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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19 (일) 21:22
분 류 사전1
ㆍ조회: 2260      
[조선] 실학 사상의 형성 배경 (민족)
실학(실학사상의 형성 배경)

세부항목

실학
실학(연구의 전개과정)
실학(실학의 개념)
실학(실학사상의 형성 배경)
실학(실학의 연구방법과 분야 및 유형)
실학(역사적 의미와 연구의 전망)
실학(참고문헌)

실학자들은 자신이 처해 있던 현실세계의 분석을 통해서 주자설에 입각한 성리학이 현실과 괴리된 것으로 판단했다. 실학자들은 성리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왕도정치론을 존중했지만, 여기에서도 그들은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에 대체될 수 있는 경세론으로 육경고학(六經古學)에 기초한 왕도정치론을 제시했다.

조선 후기 사회에 이르러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을 반대하고 실학적 왕도정치론이 제기된 데에는 일정한 배경이 있다. 즉, 실학사상의 등장 배경에는 조선 후기 사회의 해체가 강화되어 나가던 내재적 상황이 주된 역할을 담당했고, 일부 외래적 요인도 함께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실학’으로 규정하고 있는 사상의 경향에 대해 학문적으로 관심이 표시되기 시작했던 식민지시대에는 이 사상의 형성 배경으로 청조 문물의 수용이나 서학의 전래와 같은 외래적 요인들을 주로 주목했다.

그 뒤 ‘실학’의 개념을 정립시켰던 해방 직후의 학계에서는 대부분이 식민사관 극복론과 민족사에 대한 주체적 인식 논리에 따라 내재적 발전론의 입장에서 실학의 발생원인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르러 실학발생의 원인에 대한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 발생의 내재적 요인과 함께 외래적 요인에 대한 균형적 인식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체적 인식을 강조하기 위해서 외래적 요인의 인정을 거부하려는 경향을 경계했으며, 주체성의 문제는 수용의 태도나 방법에 관한 문제이지 외국의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에 대한 결과의 문제가 아님을 확인했다.

그리고 한 민족의 역사는 그 민족의 자생적 능력에 의해서 추진되고 전개되는 것이지만 밖으로부터의 외적 변수나 요인이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제시되었다. 여기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기초로 하여 실학사상 발생의 원인을 내재적 측면과 외래적 측면으로 나누어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실학 발생의 내재적 요인

실학사상 발달의 내재적 요인으로는 우선 조선 후기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발전 현상을 주목할 수 있다. 17∼18세기 이래의 농촌 사회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의해 토지 겸병이 확대되고 그에 따라 대다수의 농민은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토지를 잃고 농촌을 떠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와 함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소작 경영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가는 경영형부농(經營型富農)이나 서민지주(庶民地主)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곧 농민층 분해 현상의 집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실학은 이러한 농민층 분해과정에서 이에 대한 대안적 사상으로 형성되었다. 여기에서 실학자들은 농민층 분해의 여러 방향에 따라 각기 다르게 자신의 개혁안을 구상했던 것이다. 일부 실학자들은 농민층 분해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상업적 농업경영자 및 일부 성장하고 있는 부농층의 처지를 대변했고, 또 다른 사상가들은 토지에서 이탈된 빈농들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보고자 했다.

또 한편에서는 지주적 토지소유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주의 토지 소유 자체는 인정하고 경영의 전환과 소작 조건의 개선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아울러 양란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역시 실학사상의 발생에 있어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특히 18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의 과정에서 서울이 상업도시적 양상을 짙게 띠게 되자 이에 영향을 받은 일군의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상업과 수공업에서 새로운 동향을 주목하면서 18세기 이후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 걸맞은 유통을 중시하는 경세론을 펴게 되었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의 사회계급적 변동 역시 실학 발달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전쟁 후의 조선 사회는 중세적 신분질서가 비교적 폭넓게 붕괴해갔고, 그것은 대체로 양반의 일부와 대다수의 농민층이 경제적으로 몰락해 가는 하향방향과 서민층의 일부가 신분상승을 성취하는 상향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변화에 직면한 일부 진보성향의 사상가들은 사회적으로 하향과정에 놓여있는 양반층의 생계대책과 함께 상향과정에 들어선 서민층의 이익을 보장하는 문제에 주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실학자들은 사회현상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대책을 모색했고, 이를 통하여 현실개혁적 실학사상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성립하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는 성리학을 본위로 한 조선 사상계의 지형이 바뀌고 있었던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성리학은 15세기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던 사상이었다. 성리학은 조선 후기 사회에서도 조선왕조의 대표적 사유형태였으며, 경세론으로 의연히 작용하고 있었다.

