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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02:0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9979      
[조선] 조선미술 (한메)
조선미술 朝鮮美術

관련항목 : 한국미술

조선 시대에 발달한 미술의 총칭.

조선 미술은 불교적 색채가 짙은 고려 미술과 달리 유교적 미의식에 입각한 자연주의적 성향을 뚜렷하게 지닌 점이 특색이다. 수묵화 중심의 회화, 백자 중심의 도자기, 재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목공예,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 건축과 조원(造苑) 등 모든 분야의 미술에서 과장과 허세를 탈피하여 진솔하고 소박한 성격을 취하였다.

또한 엄격한 신분 제도에 따른 차별적 직업관 때문에 기예를 경시하거나 천대하는 경향이 강했고, 지나친 문치주의로 인해 국방(國防)을 소홀히 한 결과, 왜란·호란(胡亂)의 잦은 외침을 초래하여 우리 민족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일구어 온 문화적 유산을 심하게 훼손시켰다.

유교적 미의식이 문화계를 지배하다시피 하였지만 도가사상과 불교 사상 또한 그 틈에서 한 몫을 담당하였고, 중국의 경향을 수용, 소화하여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키는 한편 일본의 미술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침으로써 동아시아 미술사상 뚜렷한 기여를 하였다. 특히 이 시대의 미술은 오늘날의 한국과 시대적으로 가장 가깝고 또 현대미술의 발전에 가장 직접적인 참고가 된다.

[회화·서예]

<회화>

조선 시대 회화는 주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員)과 양반 출신 문인 화가들에 의해 전개되었다. 산수·인물·영모·화조(花鳥)·화훼(花卉) 등의 일반회화와 서민 대중을 위한 민화(民畵), 판화(板畵)·불교회화 등이 다양하게 특유의 양식을 형성하였다.

초기에는 인물과 산수를 씩씩하고 낭만적으로 묘사한 점이 특색이며, 이 시기의 주요작품으로는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 이상좌(李上佐)의 《송하보월도(松下步月圖)》, 이암(李巖)의 《화조구자도(花鳥狗子圖)》,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초충도(草蟲圖)》 등이 전해진다. 이 시기에는 실경산수의 전통이 뿌리를 내리고, 구도·공간처리·필묵법·준법·수지법(樹枝法) 등에서 한국적 화풍이 형성되었다.

중기에는 외침과 당쟁으로 인해 사회가 혼란을 겪으면서도 중국에서 유입된 절파계(浙派系) 화풍이 김제, 이경윤(李慶胤), 김명국(金明國) 등에 의해 크게 유행하고 이정근(李正根), 이흥효(李興孝), 이징(李澄) 등에 의해 초기의 안견파 화풍이 추종되었으며, 동물화·화조화·묵죽·묵매·묵포도 등의 수묵화가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김제의 《한림제설도(寒林霽雪圖)》 《동자전려도(童子牽驢圖)》, 이정근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 이숭효(李崇孝)의 《어옹귀조도(漁翁歸釣圖)》, 이정(李楨)의 《한강조주도(寒江釣舟圖)》, 이경윤의 《시주도(詩酒圖)》, 이영윤(李英胤)의 《방황공망산수도(倣黃公望山水圖)》, 이징의 《이금산수도(泥金山水圖)》 《연사모종도(煙寺暮鍾圖)》, 김명국의 《설중귀로도(雪中歸路圖)》 《달마도(達磨圖)》, 이명욱(李明郁)의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 김식(金埴)의 《우도(牛圖)》, 조속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이정(李霆)의 《묵죽도(墨竹圖)》, 어몽룡(魚夢龍)의 《월매도(月梅圖)》, 황집중(黃執中)의 《묵포도도(墨葡萄圖)》 등이 전해진다.

한편 이 시기에는 중국 남종문인화(南宗文人畵)가 수용되기 시작하였고, 사군자(四君子) 중 대나무와 매화의 그림이 특히 활발하게 제작되었으며, 초기의 전통을 잇고 새로운 화풍을 창출하면서 다양한 주제의 구사, 상이한 화풍의 수용과 변용, 변화있는 필묵법 등 이 시대 특유의 양식을 발전시켰다.

후기에는 실학 사상의 대두와 함께 정선(鄭敾)을 중심으로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가 발달하였고, 중기 이래 유행하였던 북종화(北宗畵)가 쇠퇴하고 남종화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으며, 한국인의 생활상과 애환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풍속화가 김홍도(金弘道)·신윤복 등에 의해 성행하였다. 또 청조(淸朝) 화풍과 서양화풍이 전해졌고 서민들 사이에 민화(民畵)가 성행하였으며, 새로운 화법의 전개와 새로운 회화관이 탄생하였다.

