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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3 (수) 00:40
분 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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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한국미술 (한메)
한국미술 韓國美術 KoreanArt

관련항목 : 고구려미술, 신라미술, 백제미술, 고려미술, 조선미술, 현대미술, 대한민국[미술], 북한[문화]

한민족에 의해 형성된 미술. 소박하고 섬세하며 단순하고 소탈하여 기교를 부리지 않는 자연주의적 경향을 기본요소로 하고 있다.

삼국 시대 초기 불교 전래와 중국문화 유입으로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와, 이후 한국미술은 지역적·민족적 특색을 지니는 가운데 독특한 전통과 특색을 살리면서 이어져 왔다. 북방적 추상양식에서 출발, 삼국시대로 들어오면서 자연주의 양식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자연에 대한 사랑과 자연에의 의존심에 뒷받침되어 한국미술 특유의 평화롭고 인간미 있으며 인공적 가식이 없는 순수한 자연의 미를 나타내려는 한국적 미술 양식을 형성·발전시켰다.

[선사 시대]

신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유물로 울주군(蔚州郡)[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川田里)와 고령(高靈) 양전동(陽田洞)에서 발견된 나사·동심원(同心圓)·마름모 등 기하학적 무늬의 바위그림[천전리 각석(국보 제147호), 고령 양전동 암각화(보물 제605호)]은 주술적 뜻을 가진 기호나 무늬라고 여겨진다. 경상남도 울산군(蔚山郡) 언양면(彦陽面)[지금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大谷里) 절벽에 쪼아서 새겨놓은 호랑이·멧돼지·개·사슴·고래·거북 등 짐승과 인물들의 암각화(岩刻畵)[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는 최초로 회화적 성격을 보여 준다.

집은 원형 또는 방형(方形)의 얕은 움집에 기둥과 서까래를 이용하여 원추형 모듬지붕을 씌웠으며, 부산 동삼동(東三洞)에서 출토된 패면(貝面)과 개·사람·새의 토상도 발견되었다. 조각은 신앙과 관련된 주술적 유물로, 고아시아족의 샤먼신상(Shaman神象) 전통에 포함된다.

토기는 BC5000년 무렵 두만강유역에서 납작바닥토기〔平底土器〕, 낙동강 하구지방에서 덧무늬토기〔隆起紋土器〕가 만들어졌으며, BC4000년 무렵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가 나타났다. 빗살무늬토기는 V자형의 간결한 형태, 점선으로 구성된 기하학적 무늬 등 북방미술의 추상주의적 양식을 지닌 토기로 청동기 시대까지 이어졌다.

청동기 시대

장방형 집이 유행하고 반지상가옥(半地上家屋)도 나타났다. 건조물로 주목되는 고인돌에는 지상에 돌방〔石室〕을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대형 판석을 뚜껑돌〔蓋石〕로 덮은 북방식과, 돌널〔石棺〕 또는 독널〔甕棺〕을 매장하고 그 위에 부정형(不定形)의 뚜껑돌을 괴어 놓은 남방식이 있다.

조각은 사람 모습이 뚜렷한 인상(人像), 동검(銅劍)자루 머리의 백조, 말모양 띠장식 등이 모두 뛰어난 두리새김〔丸彫〕 솜씨로 신석기시대 것에 비해 훨씬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을 하고 있다.

기하학무늬를 검붉은 물감으로 그린 채색토기, 그릇표면에 산화철을 바르고 반들거리게 닦은 붉은간토기〔紅陶〕가 함경도 지방에서 만들어졌으며, 서북한 지방에서는 미송리식토기(美松里式土器) 등 지역형식토기들이 만들어지다가 팽이토기가 주류를 이루었고, 그것이 남한으로 전파되어 한강유역에서 가락식토기(可樂式土器)로 발전하였다. 남한의 후기 청동기시대를 특징짓는 토기는 덧띠토기〔粘土帶土器〕로, 이는 서력기원을 전후해 김해토기(金海土器)라 불리는 단단한 뗀무늬토기〔打製文土器〕로 교체되었다.

[삼국 시대]

이 시기는 한국 미술 역사가 본격적으로 생성되고 동시에 최초의 회화흔적이 발견되는 등 한국적 미술세계 형성에 큰 의의를 지닌다. 고구려는 강인하고 웅장한 기백으로, 백제는 우아하고 섬세한 부드러움으로, 신라는 화려함으로 저마다 독자성을 확보, 상호 영향을 주고 받으며 발전해 나갔다.

