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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0-16 (수) 01:28
분 류 사전1
ㆍ조회: 2275      
[조선] 사림의 분열과 붕당정치의 전개
사림의 분열과 붕당 정치의 전개

16세기에 이르러 조선의 정치 운영은 당파를 형성하여 집단적인 논쟁을 수반하는 투쟁으로 발달했다. 이는 외척 정치가 종식된 선조 대에 정권을 독점한 사림 세력이 다시 학맥과 사상적 차이로 인해 붕당을 형성한 결과였다.

사림 분열의 직접적 요인은 1575년에 발생한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과 신진 사류 김효원의 암투였다. 김효원이 인사권을 쥐고 전랑직에 천거되자 심의겸은 그가 윤원형의 식객으로 있으면서 권세에 아부한 소인배라고 하면서 그같은 요직의 적임자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효원은 전랑직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얼마 뒤 김효원은 다른 자리로 이동을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들 심충겸이 그 후임으로 천거되었다. 그러자 김효원은 왕의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는 전랑직에 앉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고 심충겸의 전랑 취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 같이 전랑직을 둘러싼 두 사람의 대립이 가속화되고 있었는데, 다시 이들을 중심으로 당시의 벼슬아치와 사류들이 두 편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정치적 이념적 성격을 띤 붕당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파벌을 동인과 서인으로 구분해서 불렀는데,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 정동에 있었고,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 건청동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들의 분파는 비록 단순한 감정 대립에서 비롯되었지만, 그 내부는 다소 복잡한 양상을 띠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서로 학맥과 사상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동인은 주리철학적 도학을 사상적 배경으로 형성된 이황, 조식 문하의 영남학파였고, 서인은 주기철학에 근거를 두고 형성된 이이, 성혼 문하의 기호학파 사류들이었다. 이러한 학맥과 사상의 차이는 붕당 정치에 기반한 당쟁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유교 정치 사상에서 원래 붕당 정치는 금기 사항이었다. 그러나 중국 송대에 들어오면서 정치 참여 자격층 내지 정치 참여 의식층이 확대됨에 따라 전통적인 붕당관은 커다란 변모를 겪게 된다. 즉, 구양수와 같은 인물은 붕당을 공도의 실현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임인 '군자의 당'과 개인적 이익의 도모를 일삼는 '소인의 당' 두 가지로 나누고, 전자를 '진붕', 후자를 '위붕'이라고 규정하고 군주가 진붕의 승세를 유지시킨다면 정치는 저절로 바르게 이끌어진다고 하였다.

성리학의 대성자인 주희 역시 기본적으로 구양수와 견해를 같이하면서 더 나아가 붕당이 있는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군주까지도 '군주의 당'에 끌어들이도록 하여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16세기의 조선은 전통적인 붕당관과 성리학의 붕당관이 엇갈리고 있었다. 훈척 세력은 한, 당대의 붕당관에 바탕을 두고 사림의 세력 결집을 비판하는 동시에 탄압의 구실로 삼았으나, 사림계는 구양수의 붕당론에 근거하여 권세로써 정권을 독점하는 훈척 계열을 '소인의 당'이라고 비난했다.

사림 세력은 선조 대에 이르러 마침내 정권을 장악하고 구양수의 붕당관에 따라 당파를 조성하기에 이른다. 이의 시초가 바로 동인과 서인이었다. 주리론자들로 구성된 동인과 주기론자들로 구성된 서인들의 정쟁은 시간이 흐를 수록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띠게된다.

동서로 갈라진 뒤 대사헌 이이는 이들 두 당의 충돌을 극소화하기 위해 심의겸과 김효원을 각각 외직인 개성유수와 부령부사로 물러앉게 한다. 이 후 1580년 낙향했던 심의겸이 예조판서에 제수되자 동인인 장령 정인홍이 그를 탄핵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이의 중재로 정치적 파장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1584년 중재자 구실을 하던 이이가 죽자 동인과 서인은 본격적인 정치 투쟁을 감행한다. 이이가 죽자 이발, 백유양 등의 중도파 세력이 동인에 가세해 서인의 거두 심의겸을 탄핵하자 서인 중에 탈락자가 생기고 심의겸도 파직되었다. 이제 조정은 점차 동인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그러나 동인이 조정을 거의 장악했다고 판단했을 무렵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발생하여 조정은 다시 서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정여립은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수찬이 된 뒤 당시 집권 세력이던 동인 편에 들어가 이이를 배반하고 성혼, 박순을 비판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선조가 그의 이당을 불쾌히 여기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린다. 그가 서인을 공격하게 된 원인은 분명하지는 않다. 그가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을 때 이이가 반대했던 적이 있긴 했으나 이것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그의 직선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이 동인의 영수 이발의 성향과 일치했던 것이 동인에 동조하게 된 이유였을 것이다.

