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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1-26 (일) 18:14
분 류 문화사
ㆍ조회: 4907      
[조선] 경복궁 (두산)
경복궁 景福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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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악산과 경복궁.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위치. 북악산은 서울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경복궁 근정전. 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국보 제223호. 조선시대.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경복궁 근정전 행각. 서울 종로구 세종로 소재. 보물 제812호. 조선시대.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경복궁 경회루. 서울 경복궁 소재. 국보 제224호. 조선시대.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경복궁 향원정. 서울 세종로 종로구. 넓은 연못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위치하는 경복궁내에 있는 정자.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궐(正闕).

I. 개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조선을 세운 이성계(李成桂)와 그 지지자들은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으로부터 도읍을 한양성(漢陽城)으로 옮겨 신도(新都) 경영에 착수하는 동시에 궁궐의 조성도 착수하였다. 1394년(태조 3) 9월 신궐조성도감(新闕造成都監)을 두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 좌복야 김주(金湊), 전정당문학 이염(李恬), 중추원학사 이직(李稷) 등을 판사에 임명하여 실무를 담당, 해산(亥山: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고 임좌병향(壬坐丙向:北北西에 앉아 南南東을 바라다봄)의 터를 잡았다.

원래 태조는 고려시대 남경(南京)의 이궁(離宮:宮井洞 일대) 터를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새로운 왕조의 뻗어나는 기세를 수용하기에는 너무 좁은 터전이라 하여 그 남쪽에 따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ll. 태조때

경복궁의 전체적인 모습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싸여 있고 정남에 광화문, 정북에 신무문(神武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을 세웠다. 근정전(勤政殿)은 수조지소(受朝之所)로서 경복궁의 정전(正殿)으로 남북이 길고 동서축이 짧은 직사각형 터전에 조성하였으며, 보평청(報平廳)의 남쪽에 위치한다.

이 건물은 상하의 월대(越臺) 위에 세워졌는데, 월대는 입심(入深)이 50척, 너비가 112척 5촌의 규모이고, 동 ·서 ·북에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각각 그 너비가 15척, 상층으로의 돌계단 높이 4척, 층층다리 5급, 같은 규모의 돌계단 세 쪽이 남쪽에 큼직하게 설치되었다. 아래층 월대의 계단도 너비는 15척, 높이 4척이고 딛는 보석(步石)의 수는 5단이다.

근정전이 있는 직사각형 터전 윤곽과 그 시설에 여러 부속 건물이 있어 북행랑(北行廊) 29칸, 천랑(穿廊) 5칸, 정전(근정전)의 북쪽으로 수라간 4칸, 동루(東樓) 3칸(상하층의 다락집)이 있고, 그 밖에 북행랑 19칸이 있어 정전의 북행랑에 이어져 있었다. 그 동쪽 모서리로부터 동랑(東廊)이 이어지고, 그 남쪽에 9칸이 있어 근정문의 동각루(東角樓)와 연결되어 서루(西樓) 3칸(상하층의 다락집)이 되었다.

서쪽에도 같은 규모의 행랑이 만들어져 서각루(西角樓)에 이르며 여기에서 남행랑이 구성되는데, 그 중앙에는 근정문 3칸이 설치되고 근정문 좌우행랑 각 11칸이 남행랑이 되었다. 또 동서 각루 각 2칸씩이 배치되었으며, 근정문 남쪽에 3칸의 오문(午門)이 있고, 좌우의 각 17칸의 행랑, 수각(水閣) 3칸, 그 남쪽에 명당수가 서쪽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으며 돌다리가 있었다.

오문 좌우의 행랑은 동서로 꺾이어 근정전 남행랑에 연결되었으며, 그 규모는 각 17칸씩이고 동서 각루가 2칸, 행랑에 각각 일화문(日華門:東門)과 월화문(月華門:西門)이 열려 있다. 근정전 북쪽에 임금이 평상시 집무하는 보평청(報平廳)이 있어 이곳을 시사지소(視事支所)라 하는데, 그 규모는 5칸이다. 동서에 이방(耳房)이 각 1칸씩 딸렸고, 남천랑(南穿廊) 7칸, 동천랑 15칸, 서행랑 5칸, 동행랑 15칸이 윤곽에 설치되었다.

왕의 침전은 강녕전(康寧殿)이며 이 구역은 보평청 북쪽에 구획되었다. 강녕전은 7칸, 동서의 이방(耳房)이 각 2칸씩, 북천랑 7칸, 북행랑 25칸, 그 동쪽 귀퉁이에는 3칸이 계속 되고 서쪽에도 이와 같은 3칸이 있으며 남천랑 5칸이 구조되어 있었다. 강녕전 남쪽에 3칸의 연생전(延生殿)과 강녕전 남천랑에 이어지는 천랑 7칸과 동행랑에 이어지는 천랑 5칸이 있고, 또 이웃에 경성전(慶成殿) 3칸과 그 둘레의 천랑 7칸과 5칸이 이어져 있었다.