회화·서예

회화에 있어 고구려의 경우 40여 기의 벽화고분이 전해져 그 수준과 변천을 알 수 있다. 초기 대표적인 안악(安岳) 3호분은 필선(筆線)에 억양이 있는 중국화 양식으로 그려졌고, 매산리사신총(梅山里四神塚)·쌍영총(雙楹塚)에서는 엄격한 정면모습과 억양 없는 필선 및 화면공백 강조 등 한국적 특색을 보여주는 고구려화 또는 한국화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중기가 되면 무용총(舞踊塚)에서 보듯이 자유로운 힘과 움직임이 강조된다. 이러한 경향은 수렵도에 잘 나타나 움직이는 동물 모습과 사냥하는 인물을 평면공간에 간략한 필치로 자유롭게 표현하여 고구려 회화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후기인 6세기 이후에는 중기의 풍속도가 후퇴하고 사신도(四神圖)가 주류를 이루며,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文〕가 그려지고 강렬한 필선과 화려한 색조로 화면에 생동감이 넘친다. 담징(曇徵)이 일본 호류사〔法隆寺〕에 남긴 벽화를 통해 고구려 회화가 중국회화뿐 아니라 인도·서역의 회화기법까지도 반영한 세련된 수준과 양식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와 신라도 고구려 못지않게 회화를 크게 발전시켰다. 백제는 공주 송산리(宋山里) 6호분 벽화와 부여 능산리(陵山里) 고분벽화, 신라는 경주 155호분의 천마도(天馬圖) 등이 전한다. 백제 고분벽화는 구름모양과 연꽃무늬 등이 부드러운 율동감을 보여주고, 천마총의 천마도(天馬圖)는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마구장비 위에 그린 것으로 달리는 백마를 장식화한 모습이다.

한국의 서예는 비갈(碑碣)·금문(金文) 등을 통해 2000년 넘는 역사를 볼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점제현신사비·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등에 예서·해서·행서 등 여러 가지 서체가 보인다. 백제의 경우 석각과 불상명(佛像銘) 등 매우 단편적인 것이 전하는데, 무녕왕릉(武寧王陵)에서 발견된 매지권(買地卷)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글씨가 중요한 사료로 남아 있다. 신라에서는 진흥왕순수비가 문장의 유려함과 장엄함에 더불어 우아한 서법(書法)을 보여준다.

건축·조각·공예

건축은 삼국 시대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남아 있는 것은 주로 절터이다. 가람배치에 있어 중국과 인도의 영향을 받아 목탑(木塔)이 중심이지만 대웅전 배치에서 한국적 개성을 보여준다. 고구려의 사찰 건축법이 백제·신라로 전파되었으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불탑은 처음 삼국이 모두 목탑이었으나 백제에서 비로소 석탑으로 바뀌었다.

석탑은 목조건물 형상을 대담하게 추상화한 형태와 구성을 갖추었다. 미륵사지석탑·정림사지오층석탑이 대표적이다. 한편 신라에서는 중국의 전탑을 본뜬 분황사석탑이 유일한 옛 신라탑으로 남아 있다. 조각에 있어서는 선사시대 전통을 따른 토착양식의 종교적 조각과 토우(土偶) 같은 간단한 것이 만들어지다가, 불교가 전래되면서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예술성이 깊어졌다.

불상은 나무·점토·구리·돌 등 여러 재료로 만들어졌으나, 목상(木像)은 623년 신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미륵반가사유상(彌勒半跏思惟像)이 호류사에 남아 있을 뿐이다. 석상(石像)은 백제와 신라에서 유행했는데 동불(銅佛) 또한 많이 만들어져 오늘날까지도 몇 점 남아 있다. 고구려에는 북조(北朝)의 조각양식이 들어왔고,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북조양식과 함께 남조(南朝) 양식을 받아들여 고구려와 다른 부드러운 양식을 발전시켰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중국의 영향이 강하게 반영되었으나 점차 독자성을 띠어갔으며 이러한 한국화(韓國化)는 백제 불상에서 더욱 진전되어 군수리금동미륵보살입상(軍守里金銅彌勒菩薩立像)에서 둥글넓적한 얼굴, 인간적 웃음, 도식화된 옷자락 등 백제양식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신라는 7세기 무렵부터 불상이 급속히 늘어났다. 특히 당시 유행한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은 뛰어난 예술품으로, 고대 한국조각의 가장 뚜렷한 특색인 인간성과 불성(佛性)이 융화된 인간적이면서 숭고한 종교미가 잘 나타나 있다.

토기는 저마다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어 ① 중국 한식토기(漢式土器) 영향을 받은 고구려 와질토기(瓦質土器) ② 초기 고구려 토기 영향을 받다가 공주(公州) 천도 뒤 신라식의 단단한 석기로 변한 세발그릇〔三足器〕·납작바닥항아리·병 및 병을 자른 것 같은 중국식 그릇받침〔器臺〕 등 지역성을 나타낸 백제토기 ③ 김해토기에서 발전한 신라·가야토기 등 3가지 양식을 볼 수 있다. 신라 토기는 1000℃ 이상 높은 온도로 구워내어 표면이 짙은 잿빛이고 세련된 형태의 단단한 석기이다.

백제는 금속 공예에서 우수한 작품을 많이 남겨,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식(金製冠飾) 외에 1994년 부여 능산리집터에서 발굴된 금동용봉향로(金銅龍鳳香爐)는 백제인의 독자적이고 수준높은 솜씨를 보여 준다.

