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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01 (수) 22:20
분 류 사전1
ㆍ조회: 2600      
[고려/조선] 역(役) (민족)
역(役)

관련 항목 : 양역, 요역, 군역

전근대 사회의 수취 체계에서 조세(租稅)ㆍ공부(貢賦)와 더불어 수취의 3대지주를 형성한 세. 역은 노역(勞役)과 신역(身役)으로 대별할 수 있다. 노역은 인민의 노동력이 국가 권력에 의해 무상으로 징발되는 강제 노동을 의미하는 것으로 요역(法役) 내지 역역(力役)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신역은 일정한 신분 계층의 사람들에게 세습적으로 부과된 역이며, 서리(胥吏)ㆍ향리(鄕吏)의 이역(吏役)과 부병(府兵)의 병역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 밖에 천역(賤役), 즉 역정(驛丁)ㆍ간척(干尺)ㆍ공노비(公奴婢) 등이 국가에 부담하는 역도 포함된다. 신역은 직역(職役)으로도 불려 양역(良役)ㆍ천역ㆍ신량역천(身良役賤) 등으로 양상이 복잡하였다. 이것은 한국 신분 사회의 구조적인 복잡성과 신분에 따른 수탈 양태의 다양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삼국ㆍ통일 신라 시대]

이 시기의 역의 수취에 관한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노동력의 사역은 국가의 재정운영과 개인의 가정 경제의 관리에 있어 매우 큰 비중을 가진 것으로 이해된다. 일반 인민은 원칙적으로 일정한 연령에 달하면 요역에 징발되어 국가적인 토목 공사, 기타의 노역에 동원되었다. 고구려ㆍ백제의 경우 연령 기준이 15세 이상이었다. 이것은 삼국 시대의 정(丁)의 입역 연령(立役年齡)을 고찰하는데 참고가 된다.

삼국 시대에 세습적 신역이 제도화되었는가 라는 문제는 국가 기관에 예속된 공노비들의 경우를 제외하고 아직 단정할 근거는 없으나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통일 신라 시대의 요역, 즉 역역의 수취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녹읍(祿邑)이다. 그것은 원삼국 시대(A.D. 1∼3C)부터 존재했으며, 689년(신문왕 9)에 폐지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다시 부활되었다.

본래 관료들에게는 복무의 대가로 녹읍이 지급되었으며, 그것의 폐지 기간에는 관료전이 지급되어 관료는 조(租)라는 형태로 관료전의 소출의 일부를 수취하였다. 관료전 제도는 약 70년간 존속했고, 다시 녹읍 제도로 대체되었다.

흔히 관료전 제도가 토지 자체에 대한 지배였음에 반해, 녹읍 제도는 녹읍 내의 주민들에 대한 인신적 수탈, 즉 노동력의 수탈이라고 이해되었다. 이러한 시각에서 녹읍의 폐지와 부활 문제를 통일 신라의 수취 체계가 일시 토지에 대한 지배, 즉 조의 수취에 중점을 두었다가 다시 노동력 수취에 주력하는 방향으로 후퇴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요컨대 이것은 당시에 인간의 노동력을 지배하는 인신적 수탈이 사회의 경제 구조에서 가장 우월한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이해이다. 이러한 노동력 수탈의 문제는 통일 신라 시대의 역의 성격을 해명하는 중요한 관건의 하나이다.

통일 신라 시대에 요역 외에 군역(軍役)이 존재했는데, 이것이 고려와 같이 세습적인 신역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판단 자료가 없다. 당시 군사는 다분히 귀족의 사병(私兵)과 같은 성격이었으므로, 오히려 반대의 경우를 상정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리고 국가의 각 기관에 예속된 공노비는 당연히 세습적 신역의 부담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려 시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정은 원칙적으로 요역을 부담할 의무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도시의 건설, 궁원ㆍ사찰ㆍ관아의 영조, 성보(城堡)ㆍ도로의 구축, 하천ㆍ제방의 개수사업 등 대규모의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다. 조선 초기의 요역은 중앙 관부에서 명령하는 소경지역(所耕之役)과 지방 관부가 동원하는 잡역(雜役)으로 대별되는데, 고려 시대에는 이 같은 구별이 확인되지 않는다.