그 밖에 등촉인자방(燈燭引者房) ·상의원(尙衣院) ·양전사(兩殿司) ·옹방(甕房) ·상서사(尙書司) ·승지방(承旨房) ·내시다방(內侍茶房) ·경흥부(敬興府) ·중추원(中樞院) ·삼군부(三軍府)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lll. 창건 이후

경복궁 공사는 1398년(태조 7) 1월에 궁성을 쌓을 터전을 간심(看審)하기 시작하여 2월에 책임자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박위(朴喇)가 임명되고 문무 각품(文武各品)에게 쌓을 돌을 바치게 하여 진척되었다. 6월에 궁성 남문(光化門)을 착공하고, 7월에 경기좌도와 충청도 군인 3,700명으로 공사를 진행시켰다. 8월에 무인난(戊寅亂)이 벌어지고 태조가 정종에게 양위하자 공사는 모두 중단되었다가 1399년(정종 1)에 재개하여 완성하였고, 1426년(세종 8) 10월에야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이 정하여졌다.

근정전 앞 제1문이 홍례(弘禮), 제2문이 광화(光化), 근정전의 동쪽 협문(夾門)이 일화(日華), 서쪽이 월화(月華), 궁성 동쪽이 건춘, 서편이 영추, 근정전 앞 돌다리를 영제(永濟)라 하였다. 정종이 개성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서 경복궁은 공궐(空闕)이 되고 집들은 창고 등으로 이용되어, 1405년(태종 5)부터 13년까지 근정전 서랑(西廊)이 사기(史記)를 장치(藏置)하는 사고(史庫)로 이용되고, 1406년부터 12년까지는 군량미의 비축창고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1412년 4월 경회루(慶會樓)를 개조하고, 태조 때의 궁궐 북서쪽에 있는 소규모의 건물을 궁궐 서쪽으로 옮겨 지었는데, 연못도 새로 파고 누각도 새로 지었다. 태종은 서울에 다시 도읍을 옮기면서 창덕궁(昌德宮)을 지어 머물렀기 때문에 경복궁은 계속 빈 궁궐로 남아 있었으나, 명나라 사신의 접대 등은 경복궁에서 하였고 그들과의 연회를 위하여 경회루의 확장이 절실하여졌다. 이 작업은 여러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고, 물 가운데 큰 집을 짓는 일의 기술상의 어려움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태종은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완성하도록 하였다.

한편 세종은 경복궁에 주로 머물렀다. 따라서 경복궁 여러 건물의 보수가 시행되어 29년에 사정전(思政殿:태조 때의 報平廳)과 경회루의 중수공사가 착공되어 사정전은 4월에 중수공사가 완료되었으나 경회루는 계속되었다. 이 때의 작업은 《성종실록》에 세종시소창(世宗時所創)이라 할 만큼 대규모이고 완벽한 시공이 진척되었다.

1430년에 광화문의 개구(改構)의 역사(役事)가 시작되어, 1431년 4월에 완성되었으나 전혀 새롭게 지었던 모양이다. 또 1432년 문소전(文昭殿)을 새롭게 지었는데, 이는 정월에 착공된 것으로 선공감 제조 안순(安純) ·홍리(洪理)와 예조판서 신상(申商), 지리(地理) 이양달(李陽達)이 원묘(原廟)의 터전을 궁의 북쪽에 잡아 공역을 일으켰다. 원묘 문소전(원래의 仁昭殿)과 광효전(廣孝殿)이 따로 있었던 것을 모아 한곳에 통합 경영하기 위한 공사였는데, 후전(後殿) 5칸, 정전(正殿) 3칸(四面에 補恕)의 규모로 그 해 11월에 완공되었다.

이듬해인 1433년에 강녕전(康寧般)이 좁고 어두워 임금 처소로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여 고쳐 짓기 시작하여 9월에 준공하였다. 또한 이 해에 궁성 북쪽에 있다가 없어진 북문을 다시 짓는 작업을 진행하여 신무문(神武門)을 다시 두었다.

1437년 7월에 과학적 구조물인 신루(新漏)가 제작 완료되어 사용하게 되었으므로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준공시켰고, 또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고심하여 완성시킨 자격루(自擊漏)를 설치하기 위하여 1438년 1월에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흠경각(欽敬閣)을 지어 완성하였다. 그 해 5월에는 정선방(貞善坊) 종부시(宗簿寺) 서쪽 언덕 위에 있던 선원전(璿源殿)을 문소전(文昭殿)의 북동쪽으로 옮겨 짓는 일이 완료되었으며, 1456년(세조 2) 3월 후원(後苑)에 취로정(翠露亭)을 짓고 연(蓮)을 파종하였는데, 총책임자는 금천군(錦川君) 박강(朴薑)이었다.