[남북국 시대]

불교의 영향이 컸으며, 당시 미술 작풍에서 보이는 생동적인 형상과 풍부하고 세련된 표현수법은 그 뒤 고려미술 발전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회화는 고구려의 풍부한 창작경험과 전통이 계승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일본 쇼소원〔正倉院〕에 보관된 신라 악기에 그려진 화조문(花鳥文)과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鍾)의 돋음새김 비천상(飛天像)·당초무늬 등을 통해 그 원숙한 필치를 알 수 있다. 서예는 왕희지체(王羲之體)가 유행하였는데, 김생(金生)은 왕희지체를 따르면서도 개성이 뚜렷한 서풍을 창안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 시대에는 한국 건축의 전형이 이루어졌다. 불국사 대웅전을 비롯하여 석가탑·다보탑·석굴암 등이 조성되었으며, 이 시기를 대표하는 가람 배치는 경주 사천왕사지(四天王寺址)와 불국사이다. 불탑은 미륵사탑을 모방한 의성탑리오층석탑(義城塔里五層石塔)을 거쳐 독자적인 신라탑을 완성하였다.

삼국 시대 이후 조선시대까지 축조된 건축물로 현존하는 작품들은 거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탑·석실·석굴·석교·석비 등이다. 이렇듯 전국 방방곡곡에서 나는 질좋은 화강암과 진흙을 주재료로 한 건축술이 발달하였고, 기와·벽돌 등 전탑과 연꽃무늬·보상화무늬〔寶相華文〕의 화려한 네모진 벽돌도 만들어져 조각예술로까지 발전하였다.

한편 각 지역 양식이 종합되고 당(唐)나라의 사실적 양식이 더해져 인간미와 종교미가 복합된 전통적 불상조각이 만들어졌다. 마애불 등 석불과 소조불상(塑造佛像), 석굴암 조각 등 경주를 중심으로 불교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9세기로 접어들면서 석불과 동불 모두 양식화·타성화가 진행되고 8세기 이전 불상이 지녔던 종교미가 없어졌으며 석불 목이 짧아지고 어깨가 좁아지는 등 경직되고 비율이 상실된 말기 형태를 나타내게 되었다.

이 시대에 일상적으로 쓰이던 무늬없는 토기는 높은 온도에서 굽고 유약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시기였음을 알 수 있다. 공예에서는 범종이 발전하여, 종머리에 속이 빈 용통(甬筒)과 용모양 고리〔?〕가 있고 종의 몸통부분 위쪽에 4개의 유곽(乳廓), 아래쪽에 2개의 당좌(撞座)와 비천상이 각각 자리를 바꿔가며 배치되어 한국종이라고 할 만한 독특한 형식을 만들고 있다. 상원사종·성덕대왕신종 등이 남아 있다.

발해

통일 신라와 마찬가지로 우수한 미술을 발전시켰으나, 구체적인 양상은 유적·유물 등 자료의 부족과 연구의 미흡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소나무와 돌과 풍경화를 잘 그렸다는 화가 대간지(大簡之)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정효공주묘(貞孝公主墓) 벽화가 유명하다.

건축의 경우 궁궐·사찰이 적극적으로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어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서만도 웅장한 건축물과 10여 개에 이르는 절터가 발견되었으나, 남아 있는 구조물은 거의 없다. 현존하는 제 2 절터에 있는 석등(石燈)은 통일신라 석등에 비해 좀 둔탁한 느낌을 주지만 목조건축양식을 충실히 재현한 높은 수준의 세련미을 보여준다.

조각은 특히 괄목할 만하다. 불교미술을 발전시켜 석불과 소조불이 많이 만들어졌음이 확인되며, 정혜공주묘에서 출토된 석사자상(石獅子像)에서는 사자의 강인한 성격과 단단한 근육 등이 두드러져 소조불상에서 보여주던 부드러움과 차이를 나타낸다. 미술은 초기에 고구려 전통을 강하게 따르다가 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는 당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 특성은 각종 공예에서도 잘 드러난다. 상경용천부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자가 출토된 바 있어, 발해 문화의 우수성과 세련미를 짐작케 한다.

[고려 시대]

갈래의 다양성, 내용의 풍부함, 형상의 진실성과 새로운 예술수법 탐구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국토통일은 민족미술 발전의 분산성을 극복하게 하였으며 다양하고 우수한 이전 시기 전통들을 통일적으로 계승·발전할 수 있게 했다.

회화·서예

그림은 실용적 목적 외에 순수한 감상을 위해서도 제작되어 화가의 계층과 회화 영역이 한층 다양해졌다. 회화 소재는 인물화 위주에서 감상을 위한 산수화·화조화·사군자 등 문인취향의 소재로까지 범위가 확대되어 화원(畵院) 외에 왕을 비롯한 사대부·승려 등도 그림을 즐겨 그렸다. 《안향 초상화》, 고연휘(高然暉) 작품으로 전해지는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 쌍폭, 경기도 개풍군(開豊郡) 수락암동(修落岩洞) 제 1 호분에 그려진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등이 있다.

