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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1 (목) 23:54
분 류 문화사
ㆍ조회: 9139      
[삼국] 고구려미술 (한메)
고구려미술 高句麗美術

관련문서 : 한국미술

고구려 시대에 발달한 미술의 총칭.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걸쳐 이루어진 고구려 미술은 퉁구스직계의 북방 기마 유목 민족의 기풍에 한(漢)·위(魏)·진(晉)의 중국 문화를 흡수하였으며, 묘식(墓飾) 예술이나 불교 미술 등은 백제·신라·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회화]

안악3호분 묘주도삼국 중에서도 가장 일찍부터 발전된 고구려의 그림은 한대(漢代)와 육조시대(六朝時代) 및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역 회화(西域繪畵)의 영향을 받아 율동적인 고구려 특유의 회화를 이룩하고, 신라와 백제는 물론 일본 회화의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회화는 퉁거우〔通溝〕와 평양부근의 여러 지역에 있는 60여 기의 고분 벽화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초기에 해당하는 4·5세기의 것은 대체로 묘주(墓主)의 초상이 위주가 되고 불교적인 요소와 풍속화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357년(고국원왕 26)의 묵서명(墨書銘)이 있는 안악(安岳) 3호분과 408년(광개토왕 18)의 연기(年記)를 지닌 덕흥리고분(德興里古墳)을 들 수 있다. 안악 3호분 묘주의 초상화는 묘주 자신의 앉음새는 물론, 그 좌우의 시중꾼들도 모두 삼각형의 구도 속에 들어가 있어 초보적인 요철법(凹凸法) 또는 태서법(泰西法)의 음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특색은 덕홍리 고분의 벽화에도 잘 나타나 있는데, 이는 고구려 회화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무용총 수렵도그러나 중기인 6세기경부터는 동적(動的)이고 힘에 넘치는 고구려 회화의 특징이 특히 두드러지게 된다. 6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추축되는 무용총(舞踊塚)의 《수렵도(狩獵圖)》에는 활을 겨누며 말을 달리는 기마인물들이나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산짐승들이 모두 힘찬 운동감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굵고 가는 물결 모양의 선만으로 이루어진 상징적인 산들조차도 그림 전체의 울동에 맞추듯 그려져 있어 한층 힘찬 느낌을 준다.

또한 6세기의 고분 벽화 벽면에는 주인공의 생활모습이나 주인공이 겪은 중요한 일 등이 서사적(敍事的)으로 표현되어 기록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반면에, 천정부분에는 해와 달·별 등 주인공의 영혼이 승천할 천상(天上)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보편적 특징이다. 《수렵도》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적인 회화의 특색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전반에 이르러 더욱 뚜렷이 나타나 퉁거우의 사신총(四神塚), 중학군(中和郡) 진파리(眞坡里) 1호분 등의 후기 고분벽화에서 가장 전형적으로 엿볼 수 있다. 이들 벽화는 전에 비해 동적인 모습을 훨씬 더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전대에 비하여 대체로 구성이나 묘사법이 더욱 합리적이고 색채는 훨씬 선명하며, 산수화적인 요소도 좀더 사실적인 모습을 띤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벽화에서는 기록적인 성격의 인물학나 풍족학가 자취를 감추고 그 대신 도교(道敎)의 영향을 받아 사신(四神)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쳐 그 이전 벽화의 내용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구려는 이처럼 의례미술의 영향을 받아 수용하면서도 활력에 넘치는 독자적 화풍을 형성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회화 발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에 남아 있는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 영향을 미친 고구려 출신 화가는 6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사〔法隆寺〕의 벽화를 그린 담징(曇徵)과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茶羅繡帳)》의 밑그림을 그린 가서일(加西逸)및 고려학사(高麗書師) 자마려(子麻呂) 등이다.

