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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0 (수)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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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불교-한국의 불교 (두산)
불교-한국의 불교

세부항목

불교 개관, 동양의 불교
한국 불교

삼국 시대의 불교

한국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 6월 진(秦)나라의 순도(順道)와 아도(阿道)가 불경과 불상을 가지고 들어와 초문사(肖門寺)ㆍ이불란사(伊弗蘭寺) 등을 창건하고 설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들의 설법과 전도를 공허(公許)한 고구려에서는 그후 평양(平壤) 9사(寺)와 반룡사영탑(盤龍寺靈塔) 등을 짓는 한편 불교 전파에도 힘써 많은 고승이 배출되었고, 열반종(涅槃宗)ㆍ삼론종(三論宗)ㆍ천태종(天台宗)ㆍ살바다종(薩婆多宗) 등의 종파가 이루어졌다.

의연(義淵)은 불교역사 연구를 통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고, 혜자(惠慈)ㆍ운총(雲聰)ㆍ혜편법사(惠便法師)ㆍ담징(曇徵)ㆍ법정(法定) 등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였고, 도림(道琳)ㆍ덕창(德昌)ㆍ혜량(惠亮)ㆍ신성(信誠) 등은 호국불교를 위한 실력배양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백제는 384년(침류왕 1) 인도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동진(東晉)을 경유하여 입국, 왕의 우대를 받고 궁중에 머물다가 이듬해 남한산(南漢山)에 절을 짓고 포교를 시작하였다.

그후 왕흥사(王興寺)ㆍ미륵사(彌勒寺)ㆍ한산불사(漢山佛寺)ㆍ경복사(景福寺)ㆍ수덕사(修德寺) 등 많은 사찰이 건조되고 교파도 삼론종ㆍ계율종ㆍ성실종(成實宗)의 세 종파가 성립되었다.

백제불교는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많은 고승들이 일본에 건너가 불교 전파에 큰 공헌을 하였는데, 일본 성실종의 개조가 된 도장(道藏)을 비롯하여 혜총(惠聰)ㆍ도림(道琳)ㆍ혜미(惠彌)ㆍ도흔(道欣)ㆍ담혜(曇慧)ㆍ도령(道寧)ㆍ상휘(常輝)ㆍ의각(義覺)ㆍ방제(放濟)ㆍ다상(多常) 등이 있다.

이 밖에도 백제 멸망 후 그 재건을 위해 궐기하였던 승장(僧將) 도침(道琛), 인도에 유학하고 귀국 후 《율부(律部)》 72권을 번역한 겸익(謙益) 등도 유명하다.

신라는 삼국 중에서 불교가 가장 늦게 전파된 나라로 527년(법흥왕 14)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있은 후 비로소 공인되었는데 그후 급속히 발전하여 국가적 종교로 존숭되고 승려와 사원이 국가의 두터운 보호를 받게 되었다. 많은 구법승(求法僧)이 인도와 당나라에 유학하였고 그들에 의하여 당나라의 13종(十三宗:成實宗ㆍ三論宗ㆍ俱舍宗ㆍ地論宗ㆍ攝論宗ㆍ天台宗ㆍ法相宗ㆍ涅槃宗ㆍ念佛宗ㆍ密宗ㆍ禪宗ㆍ華嚴宗ㆍ律宗)이 도입되어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선종은 독자적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의 분파를 이루었다.

국가 안태(安泰)와 왕실의 번영을 비는 호국불교로서의 신라불교는 사상ㆍ정치ㆍ문화ㆍ외교ㆍ국민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건축ㆍ공예 방면에도 찬란한 예술의 꽃을 피웠다.

황룡사(皇龍寺)ㆍ사천왕사(四天王寺)ㆍ봉성사(奉聖寺)ㆍ감은사(感恩寺)ㆍ봉덕사(奉德寺)ㆍ망덕사(望德寺)ㆍ법주사(法住寺)ㆍ통도사(通度寺)ㆍ화엄사(華嚴寺)ㆍ월정사(月精寺)ㆍ부석사(浮石寺)ㆍ불국사(佛國寺)ㆍ장안사(長安寺)ㆍ해인사(海印寺)ㆍ보현사(普賢寺)ㆍ범어사(梵魚寺)ㆍ쌍계사(雙磎寺) 등 명찰을 창건하였고, 탑ㆍ종ㆍ불상 등의 공예가 발달하여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정혜사(淨惠寺)의 13층탑, 화엄사 쌍탑, 감은사 쌍탑, 무량사탑(無量寺塔), 동화사(桐華寺) 쌍탑, 금산사(金山寺)의 석탑 및 6각다보탑, 화엄사 사리탑 등을 비롯하여 석굴암 석불, 황룡사 장륙금상(丈六金像), 봉덕사 종, 금산사 부도(浮屠), 감산사(甘山寺)의 2불상, 백률사(栢栗寺)의 약사상(藥師像), 사천왕사의 사천왕상, 화엄사 석등 등은 귀중한 문화재로서 전승된다.