1461년 11월에 수리도감(修理都監)을 열고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 윤사로(尹師路)를 도제조로 삼아 세자궁(世子宮) 짓는 일에 착수하여 이듬해 12월에 준공하였으며, 1473년(성종 4) 7월경 경회루 수리공사가 시작되어 이듬해 3월에 완료되었고, 이 때에 근정전 ·홍례문 ·광화문에 청와(靑瓦)를 덮고자 하는 논의가 대두되었으나 반대에 부딪혀 중지되었다.

1474년 8월 경회루 공사가 다시 시작되니 수리만으로는 흡족하지 못하여 헐어내고 다시 짓는 공사를 시작, 1475년 5월 준공하였다. 이 때 돌기둥에 용을 조각하여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이 해 10월에는 덕종(德宗)으로 추존된 분을 위하여 옛 세자궁을 수리하여 연은전(延恩殿)을 설치하였으며, 1505년(연산군 11) 11월에 경복궁의 보루각(報漏閣)을 창덕궁으로 옮기고 간의대(簡儀臺)도 철거하였다.

이듬해 연산군은 경회루 못에 만수산(萬壽山)을 만들고 못 안에 수십 척의 배를 띄우고 흥청(興淸) ·운평(運平) 등과 더불어 즐겼다. 그러나 1543년(중종 38) 정월에 큰 불이 나서 동궁이 불탔고 그 복구가 아직 착수되기도 전에 경복궁에 다시 불이 나니 1553년(명종 8) 9월이었다. 이로써 1394년에 창건한 강녕전 ·사정전과 세종 때의 흠경각(欽敬閣)이 모두 회신되고 말았다. 곧 복구공사에 착수, 동궁까지 복구가 시작되어 이듬해 8월에 흠경각이 중건되고, 9월경에는 대내(大內)의 모든 전각들을 복구하였다. 선수도감(繕修都監)에서 공사를 맡았고, 제조는 영의정 심연원(沈連源) 등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년 4월에 왜군이 쳐들어와 13일에 부산성이 함락되더니 29일엔 충주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이 서울에 전하여지고 30일에 임금은 창황히 파천의 길에 올랐는데, 임금이 성문을 빠져나가자 뒤미처 난민들이 불을 지르기 시작하여 도성은 불바다가 되고 경복궁도 모두 불타버려, 태조 이래의 경복궁은 이때 터전만 남긴 채 소멸되고 말았다.

lV. 복구 논의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터전만 남긴 채 소실되자 1606년 11월에 경복궁 복구가 논의되었으나 실천되지 못하였고, 1616년 말과 1617년에도 중건이 논의되기는 하였으나 역시 중지되었다. 현종(顯宗)도 재건을 염원하긴 하였으나 공역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으며, 단지 1669년(현종 10)에 신덕왕후(神德王后) 부묘 때 그 제주소(題主所)를 강녕전 터에 장전(帳殿)을 설치하여 봉안한 바 있을 뿐이다.

숙종도 황폐한 경복궁에 가서 살피면서 감회에 젖었으며, 영조도 또한 그 복구를 생각하고 1772년(영조 48)에는 문소전 터에 비를 세우고 비각을 건립하였으나, 끝내 경복궁의 중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V. 재건

경복궁의 중건은 1865년(고종 2) 4월 2일 대왕대비인 신정왕후가 대원군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졌다. 영건도감을 설치하고 도제조에 조두순(趙斗淳)·김병학(金炳學)을 임명하고 제조로 흥인군(興寅君) 이최응(李最應)·김병기(金炳冀)·김병국(金炳國)·이돈영(李敦榮)·박규수(朴珪壽)·이재원(李載元)·임태영(任泰瑛)·이경하(李景夏)·허계(許棨)·이현직(李顯稷)·이주철(李周喆)이 차하(差下)되었다.

4월 4일에 개기(開基)를 위한 영건고유제(營建告由祭)를 거행하고 4월 8일에 대왕대비는 10만 냥을 중건역비로 하사하였으며, 4월 12일에 경복궁을 중건할 터전의 친심(親審)이 있었다. 이에 앞서 4월 8일에 궁성을 쌓고 5월 2일에는 광화문을 비롯한 궁성문의 상량 날짜를 정하였다.

담장과 문의 석축부분은 임진왜란 때 재화를 면하고 남아 있어서 이것들을 헐고 다시 지어야 하였다. 중건공사에 소용되는 경비를 원납전(願納錢)이라 하여 거두었는데, 4월 말까지 1차로 수납된 것은 일반인이 바친 75만 7086냥 4전 9푼과 왕족들이 기부한 7만 6450냥이었다.