호화롭고 정교한 멋이 있는 불화는 같은 시대에 발달한 청자와 더불어 시대적 특성이 되고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아미타여래입상(阿彌陀如來立像, 1286)》이 있고, 혜허(慧虛)의 《양류관음상(楊柳觀音像)》과 서구방(徐九方)의 《양류관음반가상(楊柳觀音半跏像)》 등의 걸작이 전한다. 인종 때 궁중화가였던 이녕(李寧)은 《예성강도(禮成江圖)》와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 등 실경산수(實景山水)를 소재로 화폭에 담고 있다.

그 밖의 화가로 고유방(高惟訪), 박자운(朴子雲), 초상화로 유명한 이기(李琪),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등이 있다. 서예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드물어 비문과 묘지명, 판각(板刻) 등을 통해서만 그 흐름을 짐작할 수 있다. 초기에는 구양순체(歐陽詢體)가 지배적이었으며, 후기에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유입,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이암·한수(韓修)·이제현(李齊賢) 등이 대표적인 명가이다.

건축·조각·공예

건축은 기본적으로 기둥 위에만 공포(拱包)를 쌓는 주심포양식(柱心包樣式)으로 봉정사극락전(鳳停寺極樂殿)과 부석사무량수전(浮石寺無量壽殿)·수덕사대웅전(修德寺大雄殿)·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등이 있다. 고려 말기에는 원(元)나라에서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두는 다포(多包)양식이 들어왔다.

석탑은 통일 신라의 3층 위주와 달리 5,7,9층 등으로 층수가 늘어났고, 중부 이북에서는 중국 영향으로 육각탑·팔각탑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로 이어지면서 불상 조각은 점차 쇠퇴하여 석불·철불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앞시대와 같은 예술성 뛰어난 조각은 만들어지지 못하였다. 고려 후기는 번잡한 장식이 있는 원나라 불상의 영향이 눈에 띄게 드러나는 등 전반적으로 쇠퇴했는데, 그 가운데 특이한 것은 안동하회탈이다. 서방적인 굴곡깊은 얼굴과 활달한 도법(刀法)으로 미루어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들어온 서역계 탈조각의 전통을 이어받은 듯 짐작되며, 불교 조각에서 볼 수 없는 활력과 감정이 표현되어 주목된다.

고려시대 미술 중 특히 수준 높게 발전한 것이 공예이다. 고려는 만당(晩唐)·오대(五代)의 중국청자 영향을 받아 10세기 무렵부터 황록색·회록색 청자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11세기는 중국 양쯔강〔楊子江〕지방 용천요(龍泉窯) 기술이 유입되어 고려자기가 질적으로 완성되는 시기이며, 기형과 문양 그리고 표면 색채에서 고려의 특색이 형성되던 과도기이다.

12세기 전반은 고려청자가 중국 영향에서 벗어나 고려청자 가운데서도 순청자가 발달하여 독자적인 비취색, 상감(象嵌), 유려한 선의 흐름, 자연의 모습을 단순화한 문양 등 그 기법이 완성되어 예술성을 높였다. 청자상감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반에는 상감기법 이외에 철채(鐵彩)·철채백상감·백자·백자상감·진사청자(辰砂靑磁)·연리문(鍊理文)청자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웠다. 12세기를 정점으로 발전한 고려자기 문화는 여러 변화 속에서도 계속 이어지다가 13세기 초 몽고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소멸되기 시작하였고, 원나라를 통한 중동·서방 문화 유입으로 자기의 형태·문양·색채가 변형되기 시작하였다. 14세기 후반부터 청자는 그 질과 유형이 퇴보한 상태에서 청자색이 갈색 또는 탁한 회록색으로 변했고, 고려 비색의 전통은 거의 끊어진 채 조선 초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로 변해갔다.

[조선 시대]

억불 숭유 정책과 엄격한 신분 제도 및 기예를 경시하는 풍조로 불교를 기반으로 다양하게 발전했던 고려 미술의 계승·발전이 어려웠으나, 새로운 유교적 미의식에 의한 진솔하고 소박한 미술풍조가 자리잡아 나갔다. 한국미술사상 자연주의적 성향을 가장 강하게 띠어 수묵화 중심의 회화, 백자 중심의 도자기,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목공예,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건축과 조원(造園) 등 모든 분야의 미술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회화·서예

전반적으로 회화가 수준높게 발전하였으며, 전기의 중국화 전통에서 중기 이후 탈중국 노력과 한국화(韓國化)의 성립이 양식상 특색으로 나타난다. 화풍 변화에 따라 대체로 4기로 나뉜다.