이 시기의 주요작품으로는, 정선의 《금강전도》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심사정(沈師正)의 《방심주산수도(倣沈周山水圖)》, 이인상(李麟祥)의 《수석도(樹石圖)》, 이재관(李在寬)의 《귀어도(歸漁圖)》, 최북(崔北)의 《표훈사도(表訓寺圖》, 이윤영(李胤永)의 《고란사도(皐蘭寺圖)》, 정수영(鄭遂榮)의 《한강임진강명승도권(漢江臨津江名勝圖卷)》 등과 풍속화에 속하는 윤두서(尹斗緖)의 《채애도(採艾圖)》 《짚신삼기》, 김두량(金斗樑)의 《목동오수도(牧童午睡圖)》, 조영석의 《사제첩》, 기와이기·주막·빨래터·자리짜기·점심·서당·씨름·우물가·장터길 등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폭넓게 담고 있는 김홍도의 《단원풍속화첩(檀園風俗畵帖)》, 김득신(金得臣)의 《밀희투전》 《성하직리(盛夏織履)》 등과 신윤복의 <주사거배(酒肆擧盃)> <무녀신무(巫女神舞)> <단오풍정(端午風情)> <월하정인(月下情人)> 등이 실린 《혜원풍속화첩(惠園風俗畵帖)》 등이 전해지며, 그 외에 신선도·초상화·동물화·화조화 등 다양한 소재의 그림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말기에는 급변하는 정세와 신분 제도의 동요로 인하여 전통의 위축 현상이 뚜렷하여진 결과 후기에 유행하였던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침체되었고, 김정희(金正喜)파를 중심으로 하여 남종화의 유행이 지배적 경향으로 되었다. 반면 김수철(金秀哲)·김창수(金昌秀)·홍세섭(洪世燮) 등에 의해 이색적인 화풍이 형성되었고, 장승업계(張承業系)와 허련계(許鍊系)의 계보가 형성되어 현대화단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의 주요작품으로는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와 《묵란도(墨蘭圖)》, 조희룡(趙熙龍)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 전기(田琦)의 《매화초옥도(梅花草屋圖)》, 김수철의 《무릉춘색도(武陵春色圖)》 《송계한담도(松溪閑談圖)》, 김창수의 《동경산수도(冬景山水圖)》, 홍세섭의 《유압도(游鴨圖)》 《백로도(白鷺圖)》, 장승업의 《삼인문년도(三人問年圖)》 《쌍치도(雙雉圖)》, 허련의 《방김정희산수도(倣金正喜山水圖)》 등이 있다.

장승업의 화풍은 안중식(安中植)과 조석진(趙錫晉)에게 충실히 계승되었으며 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변관식(卞寬植)·김은호(金殷鎬) 등의 현대 화가들도 그 영향을 받았는데, 허련(許鍊)·허형(許瑩)·허건(許楗)·허백련(許白鍊)과 제자들로 이어지는 호남화단과 쌍벽을 이루었다.

또한 말기에는 한 분야에 비교적 뚜렷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이 다수 배출되었는데, 난초의 대원군 이하응(李昰應)·방윤명(方允明)·민영익(閔泳翊), 괴석(怪石)의 정학교(丁學敎), 나비그림의 이교익(李敎翼)·남계우(南啓宇)·고진승(高鎭升), 매화의 이공우(李公愚), 초상화의 채룡신(蔡龍臣)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민화는 후기와 말기에 떠돌이 화가들이 주로 그렸는데, 18세기 이후 농업 생산의 증대, 수공업의 발전과 시장경제의 확대 등 경제의 성장에 따른 서민대중의 회화에 대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한국 민족의 미의식, 조형상의 특성, 색채감각 등을 진솔하고 직설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불화(佛畵)는 고려 불화의 전통을 이었던 초기의 불화로부터 점차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구성·인물묘사·필묵법·설채법 등의 양식에서 독자적 특성을 구축하였다.

판화(板畵)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이륜행실도(二倫行實圖)》 《부모은중경》 《오륜행실도》 등의 서책에 삽화 자료로 제작되었는데, 정조 때 출판된 관판 《오륜행실도》는 원화가 정밀하고 판각도 세밀하여 조선 최고의 삽화본이라 할 수 있다.