이후 이 기부금의 징수는 계속되었으며, 6월 20일에 강녕전·연생전의 정초(定礎), 10월 9일에 입주(入柱), 10월 10일에 상량하였다. 10월 24일에는 함원전(含元殿)·인지당(麟趾堂)이 입주되고, 11월 16일에는 상량이 있었으며 12월 24일에는 천추전(千秋殿)의 정초가 있었다.

이듬해 3월 6일에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5일 밤 이경(二更)에 동십자각 근처 훈국화사(訓局畵師)의 가가(假家)에서 불이 나서 목수간 800여 칸과 다듬은 재목들이 타버리고 말았다. 1867년 2월 10일에도 불이 나서 재목을 불태웠다. 그래도 공사는 진척되어 3월 27일에 경회루의 상량이 준비되고 5월 2일에는 수정전(修政殿) 상량문의 제술관(製述官)을 선정하였다.

8월 18일에는 전각과 문의 이름들을 지었고, 11월 8일에는 완성된 건물의 당호(堂號)를 지었다. 11월 14일에 백관들이 경복궁 출입시 승지(承旨)는 영추문을, 문관은 정문인 광화문의 홍예문 중 동쪽문을 이용하게 하고 무관은 서쪽으로 드나들도록 제도화하였다.

1868년(고종 5) 6월 10일 경복궁 재건공사가 사실상 끝난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임금의 이어(移御)에 대비하여 병조에서 입직(入直)을 준비하였고, 7월 2일에 드디어 임금은 대왕대비를 모시고 새 궁궐에 이사하니 비로소 경복궁은 정궐(正闕)로서의 위엄을 다시 갖추게 되었다.

1869년 9월 16일에 경복궁 재건을 위하여 설치되었던 영건도감이 철폐되었는데, 이 때에 집계한 원납전 등의 내용은 내하전(內下錢) 11만 냥, 단목(丹木) 5,000근, 백반 5,000근, 왕족이 바친 돈이 34만 913냥 6전, 일반인들의 원납전 727만 7780냥 4전 3푼과 백미 824석이었다. 준공된 전각은 합계 5,792칸 반이었다.

Vl. 중건 이후

경복궁이 중건된 이후 1872년 4월 7일 신무문(神武門)을 개건하고 1873년 봄부터 건청궁(乾淸宮)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와 서향각(書香閣)을 본떠 어진(御眞)을 봉안하기 위한 시설이다.

그해 12월 10일 사시에 순희당(純熙堂)에서 불이 나서 인지당·자경전·복안당·자미당·교태전·복도·행각 등 합계 364칸 반이 연소되는 대화가 있었다. 이듬해 정월부터 복구공사가 착공되었으나 공비의 부족으로 지지부진, 1875년 3월이 되어서야 공사가 본격화하여 1876년 4월에 대체적인 복구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그해 11월 4일에 또 불이 나서 먼저보다 더 큰 피해를 입었으니, 침전 일각 830여 칸이 소진되고 말았다. 이 재해의 복구는 상당히 늦어져서 1888년 2월 25일에야 교태전·강녕전·인지당·자미당의 상량문의 제술(製述)이 있었다. 1890년 6월에 경성전(慶成殿)의 화재가 있었으나 곧 진화되었다.

1896년(건양 1) 2월 16일 경복궁의 수리공사에 착공하고 97년 5월 20일에는 경복궁의 만화당(萬和堂)을 경운궁(慶運宮)에 이건하였다. 1899년 9월 21일에 영보당(永保堂)에 불이 나 28칸이 소진되었다. 그후 고종이 주로 경운궁에 시어하게 되면서 경복궁은 소강상태로 들어가는데, 이것으로 경복궁의 공역은 일단 마무리되고 또 나라가 멸망함으로써 궁궐로서의 수명을 다하고 말았다.

1917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을 비롯한 대내 일곽이 불에 탔다. 이것의 복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인들은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 일곽을 헐어다 재건에 썼다. 이때에 철거된 전각은 교태전·강녕전·연길당·경성전·연성전·인지당·흠경각·함원전·만경전·홍복전 등 400여 칸에 달하였다.

그후 일인들은 광화문을 비롯하여 여러 건물들을 철거하거나 이건하였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비롯하여 공진회 건물 등 낯선 건축물을 지었다. 또 각 지역의 석탑 등의 석조물을 반입하여 요소에 배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도록 하였다.

8·15광복 이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 안의 북동쪽에 건축되었으며, 6·25전쟁 때 문루가 불탔던 광화문육축의 석대를 궁 남쪽에 옮겨 시멘트로 문루를 세웠다.

1996년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였으며, 2009년까지 총 1,789억 원이 투입되어 경복궁 복원사업이 이루어진다. 1995년에는 강녕전이, 1999년에는 자선당 등이 복원되었으며, 2001년 10월에는 흥례문(興禮門)이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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