[조각]

<불상>

연가7년명 금동여래입상불교 전래 초기의 불상표현으로는, 옛고구려의 도읍인 지안〔輯安〕의 장천(長川)1호분 벽화에서 5세기경에 만들어진 불상및 보살상의 표현이 발견되었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금동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서울 뚝섬출토의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은 5세기 전반경 중국 북위(北魏)의 불상으로 추측되고 있어, 5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는 고구려불상은 아직 알려진 예가 없는 실정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불상 중 고구려의 것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연가 7년 기미년명금동여레입상(延嘉七年巳未年銘金銅如來立像)이다. 이 불상은 명문에 의해 고구려 때 평양의 동사(東寺)에서 만든 천불상(千佛像)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고, 연가(延嘉)는 역사기록에 보이지 않는 연호이나 기미년(己未年)은 양식상으로 보아 539년에 해당된다. 중국 북위나 동위(東魏) 초기의 불상양식을 본따서 약간 거칠기는 하나 강직한 고구려적 표현감각을 가지고 있다.

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불상 중에는 황해북도 곡산(谷山)출토의 신묘명금동불입상(辛卯銘金銅佛立像)이 있는데, 이 불상은 양식적으로 보아 571년경으론 추측되며 특히 명문(銘文)에 무량수불(無量壽佛), 즉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불상 중에는 또한 평양 부근 원오리(元五里) 옛 절터에서 출토된, 흙으로 만들어 구운 이조불보살상군(泥造佛菩薩像群)을 들 수 있다. 이들 불상이나 보살상들은 모두 일정한 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상(像)의 형태나 옷주름 등은 부드러운 조형감각을 보여 주고 있으며 양식적으로는 6세기 후반경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삼국시대에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椎像)이 유행하였는데 고구려시대의 금동반가사유상(金銅半跏思惟像)이 평양시 평천구역(平川區域) 평천동(平川洞)에서 출토되어 주목된다. 이 상은 양식적으로는 동위양식을 따른 것으로 반가사유상으로는 비교적 초기에 속하는 것이며 국보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은 이 평천리상(像) 비슷한 양식이 좀더 발전된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불상양식을 삼국 중 가장 먼저 수용했기 때문에 백제나 신라 두 나라의 불교조각 발전에도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와당>

고구려 귀면와당파와(巴瓦)와 평와(平瓦)의 2종이 있다. 파와에는 연꽃무늬·인동(忍冬)무늬·짐승무늬·당초(唐草)무늬·폭선(輻線)무늬·중권(重圈)무늬 등이 많이 이용되었으며, 장군총(將軍塚)에서 나온 것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평와에는 방격(方格)무늬·사격(斜格)무늬·우상(羽狀)무늬·망대(網薰)무늬 등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겼다. 동진(東晉)의 영항을 받은 고구려 기와는 고유의 특질을 발전시켜 직선적·남성적으로 웅장하고 화려하며 견실·강전항을 특징으로 하고 있어, 백제·신라의 기와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주로 국내성(國內城) 및 평양 부근에서 발견된다.

<건축>

통나무·풀·짚 등의 소박한 자재(資材)와 원시적인 기법으로 만들어진 목조건축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궁궐·사찰·관아 및 귀족들의 주택에서는 나무를 깎고 다듬어 촉·홈·이음새 등을 만들고, 여기에 각 부재를 짜맞춘 후 기와로 지붕을 잇는 매우 발달된 건축기법이 사용되었다. 이와 같은 건축양식은 근세까지 지어진 전통적 목조건축의 기본이 되었다. 한편 목조건축 외에 고구려에도 석조건축이 있있으리라고 추측되나 뚜렷한 자료는 없다. 벽화고분 중 당시의 건물을 그린 건축도에는 성곽을 그린 성곽도와 주택을 그린 전각도(殿閣圖) 및 주택의 부속건물인 부엌이나 창고 또는 마구간 등을 그린 주택의 부속건물도가 있다.

