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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3 (일) 17:42
분 류 사전2
ㆍ조회: 1921      
[조선] 위정척사론 (브리)
위정척사론 衛正斥邪論

정학(正學)을 지키고 사학(邪學)을 배척하는 유교의 벽이단(闢異端) 이념을 대변하는 사상.

조선왕조체제의 봉건적 질서 유지를 위한 이념이었던 공(孔)ㆍ맹(孟)ㆍ정(程)ㆍ주(朱)의 학통을 유일한 정학으로 보고 양명학(陽明學)을 비롯한 불교(佛敎)ㆍ도교(道敎)ㆍ서학(西學) 등 모든 다른 사상과 학문을 이단적인 사학이라 규정하여, 정통적인 정학은 지키고 외래적인 사학은 물리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말 서학의 전래를 계기로 외세의 침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이에 반대하는 반외세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위정척사를 주장한 이항로(李恒老)ㆍ기정진(奇正鎭)ㆍ김평묵(金平默)ㆍ최익현(崔益鉉)ㆍ유인석(柳麟錫) 등의 유학자들을 위정척사파라 칭했다(→ 색인 : 의병, 조선).

위정척사론의 형성

중국 송나라의 주자는 여진족의 침략으로 한족(漢族)과 중국의 문화가 위기에 놓이자 이를 지켜내기 위해 중화(中華)로서의 유교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로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말함으로써 화이(華夷) 사상을 기초로 한 위정척사론을 체계화했다. 우리나라에서 척사론이 나온 것은 고려말 조선초 불교를 배척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영ㆍ정조 시대 이후에 천주교의 전래로 기존의 사회질서가 위협받게 되자, 유학자들은 이에 대한 대응논리로 위정척사를 내세웠다.

위정척사 사상은 이항로가 "천하의 커다란 시비ㆍ분별이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화(華)와 이(夷)의 구분이며, 둘째는 왕(王)과 패(覇)의 구분이며, 셋째는 정학과 이단의 구분이다"라고 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를 화, 서양을 이로 보며, 성리학을 정학, 천주교를 이단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구분의 밑바닥에는 중화ㆍ사대 사상이 깔려 있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외세의 침략에 부딪쳐 있는 당시 상황에서 위정척사는 주체의식과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을 고취시킨 사상으로 발전했다. 즉 병인양요(1866)ㆍ개항(1876) 등을 계기로 서양 열강의 정치적ㆍ경제적 침략이 노골화되자 위정척사는 반외세 민족주의의 형태를 갖추어갔다. 이러한 위정척사의 이념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항로와 기정진의 학파가 위정척사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는 주리론(主理論)ㆍ 이일원론(理一元論)의 입장에서 주기론(主氣論)ㆍ기일원론(氣一元論)을 반대했다.

이항로는 이주기객(理主氣客)의 입장에서 이(理)를 정학, 기를 서학으로 생각했다. 그는 또 이러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서양문물, 서양의 본질을 사악한 것으로 파악했다. 한편 최익현은 개항 이후 일본이 이권 침탈에 가세하자, 일본에 대해서도 '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내세워 일본이 서양의 여러 열강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지적했다.

서양의 정치적ㆍ경제적 침탈에 대한 위정척사파의 대응은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논리로 나타났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군주와 집권관료층의 수양ㆍ솔선수범(내수)이었으며, 구체적인 실천행위로는 서양문물의 배척ㆍ금단(외양)을 주장했고, 군사적 대응도 생각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양화(洋貨)ㆍ양물(洋物)의 배척이 당면한 '양화'(洋禍)에 대한 대책으로 중요시되었다.

기정진은 양물금단(洋物禁斷)을 주장했으며, 이항로도 서양제품은 사지도 말고 쓰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서양에 대한 배척은 주자학적 화이관에 입각한 것으로 보수적ㆍ배타적 성격을 가졌으나, 서양문물의 적극적 수용을 주장한 개화파와는 달리 서양 열강의 정치적ㆍ경제적 침략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었다.

위정척사 사상의 반외세적 요소는 이들이 내세운 벽위(闢衛)ㆍ어양(禦洋)ㆍ척화(斥和)ㆍ척왜(斥倭) 등의 표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위정척사의 반침략적 성격은 병인ㆍ신미 양요에서 외세를 물리치는 원동력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과 굴욕적인 외교에 반대하는 상소운동과 나아가 반일의병운동으로까지 발전했다.

위정척사론과 반외세운동

반외세를 주장한 위정척사파는 병인양요 등 외세의 침략과 개화에 반대하여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을미ㆍ을사 의병을 일으켜 반일투쟁을 벌였다. 기정진의 손자인 기우만(奇宇萬)은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반포되자 이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결사항쟁을 호소했다.

송병선(宋秉璿)은 <벽사론 闢邪論>을 지어 양학의 배격을 주장하고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반대하고,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을 때는 조약의 폐기와 참여한 관리들의 참형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순국했다.

1880년 김홍집(金弘集)이 친중국(親中國)ㆍ결일본(結日本)ㆍ연미국(聯美國)의 주장을 담고 있는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 朝鮮策略>을 들여오자, 다음해 이를 배척하는 신사척사론(辛巳斥邪論)이 일어났다. 이때 유학생들은 경상도 유생 이만손(李晩孫)을 소두(疏頭)로 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려 김홍집을 탄핵했다. 당시 김평묵이 홍재학(洪在鶴)의 이름을 빌려 척사소를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일본과의 개항을 절대 반대하고, 왕에 대해서 극렬한 비난을 했다가 유배당했다.

최익현은 스승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을 충의사상과 춘추대의론으로 승화ㆍ발전시켰으며, 이를 철저히 실천함으로써 한말 위정척사파의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그는 대원군에게 왕도정치를 역설했으며, 강화도조약 때는 척왜척화를 내용으로 하는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렸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에 나섰다.

또 이항로의 학맥을 잇는 유인석도 대표적인 항일의병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와 같이 위정척사론은 주자학적 화이관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나, 현실의 전개에 따라서 이를 반영하여 반외세 민족의식의 형성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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