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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3 (화) 10:55
분 류 사전2
ㆍ조회: 10844      
[조선] 갑신정변 (브리)
갑신정변 甲申政變

1884년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하고자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으로 국민주권국가 건설을 지향한 최초의 정치개혁운동.

한국사에서 정치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 실학의 북학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개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젊은 양반계급 지식인들을 핵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정부의 개화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정권의 친청수구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마침 월남문제를 둘러싸고 청-프랑스 전쟁이 터져 청국이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되고 또 임오군란 이후 냉담했던 일본공사가 다시 접근해왔다. 개화파는 일본공사관의 후원을 확인하고 계획대로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국왕과 왕비를 경우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머리를 처단했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 박영효가 좌포도대장, 서광범이 우포도대장, 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강을 제정·발표했다.

정변의 실패로 이 정강·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갑신일록〉에 실려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관계의 청산, 문벌폐지와 인민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의 등용, 지조법(地租法) 개혁, 탐관오리 처벌, 백성들이 빚진 환자미[還上米]의 영원한 면제, 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의 실시, 혜상공국(惠商工局)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했고, 아직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지배체제를 청산하려 했으며, 또 뒷날의 갑오농민전쟁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소유가 제기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되었고, 왕실경비와 정부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정치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 색인 : 일본사).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 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사의를 표명하고 1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의 경쟁관계에서 다시 불리한 처지에 빠진 일본은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청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한 결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의 철수, 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天津] 조약을 체결했다(1885. 4. 18).

이로써 갑신정변의 뒷마무리는 일단 끝났지만,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농민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민중세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지향할 수 있었던 경제체제가 자본주의 경제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은 부르주아적인 정치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아직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외세의 압력이라는 데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들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려 했으면서도 대다수가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중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정변이라는 방식을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은 외세의 개입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이 민중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정변이 외세, 특히 일본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은 이렇듯 한계를 지니는 것이며, 비록 삼일천하로 끝나 버렸지만 한국사에서 근대국민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부르주아 민족운동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광(趙珖) 글

참고문헌

한국 개화사의 제문제 : 이광린, 일조각, 1986
갑신정변연구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평민사,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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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당연구 : 이광린, 일조각, 1973
한국개화사연구 : 이광린, 일조각, 1969
김옥균 : 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편, 1964(주진오 해제,역사비평사, 1990 재간)
개화파와 갑신정변 〈국사관논총〉 14 : 정옥자, 국사편찬위원회, 1990
갑신정변 '정강'에 대한 재검토 〈동아연구〉 21 : 이광린,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90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연구의 과제 〈대동문화연구〉 20 : 백종기,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6
김옥균의 개화사상 〈동방학지〉 46·47·48 : 신용하,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85
갑신정변의 개혁사상 〈한국학보〉 36 : 신용하, 일지사, 1984
갑신정변 전후의 정황과 개화파 -외세와 연관된 정변의 재평가를 위해 〈사학연구〉 38 : 최문형, 한국사학회, 1984
갑신정변 〈한국사16 - 개화척사운동〉 : 유홍렬, 국사편찬위원회, 1975
갑신갑오개혁기 개화파의 농업론 〈동방학지〉 15 : 김용섭,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74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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