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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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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406      
[조선] 김육 (두산)
김육 金堉 (1580~1658)

    잠곡서원지에 세워진 잠곡선생 김육추모비.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 경기도향토유적 제7호. 조선시대의 서원터로 잠곡은 김육선생(1580~1658)의 호로서 잠곡서원은 그의 학덕과 유풍을 기르기 위하여 1705년(숙종 31)에 창건되었고 1707년에 사액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사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청풍(淸風). 자 백후(伯厚). 호 잠곡(潛谷).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고손자. 이이(李珥)에게 수학한 흥우(興宇)의 아들. 조호익(曺好益)의 문인.

1605년(선조 3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후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신분으로 1610년(광해군 2) 3번이나 상소를 올려 성혼(成渾)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른바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였다. 1611년 정인홍(鄭仁弘)이 이황(李滉)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자 이에 격분하여, 정인홍의 이름을 유생들의 명부인 청금록(靑襟錄)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났다.

이후 자신의 근거지인 경기 가평군 잠곡리(潛谷里)에 은둔, 농사지으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인조반정으로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금오랑(金吾郞)으로 임명되었고, 1624년(인조 2)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인조 초반에 음성현감ㆍ전적ㆍ병조좌랑ㆍ지평ㆍ정언ㆍ병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음성현감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올 때는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1627년 청(淸)나라가 군사적으로 압박해오자 호패법을 중지하여 민심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하고, 체찰사 김류(金瑬)를 수행하여 남쪽지방을 순행하였다.

1632년 인목대비가 죽자 장례를 담당하는 산릉도감의 관원이 되었고, 1636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明)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병자호란의 발발과 인조의 항복 소식을 들었다. 명나라에 다녀와서 남긴 《조천일기(朝天日記)》에는 그가 직접 목도한 명나라 관원의 타락과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가 잘 나타나 있다. 1638년 승문원부제조를 거쳐 충청감사로 나가서 도내의 토지대장과 세금 징수상황을 점검하였다.

1643년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고, 겨울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이 되어 원손을 모시고 심양으로 들어갔다. 이듬해 귀국하면서 평안도 일대의 사신접대 폐단을 없애는 데 애썼다. 1646년 강빈(姜嬪)의 처벌에 반대하였다가 왕의 노여움을 입어 체직되었다. 1649년 우의정에 임명되고, 1654년(효종 6)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줄곧 대동법(大同法) 시행을 통해 민생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했는데, 이에는 자신이 가평 잠곡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목격한 백성의 곤궁한 생활에 대한 이해와, 각 지방의 수령ㆍ감사로 여러 번 재직한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1623년 음성현감으로 재직할 때는 백성의 피폐하고 곤궁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조정에 대해 부세를 재촉하지 말고 요역을 감면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정묘호란 직후인 1627년에는 양서의 사정을 논하는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려, 전쟁의 참화와 각종 잡역의 부담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 백성을 살리기 위한 종합적인 대책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전쟁 직후인 당시의 과제는 백성을 어린애 어루만지듯 안정시키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구체적으로 전쟁에 지고 도망한 군졸을 용서해 주고, 그들을 성 쌓는 데로 동원하여 기력을 고갈시키지 말 것이며, 살기가 어려워 고향을 떠나는 백성을 억지로 붙잡지 말 것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원망을 품은 백성을 안정시켜 민심을 얻은 다음 농사짓는 것과 군사 일을 분리하고(兵農分離), 비어 있는 땅에다 둔전(屯田)을 설치하는 등 장차 오랑캐가 다시 공격할 때를 대비한 방책을 제시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하려는 그의 집념은 대단한 것이었다. 효종 연간에 정승으로 있을 때 호서ㆍ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실시하려고 진력했는데, 스스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대동법 이야기만 꺼내니 사람들이 웃을 만도 하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이것은 확고하고 냉철한 현실감각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고위직에 있던 인조 말년과 효종대에는 청나라의 정치적 간섭이 극심한 가운데, 그들에게 해마다 바치는 세폐와 북벌정책의 추진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부담이 백성에게 집중된 시기였다. 여기에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가뭄ㆍ홍수ㆍ풍해ㆍ지진 등 각종 천재지변이 발생하여 위축된 백성의 삶을 더욱 옥죄고 있었다.

이러한 위기를 맞아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여 민심의 이반을 막는 것을 국왕과 자신의 과제로 생각하였다. 대동법은 바로 그 해답이었던 셈인데, 그는 대동법의 효과를 한마디로 “호서에서 대동법을 실시하자 마을 백성들은 밭에서 춤추고 삽살개도 아전을 향해 짓지 않았다”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대동법을 확대 실시하려는 노력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대동법의 실시를 둘러싸고 확연히 갈라지는 이해관계 때문에 반대하는 수령ㆍ관료 등의 반발을 잠재워야 했고, 그를 위해서는 국왕 자신을 확고히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이 때문에 대동법 실시에 반대한 김집(金集) 등과는 정치적 갈등이 생겼고, 이른바 산당(山黨)ㆍ한당(漢黨)의 대립을 낳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그의 생전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시행되었고, 호남의 경우도 죽은 뒤 그의 유지를 이은 서필원(徐必遠)의 노력으로 실현되었다.

그는 또 백성을 유족하게 하고 나아가 국가재정을 확보하는 방안으로서 유통경제를 활성화하는 것에도 노력하였다. 당시 물화가 제대로 유통되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고 그 이유를 쌀과 베[布]만을 유통수단으로 사용할 뿐 변변한 화폐가 없는 데서 찾았다. 그래서 동전 사용을 강조하였고 나아가 백성에게 각지에 퍼져 있는 은광 개발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경제관념은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柳馨遠)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학문적 이론을 실권을 가진 자로서 현실적으로 적용하는데 앞장섰다. 백성의 윤택한 삶을 보장함으로써 국가기반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수차(水車)의 사용 등 농사기술의 개선, 수레의 사용, 서양역법의 영향을 받은 시헌력(時憲曆) 사용을 통한 역법의 선진화를 주장하였다.

기근 등 각종 재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할 목적에서, 세종대부터 발달해온 흉년극복책인 "구황요기"에 관한 이론서로서 명종대에 간행된 《구황촬요(救荒撮要)》와 《벽온방(辟瘟方)》을 합쳐 새로운 저서인 《구황벽온방(救荒辟瘟方)》을 편찬하였다. 주목되는 것으로 가뭄 등의 재난을 미리 예방하는 방도로서 서울의 각 개천을 준설하자는, 당시로써는 이색적인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는 주자학적 명분론이 강조된 17세기 후반의 분위기에서 보기 드문 개혁 정치가였다.

당시의 내외 상황을 엄청난 위기로 파악하고 그 본질을 위정자들의 과오에서 비롯한 민심이반(民心離反)에서 찾았는데, 그것을 여러 가지 안민책(安民策)의 실시를 통해 극복하려 하였다. 대동법 실시, 수차 사용, 화폐 통용, 역법의 개선 등은 바로 그 구체적인 대안이었다. 18세기 실학의 융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정책들은 뒷날 실학사상가들의 정책과 상당한 관련성을 지닌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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