요역은 9등호제(九等戶制)에 입각해 호를 단위로 차과(差課)되었다. 이러한 인정(人丁)의 다과에 기준을 두어 호등(戶等)을 편성하는 계정적민법(計丁籍民法)은 고려 전시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요역에 동원되는 출역(出役)의 일한(日限)을 규정한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당(唐)과 같이 대략 연간 20일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한 해에 70일간이나 동원된 초과사역의 기록도 있다.

9등호제에 의한 요역의 공출 과정은 등급에 따라 각 호의 출정(出丁) 기준이 제정되었을 것으로 추측될 뿐, 내용은 알 수 없다. 또 ≪고려사≫에는 일가의 장정이 동시에 모두 징발되어 요역에 충당된 듯한 기록도 보이고 있다. 물납(物納)으로 요역을 대체하는 당대(唐代)의 용(庸)과 같은 제도의 시행 여부 또한 확실하지 않다. 다만 국가가 요구하는 노동력의 수요는 많은 반면 부담할 민간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에, 아마 요역의 물납 제도는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와 기타의 기록에 보이는 ‘용(庸)’은 요역의 물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요(常法)’ 혹은 노비신공(奴婢身貢)의 뜻으로 쓰여진 경우가 많다.

요역의 면제 대상으로 양반 품관(品官), 등과자(登科者), 군인ㆍ향리ㆍ역정 등 신역의 부담자들은 원칙적으로 요역의 부담이 없었다. 또한 독질(篤疾)ㆍ폐질(廢疾) 등 신체의 불구자, 단정(單丁), 70∼80세 이상의 노인ㆍ독질ㆍ폐질자를 호양(護養)하는 시정(侍丁)도 면제된 듯하다. 승인(僧人)ㆍ도사(道士)와 효자ㆍ순손(順孫)ㆍ의부(義父)ㆍ절부(節婦)의 호(戶)에 대해서는 정책적으로 면역의 특혜를 주었다. 그리고 전쟁 때 공훈이 탁월한 사람 또는 그러한 지역민들이 보상으로 면역의 특혜를 받았다.

노비의 경우 선상입역(選上立役) 중인 공노비와 주가(主家)가 솔거하는 사노비는 요역에서 면제되었다. 그러나 기타의 외거 노비는 일반 양인과 같이 요역을 부담한 것으로 이해되며, 국가나 주가에 바치는 신공(身貢) 부분만은 일반 농민에 비해 부담이 무거웠다. 한편, 입역 정인(立役丁人)은 입역하는 동안 스스로 자기의 식량을 조달하였다.

고려 시대의 3대 세목(稅目)은 조세ㆍ공부ㆍ요역이었다. 조세는 토지의 소출인 농산물을 수취하는 것이므로 요역과는 직접적 관련은 없다. 공부는 용어의 개념이 매우 복잡하나 세목의 하나로서 볼 때, 정부가 각 주ㆍ현에 상납을 명령한 세공(歲貢), 즉 해마다 주ㆍ현의 주민들이 바치는 공물을 의미한다. 공부의 종류는 대략 광산물ㆍ직포류(織布類)ㆍ동식물 및 그 가공품과 해산물 등이었다. 소(所)는 공부로서 상납되는 각종 수공업 제품을 만드는 장인(匠人)들이 사는 지역으로, 이곳의 역은 곧 거주하는 소민의 역이었다.

각종 공부의 조달은 가내의 개별적 자유 노동에 의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광산물ㆍ자연물화(自然物貨 : 밤ㆍ잣ㆍ옻나무ㆍ生麻 등) 등의 경우에는 그것을 채집ㆍ운반하기 위해 주ㆍ현의 수령이 공역(貢役)이라는 명목으로 해당 주ㆍ현의 주민들에게 집단적으로 역역(力役)을 부과하기도 하였다. 이럴 경우 공역의 조달은 요역의 연장이라는 성격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공부라는 세목도 본질은 요역과 표리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역이 3대 세목 중 비중이 가장 큰 것으로 이해되거니와, 요역의 연장으로 이해되는 공역을 합치면 노동력의 수탈을 전제로 하는 수취 형태가 당시의 세제=수취 체계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측면을 주목해 고려 시대, 특히 전기의 사회를 ‘고대적’인 성격의 사회라고 이해하려는 견해도 있다.