어쨌든 그가 이이를 공격한 이유로 서인의 미움이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래서 그는 동인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관직을 내놓고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는 낙향한 몸이었음에도 동인들 사이에서는 명망이 높았다. 그래서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매달 모임을 갖는 등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1587년 왜선들이 전라도 손죽도를 침범하였을 때는 대동계를 동원해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1591년 정철이 건저의(세자 책봉에 관한 의견) 문제로 실각하자 다시 동인이 득세하였기 때문이다.

건저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선조에게 적자가 없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선조의 왕비 의인왕후는 병약하여 아이를 낳지 못했다. 그래서 후궁 소생의 왕자들 중에 왕세자를 책봉해야 했는데, 이 일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얽혀 있어 쉽사리 진전을 보지 못했다. 이때 이 건저의 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 당시 좌의정이던 정철은 우의정 유성룡,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왕세자를 세우는 일)할 것을 주청하려 하였다.

정철은 또 한편으로 동인인 영의정 이산해와도 이 문제를 상의하고 최종 결정을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산해는 두 번이나 약속을 어겼다. 사실 이산해는 이 문제를 이용해 정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산해는 정철과 건저 문제를 의논하기로 하는 한편, 후궁 인빈 김씨의 오빠인 김공량과 결탁하여 계략을 꾸몄다.

이산해는 선조가 인빈 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총애하는 것을 알고 김씨에게 정철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올리고 그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했다. 그러자 인빈 김씨는 선조에게 이 내용을 전했고, 선조는 매우 진노하였다 .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정철이 경연장에서 건저 문제를 주청하자 선조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대노하였다. 유성룡, 이산해 등은 침묵을 지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강등되어 외직으로 쫓겨났다. 정철이 실각하자 동인은 서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감행했다. 말하자면 정여립 모반 사건에 대한 보복을 할 기회를 맞은 셈이었다. 서인의 주요 인사는 대부분 숙청되고 조정은 완전히 동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동인은 이 때부터 인조반정이 있기까지 30여 년을 집권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정철의 치죄 과정에서 남북으로 갈라서고 만다. 정철에 대해서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사형을 시켜야 된다는 주장을 펴던 이산해와, 유배로 끝내야 한다는 온건론을 펴던 우성전의 대립이 이러한 분당을 유발시켰다. 또한 이산해는 전랑 천거 문제로 유성룡과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도 분당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에 유성룡과 개인적인 알력이 있던 이발이 이산해와 결합하게 된다.

그래서 유성룡, 우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파를 남인, 이산해와 이발을 추종하는 파를 북인이라고 했다. 이것은 유성룡이 영남출신이고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는 데 반해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편에,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유래됐다. 이 남인과 북인의 학맥을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둘 다 주리론을 주창한 영남학파였으나 남인은 이황 문하였고, 북인은 조식의 문하이면서도 이이, 성혼 등과 교유 관계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이 철저한 인맥을 중심으로 당을 형성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분당 이후 남인은 우성전, 유성룡, 김성일 등을 중심으로 한때 정권을 잡았으나, 조식의 문하인 정인홍이 1602년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 화의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탄핵하여 삭직케 함으로써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북인은 홍여순과 남이공의 대립으로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분파된다. 이산해, 홍여순 등 노장들이 영도하는 당을 대북이라 했는데 기자헌, 이이첨, 허균 등이 여기에 속했고, 남이공, 김신국 등 소장 세력이 이끄는 당을 소북이라 했는데 여기에는 유영경, 박이서, 성준구 등이 참여했다.

이렇게 북인이 소북과 대북으로 갈리자 남인은 서인과 공조 체제를 구축하고 이에 대응했지만 어쨌든 선조 말기는 북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대북 세력은 정권을 거의 독점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대북은 광해군 대에 가서 내부에서 알력이 생겨 영창대군과 인목대비 폐위를 주장하던 골북과 육북, 이를 반대하던 중북으로 다시 세 분파를 이루게 된다.

이 때 골북을 주도하던 인물은 이산해였고, 육북은 홍여순, 이이첨이었으며, 중북은 유몽인이었다. 이렇듯 끝없는 분파를 통하여 조선의 붕당 정치는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각 당파들은 일당 독재의 경향을 보이며 처음에는 미숙함을 드러내지만 후에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서인과 남인이 서로 공존하면서 상호 비판하는 체제를 갖추어 붕당 정치의 참모습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당쟁으로 인해 조선이 망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요받아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강요된 이같은 식민사관의 근본 문제는 바로 붕당 정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결여되었다는 데 있다. 당쟁, 즉 붕당 정치에서는 상호 견제하고 대립하는 것이 곧 상호 공존하는 방법이었다. 붕당 정치의 본질적인 취 지는 바로 일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원리는 현대의 민주 정치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 점령되던 시기를 돌이켜 보아도 이것은 명백해진다. 흔히 조선 말기를 당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대원군 등의 외척, 인척 세력의 독재가 횡행하던 시기였다.

이 사실은 조선을 망하게 한 원인이 당쟁이 아니라 일당 또는 일부 세력의 독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좋지 않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쟁, 즉 붕당 정치는 결코 식민사관에서 강요받았던 '망국적 권력 다툼'이 아니었던 것이다.

출전 : 사이버 관동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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