<서예>

서예는 조선 시대 지식층의 필수 교양이었으므로 양반 사회에서는 누구나 익혔다. 초기에는 고려 말기와 마찬가지로 원(元)나라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가 유행하였다. 이 시기에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榕), 강희안(姜希顔), 성임(成任), 김구(金銶) 등의 명필가가 출현하였는데, 안평대군은 조맹부의 서체를 개성있게 발전시켜 이름이 높았다.

중기에는 송설체에 대한 반동으로 왕희지체(王羲之體)로 돌아갔는데, 이 시기에는 양사언(楊士彦)과 한호(韓濩)가 각각 초서(草書)와 해서(楷書)로 이름을 떨쳤다.

후기에는 한국 문인·학자들이 청(淸)나라의 문인·학자들과 직접 사귀게 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아 그동안 틀에 박혀 있었던 서예계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곧 윤순(尹淳)·김정희 등은 한호·이광사(李匡師)로 대표되는 한국 서도의 관파(官派) 글씨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특히 김정희는 금석학(金石學) 연구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연구하여 <추사체(秋史體;玩堂體)>라는 독특한 서체를 창안, 국내는 물론 중국의 학자들로부터도 절찬을 받았다. 이 김정희의 서체는 권돈인(權敦仁)·조희룡(趙熙龍)·허유(許維)·신헌·대원군(大院君)·오경석(吳慶錫) 등에 의해 추종되었으나, <추사체>의 본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 결과 점차 소멸되어 갔다. 한편 한글서체로 궁체(宮體)라는 서체가 있었는데 한글이 지닌 곡선적 경향을 질서정연하게 정렬시킨 구성미가 뛰어났다.

[조각]

조선 시대의 조각은 조선미술의 기타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성이 그 특징이다. 옷주름의 경화(硬化), 면(面)의 감소(減少) 등으로 나타나는 이 단순성으로 말미암아, 경직된 추상성이 확실하게 드러난다. 임진왜란을 경계로 해서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자연주의적 경향이 아직 남아있어 조선적인 경화가 급속히 진행하면서도 인간적인 체취가 스며있었으나, 후기에는 직업적인 장인(匠人)에 의한 불교조각에는 완전히 정신미가 없어졌고, 자연주의를 추구하려는 한국인의 잠재의식은 도리어 일반서민층의 비전문가적 조각에서 그 출구를 찾게 되었다.

현존하는 조선 전기의 불교 조각으로는, 전북 고창(高敞) 선운사(禪雲寺)의 금동보살좌상(金銅菩薩坐像) 2구(具), 경남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목조비로자나불(木造毘盧舍那佛)과 법보전(法寶殿)의 목조비로자나불, 경기도 고양시(高陽市) 수종사(水鐘寺) 석탑에서 발견된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아미타좌상(木造阿彌陀坐像) 등이 있고, 후기의 것으로는 전북 김제(金堤)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의 목조미륵삼존(木造彌勒三尊), 전남 순천(順天) 송광사(松廣寺) 대웅전(大雄殿)의 석가약사미타삼불(釋迦藥師彌陀三佛) 등이 있다.

이 중 선운사의 보살좌상은, 체구는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옷이 몹시 두꺼워지고 주름이 없어지는 동시에 결가(結跏)한 두 무릎의 옷주름도 굵은 선(線)으로 정리되고 있다. 한편 후기의 불상은 표정이 없는 건조한 표피(表皮)뿐인 불상으로 타락하고 말았는데, 이는 조각 기술의 쇠퇴 이전에 신앙 그 자체가 속화(俗化)·타락한 데에 그 원인이 있다.

불상을 제외한 일반 조각품으로는 능묘(陵墓) 앞에 세운 석인(石人)과 탈(假面)이 있는데, 전기의 초기에 속하는 태조(太祖)·태종(太宗) 등 능의 석인들은 고려 공민왕릉 석인에서 보이는 자연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아 육체의 혼량감(魂量感)이나 얼굴의 표정에 유의하고 있는 듯하나 15세기 중엽 무렵의 문종릉(文宗陵)의 석인에서부터는 신체의 균형이 상실되고 4등신(四等身) 또는 3등신의 볼품없는 조각으로 변하고 있다.

또 산대극(山臺劇)에 쓰이는 목가면(木假面)으로는 서울대학교박물관의 일괄수집품이 유명한데, 이것은 19세기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각인물의 신분·성격 등의 특징을 잘 잡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남자탈의 경우 안면굴곡의 조형도 잘되고 코가 비대한 것이 고려가면의 고식(古式) 전통을 남기고 있다.