성곽도에는 삼실총(三室塚)의 경우와 같이 병사들이 성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 속에 성곽의 일부가 그려진 것이 있고, 요동성총(遼東城塚)·약수리벽화분(藥水里壁畵)과 같이 성곽 전체를 높은 위치에서 조감한 그림이 있다. 전각도는 쌍영총(雙楹塚)·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대안리(大安里) 1호분·팔천리(捌川里) 벽화분·퉁거우〔通溝〕1호분·안악1호분 등에서 볼 수 있다. 쌍영총의 전각도는 맞배지붕의 기와집이 그려져 있고 퉁거우 12호분의 전각도는 중층(重層)의 건물이 그러져 있으며, 안악·1호분은 사방에 대문이 달린 큰 규모의 주택 전체를 높은 위치에서 조각한 그림으로 당시 주택의 건물배치 등을 알 수 있다. 주택의 부속건물을 그린 벽화는 안악 3호분·약수리벽화분·마선구(麻線溝) 1호분·대성리(大城里)1호분·무용총(舞踊塚)·각저총(俑抵塚)·퉁거우 12호분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부엌·육고(肉庫)·마구간·방앗간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고구려 벽화고분 속의 건축도들은 고구려의 건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성곽>

성곽은 산성(山城) 도성(都城)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산성은 주로 봉우리와 능선을 따라 큰 계곡을 둘러싸는 이른바 포곡식(包谷式)형태를 취하였으며 토축 또는 석축으로 되어 있다. 도성은 1세기 경부터 등장하는데 중국식 도성제를 채용하면서도 지형조건에 맞추어 산성의 기능을 살린 특유한 형태로 발전시켰고 주변에 산성을 두어 유사시에 피난처로 이용하였다.

4·5세기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성곽이 그려져 있는 것이 있는데, 여기에는 석축성벽과 여장(女墻)의 조형(祖形)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있어 그 때에 이미 성곽의 기본 요소가 갖추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고구려의 성곽은 지안〔輯安〕의 국내성과 위나암(尉那巖)산성, 평양의 안학궁(安鶴宮)과 대성산성(大城山城) 및 평양성이며, 그 밖에 오녀산성(五女山城) 등 지방의 산성들이 있다. 남쪽으로는 백제의 칩입에 대비하여 황해도 일대의 7군데에 산성을 쌓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홍(瑞뾔의 대현산성(大峴山城), 배천〔白川〕의 치악산성(雉岳山城) 등이 있다.

[토기]

고구려 항아리고구려의 문화를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전기(4세기 이전)문화와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후기(4세기∼7세기) 문화로 구분지을 때, 4세기 이전의 토기가 출토되는 유적은 압록강·혼강·독로강 유역에 산재되어 있는 돌무지무덤〔積石塚〕과 집자리유적이다. 이들 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들은 그 시기에 청천강 이남에서 흔히 출토되는 밑이 둥근 회색 숭석문토기와는 달리, 바닥이 편평하고 배가 부르며 주둥이가 외반(外反)되어 있는 형태의 흑색 와질계(瓦質系)로 만들어진 것이 특색이다.

이러한 4세기 이전의 토기가 중국 토기 문화의 계속적인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 4∼7세기 고구려토기의 특색이며, 그 종류는 대접·항아리·사발·대야·병·골호(骨壺)·벼루·부뚜막 등이 있다. 이 토기들은 대부분 무늬가 없으며 일부 무늬가 들어있는 토기도 백제·신라·가야지역 토기에 많이 보이는 타날문(打捺文)·음각문(陰刻文)계의 문양 대신에 직선·파상곡선(波狀曲線)·문살형·원·호상문(弧狀文)·연화문 등을 몸통이나 어깨의 일부분에만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항아리류에는 몸통이나 어깨에 물동이형 손잡이를 같은 간격으로 4개 붙인 것도 있다. 이밖에도 고분에서는 황록(黃綠)·황갈색의 연유토기(鉛釉土器)와 부뚜막이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러한 토기는 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껴묻기용〔副葬用〕으로 특별 제작된 것인 듯하다. 일반적으로 볼 때 고구려 토기는, 신라·가야지역의 토기가 대개 높은 굽이 달려 있는 회청색 경질토기인 데 비해 연질·오질계로 만든 회색·흑색의 굽이 없는 실용적 토기인 점이 특징 이다.

<박은희>

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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