한편 수많은 고승이 배출되어, 원광(圓光)과 같은 대학승(大學僧)은 세속5계(世俗五戒)로 국민도의를 확립하였고, 자장(慈藏)은 문물제도를 수립하였으며, 의상(義湘)은 실천적인 수행(修行)과 사찰의 건립을 통하여 화엄의 교리를 널리 펴는 한편 많은 학승을 양성하였고, 원효(元曉)는 80여 부의 논소(論疏)를 지어 불교의 대중화를 꾀하는 한편 통일불교 창조에 정력을 쏟았다.

의상과 원효는 그 학통이 중국과 일본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원측(圓測)은 유식설(唯識說)에 통달하여 독특한 견해를 가졌고, 그 때문에 중국의 법상종 정통파에게는 비난을 받았으나 그의 저술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티베트어로 번역되어 전한다. 혜초(慧超)는 인도에 건너가 불적(佛蹟)을 순례하고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거쳐 귀국한 다음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저술하여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그 밖에 신라시대의 고승들로는 도증(道證)ㆍ경흥(憬興)ㆍ지통(智通)ㆍ표훈(表訓)ㆍ명랑(明朗)ㆍ승전(勝詮)ㆍ대현(大賢)ㆍ도의(道義)ㆍ신행(信行)ㆍ체징(體澄)ㆍ지증(智證)ㆍ혜소(慧昭)ㆍ현욱(玄昱)ㆍ개청(開淸)ㆍ낭공(朗空)ㆍ범일(梵日)ㆍ무염(無染)ㆍ원랑(圓郞)ㆍ진경(眞鏡) 등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모두 당나라와 일본까지 이름이 알려졌다.

통일 신라 시대의 불교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불교 전래과정은 국가적 사절을 매개로 한 외교적 통로에 의한 전래였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초기 전래는 눌지왕 때 고구려로부터 무명인에 의해 전래되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고, 소지왕 때 일선군(一善郡:善山) 지방 모례(毛禮)의 집에서 아도(阿道)가 전도했으나 이 역시 박해 속에 끝났다.

521년(법흥왕 8) 남조(南朝)인 양(梁)나라와 국교를 맺은 후 양나라 무제(武帝)가 보낸 승려 원표(元表)에 의하여 비로소 신라 왕실에 불교가 알려지자 법흥왕은 불교를 수용하고 이를 진흥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귀족의 반대로 실패하고 왕의 총애를 받던 이차돈(異次頓)마저 순교하게 되었다(527). 이를 계기로 불교가 공인되고 중단했던 흥륜사(興輪寺) 창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다(535). 이와 같이 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실에서 불교를 수용한 원인은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는 정신적 지주로서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의 불교는 재래의 토속신앙을 극복하면서 고대국가의 이념과 사상을 통일하고 국가발전을 비는 호국신앙(護國信仰)과 현실구복적(現實求福的) 신앙으로 수용 발전되었다. 왕권이 강화되면서 불교의 호국사상은 왕권의 신성함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불교왕명을 낳았다. 즉, 진평왕과 그 왕비는 석가의 모친명(名)을 따서 백정(白淨)ㆍ마야부인(摩耶夫人)이라 불렀고, 법흥왕은 법공(法空), 진흥왕은 법운(法雲)이라 하는 등 불교왕명시대가 찾아왔다.

불교의 호국관은 국가적 차원에서 불국사(佛國寺)ㆍ흥국사(興國寺)ㆍ흥왕사(興王寺) 등을 축조한 것이나, 황룡사9층탑의 축조 및 미륵불(彌勒佛)이 하생하여 화랑이 되었다는 신념 등은 왕실호위와 국가수호의 호국신앙의 표시였다. 또한 호국경(護國經)인 인왕경(仁王經)이 존중되고, 국가의 안태(安泰)를 비는 백좌강회(百座講會:仁王會)ㆍ팔관회(八關會) 등 불교행사가 성행하였다.

