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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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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325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역사 속의 라이벌] '송시열' vs '윤증'

〈김갑동/ 대전대 인문학부 교수〉

-송시열 / '숭명반청'이 정치 철학, 주자학 절대주의자-
-윤증 / 현실 바탕 정치 꿈꿔, 학문ㆍ사상의 자유 도모-

훈구파와 사림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을 지나면 조선 정계는 붕당정치에 휩싸인다. 붕당은 조선 중엽에 모습을 드러내 세도정치가 등장한 조선 말까지 이어진다. 애초 붕당정치로 정국 주도권을 잡은 건 동인이었으나 인조반정을 거치며 서인이 득세했다. 서인은 숙종 초 핵분열을 일으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며 약 100여 년 가량 각종 현안에 대해 대립과 갈등을 보였다. 노론과 소론, 그 중심엔 송시열과 윤증이 있다.

우암 송시열은 죽어서도 붕당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할 만큼 붓으로 천하를 휘어잡은 독특한 정치인이다. 선조 40년(1607) 충북 옥천군 이원면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 때 스스로 문자를 알았고, 일곱 살이 되어선 형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그대로 받아썼다고 한다. 여덟 살에 송이창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송준길을 만난다. 두 사람은 숱한 우여곡절 속에서도 평생지기로 지낸다. 사계 김장생과 김집의 가르침을 받으면서는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와 우정을 나눈다.

송시열은 병자호란과 효종의 북벌계획이 탄로나는 바람에 조정과 재야를 넘나들던 중 근 20년 가까이 절친하게 지내던 윤선거와 사이가 벌어진다. 발단은 백호 윤휴의 경전해석. 윤휴가 〈중용〉에 대해 집주를 달자 송시열은 그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붙였다.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은 예송논쟁으로 극에 달했고, 윤휴는 숙종 6년 허적의 서자 허견의 모반사건에 연루돼 사약을 받았다.

윤선거는 송시열과 달리 윤휴의 경전해석을 긍정적으로 샀다. 오직 주자해석만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통념에서 다소 벗어난 시각이다. 윤휴와 송시열의 입장 차이는 효종 4년 황산서원에서 벌어진 시회(詩會) 토론 과정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두 사람의 논쟁은 윤증에게로 이어져 서인을 노론ㆍ소론으로 분열시키는 요인이 됐다.

▲논쟁을 통해 불거진 노론ㆍ소론 파당 불씨

명재 윤증은 인조 7년(1629)에 태어났기 때문에 송시열보다 22세 아래다. 아버지 윤선거를 비롯해 유계와 송준길, 송시열에게 수학했고, 윤휴ㆍ윤선도 등 남인계 석학들과도 교류를 가졌다. 양명학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송시열 문하에서는 가장 뛰어난 실력을 보여 조정으로부터 여러 차례 관직을 제의받았으나 한사코 뿌리쳤다.

소론 영수로 나선 윤증과 송시열의 대립은 흔히 '회니시비(懷尼是非)'로 불린다. 송시열이 대전 시내의 동쪽에 자리한 회덕에 살았고, 윤증이 논산군 노성면에 해당하는 니성에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용어다.

회니시비는 송시열이 예송논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윤선거 부자가 자신에 동조하지 않고 윤휴를 감싸고 돌자 병자호란 당시의 강도(江都) 수난과 탈출 사건을 들고나오면서 시작됐다. 송시열의 주장에 따르면, 윤선거는 강화도에 있을 때 친구들과 함께 의병을 모집한 뒤 성을 사수하기로 약속했다. 친구인 권순장과 김익겸, 이돈오 등은 성이 청나라 군사에 함락되던 날 약속대로 죽었고, 윤선거의 처도 자결했다. 오직 윤선거만 살아남았을 뿐이다. 더구나 윤선거는 적군에게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봉림대군 사신 일행이 성에 들어오자 이름을 바꾸고 노비로 위장한 뒤돌아가는 사신 일행에 붙어 몸만 살짝 빠져나온 모양새가 참으로 부끄러웠다는 것이다.

윤선거ㆍ윤증의 주장은 다르다. 윤선거에 따르면, 권순장과 김익겸은 남문을 지키던 정승 김상용이 분신자살하자 적과 싸우지도 않고 자결했으며, 자신의 처가 죽은 것 역시 적에게 잡혀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하는 게 낫다고 여긴 탓이다. 미복으로 강도를 탈출한 건 교전은 이미 끝났을 뿐 아니라 적에게 포위된 남한산성으로 급히 아버지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양쪽 주장은 다소 차이를 보인다. 다만 윤선거가 강도에서 당한 수난과 탈출은 사실이다. 때문에 윤선거는 과거시험도 단념하고 재취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자숙하며 재야에서 지냈다. 죽을 때까지 강도의 일은 그를 옭아맨 족쇄였다.