고려 시대의 역은 정남이 의무적으로 부담하는 일반 요역 외에 군인ㆍ향리ㆍ역정 등 특수한 신분 계층에게 세습적으로 복무가 의무화된 신역 내지 직역(職役)이 존재하였다. 신역ㆍ직역의 부담자를 정호(丁戶)라 하였고, 정호를 제외한 일반 농민은 백정(白丁)이라고 하였다. 정호는 원칙적으로 일반 요역에서는 면제되었고, 일정한 면적의 토지(收租地)가 입역(立役)의 대가로 지급되었다. 그러나 백정에게는 지급되지 않았다.

군역(軍役)ㆍ이역(吏役)ㆍ역역(驛役) 등을 부담하는 정호는 전정 연립(田丁連立)의 형식으로 역과 토지가 세습되었다. 군역은 군반 씨족(軍班氏族)에 속하는 계층이 부담했는데, 결원이 생기면 일반 민간에서 뽑아 보충하였다. 역역(驛役)을 부담하는 역정은 천인 내지 천인에 준하는 취급을 받았다.

천인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사람들로 소위 신량역천에 속하는 간ㆍ척계층이 있었다. 신역ㆍ요역은 당시 농민들의 최대의 부담이었으며, 9등 호제(戶制)에 입각해 작성된 호적은 바로 이 역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

조선 초기의 요역은 소경지역과 잡역으로 구분한다. 소경지역은 각 호(戶)의 소경전, 대체로 각 호가 소유하는 민전(民田)의 다과에 따라 차등있게 출정(出丁)을 규정한 중앙 관부의 요역이다. 잡역은 잡다한 요역으로 지방 관부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읍내의 민정을 징발하였다. 전자는 정한적(定限的)ㆍ정량적(定量的)이었으나, 후자는 일정한 한계가 없이 수시로 차발(差發)되어 전자보다 고통이 컸다. 요역을 부담하는 정남의 연령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16세 이상 60세까지였다.

요역은 호역이라고도 하여 각 호에 부과되는 것이며, 인정을 사역하는 것이었으나 그것을 직접 파악하지는 않았다. 호는 처음에는 계전적민법(計田籍民法)을 세워 인정의 다과에 따라 호의 등급을 제정하였다. 그 뒤 1435년(세종 17)부터 계전적민법을 채택해 토지 소유량에 따라 민호를 5등급(大ㆍ中ㆍ小ㆍ殘ㆍ殘殘)으로 나누고, 이를 기준으로 요역을 차정(差定)하는 역민식(役民式)이 제정되었다.

각 호의 출정수 및 일한에 대한 구체적 세칙이 보이지 않는데, 1471년(성종 2) 소경지역은 전 8결에 1부(夫)를 내고, 1부의 복역일한은 1년에 6일을 넘지 않을 것을 규정해 그대로 ≪경국대전≫에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 역민식의 규정은 준수하기 어려운 비현실적 법제였으므로 요역(소경지역)이 징발되는 과정에서 항상 초과출역(超過出役)이 강요되었다. 소경지역 중에 가장 비율이 큰 것은 공부지역(貢賦之役)ㆍ전세지역(田稅之役)이었다.

이것은 공물ㆍ조세를 각 지방에서 중앙의 각 관부로 수송하는 데 소요되는 요역과 공물을 채취, 상납함에 필요한 요역을 의미한다. 이 밖에 궁궐ㆍ관아ㆍ성곽ㆍ도로ㆍ제방 등의 수축, 영선은 요역이 투하되는 중요한 대상이었다. 조선 초기에도 고려 시대와 같이 공물은 주로 민간요역의 동원, 즉 공역(貢役)의 징발을 통해 채취, 조달되었다.

요역의 면제 대상은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왕족 및 현직 양반 관료, 고급 관료의 가족도 면역(免役)되었고, 지방의 세가(勢家) 등 특권적 지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대체로 요역을 부담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요역은 주로 일반 양인의 부담으로 변하였다.

한편 직역ㆍ신역을 부담한 양ㆍ천계(良賤系)의 유역인(有役人), 즉 지방 관아에서 통치 기구의 말단에 종사하는 서원(書員)ㆍ나장(羅將)ㆍ일수(日守) 등과 이 외에 면주인(面主人)ㆍ이정(里正)ㆍ창정(倉正)ㆍ진부(津夫)ㆍ수부(水夫) 등은 요역 중에서 잡역만 면제되었다. 공천(公賤)인 각사노비(各司奴婢)도 선상입역 중에는 잡역이 면제되었다. 이와 같이 신역 부담자가 면역의 혜택을 입은 것은 대체로 잡역이었다. 소경지역에서 공역은 취역(就役)하는 대신 물품을 상납해 면제되기도 하였다.