한편 승직제도인 국통제(國統制)가 진흥왕 때 수립되어 불교의 정치참여를 촉진시켰다. 또 현세구복적 성격면에서는 아들의 출산이나 치병(治病)을 기원하는 등 샤머니즘과 결부되어 불교의 대중화가 촉진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는 왕권 중심의 지배체제를 강화하는 데 정치적 고문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중국 및 서역문화 수입에 선구적 역할을 담당하여 민족문화 개발에 활력소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일본문화 개발에도 큰 몫을 담당하였다. 특히 승려들은 학문과 사상의 선각자가 되어 국민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원광(圓光)의 세속오계(世俗五戒)가 신라인의 도덕적 요강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도 실증된다.

통일 전 불교의 종파는 자장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戒律宗)이 유행하여 국민사상의 통일에 큰 몫을 담당하였다. 한편 의상(義湘)의 화엄종(華嚴宗)은 원융사상(圓融思想)을 바탕으로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와 부합되었기 때문에 귀족사회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통일 후 중대의 불교는 나ㆍ당간의 친선관계가 이룩되면서 유학생ㆍ유학승의 노력으로 단순한 호국종교의 역할을 벗어나 사상과 이념을 앞세운 종교철학으로 발전하였다. 이 결과 5교(敎)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이때 원효는 통일신라의 불교를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그는 종파간의 대립의식이나 형식을 배격하고 일심(一心)ㆍ진여(眞如)와 통일ㆍ화합의 화정사상(和靜思想)을 강조하면서 불교의 형식화ㆍ귀족화를 거부하였다. 이로써 불교를 생활화하며 대중화하는 정토신앙을 확립하였다.

5교가 귀족들의 환영을 받은 데 대하여 정토신앙은 일반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이 정토신앙은 불경의 깊은 교리를 터득하지 않더라도 극락세계에 생왕(生往)한다는 뜻의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을 외면, 고해에서 벗어나 서방의 정토(淨土:극락)에 귀의할 수 있다는 지극히 단순한 신앙이었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들도 손쉽게 믿을 수 있었는데, 이와 같은 정토신앙은 통일신라의 사회적 모순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들의 현실도피적 염세경향을 반영해준 불교 내세관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

8세기 이후 신라 사회에 정치적 권위가 추락되자 불교계에도 불경과 계율을 앞세워 중앙귀족과 연결된 5교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대두되어 지방 호족과 연결, 9산(九山:禪宗)의 종파가 이룩되었다. 하대의 선종사상은 교리보다 스스로 사색하여 개인적인 심적 체험과 도야로서 진리를 깨닫는 것(見性悟道)이 옳다고 생각한 종파로서 문자를 떠나(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을 중요시하였다.

이 선종은 8세기 말 혜공왕 때의 신행(神行)과 9세기 초인 헌덕왕 때의 도의(道義)에 의하여 가지산파(迦智山派)가 성립되면서 9개파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정치ㆍ사회적으로 혼란을 거듭했던 하대에 심성(心性) 도야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시대적 환경에 부합될 수 있었다. 대개 6두품 출신이 지방 호족들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한 변경에서 개창되었기 때문에 호족의 종교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발전 성행한 선종은 중세(中世)의 지성을 성립시키는 자극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왕실의 권위를 부정함으로써 호족세력의 사상적 이념을 제시해주었다. 특히 해주(海州) 수미산파의 개창자 이엄(利嚴)이 호족 출신인 왕건(王建)의 스승이 된 것 등으로 미루어 선종사상은 고려 왕조 개창의 정신적 계기가 되었다. 선종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중국문화의 폭을 넓혀주었고, 한문학 발달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 시대의 불교

고려의 불교는 신라 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ㆍ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ㆍ진관사(津寬寺)ㆍ부석사(浮石寺)ㆍ관음사(觀音寺)ㆍ숭교사(崇敎寺)ㆍ석왕사(釋王寺)ㆍ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 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 밖에 중기에 이르러 지눌(知訥)ㆍ수기(守其)ㆍ균여(均如), 말기의 나옹(懶翁)ㆍ보우(普愚)ㆍ보조(普照)ㆍ백운(白雲) 등은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ㆍ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ㆍ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ㆍ화엄종ㆍ총남종(摠南宗)ㆍ자은종(慈恩宗)ㆍ신인종(神印宗)ㆍ남산종(南山宗)ㆍ도문종(道門宗)ㆍ중신종(中神宗)ㆍ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ㆍ자은ㆍ총남ㆍ중신ㆍ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ㆍ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조선 시대의 불교

