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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0 (일) 16:38
분 류 사전2
ㆍ조회: 2190      
[고려] 고려시대의 조세 (민족)
조세(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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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적 봉건국가에 있어서의 농민 부담은 이를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전조ㆍ공세(貢稅)와 요역 및 군역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조ㆍ용ㆍ조의 조세체계에 기반을 둔 중앙집권적 봉건국가의 조세인 것이다.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는 토지국유제의 원칙하에 그에 예속되어 있는 일반 농민으로 하여금 경작하게 하고, 대신 전조ㆍ공세와 요역 및 군역 등을 조세로서 수납하는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전조]

고려 태조는 왕위에 오르자 문란했던 전제(田制)를 바로잡고 무질서했던 조세징수를 규율 있게 하기 위하여 수정전제(首正田制)와 취민유도(取民有度)를 표방하고 이러한 기본원칙하에 민심수습과 일련의 봉건세력 및 농민에 대한 회유책으로 십분취일(什分取一)의 전조율을 내세웠다.

즉 ≪고려사≫에 보면 1결의 수확량을 20섬으로 추정하고 그 10분의 1을 전조로 징수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전에 1경(頃)당 6섬이었던 전조를 2섬으로 낮추어 거의 3분의 1이라는 파격적인 저율로 인하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 사전(私田)의 확대가 공전(公田)을 잠식하였고, 또 태조의 건국 초에는 전제를 적극적으로 개편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이와 같은 낮은 전조율로는 국가의 재정수요를 충족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992년(성종 11)에 이르러 전조율을 높여 사분취일(四分取一)로 하였다.

이는 〔표 1〕에서와 같이, 밭ㆍ논별로 토질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전조액을 정한 것이며 세율설정에 세심한 주의를 베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려정부는 정권의 확립과 더불어 국가기관의 유지비가 자연 확대됨으로써 수조율도 높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표 2〕와 같이 제2차 증세를 단행하였다.

이 증세규정의 연대는 명시되지 않아 알 길이 없으나 992년의 그것과 비교하면 논 상등전 1결에 대하여 1섬11말2되4홉5작, 중등전 및 하등전 1결에 대하여는 11말2되5홉씩의 증세이며, 밭의 경우 상등전 1결에 대하여는 6말6되2홉5작, 중등전은 6되2홉5작의 증세이다. 이와 같은 세율을 공전 및 사전에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농민이 공전에서는 국가에, 그리고 사전에서는 수조권자에게 납부하였다.

그러나 공전에서는 지방향리의 농간이 있었고 사전에서는 수조권자인 왕실ㆍ귀족ㆍ관리의 횡포가 심하여 백성들의 부담은 실제로는 이를 훨씬 초과하였다는 것이다. 특히 무인정권이 수립되고 몽고군이 침입하여 봉건적 중앙집권력이 약화됨에 따라 이러한 폐습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와 같이 이미 사전의 확대로 말미암아 공전이 현저히 감축되어 공전에 대한 전조율을 인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고는 더욱 고갈되어 갔다. 그러나 봉건적 재생산을 위해서는 농민의 부담만을 무한정 증대시킬 수 없어 1013년(현종 4)에는 종래 면세되었던 양반ㆍ귀족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전에서 새로운 세원(稅源)을 발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고려사≫에 의하면 30결 이상의 양반의 수조지와 궁원전(宮院田)에 대하여 1결당 5되의 사전세(私田稅)를 부과하게 된 것이다. 그뒤 1069년(문종 23)에는 이를 7되5홉으로 인상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봉건ㆍ귀족ㆍ관리 들에게 지운 이 신설된 사전세의 일정한 부담은 그들의 교묘한 방법에 의하여 모두 사전민에게 전가되어 농민들의 부담만 가중되어 갔다.

농민들의 부담으로는 이 밖에도 전조의 부과세로서 모미(耗米)라는 것이 있었다. 고려 초기에는 전조 1섬에 1되의 모미를 부과하여 오다가 1053년에는 7되로 대폭 인상되었다. 그리하여 12세기 이후, 특히 무인정권시대를 계기로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혹하게 늘어만 갔다.

[공세]

공세는 본래 소위 토공(土貢)이라 하여 지방특산물에만 한정되었던 것인데 뒤에 와서 일반적이고 부가적인 현물 공세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공세가 상공(常貢)과 별공(別貢)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상공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농민가내수공업품의 수량을 미리 책정하고 그에 따라 연초에 일반 농민에게 일률적으로 부과하는 경상세의 성질을 가지는 것이며, 별공은 지방특산물을 국가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그 생산자나 생산지역 농민에게 부과하는 임시세의 성질을 가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사정이 곤궁하게 되자 11세기 후반에 와서 별공은 지방적 특산물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 농민들에게까지 부과시켜 농민수탈의 간편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특산물의 생산지로서 소(所)라고 하는 특수행정단위가 있어서 여기에 별공이 부과되었다. 이것은 향(鄕)ㆍ부곡(部曲)과 같은 천민의 집단부락이었다. 그 당시 상공ㆍ별공의 종류로서는 금ㆍ은ㆍ백동ㆍ적동ㆍ철ㆍ피혁ㆍ면사ㆍ면포ㆍ마포ㆍ저포ㆍ기름ㆍ꿀ㆍ소금ㆍ옹기ㆍ도자기ㆍ생강ㆍ종이ㆍ붓ㆍ먹ㆍ숯ㆍ건어물ㆍ다시마ㆍ김 등이 있었다.