사노비(私奴婢)도 솔거노비를 제외한 외거노비는 요역의 의무가 있었으나 현실적으로 상전의 위세에 힘입어 입역을 포탈하였다. 공ㆍ상인(工商人) 역시 요역을 부담해야 했으나 출역에 의해 공상세(工商稅)가 체감되었다. 사찰에서 수도하는 승도(僧徒)는 면제되었으나, 정착해 농업에 종사하는 승도들은 일반 민호와 같이 공부ㆍ요역이 부과되었다. 노무에 견딜 수 없는 신체 불구자 역시 면제 대상이었다.

직역의 대표적인 것은 중앙과 지방 관아의 서리(胥吏)ㆍ향리의 역, 즉 이역(吏役)이었다. 중앙 관아의 유역인으로는 말단의 행정 실무에 종사하는 녹사(錄事)ㆍ서리(書吏)ㆍ서원 등의 서리층과 기타 관아의 잡무 사역에 종사하는 사령(使令)의 부류들이 있었다. 이 밖에 사법 경찰의 잡역에 종사하는 나장(螺匠)ㆍ소유(所由)ㆍ장수(杖首) 등과 관리의 종졸(從卒)인 반당(伴貴) 그리고 신탄(薪炭)ㆍ연료의 조달을 맡은 기인(其人) 등이 있었다.

중앙 각사(各司)의 서리, 즉 경리(京吏 : 京衙前)는 조선 초기에는 고려의 전통을 이어 양반의 하류와 비슷한 지위에 있으면서 취재(取才)를 통과하면 수령ㆍ역승(驛丞)ㆍ도승(渡丞) 등에 서용되어 문무유품(文武流品)에 승진하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점차 지위가 떨어져 중기 이후에는 입관(入官)의 길이 없어졌다.

지방 관아에서 관찰사 및 수령의 수족으로 대민 행정(對民行政)의 실무에 종사하는 향리(外衙前)는 이른바 육방(六房 : 吏ㆍ戶ㆍ禮ㆍ兵ㆍ刑ㆍ工房)을 조직해 지방의 말단 행정을 장악하였다. 지방 행정에서 특히 군사ㆍ경찰 사무에 종사하는 자를 군교(軍校)라 하였다. 향리ㆍ군교 등 외아전의 하인으로 사령ㆍ나장(羅將)이 있어 각종 역무(役務)에 종사했는데, 이들은 공ㆍ사천에서 모립(募立)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이역을 부담하는 계층은 역이 세습되어 입역자의 범위가 한정되는 조건 아래서 스스로 특정의 신분 계층을 형성하였다.

천역과 관련된 신역은 주로 공ㆍ사노비가 부담하였다. 공노비는 대부분 외거노비였는데 중앙관부에 예속된 시노비(侍奴婢)는 일정한 기간을 선상입역했고, 입역하지 않는 자는 신역의 대가로 사섬시(司贍寺)에 면포 1필 내지 1필반을 신공으로 바쳤다. 사노비는 국가에 대한 신역은 없었으나 외거해 독립호를 형성할 경우, 노는 면포 2필, 비는 면포 1필반의 신공을 바쳤다. 이것은 상전에 대한 신역의 물납을 뜻하는 것이었다.

1461년(세조 7) 경중각사(京中各司)에 신역을 부담하는 공노비는 20만구를 훨씬 초과하였다. 공ㆍ사노비 이 외의 천민 계층으로는 나장ㆍ일수ㆍ조졸(漕卒)ㆍ역보(驛保) 등 이른바 칠반공천(七般公賤)과 백정ㆍ무격(巫覡)ㆍ재인(才人 : 광대)ㆍ창기(娼妓) 등 이른바 팔반사천(八般私賤)이 있었다.
국초에 간(干)ㆍ척(尺)으로 불린 이른바 신량역천은 칠반천역(七般賤役 : 七般公賤)을 부담했는데, 신량역천 중에서 가장 고역이었다. 역졸(驛卒)은 칠반공천 중의 하나인 역보와 같은 부류였다.