[공예]

조선 시대의 공예는 지식층의 의식주생활에 요구되는 필수품이나 문방구 등과 관련하여 특색있는 발달을 가져왔다. 특히 각종 도자기와 목칠공예는 종류의 다양성과 한국적 특성이 뚜렷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도자기는 임진왜란을 경계로 하여 전기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가, 후기에는 청화백자(靑華白磁)가 각각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모두 그릇의 실용성과 견실성을 앞세우고 불필요한 곡선, 불필요한 면을 최소한도로 줄이고자 애쓴 흔적이 돋보인다.

전기에 유행한 분청사기는 고려청자가 퇴화한 형식인데, 임진왜란 때 큰 타격을 받고 완전히 소멸하였다. 후기의 청화백자의 기형(器形)에는 사발·접시·항아리 등 여러 가지가 있으며, 전체적으로 볼 때 전기에서 보이던 아가리〔口緣部〕의 외반(外反)이 중지되고 매병(梅甁)이 완전 소멸한다. 한편 고려시대에 발달한 청자(靑磁)도 조선 초기까지는 쇠퇴한 형태로나마 계속 만들어졌고, 범종(梵鐘)·칼 등의 금속공예도 고려 때의 형식을 계승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목공예품은 장(欌)·궤(櫃)·사방탁자(四方卓子)·문갑(文匣)·연상(硯床)·필통(筆筒)·주상(酒床)·식기(食器) 등 가지각색의 종류에 따라 적절한 나무의 선택, 튼튼한 짜임새, 편리한 실용성, 나뭇결의 장식적 이용, 간결하고 평면적인 형태 등의 특징과 개성을 나타내고 있다.

칠공예품은 고려 때 발달했던 나전칠기(螺鈿漆器)가 조선시대에도 더욱 발전하였는데, 고려칠기에서 사용되던 복채(伏彩)나 금속선(金屬線)을 쓰지 않고 당초문(唐草文)으로 전면을 씌워 도안 효과를 노렸거나 십장생(十長生) 계통의 회화적 도안을 쓰고 있다.

이 밖에 잡공예(雜工藝)로서 죽피(竹皮)의 황색을 이용하여 일종의 박지문(剝地文)을 조각하는 죽기(竹器), 또 중국산의 백옥(白玉)으로 길상무늬〔吉祥文〕를 투명하게 조각하여 만든 노리개 장식, 각종 장신구 등이 있다.

[건축]

고려 때의 건축이 사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데 반하여 조선시대의 건축은 궁성·성문·서원이 중심을 이루었다. 건물의 규모가 법적으로 제한되어 있어 대체로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도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룬 점이 특색이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서울의 숭례문(崇禮門), 개성(開城)의 남대문(南大門) 등이 초기 건축물로 전해지며, 궁성건축에 속하는 경복궁(景福宮)의 광화문(光化門)·근정전(勤政殿)·경회루(慶會樓)·집옥재(集玉齋), 창덕궁(昌德宮)의 돈화문(敦化門)·인정전(仁政殿), 창경궁(昌慶宮)의 홍화문(弘化門)·명정문(明政門)·명정전(明政殿), 덕수궁(德壽宮) 등은 모두 여러 차례에 걸쳐 증수·개축하거나 임진왜란 이후 재건 또는 신축한 것들이다.

비교적 조선 초기의 건축 양식을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 숭례문〔南大門〕을 살펴보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 다포(多包)집이며, 공포는 내이(內二), 외이(外二) 출목(出目)으로서 주간(柱間)에서는 최상부에 끝이 3갈래로 나뉜 살미첨차를 놓아 외목(外目)도리를 받게 하고 주심(柱心)에서는 대들보가 직접 제공(諸工) 위에 놓이고 그 보가 외목도리를 받들게 되어 있다.

