의하여 풍미한 점. ④ 서양화법이 전래되어 어느 정도 수용되기 시작하였던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남종화법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전대에 전래되어 있었던 것이나 본격적인 유행을 하게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이 남종화법의 유행은 조선 후기의 회화가 종래의 북종화적 기법을 탈피하여 새로운 화풍을 창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또한 남종화법의 전개에는 남종 문인화론이 뒷받침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형사(形似)보다는 사의(寫意)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대두되어 역시 참신한 화풍의 태동을 가능하게 하였다.

후기의 강세황(姜世晃)·이인상(李麟祥)·신위(申緯) 그리고 말기의 김정희(金正喜) 등은 남종화의 유행을 부채질한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러한 남종화법을 토대로 발전된 전형적인 한국적 회화가 바로 진경산수이다. 정선에 의하여 발전된 진경산수는 한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실경을 한국적으로 발전된 남종화법을 구사하여 그려낸 산수화를 말한다.

본래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삼아 그리는 화습은 이미 고려시대에 생겨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쳐 계속 전통의 맥락을 이어왔다. 그러나 정선 일파의 진경산수는 비단 한국의 실경을 소재로 다룰 뿐만 아니라 남종화법을 토대로 하여 새로이 발전된 화풍을 지니고 있는 것이 큰 특색이다. 상상에 의한 관념적 산수화를 토대로 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보고 느낀 직접적인 시각 경험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음으로써 진경산수는 농도 짙은 생동감을 자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시각을 당기는 구도와 개성화된 각종 준법, 농담이 강한 필묵법과 안온한 설채법(設彩法) 등은 정선과 그의 추종자들의 화풍을 더욱 한국적인 것으로 돋보이게 한다.

진경산수와 더불어 조선 후기 회화에서 가장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풍속화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이미 조선 초기와 중기의 각종 계회도(契會圖)를 비롯한 기록화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속화(俗畵)라고도 불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풍속화는 역시 김홍도·신윤복·김득신(金得臣) 등 후기 화원들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되었다.

김홍도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김득신은 주로 서민 생활의 단면들을 소재로 삼아 해학적으로 표현하였다. 양반만을 대상으로 양반만을 위해서 그려진 전 시대의 계회도와는 달리 그들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하에서 이루어졌다. 바지저고리와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 후기의 서민들이 그들의 주인공이며, 초가와 논밭과 대장간이 그 주인공들의 활동 무대를 이룬다. 이러한 풍속화는 전시대의 회화에서 찾아보기 어렵던 새로운 것이다. 서민들의 생활주변에서 찾은 재미있는 소재를 간결하면서도 초점을 이루는 구도 속에 익살스럽게 승화시킨 것이 김홍도와 김득신의 풍속화가 지니는 큰 특색이다.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대조적으로 신윤복은 남녀간의 애정 문제를 파헤치는 데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이기보다는 인생의 즐거움과 ‘로맨스’를 누리는 한량이나 기녀, 양반 등이 대부분이다. 아직도 유교적인 규범이 엄하였던 당시에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은 당시의 사회적 풍조를 고려해도 대담한 용기를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신윤복은 산수나 옥우(屋宇 : 여러 집채)를 배경으로 그의 주인공들을 섬세하고 유연한 필치와 산뜻한 채색을 구사하여 세련되게 표현하였다. 이렇듯 신윤복은 소재의 선택·구도·배경 설정·필법·설채법 등 다각적인 면에서 김홍도나 김득신과는 큰 차이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의 시대상이나 생활상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진지하고 적나라하게 묘파하였다는 데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솔직하게 반영한 가장 한국적인 화가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 과거의 상당한 부분을 모를 뻔하였다.

조선 후기의 회화와 관련하여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중국을 통한 서양화법의 전래와 수용이다. 명암법과 원근법·투시 도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서양화법은 청조에서 활약한 서양인 신부들에 의하여 소개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연경을 오고간 사행원(使行員)들의 손을 거쳐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두량(金斗樑)·이희영(李喜英)·박제가(朴齊家) 등의 일부 18세기 화가들에 의하여 수용되기 시작한 서양화법은 그 뒤에도 화원들이 그리는 궁궐의 의궤도(儀軌圖)나 민화의 책꽂이 그림 등에도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화가들이 수용한 서양화법은 오늘날의 유화와는 달리 한국적 소재를 명암이나 요철법 또는 원근법을 가미하여 다룬 수묵화의 한 가지였다.