① 제 1 기:15∼16세기 중기까지로, 세종 때의 문예 부흥에 힘입어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전해 내려오는 작품이 적다. 안견(安堅) 《몽유도원도(夢遊桃遠圖)》와 이상좌(李上佐)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등이 전한다. 그 밖에 인물화의 최경, 《초충도(草蟲圖)》의 신사임당(申師任堂) 등이 있다.

② 제2기: 16세기 말∼17세기 말로, 중국 명(明)나라 때 절파화풍(浙波畵風)과 유사한 산수화가 유행하였다. 인물강조 등이 특징으로 강희안(姜希顔)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 김명국(金明國)의 《달마도(達磨圖)》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이암(李巖)·김식(金埴)·이정(李霆)·조속 등은 탈중국의 첫방향을 제시하여 영모와 화조 등 섬세하고 소박한 서정적 세계를 그려 한국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③ 제3기 : 18세기 초∼19세기 후기로,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즉 한국 산천의 실제 경치를 소재로 한 진경산수(眞景山水)와 생활상을 소재로 한 풍속화가 크게 유행하였다. 진경산수화가로는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산도(仁旺山圖)》 등을 남긴 정선이 유명한데, 그는 골산(骨山)이 많은 한국 산천을 소재로 삼아 중국 산수화와 뚜렷이 구별되는 한국적인 그림세계를 이룩하였다.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는 산수·도석인물(道釋人物)·화조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민층 생활을 담은 풍속화를 그려 양반사회 풍류를 즐겨 그린 신윤복(申潤福)과 함께 풍속화에 독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④ 제4기 : 19세기 후반의 50년 남짓한 시기로, 격조높은 문인화를 이룩한 김정희(金正喜)와 그를 추종하는 조희룡(趙熙龍)·전기, 화원으로서 출중한 기량을 지닌 장승업(張承業) 등이 대표적 화가이다. 한편 서양 수채화에 비견되는 이색적 화풍으로 산수와 꽃을 그린 김수철(金秀哲), 여러 화법을 경험적으로 구사하며 미술평론도 한 강세황(姜世晃) 등이 나타났다. 조상숭배 관습으로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으며, 서민들 생활을 그린 민화(民畵)도 나름대로 엄격한 유형이 이루어져 조선시대 서민생활 속에 정착해 나갔다. 서민적 화풍과 소재의 친밀감, 자유로운 구도로 예술 감각과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민화는 매우 독특한 한국적 회화 양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다음으로 서예는 초기에 송설체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강희안(姜希顔) 등이 이에 능하였다. 임진왜란 전후로는 왕희지체가 다시 대두되기도 했다. 한호·윤순(尹淳)·이광사(李匡師)·강세황(姜世晃) 등이 유명하다.

18세기 말 청(淸)나라 고증학의 영향으로 금석학이 발달, 문자의 근원인 전서(篆書)·예서(隷書)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선 말기 대표적 서예가는 김정희로, 그의 추사체(秋史體)는 독창성과 특출함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한국 근대서예의 뚜렷한 기점(基點)을 이룬다. 그 밖에 15세기 한글 창제 이후 한글서체도 대두하였는데, 조선 말기의 궁체(宮體)는 한글이 갖는 곡선적 경향을 단아하게 표현해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고 있다.

건축·조각·공예

건축은 고려 건축에 비해 한국 자연 환경에 가장 알맞은 양식을 취하고, 세부에서도 중국 양식을 탈피하여 익공(翼工) 같은 한국적 양식을 고안하여 한국적 목조건축양식의 발전기를 맞았다. 대표적 건축은 한양의 도성과 궁궐건축이다. 한양성 남쪽에는 숭례문(崇禮門)이 준공되었으며 장엄하게 조영된 궁궐로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희궁·경운궁(덕수궁)의 5대궁이 있다.

사찰은 숭유 억불 정책으로 고려 시대보다 상당히 위축되었는데 태조 때의 흥천사(興天寺), 태종 때 문경사·연경사, 세조 때 창건된 용문사(龍門寺) 등이 대표적이다. 불교 억압 정책으로 불상 조각도 점차 쇠퇴하였다. 고려 말기의 무표정한 얼굴, 굳어진 몸, 옷의 퇴화 양식이 더욱 심화되어 한국 조각은 신라 시대를 정점으로 하는 자연주의가 고려 시대에 추상 양식으로 바뀌고 조선 후기에 와서 그 정점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공예는 임진왜란을 경계로 전기의 분청시대, 후기의 백자시대로 나뉜다. 분청사기와 백자는 외형적으로 저마다 다른 특성을 지니나 분청사기는 표면이 백토분장(白土粉粧), 백자는 백토로 이루어져 모두 백색이라는 공통성을 지녔다. 바로 이 점이 고려와 조선 도기문화의 큰 차이다. 한편 임진왜란 동안 많은 도공(陶工)이 일본으로 끌려가고 가마가 파괴되어 분청사기는 자연히 소멸되었다.