서원 건축은 16세기에 성행하였는데 경주(慶州)의 옥산서원(玉山書院),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등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주택 건축 양식과 정자 건축 양식이 배합되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사찰 및 일반 목조 건물은 영천(永川) 은해사(銀海芋) 거조암(居祖庵)의 영산전(靈山殿), 안동(安東) 개목사(開目寺)의 원통전(圓通殿), 합천(陜川) 해인사(海印寺)의 경판전(經板殿), 서산(瑞山) 개심사(開心寺)의 대웅전, 순천 송광사(松廣寺)의 국사전(國師殿), 강진(康津) 무위사(無爲寺)의 극락전(極樂殿), 여주(驪州) 신륵사(神勒寺)의 조사당(祖師堂), 강화(江華) 정수사(淨水寺)의 법당 등 대부분 사찰건축이며, 일반 건축물로는 아산(牙山)의 맹씨행단(孟氏杏壇)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

맹씨행단은 세종 때의 명재상 맹사성(孟思誠)이 살던 집으로, 평면은 동서장축(東西長軸)의 주사(主舍) 양 끝에 남북향의 익사(翼舍)가 달려 있고 중앙부에는 마루, 그리고 그 양 옆에 온돌방이 각각 두 칸씩 있다. 구조와 가구(架構)가 간결하면서 쇠서·첨차가 강직하여 조선 초기 민가(民家)의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한 귀중한 건축물이다.

중기에는 건물이 점차 장식성을 띠고 공포가 실용성과 견실성을 상실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의 건물은 사찰·궁전·일반민가 등 그 종류가 다양하게 현전하여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중기의 주요 건물로는 강화 전등사(傳燈寺)의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 부여(扶餘) 무량사(無量寺)의 극락전(極樂殿), 부안(扶安) 내소사(來蘇寺), 구례(求禮) 화엄사(華嚴寺), 고창 선운사의 대웅전과 서울 문묘(文廟)의 대성전(大成殿), 홍화문, 명정문, 돈화문, 정읍(井邑) 피향정(披香亭), 전주(全州) 풍남문(豊南門), 남원(南原) 광한루(廣寒樓), 안동의 양진당(養眞堂) 및 도산서원 전교당(典敎堂), 강릉(江陵)의 오죽헌(烏竹軒)·해운정(海運亭), 삼척(三陟)의 죽서루(竹西樓) 등이 전해진다.

후기 건축물의 특색은, 공포부의 약화(略化)·장식화로 인하여 전반적으로 품격이 저하되고 번잡·섬세한 경향이 현저해지면서 소위 익공(翼工)집이 유행하였는데 이 시기의 건축물은 그 예가 많이 전하고 있다. 주요건축물은 경주(慶州) 불국사의 대웅전·극락전, 구례(求禮) 화엄사의 각황전(覺皇殿), 창녕(昌寧) 관룡사(觀龍寺)·화순(和順) 쌍봉사(雙峰寺)·영변(寧邊) 보현사(普賢寺)·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 등의 대웅전 및 궁성건축으로 근정전, 덕수궁의 중화전(中和殿), 흥인지문(興仁之門), 수원(水原) 팔달문(八達文) 등이 꼽힌다.

한편 석탑은 조선 시대에 들어 불교 탄압 등으로 그 건립이 극심한 침체를 겪었으며, 현존하는 주요 조선 석탑으로는 남원(南原) 만복사탑(萬福寺塔), 서울 원각사탑(圓覺寺塔), 양양(襄陽) 낙산사탑(洛山寺塔), 여주 신륵사탑 등이 있을 따름이다.

또 비석은 고려 시대의 양식을 따르지 않고 중국 비석의 양식을 받아들여, 초기의 개성(開城) 연복사중창비, 태조건원릉비(太祖健元陵碑), 원각사비(圓覺寺碑) 등은 당식(唐式) 이수가 있다. 이 밖에 석빙고(石氷庫)와 석교(石橋)·무덤 등이 건축미술의 범주에 드는데, 석빙고는 현존하는 4개 중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의 것이 가장 크고 대표적이다. 돌다리는 서울의 수표교(水標橋)와 살곶이다리(箭串橋), 승주(昇州) 선암사(仙巖寺)와 벌교(筏橋)의 홍교(虹橋) 등이 손꼽힌다.

무덤은 왕릉과 일반무덤으로 나뉘는데, 왕릉은 초기에는 고려 때의 상자형 석실묘를 따르다가 세조(世祖)의 광릉(光陵)부터는 광(壙)을 파고 하관한 다음 상하 4면을 모두 삼물회(三物灰;石灰·黃土·細沙)를 3:2:1의 비율로 섞어 만든 고대 콘크리트로써 단단히 쌓는 <회격식묘(灰隔式墓)>로 바뀌게 되었고, 일반무덤은 석회를 바른 목관묘(木棺墓)가 주류를 이루는데, 초기에는 일부 세력가 중에 석회를 바르지 않은 관형석곽(棺形石槨)을 쓰기도 하였다.

<김경>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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