더욱이 양란 후의 조선왕조 사회는 모든 분야에 걸쳐 그 부조리가 드러나고 변화의 조짐이 나타남에 따라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러서 조선의 사상계에서 성리학의 학풍을 추구하면서도 주자 유일 기준의 입장을 벗어나서 새로운 기준에 입각한 학문경향이 나타나기도 했다.

한백겸(韓百謙)·이수광 등으로 대표되는 이러한 경향의 학인들은 당시 성리학계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던 주자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 공허한 논의가 성행하고 있던 상황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권득기(權得己; 1570∼1622) 및 권시(權魅 ; 1604∼1672) 부자나 허목의 경우에도 주자 유일 기준을 거부하고 있었다.

특히 허목의 경우에는 고문 고학을 존중하며 주자 주소(註疏)의 번잡함과 폐쇄성을 탈피하여 육경을 중시하는 원초유학의 체제로 복귀하고자 했다. 이들의 사상은 상술한 바와 같이 17세기에 이르러 새로운 상황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이에 그들은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여 선진시대의 원초유학으로 돌아가 왕도정치론의 견지에서 새로운 개혁안을 모색해 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성리학적 학문체계에서 벗어난 새로운 학풍이 형성되어 갔고, 여기에서 탈성리학적, 그리고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제시된 개혁사상인 실학사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에 후반기에 이르러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사회질서가 동요되던 당시의 사상계에서도 동일하게 드러났다. 그리하여 서울의 경화사족(京華士族)을 중심으로 한 경화학계 일각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적 의리지학(義理之學)을 반성하는 새로운 학문적 지향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성리학의 자기 극복 과정에서 실학이 나타나게 된 것은 실학자 대부분이 성리학적 지식을 기본 교양으로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학자들은 상술한 바와 같이 적극적으로 성리학을 부정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당시의 실학자들은 기득권을 장악하고 있던 성리학자들과 본격적인 갈등이나 대립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시대의 권력구조와 사회질서와 문화전통의 해석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여 전면적으로 반성 비판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 때문에 실학사상은 조선 후기라는 중세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이상사회의 중세적 재건논리였다는 특성에만 머물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실학사상 발달의 또 다른 내재적 요인으로는 정치적인 면에서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을 들 수 있다. 16세기경부터 일부 변질되기 시작한 조선왕조적 통치질서는 전쟁을 겪으면서 동요되기 시작했다. 집권층의 벌열화, 수취체제의 붕괴, 신분체제의 동요, 농본주의 생산체제의 일부 변화 등은 15세기를 통해 짜여진 조선왕조 본래의 경국대전적 통치질서에 상당한 수정을 가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했다.

전쟁 후의 조선왕조 사회에는 전면적이고 본질적인 개혁이 요청되었으나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침잠되어 있던 집권세력은 폭넓은 개혁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소변통론(小變通論)의 입장에서 보완적 체제유지책을 세우는 데 한정됐을 뿐이다.

그러나 일부 상대적 진보성향의 관료와 재야의 지식인들이 조선왕조 자체를 유지하는 범위 안에서 벌열세력을 억제하고 국가의 통치체제를 강화해서 민생을 안정시킬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자 했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조선 후기 통치질서의 경직화 현상에 대한 발생은 왕도정치론의 구현을 위한 현실적 대안들에 대한 사고를 요청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16세기말 이이(이李珥)가 제시한 바와 같은 무실론(務實論), 즉 현실개혁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주자 유일 기준이 아닌 원초유학의 입장에 선 무실론을 전개했고, 그것을 다시 발전시켜 독자적인 학문영역으로 성립시켜 나갔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에게 있어서 왕조 전기의 과학부문의 업적이나 무실론으로 대표되는 경세적 학풍들은 참고된 바가 적지 않았다.

2. 실학 발생의 외래적 요인

실학 사상의 발달에는 내재적 요인과 함께 국제정세의 변동과 이 시기에 전래된 서학(西學) 및 청대 학문의 영향도 일정하게 작용했다. 여기에서는 먼저 국제정세의 변동 가운데는 조선과 청이 맺고 있던 관계를 주목해 보고자 한다. 즉, 조선은 17세기 전반기 병자호란의 과정에서 참패를 당했고 이를 만회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측면에서 전개해 갔다.

또한 대륙에서도 명청의 교체가 일어나, 만이(蠻夷)였던 청이 중국의 정통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새롭게 전개된 일련의 상황에서 조선의 사상계에서는 전통적인 정통론과 화이론(華夷論)에 대한 재검토 작업의 과정에서 조선중화주의(朝鮮中心主義)가 일어나서 소중화론(小中華論) 혹은 소화론(小華論)을 제시하게 되었다.