17세기 초 이후에는 자기의 질, 형태, 굽의 정리며 받침 등에 변화가 일어나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생산되었으며 번잡한 기교나 화려한 색채를 표현하기보다 단순한 색조, 대범한 형태, 선의 변화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이것은 목공예에도 잘 나타나 불필요한 기교가 없는 견고한 형태와 구조로 된 옷장·문갑·사방탁자·소반 등 생활용구가 많이 만들어졌다. 그 밖의 공예로서 나전칠기·화각 등이 있다.

[근대]

1945년까지의 근대미술 시기에는 전통적 수법의 변화있는 계승과 서양문물 수용에 따른 서양식 방법의 급속한 유입이라는 두 흐름이 공존하였다. 전통적 한국화 외에 서양식 회화·조각·공예·건축이 근대미술 전개를 다채롭게 하였다.

회화·서예

안중식(安中植)·조석진(趙錫晉)·김규진(金圭鎭)은 전통회화를 새 방향으로 이끌었으며, 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변관식(卞寬植)·김은호(金殷鎬)·박승무(朴勝武)·허백련(許百練)·이용우(李用雨)·박생광(朴生光) 등이 활동하였다.

한편 1922년 총독부가 식민지 문화조작의 일환으로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약칭 鮮展)는 민족의식이나 현실사회적 사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많은 작가와 작품이 나타나는 데 큰 제약이 되었다. 또한 안중식·조석진 등에 의해 1918년 창립된 서화협회(書畵協會)의 민족적 성격과 대립적인 관계를 이루었고, 이를 계기로 일본화가 한국에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한국 서양화가의 탄생은 1910년대에 동경미술학교에서 고희동(高羲東)·김관호(金觀鎬)·나혜석 등이 처음으로 서양화법을 전공하고 돌아온 뒤부터이다. 1930년대에는 여러 경로로 더 많은 서양화가가 출현하여 마침내 서양화계가 형성되었다. 그들 작품은 거의 사실적 표현과 보편적 구도의 인물화·풍경화·정물화였다. 그러나 이들이 그린 유화의 예술적 작품성에 대한 전통 사회의 일반적 이해 부족과 냉담이 오래 계속되어 작품 행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편 미국·유럽에서 공부하고 온 서양화가의 존재로 민족미술계의 서양화가 일본 서양화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세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을 전후하여 도쿄〔東京〕에서 구본웅(具本雄)·김환기(金煥基) 등이 전위적인 추상주의와 순수조형주의 작품을 적극 시도하여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민족 미술 수립을 위해 노력한 오지호(吳之湖)·박영선(朴永善)·이인성(李仁星) 그리고 독자적 향토 의식과 내밀한 자신의 심상에 집착한 이중섭(李仲燮)이 있었다. 그 밖에 도상봉(都相鳳)·김인승(金仁承)·박상옥(朴商玉) 등이 활동하였다.

서예에 있어 김정희 이후 19세기 중엽부터 후반에 걸친 시기의 서법 명가는 이종우(李鍾愚)·권동수(權東壽) 등이다. 1930년대까지의 글씨 명인들은 국권상실 전의 고관대작 역임자며 순수 문인학자 및 직업적 전문서예가 등이다. 또 독립운동가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도 격조있는 서법인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건축·조각·공예

1880년대부터 서울과 전국 도시에 걸쳐 정착되기 시작한 벽돌과 석조를 사용한 서양풍 건축은 한국의 전통적 목조양식을 대체하였다. 초기에는 주로 외국 공관이나 성당, 교회 건물 등에 나타났는데, 명동성당·정동교회·덕수궁 석조전 등이 그것이다.

서양풍 조각 미술이 한국에 처음 싹튼 것은 김복진(金復鎭)이 도쿄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면서부터이다. 1940년을 전후하여 조각계가 형성되었으나, 그 움직임은 초기단계에 지나지 않아 작품은 대부분 석고 습작의 나부상(裸婦像)·소녀상·인물초상이었다.

공예는 1932년 조선미술전에 공예부가 신설되면서 근대적 공예 미술의 인식이 확산되었다. 도안분야의 이순석(李順石), 목칠과 염색·디자인 분야의 강창원(姜菖園)·김재석(金在奭) 등이 초창기 근대 공예부문의 개척자들이다.

[현대]

남한

1945년 8·15는 일제강점기 때 상실 또는 변질되었던 자율성 회복과 자주적 미술문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였다. 조선문화건설 중앙협의회 산하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되어 뀤해방 기념 미술전람회뀥를 개최하였으며, 48년 이들을 중심으로 조선미술협회가 결성되었다. 정현웅(鄭玄雄)·김주경(金周經)·길진섭(吉鎭燮)·이순석 등이 주요 활동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희동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이 협회를 주도하게 되자 김주경·오지호·이인성 등 좌익미술가들이 탈퇴, 새로이 독립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미술계는 좌·우익으로 분열되었다. 그 밖에 조선산업미술가협회·조선상업미술가협회·조선조각가협회·조선공예가협회 등의 단체가 결성되어 8·15 직후 혼란한 상황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48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國展)가 처음 열리면서 미술 발전의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작품·경향 모두 다채롭게 전개되었다.