조선 시대에 이르러 조정의 숭유 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인하여 불교는 미증유의 수난기(受難期)를 맞이하였으니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하는 한편, 함부로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하고 사전(寺田)에도 과세를 하였으며 승려의 궁중 출입과 도성(都城) 내 출입을 금하였다.

또한 연산군 때는 승과(僧科)를 폐지하고, 삼각산의 여러 절의 승려를 몰아내어 그곳을 놀이터로 삼았으며 원각사(圓覺寺)의 불상을 옮기고 그곳을 기관(妓館)으로 삼는가 하면 선종(禪宗)의 본산인 흥덕(興德)ㆍ흥천(興天) 두 절을 없애고 여승은 궁중의 노비(奴婢)로 삼고 승려들도 모두 환속(還俗)시켰다. 중종(中宗)은 경주(慶州)의 동불상(銅佛像)을 녹여 병기(兵器)를 만들고 원각사를 헐어 그 재목은 민가를 짓는 데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강압에도 불구하고 불교신앙 자체를 말살하지는 못하였으며, 특히 상류층 부인의 신앙을 저지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역대왕 중에는 호법왕(護法王)도 있었으니, 태조는 석왕사ㆍ태고사ㆍ해인사 등에 비판(婢板)을 하사하였고, 세종ㆍ세조 때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 불경을 간행하였다. 특히 세종은 불교종파의 정비를 단행하여 조계ㆍ천태ㆍ총남의 3종을 선종(禪宗)으로, 화엄ㆍ자은ㆍ시흥ㆍ중신의 4종을 교종(敎宗)으로 통합하여 선ㆍ교 양종을 성립시켰다.

이름 높은 명승도 많이 배출되어 무학(無學)ㆍ함허(涵虛)ㆍ보우(普雨) 등과 임진왜란 때의 승장 서산(西山)ㆍ사명(四溟)ㆍ처영(處英)ㆍ영규(靈圭) 등은 특히 유명하다.

그 후 한국불교는 일제강점기에 사찰령(寺刹令)에 따라 31개 본사와 1,200개의 말사(末寺)로 구분되었고, 3ㆍ1운동 때는 많은 승려가 가담하였으며, 한용운(韓龍雲)ㆍ백용성(白龍成) 등은 33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8ㆍ15광복 후 전국불교대회를 열어 교구제(敎區制)를 정하고 중앙에는 총무원, 각 도에는 교무원을 설치, 종헌(宗憲)에 따라 조직을 강화하였다.

6ㆍ25전쟁 후에는 파괴된 100여 개의 사찰을 수축하는 한편 불교의 대중화 운동을 전개하였고, 고아원의 설립, 동국대학ㆍ해인대학ㆍ경기대학과 해동(海東)ㆍ용인(龍仁) 등 10여 고등학교 및 20여 개의 중학교를 운영, 문화사업에도 기여하고 있다. 1954년 이래 비구(比丘)ㆍ대처(帶妻) 두 파의 분쟁으로 분열된 후 여러 개의 종단으로 갈라졌다.

현재 교육부에 등록된 종파는 조계종을 비롯하여 태고종(太古宗)ㆍ법화종(法華宗)ㆍ미륵종(彌勒宗)ㆍ법상종ㆍ보문종(普門宗)ㆍ일승종(一乘宗)ㆍ용화종(龍華宗)ㆍ불입종(佛入宗)ㆍ원효종(元曉宗)ㆍ천태종ㆍ화엄종ㆍ정토종(淨土宗)ㆍ진각종(眞覺宗)ㆍ총화종(總和宗)ㆍ진언종(眞言宗)ㆍ천화불교(天華佛敎)ㆍ한국불교법화종 등 18개 종파가 있다.

사찰수는 5,700여 개소이며, 승려가 2만여 명, 신도수 1,300만여 명이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신문》을 비롯하여 각 종파ㆍ단체들에서 정기간행물도 30여 종이 나오고 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불교'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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