이 화법은 비록 널리 유행하지는 못하였지만 회화상의 근대화를 예시하는 중요한 것이었다고 믿어진다. 아마도 이 화법의 전래와 수용은 19세기의 한국 회화가 이색적인 화풍을 형성할 수 있게 한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는지도 모른다.

4. 말기의 회화

조선 말기에는 후기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와 풍속화가 쇠퇴하고 김정희 일파를 중심으로 남종화가 일방적인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또한 개성이 강한 화가들이 나타나 참신하고 이색적인 화풍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경향은 김정희와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전기(田琦) 등 이른바 추사파(秋史派)와 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 그리고 홍세섭(洪世燮) 등의 작품들에서 전형적으로 간취된다.

김정희 일파가 남종화법을 다져놓는 데 기여하였다면, 김수철·김창수·홍세섭 등은 남종화법을 토대로 세련된 서구적 감각의 이색 화풍을 형성한 데 그 공로가 있다고 하겠다. 말하자면, 이 시대의 회화는 중국 청대 후반기 회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18세기 조선 후기 회화의 전통을 이어 전 시대에 못지 않게 뚜렷한 성격의 화풍을 형성하였다. 또 근대 회화의 모체가 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그러나 이 시대의 회화는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세차게 밀어닥친 국내외의 정치적 격동과 더불어 위축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興宣大院君 : 李昰應)과 민영익(閔泳翊) 등에 의하여 묵란이, 그리고 정학교(丁學敎) 등에 의하여 괴석(怪石)이 그려지는 등 문인화적인 소재가 약간 활발하게 다루어진 편이나, 전반적으로는 화단의 침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침체 상태에서 한 줄기의 빛을 발하며 맺어진 열매가 바로 장승업(張承業)이라고 볼 수 있다. 뛰어난 기량을 지녔던 장승업은 인물·산수·화훼·기명(器皿) 등 다양한 화재를 능란하게 다루어 화명을 떨치고 후진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晋)에게 영향을 미쳐 조선 말기의 회화 전통을 현대 화단으로 잇게 하였다. 따라서 장승업은 한국 근대 회화와 관련하여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겠다.

그러나 장승업은 뛰어난 기량을 지녔으면서도 그것을 높은 수준의 격조로 승화시켜 줄 학문이나 교양을 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개성을 발하면서도 이른바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를 품고 있지 못하다. 안견·정선·김홍도 등 그 이전의 화원들이 안평대군이나 강세황 등의 뛰어난 문인들로부터 받았던 화론상의 지도를 그는 충분히 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어쨌든 기이한 형태와 강렬한 필묵법과 설채법을 특징으로 하는 장승업의 화풍은 안중식과 조석진에 의하여 계승되었다. 이들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격조는 그 이전의 거장들에 비하여 현저하게 하락한 것이다. 조선 말기의 정치적·사회적 소용돌이와 더불어 이 시대 회화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저하되는 추세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국의 회화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등 외국 회화와의 교섭을 유지하고 좋은 점을 수용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화풍을 창조하였다. 이러한 전통이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일본 및 서양의 문물이 세차게 밀려오는 19세기 후반부터 다소 위축되는 경향을 나타내기 시작한 채 일제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현대 미술의 커다란 물결을 형성해 온 것은 단색파였다. 일명 백색파라고도 불린, 화면 전체를 단일한 색과 균질한 톤을 시도한 경향을 지칭한 것이었다. 절제, 간결, 고답적인 단색파의 경향은 미니멀리즘의 한국적인 대응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개념적 속성을 다분히 띤 것이다. 가능한 한 그린다는 것을 배제하고 저음의 화면 속에서 일종의 정신적인 깊이를 추구하려는 경향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는 정치, 사회적으로 억압된 시대로서 미술의 일각에선 민중의 정서를 반영한다는 민중 내지 민족 미술이 등장되어 기존의 미술권과 대립된 양상을 보여 준 시대라 할 수 있다. 또 한편 지금까지 금기되었던 그린다는 것이 다시금 의미를 띠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왕성한 표현력이 구가되기에 이르렀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목적을 둔 낙서파와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는 현실 이미지의 회복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 다양하고도 왕성한 표현의 일각을 장식하면서 1990년대 가장 활기찬 이슈로서 떠올랐다.

1990년대 한국 미술에서 주목되는 현상으로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창설과 같은 해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국판 건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권에서 유일한 국제전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관 건립과 더불어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베니스비엔날레는 두 차례에 이어 한국작가들이 특별상을 수상하였다. 그러므로서 다시금 한국 현대 미술의 수준을 세계에 과시한 계기가 되었다.

<안휘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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