국역(國役)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군역(軍役)이었다. 조선 전기의 군역은 공ㆍ사노(公私奴)를 제외한 일반 양민(農民)들은 원칙적으로 복무 의무가 있는 국민 개병(國民皆兵)의 원칙에 입각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의 군반 씨족과 같이 특정한 신분 계층에 세습적으로 부과된 신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일반 요역과 비슷한 성격을 띤 역(役)이 국방을 담당하는 군사면에서 특수한 형태로 구현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현직의 관료, 향교의 생도, 그리고 향리ㆍ역리ㆍ목자(牧子) 등 특수한 신역의 부담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적(軍籍)에 올랐으므로 양반계층도 군역을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들은 향교 생도로 빙자하는 등의 수단으로 군역을 도피했으므로 군역 부과는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국초 이래 군역의 파악 양식은 부병제(府兵制)가 논의되면서 계전법(計田法)에 의한 부역 방식(賦役方式)이 채택되어 군역과 요역과의 관계에 혼란이 있기도 했지만 결국 양자는 별개의 체계를 갖게 되었다. 초기의 3정1호(三丁一戶) 원칙 하에 호수(戶首, 정병, 1명)와 봉족(奉足, 2명)으로 구성되는 군호의 편성 양식은 입역 단위가 인정을 기준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성 원리에 있어서는 호수와 봉족이 소유하는 토지의 광협(廣狹)이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즉, 일정한 면적(전6결)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는 호수는 봉족이 붙지 않았고, 또 봉족은 일정한 면적(전 2ㆍ3결) 이하의 토지를 가진 자들만으로써 형성되었다. 이러한 군호 편제가 세조 때부터 2정1보(二丁一保)의 군보제(軍保制)로 개혁되었다. 이 군보제, 즉 보법(保法)은 종래 자연호를 중심으로 제정된 3정1호의 원칙에서 벗어나 2정1보를 군역 부과의 새로운 단위로 삼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가족 관계에 구애되지 않고 2정(丁)으로 구성된 보(保)라는 단위를 설정해 대가족이나 소가족을 막론하고 있는 그대로 군역 부과가 이루어질 수 있게 하였다. 그러므로 인정이 많은 호는 몇 개의 보가 짜여질 수 있으며, 단정(單丁)의 호는 토지준정(土地准丁)의 원칙에 적용되지 않는 한 다른 호와 어울러서 작보(作保)를 하였다. 이렇게 설정된 군역 부과 단위로서의 보에 병종(兵種)에 따라 입역하는 군정을 재정적으로 돕는 봉족으로서의 보가 지급되었다.

예를 들면 갑사(甲士)는 3보(三保 : 1봉족)가 1보(一保 : 군역부과단위)를 받들게 되므로 7정(丁)의 봉족을 가지는 셈이며, 기정병(騎正兵)은 2보(保)가 1보를 받들게 되어 5정의 봉족을 가지게 되고, 보정병(保正兵)은 1보가 1보를 받들게 되어 3정의 봉족을 가지게 되는 셈이 되었다.
봉족인 보인(保人)은 입역하는 군정, 즉 정병을 위해 매월 면포 1필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보법, 즉 군보의 제도는 그 뒤 약간의 변화가 있기는 했으나 군역 부과의 제도로서 존속해 나갔다.

그러나 성종 이후 태평이 오래 지속함에 따라 군정의 입역제도 자체가 해이해져 소수의 직업군인을 제외하고는 군정과 봉족의 구별도 희미해졌다. 중종대 이후부터는 방군수포(放軍收布)가 널리 이루어져 재래의 보법은 무너지고 군역 대립(軍役代立)의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이에 군역은 점차 차역(差役)에서 고역(雇役)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장정에게는 군역의 대가로 양포(良布, 保布) 2필이 과해졌다.

군역의 포납화(布納化)는 포(布)라는 현물 화폐를 매개로 과거의 의무 병역이 용병제(傭兵制)로 전환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군역 뿐 아니라 일반 요역에서도 18세기에 접어들면서 공납 제도가 전세화(田稅化)하는 대동법(大同法)이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을 계기로 요역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공부지역(貢賦之役), 즉 공역이 미납화(米納化) 혹은 포납화ㆍ전납화(錢納化)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 노동력의 직접적 파악을 목적으로 하는 역이 현물 혹은 화폐를 대납하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은 한국 사회경제사상의 큰 발전이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러한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한 수공업의 발전, 유통ㆍ교환 경제의 성장 그리고 상품 화폐 경제의 전개 등 여러 가지의 경제적 발전 계기가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인간 노동력의 직접적인 무상 지배를 의미하는 요역은 조선 말기까지 하나의 세항목으로 존속했으나, 수취 체계 안에서 민간 부담의 비중은 훨씬 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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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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