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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23 (수)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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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354      
[근대] 근대사회 (한메)
근대사회 近代社會 modern society

중세 봉건사회가 해체된 뒤에 나타난 사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공업화가 이루어지고 정치적으로는 개인적인 인권을 인정하여 민주주의 체제를 갖춘 사회를 가리킨다. 시민사회ㆍ부르주아사회ㆍ자본주의사회 등과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양과 서양 등 지역적인 차이에 따라 형태가 다르고 또 시작된 시기도 각각 다르다. 근대사회의 끝은, 현대사회를 넓은 뜻으로 근대사회의 범주 속에 넣느냐의 여부에 따라 견해가 달라진다.

시대구분의 용어로서 <근대>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종래에는 왕조(王朝) 또는 연호(年號)에 의한 구분이 주로 쓰였고, 중국사에서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사상에 따라 24사(二十四史)로 구분하였다.

유럽에서도 왕조별의 구분이 주류를 이루었고 한편으로는 긴 역사를 몇 시대만으로 구분하는 방법도 있었다. 헤겔은 세계사를 동양적 세계와 그리스ㆍ로마세계 그리고 게르만적 그리스도교 세계의 3단계로 구분해서 정신의 자기전개(自己展開)와 진보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였다.

마르크스는 고대(노예제)와 중세(봉건제) 그리고 근대자본제로 3분하고 그 앞뒤에 원시공산주의와 공산주의를 두었다. 중국사에서는 1930년대의 마르크스사학의 영향으로 노예제ㆍ봉건제ㆍ자본제의 3분법이 주장되었으나, 앞의 둘을 고대 또는 전근대로 일괄시켜 근대와 대비시키는 2분법도 있다.

서구사(西歐史)에서는 르네상스와 절대주의 이후를 근세라고 하여 중세와 구분하고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를 근대사회로 보았다.

[서양]

<시대구분>

서양에서는 고대ㆍ중세ㆍ근대라는 3분법이 쓰이는데, 중세봉건사회는 14∼15세기에 해체되기 시작했고 16세기에 와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그리고 지리상의 발견에 수반되는 상업의 발전 등 현저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16세기 이후를 근대로 본다.

그러나 18세기 후반까지는 사회구조상으로 신분제(身分制)와 영주제(領主制)가 존속하고 있었고, 정치체제에 있어서도 절대왕정(絶對王政)이라는 전근대적 통치기구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16세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를 봉건사회가 해체되고 근대사회가 형성되는 과도기로 보고, 이 시기를 초기근대(early modern)라고 부른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18세기 후반, 미국의 독립전쟁과 특히 프랑스혁명으로 신분제와 영주제, 그리고 그 위에 존재하던 절대왕정이 폐지되고, 영국의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자본주의의 확립과 공업화가 진전되던 시기를 서양 근대사회의 성립기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회의 구조는 19세기 이후 특히 20세기에 들어와서 크게 변화하는데, 이 이후를 근대사회의 변질기 또는 근대와 구별해서 현대라고 한다.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의 이행>

유럽의 봉건사회는 13세기에 그 최성기(最盛期)를 이루고, 14ㆍ15세기에 들어서 이른바 봉건적 위기시대(危機時代)를 맞이하여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전란(戰亂)과 전염병으로 농촌의 인구가 격감(激減)되었기 때문에 영주(領主)는 영토의 유지를 위해서 농민에게 양보한다는 뜻으로 부역(賦役)을 줄이거나 금납(金納)으로 대신할 수 밖에 없었으며, 대규모 농민 봉기도 일어나 봉건사회의 경제적인 기초를 이루는 장원제(莊園制)는 약체화되고 점차적으로 농노(農奴)의 해방이 이루어져 농민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

동시에 화기(火器)와 용병(傭兵)의 사용으로 기사계급(騎士階級)의 몰락이 현저해졌고 전쟁과 내란으로 귀족과 제후들의 힘도 쇠퇴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분산되었던 정치권력이 도시에 있는 거상(巨商)들의 지지를 받는 국왕에게 집중되었다. 또 중세봉건사회를 지탱하는 주요한 지주(支柱)였던 로마교황의 권위도 교회의 분열로 그 힘을 잃어, 봉건사회의 해체는 16세기 이후 더욱 진전되었다.

