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0 (수) 14:36
분 류 사전1
ㆍ조회: 3250      
[가야] 가야사 개관 (이영식)
가야사 개관

이영식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소장)

가야의 역사는 기원 전후에 남쪽의 해안 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 경에 북쪽의 내륙 지역에서 마감되었습니다. <삼국지ㆍ삼국사기ㆍ일본서기> 등의 기록과 고고학 자료를 가지고 보면 약 십이개국 정도의 나라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약 600년 동안이나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과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였습니다. 가야가 신라에 통합되는 것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기 100년 전이었습니다. 100년 먼저 망했던 사실과 600년 동안 역사를 함께 했던 사실에서 어디에 의미를 두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런 간단한 산술도 못했기 때문에 가야의 역사를 소홀히 다루어 왔습니다. 우리의 고대사를 삼국 시대로 인식한다면 600년 동안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일궈갔던 고대 영남인들의 역사는 어디에서 찾을 것입니까? 우리 역사에서 가야사가 가지는 의미를 새롭게 보아야 할 때가 왔습니다.

<삼국유사>는 가야사가 전개되었던 무대를 해인사의 가야산에서 남해까지, 낙동강 서쪽에 서지리산(섬진강)까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는 낙동강 동쪽의 동래ㆍ 양산ㆍ창녕 등과 섬진강 서쪽의 진안ㆍ장수ㆍ임실ㆍ남원 등에서도 가야문화의 흔적들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현재의 경남과 부산을 중심으로 경북과 전북의 약간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가야사는 전개되었습니다. 많은 산과 강으로 나누어진 분지들은 독립적인 가야의 여러 나라들의 형성과 발전에 적합했지만, 통일된 왕국을 이루기도 어렵게 하였습니다. 가야는 통일왕국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가야(加耶)는 가라(加羅)에서 온 말입니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로 되었습니다. 김해의 가락국(駕洛國)은 '가라의 나라'였습니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신라)→伽耶(고려)→伽倻(조선)와 같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습니다.

<삼국지>는 3세기 경에 경남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구야국(狗邪國, 김해)ㆍ안야국(安邪國, 함안)ㆍ반로국(半路國, 고령)ㆍ불사국(不斯國, 창녕)ㆍ독로국(瀆盧國, 거제)ㆍ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밀양)ㆍ고순시국(古淳是國, 창원)ㆍ고자미동국(古資彌凍國, 고성) 등이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나라 이름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加耶, 김해)ㆍ아나가야(阿那加耶, 함안)와 같은 이름이 친숙합니다만, 고려 시대의 일연스님이 고려시대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여 지었던 이름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정작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들은 몰랐을 겁니다. 가야의 각국은 구야국ㆍ안야국ㆍ반로국 등과 같이 부르는 것이 옳습니다. 임나(任那)는 <일본서기>에 주로 쓰여 고대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고 꾸미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임나는 「광개토왕릉비(400년)ㆍ삼국사기 강수전(7세기)ㆍ진경대사비(932년)」와 같이 고구려인과 신라인들도 사용하였습니다. 임나는 '님의 나라(主國)'입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중심국이었던 김해의 가락국이나 고령의 대가야를 높여 부르던 말이었습니다. 김해와 고령은 가야의 대표로 일본과 교섭했기 때문에 고대 일본에서 임나는 가야의 대명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대가야(大加耶)는 고령의 가야를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이지만, 원래의 대가야는 둘이 있었습니다.

1∼4세기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큰가야(大加耶)'였고, 5∼6세기에 는 고령의 반로국이 '큰가야(大加耶)'였습니다. 가야사에서 마지막 '큰가야'가 반로국이었기 때문에 고령을 대가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가야의 역사는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로 나누어 집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를 공격했던 사건을 중심으로 전기 가야와 후기 가야로 나눕니다. 전기 가야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 가야에는 고령의 대가야가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전기 가야는 남해안에 인접한 거제(瀆盧國)ㆍ김해(狗邪國)ㆍ창원(古淳國ㆍ卓淳國)ㆍ함안(安邪國)ㆍ고성(古 自國)등이 번성하였고, 후기가야는 고령(大加耶)ㆍ합천(多羅國)ㆍ창녕(不斯國ㆍ比斯國)ㆍ의령 (爾赦國)ㆍ거창(居烈國)ㆍ남원(己汶國)ㆍ하동(多沙國)ㆍ사천(史勿國) 등이 가야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기원 전후의 시기에 김해를 비롯한 창원ㆍ마산ㆍ함안ㆍ고성ㆍ사천ㆍ진주 등의 지역에서는 소규모의 정치체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가야사의 시작이었습니다.

대개는 3천∼3천5백명 가량의 '소국(小國)'들이었으나, 김해의 구야국(狗邪國)과 함안의 안야국(安邪國)은 2만∼2만5천명 정도의 '대국(大國)'이었습니다. 남해안에서 가야사가 시작 된 것은 낙랑군ㆍ대방군(樂浪郡ㆍ帶方郡)과 같은 선진지역과 바닷길을 통해 교섭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국지>는 3세기경에 대방군에서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상 교통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남해에 접어들어 동쪽으로 향하다가, 김해의 구야국에 정박한 다음,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큐슈(九州)에 도착하 는 항로였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었던 한(漢)의 선진 문물이 이동하던 경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남해에 인접해 있던 가야의 소국들은 이러한 선진문물 이동로의 관 문과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 들였고, 이를 바탕으로 발 전할 수 있었습니다. 김해의 대성동고분군ㆍ양동고분군, 창원의 다호리유적, 고성의 동외동 패총, 울산의 하대고분군 등에서는 이러한 경로로 수입되었던 중국제 문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전기가야 소국들의 발전에는 중국 군현과의 외교와 교역이 절대적인 요소로 작용하 였습니다. <삼국사기ㆍ삼국유사>가 전하는 '포상팔국(浦上八國, 201∼212년)의 난'은 사천ㆍ 고성ㆍ칠원ㆍ마산 등의 가야가 김해의 해상교역권을 빼앗기 위해 가락국을 공격했던 전쟁이 었습니다. 우리는 가야의 건국신화를 바탕으로 형제관계와 같이 이해하고 있지만, 같은 가야 문화권이라도 이해 관계에 따라서는 전쟁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13ㆍ314년에 고구려에게 낙랑군과 대방군이 축출되면서 남해안의 가야에 선진 문물의 공급원이 차단되었습니다.