회화

국전 동양화부는 현대 한국화 흐름에 큰 영향을 주어 서세옥·박노수(朴魯壽) 등이 배출되었다. 53년 창립된 백양회(白陽會)의 김기창(金基昶)·이유태(李惟態)·박내현(朴峽賢)·천경자(千鏡子)·허건·김영기(金永基)·김정현(金正炫) 등은 현대 한국화의 주목할 만한 움직임을 형성하였다. 배렴·장우성(張遇聖)·성재휴(成在烋)는 전통적 화의(畵意)를 주제로 하였고, 이응로(李應魯)는 향토적 실경의 수묵담채화를 그렸다.

60년대 이후 구미 추상미학의 영향을 받아 반전통(反傳統) 비구상작가가 많이 나왔으며, 한편에서는 현대적 실경주의로 한국의 자연을 주제로 한 수묵화·채색화의 추구가 계속되었다. 이 밖에도 수묵이 지니는 표현의 가능성과 동양 정신세계의 현대적 탐구 등 한국화의 활발한 전개가 이루어져 왔다.

서양화 부문에서는 사실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고, 1950년대에 들어서는 추상미술이 급속히 보급되었다. 또한 국제적인 미술정보가 직접 들어와 새로운 조형이념 수용이 가능해졌다. 1948년 창립전을 가진 김환기·유영국(劉永國)·장욱진(張旭鎭)·이규상 등 신사실파는 새로운 조형주의와 순수한 표현주의를 지향한 선명한 성격의 첫 서양화가 그룹으로 확실한 창작정신과 독자적 예술을 추구하였다. 이는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테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지만, 5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일기 시작한 국제적 추상주의와 자유로운 현대미술 전개로 이어지는 선구적 면모를 보였다.

또 같은 시기에 서정적 추상미술 그룹을 표방한 유경채(柳景採)·고화흠(高和欽)·장이석(張利錫)·이봉상(李鳳商)·최영림(崔榮林)·박창돈 등이 창작미술협회를 결성하였으며, 변영원(邊永園)·조병현(趙炳賢) 등이 신조형파(新造形派)를 만들어 새로운 조형표현을 실험하였다. 박수근(朴壽根)·남관(南寬)·변종하(卞鍾夏)·임직순(任直淳)·문신(文信)·손응성(孫應星)·권옥연(權玉淵)·김흥수(金興洙)·문학진(文學晉)·이대원(李大源)·오승우(吳承雨) 등은 각기 개성있는 작품 세계를 보였다.

62년 박서보(朴栖甫)·정창섭(丁昌燮)·정상화(鄭相和)·김창렬(金昌烈)·윤명로(尹明老) 등의 악튀엘(Actuel)그룹 결성을 비롯하여, 69년 A.G.(아방가르드 협회) 동인이 결성될 때까지 60년대 현대미술에는 비정형 추상 미술과 실험 미술 유형의 전위적 성격을 띤 다양한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또한 60년대부터 앵포르멜이라 불리는 표현주의적 추상과 기하학적 경향의 추상이 등장하고, 70년대에는 이른바 모노크롬 추상, 즉 단일색면의 개념적 회화로 진행되어 왔다.

한편 정부 주관으로 행해진 국전은 82년부터 반관 반민 형태로 운영되다가, 86년 이후 민전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80년대에는 후기미니멀리즘적 성격을 비롯하여 물방울·돌·흙·인물의 부분 등을 극사실적으로 그리는 하이퍼 리얼리즘, 비판적 현실의식을 바탕으로 한 민중 미술, 신표현주의라고 할 수 있는 강렬한 색채와 형상의 이미지를 찾아 나가는 분명하고 다양한 표현의 조형 예술이 등장하였다. 이 밖에 한국 현대미술은 점차 탈(脫)장르라고 할 수 있는 종합적 성격의 조형 예술로 변모하는 특성도 보이고 있다.

판화·서예

판화는 고려 시대 이전부터 발달하였으나 근대 이후 서양회화가 도입되어 기법이 현대화되면서 새롭게 시작되었다. 굵은 선과 강렬한 원색적 표현 그리고 복제성을 특징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57∼59년 한국판화가협회 결성을 전후하여 정규(鄭圭)·유강렬(劉康烈) 등을 중심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60∼70년대를 거치면서 기법의 발전과 다양화를 보였으며, 80년대에는 각종 전시회와 국제교류 등을 통해 양적·질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는 민중의 삶과 시대의 아픔을 표현한 민중미술이 나타나 관심을 끌었으며 전문판화가들도 대거 등장하였다. 이우환(李禹煥)·김창렬(金昌烈) 등을 비롯하여 오윤(吳潤)·박광렬(朴光烈)·윤동천(尹東天)·김상구(金相九)·이성구(李誠九) 등이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대 서예활동은 1945년 9월 손재형(孫在馨)이 주도한 조선서화동연회(朝鮮書畵同硏會) 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국전 개최로 서예활동은 활기를 띠어 50년대 말까지 서예계는 국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 뒤 개인전 등 다양한 형태로 확산되어 60년대 중반기에 이르러서는 국제적 교류 움직임도 일었다.