이른바 지리상의 발견에 수반되는 세계무역의 급격한 발전은 신대륙으로부터의 귀금속 유입과 유럽에 상업적 번영을 가져왔으며, 지대(地代)의 수입에 의존하는 영주와 귀족들의 몰락을 촉진시켰고 거상들과 금융업자들을 비롯한 부르주아계층의 발흥(勃興)을 가져왔다.

또 새로운 국제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이 된 것은 모직물이었기 때문에 세계시장의 확대에 따라 유럽각지에서 그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여 새로운 생산방식으로써 자본주의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물결은 서유럽까지 미쳤으며 상ㆍ공업의 번영을 배경으로 자유스러운 인간성을 표현한 국민적 문화가 탄생되었고, 종교개혁은 형식화된 교회와 교의(敎義)의 속박을 깨고 개인이 자유에 대하여 자각하게 되었으며 근대사회의 문화적ㆍ정신적 기초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16세기의 새로운 움직임이 즉시 근대사회의 성립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우선 몰락한 귀족들이 농민에 대한 재지배(再支配)를 시도했으며, 거상 등 상층 부르주아들은 지주화(地主化)하거나 귀족화해서 구지배층과 타협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절대왕정이라는 과도적 국가형태는 이 귀족들과 상층 부르주아들의 타협으로 성립된 것이다. 즉 귀족들은 국왕으로부터 농민에 대한 지배권과 면세(免稅) 등의 신분적 특권을 보장받은 대신 국왕의 정치적 권력의 강화를 용인하였고, 호상(豪商)들은 독점권 등 상업상의 특권을 부여 받는 대신으로 국왕이 필요로 하는 자금과 인재를 제공하였으며, 이 양자가 각각 다른 입장에서 국왕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절대왕정이 성립되었다.

그래서 절대왕정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행정기구를 정비하는 등 근대국가의 형태를 갖출 준비를 했으나 그 밑의 사회구조에는 여전히 영주제ㆍ신분제가 유지되었으며 거상들의 상업적 독점권이 강화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국고의 수입을 증가시키는 중상주의정책(重商主義政策)으로 엄중한 산업규제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의 자유스러운 성장을 오히려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근대사회의 형성은 절대왕정을 흔들어가면서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걸쳐서 진행되었으며 그 선두주자가 영국이었다. 영국은 일찍부터 모직공업(毛織工業)이 농촌에까지 확산되어 급속히 성장했으며 상품인 모직물의 생산으로 농민층이 근로자로 변모해서 임금노동자층이 형성되었으며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에 박차를 가했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현저해졌다.

17세기 후반에는 상공업자와 경영적인 지주(地主)들의 힘으로 대귀족과 특권적인 거상들이 지지하는 절대왕정이 타도되고(청교도혁명 및 명예혁명), 자본주의에 대한 장애가 제거되었으며 권리장전(權利章典) 등으로 국민의 기본적 인권과 의회주의 원칙이 수용되어 일찍부터 근대사회가 이루어졌다.

18세기에 들어와서 프랑스 등 대륙 여러 나라에서도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구체제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졌으며, 17세기의 과학혁명이 계기가 된 합리주의 사상은 영국의 시민적 정치사상을 매개로 18세기의 계몽사상운동으로 계승되었고 이것이 근대사회성립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근대사회의 성립과 특징>

18세기 말의 유럽은 프랑스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의 2중혁명시대라고 하며 프랑스혁명으로 절대주의시대가 끝나고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가 확립되는 시기가 도래했기 때문에 이 2중혁명이 서양의 근대사회를 이루었다.

프랑스혁명은 먼저 미국독립선언이 주장했었던 사실을 다시 채택하여 인권선언을 했으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의 평등 그리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을 수용, 근대민주주의의 정치원리를 확립시켰다. 모든 특권과 신분제를 일소시켰고 상품의 생산과 유통의 자유를 확립하고 소유권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등 자본주의의 성장에 대한 장해물들을 제거하였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진행된 영국의 산업혁명은 새로운 기계와 기술로 수공업 대신에 기계화된 대공업과 공장제도를 확립시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갖추었다.

프랑스혁명의 영향은 나폴레옹에 의해 전유럽에 이르게 되었으며 영국의 산업혁명도 곧 대륙에 파급되었기 때문에 19세기 중엽에는 전유럽과 북미(北美)에서 사회의 근대화가 거의 왼성되었다.