400년에 고구려의 광개토왕은 가야를 공략하였습니다. 이러한 1세기간의 역사적 변동은 가야사의 중심이 남부의 해안지역에서 북부의 내륙지역으로 이동하게 하였습니다.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전개된 후기가야는 가야금 12곡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 '가라국왕 하지(加羅國王荷知)'의 남제(南齊)와의 외교에 대한 해석,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의 확산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 등을 통한 대가야사의 복원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5세기 중후엽에 대가야의 가실왕은 우륵에게 가야금 12곡을 작곡시켰습니다. <삼국사기>가 전하는 가야금 12곡명은 연주곡과 무곡 등으로 구성된 음악으로 해석되어왔습니다만, 최근에 가야금 12곡명은 서부경남의 가야 여러 나라들의 이름으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대가야가 정치적 영향을 미쳤던 산물이 가야금 12곡이었습니다. 고령의 대가야왕은 의령의 사이기국(斯二岐國) 사 람 우륵(于勒)을 강제 이주시켜 작곡을 시킬 수 있었고, 가야금 12곡에 서부 경남의 가야들을 포함시키는 정치적 통합체를 추진하였습니다. 대가야왕은 축제의 마당에 가야왕들을 불러모았고, 가야금 12곡을 연주케 하여 가야의 일체감을 높였습니다. 479년에 대가야왕은 중국의 남제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輔國將軍ㆍ本國王'에 제수되었습니다. 내륙에 위치한 대 가야(고령)의 사절단이 중국의 양자강에 이르려면 먼저 남해로 나와야 합니다. 고령에서 남해로 나오는 길은 낙동강과 섬진강이 있지만, 당시의 낙동강 하류역은 신라가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대가야에서 섬진강 하구(하동)에 도달하려면 고령→합천→거창→함양→남원 (운봉)의 육로와 남원→곡성→구례→하동의 섬진강을 경유하였을 것입니다.

5세기 후반의 대가 야왕은 이러한 지역에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가야 사절단은 중국의 남제에 도 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물적 증거가 서부 경남 지역에 대가야식 토기와 문물이 확산되는 현상과 고령 지산동 고분군의 내용입니다. 대가야식 토기와 금동제 위세품 등이 서부 경남 일대로 확산되는 과정은 경제 교역권(5C중엽)→간접 지배권(5C후엽)→직접 지배권(6C 초)의 단계로 나누어 집니다. 고령의 지산동 44호분은 중앙의 주인공을 방사식으로 둘러싸듯 이 35개의 돌방이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무려 100인 이상을 강제로 죽여 순장되어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6세기의 대가야는 고대국가의 출발점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6세기 전반부터 가야는 신라와 백제의 침입에 휘말리게 됩니다. <삼국사기ㆍ창녕진흥왕순 수비ㆍ일본서기>에는 당시의 사정이 자세하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신라와 백제의 진출에 대해 독립 유지를 위해 전쟁과 외교를 전개하는 가야의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가야는 친백제 노선과 친신라 노선을 반복하기도 하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기도 합니다. 이른바 임나일 본부(任那日本府)의 문제가 생기는 것도 이 시기입니다. 임나일본부의 실체는 일본의 왜왕권 이 가야에 파견했던 외교사절입니다만, 이들은 가야의 왕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백제나 신라 에 대한 외교 활동을 벌였습니다.

안라국왕은 함안에 이들을 머물게 하면서 백제와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왜를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532년에 가락국(김해), 560경에 안라국(함안), 562년에 대가야(고령)가 차례로 신라의 회유와 무력앞 에 통합되었고, 가야의 역사는 한국 고대사의 울타리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야인들의 일부는 일본 열도로 이주하기도 하였고, 신라의 지방 사람으로 편제되기도 하였으나, 김유신 일족과 같이 정복국인 신라에서 최고 권력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출전 : http://todori.inje.ac.kr/~kaya/mu21.htm
   
윗글 [근대] 근대화 (한메)
아래글 [삼국/남북국] 신라의 제도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900 사전1 [고려] 최승로 상서문 (민족) 이창호 2002-04-18 3342
2899 사전1 [삼국] 삼국시대 (민족) 이창호 2002-04-22 3339
2898 사전1 [근대] 근대사회 (두산) 이창호 2002-10-23 3323
2897 사전1 [불교] 문수보살 (민족) 이창호 2002-06-03 3305
2896 사전1 [근대] 근대화 (한메) 이창호 2002-08-28 3297
2895 사전1 [가야] 가야사 개관 (이영식) 이창호 2002-03-20 3250
2894 사전1 [삼국/남북국] 신라의 제도 (민족) 이창호 2002-04-21 3247
2893 사전1 [고려] 교장=속장경 (민족) 이창호 2002-05-06 3176
2892 사전1 [조선] 악장문학 (국어국문학자료사전) 이창호 2002-09-20 3153
2891 사전1 [회화] 남종화 (한메) 이창호 2002-09-24 3150
1,,,1112131415161718192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