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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6 (화) 08:51
분 류 문화사
ㆍ조회: 5237      
[미술] 벽화 (한메)
벽화 壁畵 wallpainting

건조물의 벽면이나 천장에 안료로 직접 그린 회화, 또는 예정된 건축물 벽면에 붙이기 위해 그린 화포화(畵布畵)나 판화. 주로 건축이나 무덤의 장식으로서 발전했으나, 라스코나 알타미라의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와 모자이크·타일 등에 의한 벽면 장식도 넓은 의미에 있어서 벽화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규모나 성격은 다르나 회화의 가장 오래 된 형태로서 거의 대부분의 지역과 시대에 걸쳐 작품이 남아 있다. 벽화는 그 목적 및 조형·기술면에서 벽화가 그려지는 건조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계의 벽화]

고대의 왕궁·신전·널방〔墓室〕에는 벽면을 장식하는 역사적인 작품이 많은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널방의 벽화에 훌륭한 작품이 많이 있으며, 메소포타미아와 에게해 지방에서도 그런 예를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역사시대의 고대 그리스 건축물도 벽화로 장식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아테네의 아고라에 있었던 스토아포이킬레는 3명의 화가가 그린 프레스코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한다. 로마 시대 이전의 고대 이탈리아에서는 에트루리아의 도시에서 벽화가 있는 지하 널방이 많이 발견되었다. 고대 그리스 회화의 반영을 보여주는 로마 시대의 작품은 베수비오화산의 분화로 매몰된 2개의 도시에서 발굴되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에는 카타콤에 벽화를 그렸고, 중세에 와서도 여러 수도원과 성당 등에서 발견되듯이 벽화 제작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비잔틴 양식의 성당에서는 모자이크가 성행하였고, 대체로 중세 시대에는 내구성이 빈약한 기법(技法)으로 그려졌던 때도 있어서 보존이 양호한 벽화는 적다.

서양 회화 역사상 벽화가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시대는, 조토 디 본도네를 선구자로 하고 마사초·P.프란체스카·A.만테냐를 거쳐서 B.미켈란젤로에 이르는, <참된 프레스코>기법이 융성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이다. 이어서 틴토레토와 P.베로네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파 후기의 화가들은 그림을 벽에다 직접 그린 것이 아니라, 유채(油彩)로 화포의 큰 화면에다 그리는 방법을 채용하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의 환상적인 천장화를 마지막으로 서양에서 벽화는 쇠퇴하였다.

동양의 벽화는 불교유적과 무덤의 널방에서 보게 된다. 널방벽화의 오래 된 보기는 중국 전한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잔타나 바미안의 석굴, 둔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 등은 벽화로 유명한 불교 유적이다. 벽화와 건축 관계에서는 여러 가지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벽화의 회화공간과 건축 자체의 공간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면,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유형을 들 수 있다.

단순한 평면적인 장식화로서 벽면 자체의 평면성과 일체화된 벽화는 건축의 공간 구성을 강조하고 명료하게 한다. 열린 창 또는 문짝과 같은 효과를 벽화로 표현하는 방법은 폼페이에도 그 보기가 있는데, 이 방법을 진전시키면 주위의 벽면을 구석구석까지 자연의 풍물로 뒤덮음으로써 건축을 부정하고 건축 공간을 변질시키는 벽화가 탄생한다.

석굴의 불교 벽화와 중세의 그리스도교 성당벽화는 보는 사람이 서 있는 공간에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회화이고, 르네상스 벽화는 상상력의 세계를 여는 상징적인 창문이다. 그리고 폼페이의 열린 문짝의 방법을 수직방향의 과장된 원근법으로 변형시킨다면 바로크 시대의 환상적인 천장화가 된다.