70·80년대를 거치면서 서예 인구의 저변 확대로 다양성과 양적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소수 전문서예가들에 의해 그 예술성이 확보되고 있는 정도이다. 두드러진 활동을 한 서예가는 김충현(金忠顯)·배렴·유희강(柳熙綱)·김응현(金膺顯) 등과 서예 2세들로 배종승(裵宗承)·권창륜(權昌倫)·유치봉(兪致鳳)·서희환(徐喜煥) 등이 있다. 그 밖에 조선시대 이래로 이어져 왔던 한글서예 궁체가 현대적으로 정리, 다양한 서체 개발 노력이 전개되었다. 궁체의 대표자로 이철경(李喆卿)이 유명하다.

조각·공예·건축

조각에서는 권진규(權鎭圭)·김세중(金世中)·김정숙(金貞淑)·윤영자(尹英子)·김영중(金泳中)·민복진(閔福鎭)·강태성(姜泰成)·전뢰진·김찬식(金燦植)·최기원(崔起源)·정관모(鄭官謨) 등이 활동하였다. 공예의 중심은 도자기로 고려·조선의 작품을 계승하는 전통도예파와 현대도예작가가 양립하고 있다. 건축분야는 도시화 및 경제발전을 배경으로 다양하고 풍성한 움직임을 나타냈다. 현대에 들어와 새로운 분야의 미술활동도 전개되어 전위음악에서 출발한 백남준(白南準)은 비디오아트를 창시, 세계적으로 주목받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북한

오늘날 북한 미술은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따라 기념비미술(기념비회화·기념비조각·기념비건축), 일반미술, 장식미술, 영화미술, 무대미술, 산업미술, 건축미술 등으로 나누어진다. 장르별로는 회화·조각·공예·도안 등으로 분류되며, 회화는 재료와 기법에 따라 다시 조선화·유화·벽화·출판화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조선화는 기본적인 장르로 되어 있고 조각과 유화에 치중하고 있다. 모든 작품은 당성·인민성·계급성 구현을 원칙으로,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은 인민적이며 혁명적인 미술을 발전시키는 것을 기본노선으로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작품 주제의 대부분이 김일성 항일빨치산 활동, 6·25, 천리마운동, 혁명전적지 풍경, 통일염원, 고분벽화의 선녀상 등에 집중되어 있다. 기법은 정교하고 치밀한 선묘법(線描法)과 화려한 색채의 사실주의적 기법이 강조되고 있다.

1945∼50년까지는 사회주의 지도이념 확립을 위한 기초작업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소련미술의 양식과 기법이 도입되어 레닌·스탈린·김일성(金日成) 초상화, 항일투쟁 선전벽화나 선전포스터 등의 선전미술이 주류를 이루었다. 1946년 '평남지구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이 결성되고 이어 '북조선예술총연맹' 산하에 미술동맹이 결성되면서 미술 활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6·25를 거치면서 월북 작가에 의해 풍경이나 생활상이 자연주의적으로 묘사되었고 고미술 소개가 활발했을 뿐만 아니라 전래의 동양화 양식을 답습하여 유미주의적으로 표현하는 산수화나 문인화의 비중이 커졌다. 이석호(李碩鎬)·정종여(鄭鍾汝)·이팔찬(李八燦) 등과 서양화부문에 김주경·길진섭·김용준·정현웅·이쾌대(李快大)·배운성(裵雲成)·최재덕(崔載德) 등이 활동하였다.

그러나 6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적 민족 미술 정책에 따라 사실주의적 기법이 강조되어 개인의 주관이나 개성이 배제되고 집단창작에 의한 목적화 형식이 미술형식의 한 조류로 형성되었다. 그 뒤 '주체미술'이 확립됨으로써 혁명 사상을 고취한 동상·조각·벽화·걸개그림·기념탑 등이 대량 제작되었는데 대형 김일성동상을 비롯한 평양의 천리마동상·주체사상탑·개선문·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인민영웅탑·만수대기념비·평양지하철 조각 등이 그 예이다.

이 밖에 《피바다》식 가극무대미술과 《성황당》식 연극무대미술 등 무대미술분야와 주체사상에 기초한 영화 미술 분야가 개척되어 있으며 집단체조 배경대미술, 건축 장식 미술, 공예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추기 : 신석기 시대 부분의 [ ] 안의 내용은 울산시에 지역홍보연구소를 운영하시는 서창원님께서 행정 구역 변경을 지적해 주셔서 보충하였습니다. 2003년 2월 18일, 운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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