이 주장은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당시의 현실을 중화가 이미 소멸된 상황으로 규정했던 사실을 전제로 하여야 올바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을 기준으로 한 왕도정치론의 입장에서 조선만이 중화문화의 정수를 보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의 학계가 다시 중국에 이를 전수시켜 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국제정세의 변동으로 인해서 초래된 이와 같은 조선 중심주의적 사고방법의 출현은 실학자들의 자아각성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들의 경우에서도 정통론과 화이론의 재검토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재검토 작업은 실학자 자신의 사상이 새롭게 정립되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한편, 당시 국제정세의 변동은 서세동점의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서세동점의 결과로 중국에 전해진 서학사상은 조선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이래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한문 서학서들 가운데 상당수가 조선에 전래되어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이때 전해진 서학서 가운데에는 천주교 사상을 논하는 서적과 함께 수학·천문학·농학·측량·지도 등과 같은 과학기술 계통의 서적이 있었다.

한문 서학서를 통해 실학자들에 흡수된 서학의 종교사상은 그들의 철학적 사유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후기 서학사상을 수용한 지식인층은 대체로 성리학에 대해 비판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선진유학에 기초하여 원초유학적 입장에서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변혁시켜 보려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그들은 당시의 학문풍토가 지니고 있던 사변적 경향과 관련하여 한문 서학서 가운데 천주교 교리를 설명하는 이편(理篇)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로 논하고 있던 내용은 원초유학의 신관(神觀)에 대한 수용을 뜻하는 보유론적(補儒論的) 천주교 신앙이었다. 보유론은 서학이 유학에 대립되는 사상이 아니라 유학의 부족한 점을 보충해 준다는 이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이 기초하고 있던 원초유학적 입장을 포기하지 않고서도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그들이 원초유학의 틀을 빌려 자신의 교리에 대한 설명을 시도하던 서학에 접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심성론을 비롯한 그들의 사상이 이미 성리학적 사상의 틀을 떠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은 서학서에서 논의하는 인간관 등의 개념을 원용하여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켜 나가기도 했다.

그들은 선진유학의 재검토를 기초로 하여 성리학의 사상체계를 개혁하고자 시도했고, 여기에서 그들은 서학 자체도 변혁의 이념으로 파악하고 이를 연구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서학은 실학이 성리학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로 발전하는 데에 일정한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서학의 과학기술에 대한 이론들도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 및 과학연구에 자극을 주었다.

실학자들은 서학의 자극을 받으며 천문학과 지리학 혹은 기하학 등의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서양의 과학기술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주장도 제기됐으며, 서학서의 이론을 직접 적용하여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실용적인 토목공사용 기계를 제작하기도 했다.

서양 천문학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면서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대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학문의 관심이 조선과 조선 문화로 돌려질 수 있었다. 즉, 실학이 조선중심적인 사유체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서양 천문학의 영향으로 인한 지식의 확대가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명말·청초 중국의 실학적 학풍과 청대의 고증학도 조선 후기 실학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황종희(黃宗羲)·고염무(顧炎武)·왕부지(王夫之)·안원(顔元) 등에 의해 제시되었던 명말·청초의 학술 사상에서는 일종의 ‘민족의식’과 ‘민본의식’ 그리고 ‘현실개혁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학문 경향에서 등장하는 개혁적 이상은 청조 지배층의 의도적 왜곡작업으로 인해 변질되었다. 그 개혁적 이상이 거세되고 고증학으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18세기 후반기 이후에 활동했던 조선 실학자들은 명말 청초의 사상을 통해 자신의 개혁이념을 가꾸어 나갔다.

한편 청조의 고증학(考證學)도 조선 후기의 일부 실학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청조 고증학의 영향을 받은 실학자로는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정약용·김정희·이규경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이 청대 고증학에 대해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냉담하기조차 했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조선 후기 실학에 미친 청대 고증학의 영향은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선 후기의 실학은 고증학보다 명말·청초의 학문 경향에 좀더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발생 배경은 내재적 요인과 외래적 요인으로 나누어 검토할 수 있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내재적 요인이다. 그리고 실학사상이 조선 후기라는 장기간에 걸쳐 전개되던 과정에서 각 시대에 따라서 달리 나타난 내외적 배경들은 실학사상의 전개과정에서 그 사상적 특성을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발생배경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내재적 요인이다. 그 내재적 요인으로는 농업변동과 농민층 분해,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신분제의 붕괴 및 평민의식의 성장 등을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사회가 직면하고 있었던 국제환경의 영향 아래 실학의 외래적 요인들이 조성되어 갔다. 실학은 대륙정세의 변동이나 서세동점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무관할 수 없었다.

실학은 서학 및 명청대 학술의 수용 등 조선 후기사의 주체적 전개과정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갔다. 아울러 실학자의 이러한 사상전환은 기존 사상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얻어진 단절의 결과가 아니라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가능하였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은 전통 성리학의 발전적 자기극복 과정에서 성장하고 발달하였던 것이다.

<조광>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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