이렇게 성립된 서양의 근대사회는 경제ㆍ사회ㆍ정치ㆍ사상 등 네 가지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여주었다.

① 경제적으로는 자본과 임금노동 관계에 기초한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확립되어 공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규칙적인 경제성장이 실현되었다.

② 사회적으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인정받게 되었는데, 자본주의가 노동력이라는 상품도 포함시켜 상품의 소유자가 서로 대등한 입장에서 자유스럽게 상품을 교환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특권을 가진 여러 신분과 지역적ㆍ직능적(職能的) 단체가 존재했으나, 근대에서는 자유스럽고 평등한 개인이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이런 신분과 단체는 없어지고 자본가(부르주아지)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트)라는 2대 계층으로 사회를 구분하게 되었다. 근대사회가 신분제 사회에 대신하여 시민의 사회이고 부르주아의 사회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③ 정치적으로는 개인의 기본적 인권을 정치에 반영시킬 수 있는 근대민주주의가 원칙적으로 수용되었으며, 입헌정치와 의회정치가 수립되어 실질적으로 부르주아가 정치를 지배하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신분과 단체들이 없어져서 국민적 통일이 완성되고 근대국민국가(近代國民國家)가 성립되었으며 일원화된 국가권력은 관료들의 행정기구를 통해서 통치하게 되었다.

④ 사상면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신뢰하는 과학적인 합리주의와 인류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봉하는 진보사상이 발달되었다. 이러한 특징의 서구근대사회는 비서양지역(非西洋地域)에 대한 서양의 지배 위에 세워졌으며 비서양지역의 식민지ㆍ종속국화 및 저개발상태와 표리일체(表裏一體)를 이루었는데, 이 점이 근년에 와서 제3세계 문제로 특히 주목받고 있다.

<근대사회의 여러 유형>

근대사회의 경제적 기초를 이루는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본래 국경의 구애를 받지 아니하고 전 세계로 확대되어 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17세기 후반 일찍이 근대사회를 이룬 영국은 18세기에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앞질러 동서 양대양(兩大洋)으로 진출했으며 세계시장의 제패를 배경으로 산업혁명을 수행하였다. 다른 국가들은 영국 자본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으로 자국의 사회를 근대화시켜가면서 영국의 뒤를 따라 비서양지역으로 진출해야만 했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을 정점으로 하고 그밖의 서양제국을 그 밑에 두며 종속국과 식민지를 저변으로 하는 피라미드형 체제가 이른바 자본주의적인 체제로 성립되었다.

근대사회의 유형적 차이는 각 나라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국의 근대화를 달성시켰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며, 또 동시에 각 나라들이 이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했느냐에 따라 정해졌다. 우선 피라미드형의 정점을 차지한 최선진국 영국은 농업을 포함한 전 산업부문을 자본주의화하여 국내를 철저하게 근대화시켰고, 미국과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시민혁명으로 근대화를 달성했으나 영국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기 때문에 미국 남부의 플랜테이션과 프랑스 중ㆍ남부의 영세농민들과 같이 비자본주의적 요소도 내포하고 있었다.

독일ㆍ이탈리아ㆍ러시아 등은 더욱 뒤떨어진 후진국으로서 서구에 대항해서 자국을 근대화시키기 위해서 부르주아혁명을 기다릴 수가 없었고, 프로이센의 개혁과 이탈리아의 리소르지멘토 그리고 러시아의 농노해방과 같은 이른바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독일 동부의 융커의 경영과 이탈리아 중ㆍ남부, 소작제도, 그리고 러시아의 고용제도와 같이 비자본주의적 토지제도를 남긴 채 농업을 희생시키고 공업화를 강행하게 되었다.