어쨌든 송시열은 윤선거와 회니시비를 벌이면서도 절교하지 않았다. 윤선거가 현종 10년(1669)에 죽자 제문까지 보냈다. 한데 윤선거 비문 찬술과 윤증의 배사론(背師論)을 둘러싸고 감정이 폭발하며 루비콘 강을 건너고 만다. 윤증은 박세채가 지은 행장과 자신이 작성한 연보를 송시열에게 주며 아버지 윤선거의 묘명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윤선거 부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송시열은 대충 비명을 지어 보냈다. 그의 덕을 기리는 구절에서는 "망연해 할 말을 알 수 없다"고 적은 뒤 "나는 다만 기술만 하고 짓지는 않았다(我述不作)"고 마무리했다.

이에 윤증은 4~5년에 걸쳐 장문의 편지를 띄우거나 직접 찾아가 개찬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비문 요지에 전혀 손대지 않고 글자 몇 군데만 고쳐줬다. 송시열이 제자 윤증의 마음을 저버린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

우선 송시열은 옛정을 생각해 윤선거를 칭송하는 제문을 보냈는데도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윤휴의 제문을 윤증이 거절하지 않고 받은데서 무척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윤증이 비명을 요청하며 가져간 '기유의서(己酉疑書)'도 화근을 낳았다. 윤선거가 죽기 4년 전에 작성한 기유의서는 설령 윤휴ㆍ허목 등이 잘못했을지라도 같은 사림이니 너무 배척하지 말고 차차 중용하는 게 옳다며 송시열에게 충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윤증은 윤선거가 생전에 보내지 않았던 서신을 선의로 보여줬지만 이는 송시열의 비위를 더욱 건드린 격이 되고 말았다.

▲스승과 제자 사이가 절교한 두 가지 이유

여기에 신유의서(辛酉疑書)가 덧붙여지면서 송시열과 윤증 사이에 증오가 싹텄다. 신유의서는 숙종 13년(1687) 경신환국이 있었던 다음해에 윤증이 송시열에게 보내려고 쓴 편지다. 내용은 크게 두 가지. 송시열의 학문은 그 근본이 주자학이라고 하나 기질이 편벽돼 주자가 말하는 실학을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게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송시열의 존명벌청은 말로만 방법을 내세울 뿐 실익이 없다는 것이다.

윤증은 이 의서를 먼저 박세채에게 보여줬는데, 박세채가 보내지 말라고 강권해 일단 송시열에게 보내지 않았다. 한데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인 송순석이 박세채 집에서 의서를 몰래 가져가 송시열에게 전했다. 송시열은 크게 화를 내며 치를 떨었다. 그 뒤 둘은 의절했고, 노ㆍ소론 분당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회니시비는 삼전도 비문을 둘러싼 시비로 이어졌다. 삼전도 비문은 송시열을 조정에 천거한 이경석이 지었다. 송시열은 숭명(崇明) 의리에 입각해 이경석을 성토하고 나섰다.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은 어차피 군신이 청에 항복한 이상 누구든지 그 비문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논리로 반박했다.

〈가례원류〉의 간행문제와 찬자 시비에서는 윤증의 배사론이 불거졌다. 〈가례원류〉는 윤증의 스승 유계가 김장생에게서 배운 예학을 발전시킨 책이다. 집필 과정에서 윤선거의 도움을 받았던 유계는 윤증에게 초고를 넘기고 교정과 간행을 부탁하며 세상을 떴다. 하지만 윤증은 〈가례원류〉를 유계와 윤선거가 공동으로 집필했을 뿐더러 김장생의 〈가례집람〉과 별 차이가 없다며 간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 책은 윤증이 죽고 난 뒤에야 비로소 햇빛을 봤다. 송시열의 제자 권상하는 윤증이 스승의 유언을 저버린 채 공동편찬이란 간사한 말을 했다고 맹공을 퍼부었다.

송시열을 영수로 한 노론과 윤증을 따르는 소론은 이처럼 여러 면에서 의견을 달리하며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 송시열은 주자학 절대주의자였으며 숭명반청을 정치철학으로 삼았다. 반면에 윤증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도모하고 현실에 바탕한 정치를 꿈꿨다. 그 바람에 스승과 제자는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갈라섰다. 과연 어느 쪽이 옳았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붕당정치 밑바닥엔 나름대로의 정치철학이 도도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출전 : 뉴스메이커 431호 2001년 7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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