고려시대에 있어서 공세의 수취관계는 그 가혹성이 지나쳤다. 즉, 상공 이외에 각종 별공의 가혹한 수납으로 말미암아 장인(匠人)들은 소극적인 반항의 일환으로 도피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상공ㆍ별공의 공급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민 또는 공장(工匠)들에 대한 공세 부담을 다소 완화하여 줄 것을 국왕에 건의할 정도였다.

의종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겨 국고를 탕진하고 국고가 허갈되자 별공사를 파견하여 공물을 수납하였는데 별공사를 둘러싼 횡렴(橫斂:무법하게 조세를 징수하는 것)의 폐해가 컸다. 특히, 몽고군의 내침이 있은 이후 몽고에 대한 세공(歲貢)은 백성들에게 전세 이상의 가혹한 부담으로 대두되었다.

문종 이래 국가로부터 배정된 공물을 생산하지 못하는 지방에서는 평포(平布)로써 환가대납(換價代納)하는 대납세가 생겼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공물이 물품화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농민들이 일정한 기일 안에 공물을 납부하지 못하는 경우 서울에 있는 향상(鄕商)으로 하여금 이를 미리 수납하게 하고 추후에 농민으로부터 상환받도록 하는 소위 공납청부제(貢納請負制)가 있었다. 이 제도는 결국 상인에게 중간 착취의 길을 터주는 계기가 되었다.

몽고군의 침입 이후 농민의 유망이 더욱 심하여지고 조세수입은 날로 감소됨에 따라 유망농민의 공세를 잔존농민에게 부담시키는 추징제(追徵制)와 수년 후의 공세를 미리 징수하는 예징제(豫徵制)를 실시하기도 하여 농민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어 갔다.

[요역 및 군역]

요역 및 군역은 16∼60세의 농가 장정을 대상으로 하는 무상의 강제노동의 역(役)으로서 주로 궁전ㆍ성곽의 축조, 사찰의 건설, 군정(軍丁)의 수역(戍役) 등의 비생산적 노동에 징발되었고, 직접 둔전(屯田)ㆍ적전(籍田)ㆍ공해전(公力田) 등의 경작노동에는 부분적으로 동원되었을 뿐이었다.

이러한 국영농장은 원칙적으로 관노비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따라서, 일정한 법제적 부역기간이 없었고 우발적이었으며, 그리고 식량은 농민 스스로의 부담이었다.

그러나 부역기간이 일반적으로 장기화되었으므로 부역자에 대한 급보제(給保制)인 조역제(助役制)를 설정하였다. 조역제는 농가에 장정이 1인인 경우 장기징발하는 경우 농업의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특정인을 조역인으로 보내어 대역시킬 수 있는 제도를 말한다. 이는 고려시대 요역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요역은 중세유럽에 있어서의 부역노동처럼 경작노동에 동원되는 예는 드물었고, 요역기간에 있어서도 중세유럽에 있어서는 주부역제(週賦役制)로 1주일 동안에 며칠씩이라고 법제적으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고려 봉건국가에 있어서는 부정기적이었다. 다만, 농업의 재생산을 위하여 농번기에 있어서만은 가급적 이를 피하였던 것이다.

역대 국왕은 궁전을 수축하고 사원을 신축하며 성곽을 축조하는 것 등은 모두 요역에 의존하였다. 10세기 말부터 12세기 초에 근 30년간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에는 전국의 농병이 동원되었고, 거란 및 여진을 방어하기 위한 동북방의 장성 축조에는 수십 만의 농민이 징발되었다. 그리고 12세기 초 이래 토지개발과 관개시설의 건설도 요역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임시과세 및 잡세]

몽고군의 침략 이후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국가재정은 파국상태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하여 고려정부는 최후수단으로 일반 농어민뿐 아니라 각 품관(品官)에게까지도 여러 종류의 임시세와 잡세를 부과하게 되었는데 충혜왕 때에는 전횡적인 과세가 특히 많았다.

즉, 각 품관에게서 봉록 또는 군량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품미(品米), 몽고에의 세공 및 군사비와 기타의 임시비를 지변하기 위한 품포(品布), 재정 적자를 보충하기 위한 품은(品銀), 원나라에의 세공에 충당하기 위한 품마(品馬), 또 퇴직관료에 대한 일종의 수탈행위로서 직세(職稅) 등을 징수하였다.

농민에게는 정세 외에 문자 그대로 이유없이 강징하는 호별세에 해당하는 무단미(無端米)를, 강원도 농민들에게는 이른바 산세(山稅)라 하여 잣을, 또 어민들에게는 선박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선세(船稅) 및 해세(海稅)를 징수하였다.

그리고 상인들에게는 각 지방의 주요 통로에서 일종의 통행세로서 상세(商稅)를, 그리고 소금을 생산하는 염호(鹽戶)에는 염세(鹽稅)를, 또 독립적 수공업생산자에게는 장세(匠稅)를 각각 징수하였으며 심지어는 무격(巫覡)에게서도 말〔馬〕을 무장세(巫匠稅)로서 징수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임시세 내지 잡세는 모두 직접ㆍ간접으로 농민의 부담으로 돌아가 농민은 가혹한 수탈을 당하였던 것이다.

<황하현>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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