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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1-26 (일) 17:36
분 류 문화사
ㆍ조회: 5290      
[조선] 경복궁 (민족)
경복궁(景福宮)

경복궁 일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경복궁 경회루.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에 있는 조선 후기의 누각. 정면 7칸, 측면 5칸의 중층의 팔작지붕 건물. 국보 제224호. 근정전 서북쪽에 있는 방형 연못 안에 세운 건물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기 위한 곳이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궁궐도. 작자 미상의 덕수궁 그림. 조선시대. 저지에 채색. 77*49cm. 개인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백악춘효도. 1915년에 안중식이 그린 채색산수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북악산과 경복궁의 위치를 잘 보여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경복궁 배치도. 서울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의 배치도.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 북악산의 기슭에 위치한 경복궁은 남면하여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앞 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 침전과 후원이 자리잡은 전조후침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 사적 제117호. 도성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궐(北闕)이라고도 불리었다.

조선왕조의 건립에 따라 창건되어 초기에 정궁으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조선 말기 고종 때 중건되어 잠시 궁궐로 이용되었다.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때의 궁의 규모는 390여칸으로 크지 않았으며, 수조지소(受朝之所)인 근정전(勤政殿)이 5칸에 상하층 월대(越臺)와 행랑·근정문·천랑(穿廊)·각루(角樓)·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慶成殿) 3칸, 시사지소(視事之所)인 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태종 때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연생전·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그때 창덕궁·창경궁 등 다른 궁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왕은 정릉동의 구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에 임시 어소(御所)를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하도록 만류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趙光祖)가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이 있은 것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궁이 중건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그 규모는 7,225칸반이며 후원에 지어진 융문당(隆文堂) 이하의 전각도 256칸이고 궁성 담장의 길이는 1,765칸이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어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含元殿)·만경전(萬慶殿)·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의 내전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근정전의 정면 앞에다 총독부청사를 지었는데 이것은 매우 큰 석조건물로 궁의 정전인 근정전을 완전히 가리는 결과가 되었다. 이 밖에도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

1945년 광복 후 궁은 공원으로 개방되는 한편, 일인들이 지었던 총독부청사는 정부청사로 이용되었다. 1971년에는 궁의 동북 담장 가까이에 국립박물관이 목조기와건물의 모양을 본뜬 철근콘크리트조로 지어졌다가 198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명칭을 고쳐 구 총독부청사 건물로 이건되었다.

[위치와 건물배치]

경복궁이 자리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의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오던 도성의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여척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으며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앞 부분에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 침전과 후원이 자리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들이 좌우에 놓이거나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이 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

주요건물의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建春)·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홍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錦川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 서쪽에 함광각(含光閣), 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다. 홍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黛)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

[현존 건물과 유물]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다.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조로 복원되었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경복궁자경정십장생굴뚝, 보물 제810호).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간직한 한국식 정원 모습을 남기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의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경복궁아미산의굴뚝, 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궁내에 여러 유물이 보관되어 있는데, 국보인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경천사십층석탑·남계원칠층석탑(南溪院七層石塔)·산청범학리삼층석탑(山淸泛鶴里三層石塔)·전흥법사염거화상탑(傳興法寺廉巨和尙塔)·갈항사삼층석탑(葛項寺三層石塔)·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등이 있고 9점의 보물로 지정된 탑비·석등이 있다.

경복궁은 비록 궁내의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으나 정전·누각 등 주요건물들이 남아 있고, 창건 때의 위치를 지키고 있어 조선조의 정궁의 면모를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宮闕志, 서울特別市史-古蹟篇-(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63), 서울六百年史 3(서울特別市史編纂委員會, 1979), 景福宮重建에 대한 小考(張大遠, 향토서울, 1964), 朝鮮朝王宮重要建築物指定調査書 Ⅰ(文化財管理局, 1984), 한국의 궁궐(이강근, 대원사, 1991), 서울의 고궁산책(허균, 효림, 1994).

<김동현>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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