서양 근대사회의 여러 유형은 영국에서 러시아까지 자국 내부에 어느 정도의 비자본주의적(비근대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느냐는 정도의 차로 나타나게 되며, 그 차이는 자본주의체제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국내를 완전히 근대화시킨 영국이 에이레로부터 인도까지 광대한 지배지(支配地)를 비근대적 저개발상태로 둔 채 그 위에 국내의 근대사회를 세웠다는 사실은, 서양 근대사회가 국내의 근대적 요소(특히 자본주의적 공업)와 국내ㆍ외의 비근대적 요소와의 복합적인 결합 위에 성립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근대사회의 변질>

19세기 말의 제국주의시대 이후 서양 근대사회는 점차 변질하기 시작했는데, 피라미드형 자본주의적 체제가 변질되어 해체해 가는 과정에도 그랬다. 특히 러시아혁명 이후 사회주의권이 자본주의적 체제에서 이탈했으며 제2차세계대전 이후에 식민지와 종속국들이 독립함에 따라 서양제국들의 자본주의적 존재도 변화하였고 이른바 대중사회화현상(大衆社會化現象)이 나타났으며 복지사회 밑에서 관리사회라는 새로운 현상도 생겨났다. 이런 뜻에서 현대의 서양은 근대사회의 변질 도상에 있다고 하겠다.

[아시아]

<근대의 기점>

아시아사에서는 대부분의 경우 서구근대화와의 만남을 근대의 시작으로 본다. 중국사에서는 아편전쟁(1840∼42)을, 인도사에서는 18세기 후반 영국에 의한 식민지화가 시작되었을 때에 각각 근대의 기점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 함축되어 있는 뜻은 봉건제의 부정과 자본주의의 발흥 등 서구사에서의 발전단계론과는 달리 독립의 상실과 서구 특히 영국에 의한 식민지화ㆍ종속화 그리고 저항과 모순이다. 서구사에서는 근대가 봉건제를 부정하고 자생적인 자본주의의 탄생과 진보, 부(富)의 축적, 민주주의 그리고 민족국가의 탄생 등을 뜻하는 데 반해서 아시아사에서는 종족과 후퇴 그리고 빈곤의 시작을 의미하며 여기에 대한 저항이라는 주체적 계기를 중시하고 여기에서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게 된다.

중국사의 경우에는 아편전쟁에서 5ㆍ4운동(1840∼1919)까지, 최근에는 신중국의 성립(1949)까지를 근대라고 하며 해방의 주체가 형성된 이후를 현대로 구분한다. 다른 세계와 관련시켜서 본다면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경계로 종속국가들의 해방이 현실화되기 시작하는 시기로 보고 그 이후를 현대라고 한다.

<중국의 근대화과정과 특징>

이 과정을 중국측에서 본다면 아편전쟁의 결과인 1842년의 난징조약〔南京條約〕과 1860년의 베이징조약〔北京條約〕, 청일수호조약(淸日修好條約) ,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에 수반되는 베이징의정서〔北京議定書〕 등 일련의 불평등조약이 모두 패전조약이며 과다한 배상금의 지불과 영토의 할양을 해야하였다.

열강의 침략이 중국을 반식민지화했으며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반봉건ㆍ반식민지사회를 만든 것이 중국의 근대화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외채(外債)를 발행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금융자본에 점차 종속되었으며 베이징조약에서 관세수입의 20%를 배상금 지불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어서 무역량을 증가시켜야 했고, 특히 아편의 유입이 증가했으며 1887년에 아편이금제도(阿片釐金制度)가 도입되어 관세수입에 기여하였다.

청ㆍ일전쟁(淸日戰爭)의 배상금은 청ㆍ일 양국 재정규모의 약 4년분 정도의 금액이었기 때문에 청조(淸朝)의 지불능력은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외채의존도가 높아서 열강의 금융자본이 쇄도하였다. 배상금을 받은 일본은 이것을 바탕으로 산업혁명을 추진시키고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를 채택하여 경제적으로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다.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중국 최후의 왕조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변혁하였으나 사회변혁은 수반되지 못했고 일본의 21개조의 요구와 일본군의 침략으로 반식민지 상태는 더욱 심화되었다. 국내적으로는 민중이 각성하고 대외적으로는 러시아혁명의 영향으로 5ㆍ4운동이 19년에 일어났으며 1921년에 중국공산당이 탄생했고 국민당과 함께 반봉건ㆍ반식민지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국에서의 근대는 이처럼 독립의 상실과 종속ㆍ후퇴ㆍ빈곤을 의미했고 5ㆍ4운동은 이 부정해야 할 근대에 대해서 독립ㆍ부강ㆍ민주를 목표로 자본주의가 아닌 사회주의에 의해서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려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시기 이후를 중국에서는 현대라 하며 근대와 구별시키고 있다.