[한국의 벽화]

한국의 벽화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는데, 크게 건물 벽화와 고분 벽화로 나뉜다. 건물 벽화에서 사찰 벽화가 조선 시대까지 존재하였고, 고분 벽화는 고구려 시대에 크게 유행하여 역시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건물 벽화>

① 삼국시대

이 시대의 사찰 벽화로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부여(扶餘) 서복사지(西腹寺址) 출토의 벽화 파편이 있는데, 진흙바탕에 회칠을 하였고 벽으로 그린 새의 일부가 남아 있다. 고구려의 담징(曇徵)이 그린 일본 나라〔奈良〕의 《호류사금당벽화〔法隆寺金堂壁畵〕》는 중국 육조시대 회화식의 가는 선과 음영법(陰影法)의 입체감을 내는 운채(暈彩)를 사용하여 불상들의 풍만한 육체를 묘사하였는데, 1949년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② 고려 시대

사찰 벽화로 현존하는 부석사(浮石寺) 조사당(祖師堂)의 벽화는 범천(梵天)·제석천(帝釋天)·사천왕(四天王) 등 6점으로 국내 최고(最古)의 불교벽화이다. 그 외에 1937년 수덕사(修德寺) 대웅전 보수공사 중 발견된 1308년의 벽화들은 주악비천(奏樂飛天)·공양화(供養花)·소불도(小佛圖) 등의 내용으로 창방(昌枋)이나 고주(高柱) 주위의 황토벽에 그린 것으로 당시의 벽화양식을 알 수 있게 해준다.

③ 조선 시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사찰 벽화의 경우 예불용의 불화로 벽화보다는 탱화(幀畵)가 많이 이용되었고, 전각의 측면이나 창방 위의 포벽(包壁) 등에 벽화를 그렸다. 전기의 벽화로 1476년 조성된 무위사(無爲寺) 극락전의 후불벽화가 있고, 후기의 벽화로 위봉사(威鳳寺) 보광명전(普光明殿)의 벽화, 문수사(文殊寺) 극락전 벽화 등이 유명하다.

<고분 벽화>

① 고구려

4세기 중엽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중국계 벽화돌방무덤〔壁畵石室古墳〕의 영향을 받았다. 전기 벽화의 특징적 무늬로 중국 한(漢)나라 때의 괴운무늬〔怪雲紋〕에서 나온 구름띠무늬가 있고, 이들 벽화는 프레스코법으로 그려졌으며, 물감으로 녹청(綠靑)·군청(群靑)·황토·주토(朱土)와 먹이 쓰였다.

중기 벽화의 무용총(舞踊塚) 벽화는 화면의 정지감, 색조의 안정감, 대상물의 병치 등 고구려벽화의 특색을 잘 보여주고, 《사냥그림〔狩獵圖〕》은 중국 한나라 때의 사냥그림의 구도를 따라 화면이 크고 힘이 있다. 중기 벽화는 전기의 벽화에서 독립한 고구려화된 양식으로 주제면에서 인물화로부터 사신그림〔四神圖〕으로 이행하였고, 인동당초띠무늬가 특징적 무늬였다. 후기에는 풍속도·무늬그림은 사라지고 화려한 채색의 사신그림이 유행하였다. 진파리1호분·통구사신총·내리1호분 등이 대표적이다.

② 백제

공주(公州) 송산리(宋山里)6호분의 벽화 《백호도(白虎圖)》는 구름무늬 배경에 호랑이의 머리와 몸을 생동감있게 그렸는데, 선이 가늘면서 부드럽고 색채가 밝아 고구려벽화와는 다른 면을 보인다.

③ 신라

고신라의 영토 안에서 발견된 벽화무덤은 <영풍군 순흥면 태장리 어숙술묘(榮豊郡順興面台庄里於宿述墓)>와 <영풍군 순흥면 읍내리고분(邑內里古墳)> 등 2기이다.

④ 고려 및 조선 시대

고려 시대의 개풍군 수락암동(開豊郡水落巖洞) 1호분의 벽화는 선화(線畵) 십이지상이고, 거창(居昌)의 둔마리고분(屯馬里古墳)에는 십이지상이 아닌 피리를 불거나 복숭아를 들고 있는 선녀들의 도교적(道敎的) 도상(圖像)이 그려져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내부는 조사된 바 없으나 《국조오례의》에 의해 천장에는 일월성신도를, 네 벽에는 사신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이종애>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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