<신중국으로의 길>

5ㆍ4운동은 정치적ㆍ사상적으로 새로운 시작이고 반제국주의ㆍ반봉건 투쟁의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점차 현실화되었다. 즉 제국주의와 손을 잡은 군벌(軍閥)을 타도하는 것, 봉건제도의 기초였던 토지소유의 변혁(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의회의 입법과정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민중, 특히 인구의 9할을 차지하는 농민이 궐기해야 했고 농촌에서의 무장투쟁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1927년의 국공분열(國共分裂) 이후 중국공산당은 농촌의 혁명근거지에서 토지개혁을 실시했고, 국민당(國民黨)은 도시를 중심으로 항만ㆍ철도ㆍ도로 등의 건설을 추진시켰다.

1937년 일본군의 침략이 강화되고 내전(內戰)의 중지와 일치항일(一致抗日)의 슬로건 아래 제2차 국공합작이 실현되었으며, 중국공산당이 지도(指導)하는 팔로군(八路軍)이 중ㆍ일전쟁의 주역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은 중국에게 비참한 승리를 가져다 주었고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했다. 특히 농민의 토지문제와 민주적 권리를 해결시키기 위한 토지개혁이 필수적인 과제였으며 이 문제로 다시 내전이 일어나고 해방구를 지도하는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팔로군)이 급속하게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어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한국>

한국 근대화의 기점은 1860년대로 보는 견해와, 1876년 강화도조약을 계기로 개국(開國)을 단행한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19세기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는데, 구미세력의 동양진출로 한국에도 근대사조가 대두하였고, 개화(開化)와 척사(斥邪) 등 근대문물의 수용문제를 둘러싸고 신구사상(新舊思想)의 대립은 날카로웠다.

19세기 후반은 1864년(고종 1)을 전후로 외세에 의해 독자적인 발전이 저해당하고 있었는데, 특히 이 시기는 일제의 침략으로 점철되어 일본관계가 주류를 이루었다. 고종의 즉위로 흥선대원군이 집정, 양반귀족들의 횡포억압과 문벌 귀족세력의 타파, 탐관오리의 숙청 등 내정에 있어서 혁신을 단행하여 삼정문란으로 혼란해진 민심을 수습하는 등 과감한 개혁으로 왕권을 강화하였다.

강경하게 쇄국으로 일관했던 대원군이 1873년에 유학자들과 민씨세력에 의해서 정권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민비의 등장으로 척족세도를 재현시켰다. 외부적으로는 1876년(고종 13) 일본이 일으킨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후 구미제국과도 수호통상조약이 맺어져 국제사회에 등장하게 되었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壬午軍亂)은 이러한 문호개방에 따르는 문제점들이 청나라와 일본 양국의 이해관계와 얽혀서 발생한 것이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한국에서 일본세력을 누른 청나라가 대원군의 납치 등 내정에 간섭하자, 자강독립(自强獨立)을 목표로 하는 소장정치인들에 의해 급진적인 정치개혁이 시도되었는데, 그 결과 나타난 것이 갑신정변(甲申政變)이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ㆍ박영효(朴泳孝)ㆍ홍영식(洪英植) 등 개화독립당 주도로 이루어진 이 정변은 민중에 기반을 두지 못한 채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했는데, 3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1890년대에 접어들어 흉년기근으로 민심은 더욱 불안해졌고, 1894년에 혁명적인 사태로 발전하였다.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사형된 후 표면적인 활동이 불가능했던 동학교도들은 교조 신원운동(信寃運動)을 전개하면서 외세침투와 국내모순을 타개하고자 <인내천(人乃天)>이란 깃발 아래 동학혁명을 전개하였다.

1897년경부터 주체적인 입장에서 개혁이 시도되었는데 특히 독립협회가 조직되어 언론활동을 하는 한편, 민권사상을 고취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04년의 러ㆍ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고 한국에는 일제의 통감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때부터 사실상의 식민통치가 이루어졌다. 잔학한 일제치하에서 경제질서와 고유문물은 파괴되어, 한국 사회는 근대화와는 거리가 멀어졌다.

어떤 의미로는 8ㆍ15와 6ㆍ25를 거친 후, 19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에 의해 산업화를 이루면서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장본웅>

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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