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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6 (수) 09:03
분 류 사전2
ㆍ조회: 854      
[조선] 민영환 (민병태)
충정공(忠正公) 민영환(閔泳煥) 1861(철종 12)~1905(고종 42)

조선의 문신, 순국지사,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

민영환은 조선 말 18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흥성대원군의 장인인 민치구(致久)가 조부이고, 병조 판서 민겸호(謙鎬)가 생부이나, 큰아버지인 여성부원군 민태호(泰鎬)에게 입양되었다. 고종(高宗)과는 고종 사촌간이며 명성황후 민씨의 조카가 된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1878년(고정 15)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정자(正字), 수찬(修撰), 사인(舍人) 등의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고, 이듬해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생부 민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동안 거상(居喪) 후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피명(被命), 세 차례에 걸쳐 사직서를 올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어 도승지(都承旨), 홍문관 부제학, 이조참판, 해방총관(海防總管), 친군연해방영사(親軍沿海防營使), 기기국 총판(機器局總辦)을 역임, 1887년 상리국(商理局) 총판, 친군 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과 1890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 1893년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判尹), 1894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형조판서 등의 요직을 지냈다. 1895년 주미 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사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귀국하여 의정부 찬정(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후, 1897년(광무 1) 1월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6개국 특명전권 대사에 겸직 발령되어 출발, 아울러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 여행으로 신문명에 일찍 눈을 떳고, 처음으로 양복을 입어 사신으로 외국에 가는 사람의 변복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하였다.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육 등의 제반 제도의 개혁을 건의하였으나, 군제(軍制)의 개혁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활하게 했다.

1896년(건양 1)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하는데 힘써야 된다고 주장한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 일파들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했다.

후에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탁지부(度支部, 재정경제부) 대신, 원수부 회계국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장례원경(掌隷院卿), 표훈원(表勳院) 총재, 헌병사령관을 역임. 훈일등 태극장(勳一等太極章)을 받았다.

1904년(광무 8) 내부, 외무(외무부), 학부(교육부) 대신을 지내고 대훈(大勳)과 이화장(李花章)을 받았다. 나라의 위태로운 운명을 바로 잡으로려 노력하여 친일적인 각료들과 대립하였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聲討)하다가 일본의 간섭으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우정대신 조병세(趙秉世), 심상훈 등과 백관(百官)을 인솔, 궁궐에 나가 을사조약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문에는 일본의 앞잡이로 을사조약에 도장을 찍은 다섯 명의 역적을 당장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이들은 대궐 앞에서 멍석을 깔고 앉아 임금의 회답이 있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기울어져 어쩔 수 없었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에 소청(疏廳)을 열고,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국민에게 보내는 유서를 명함 앞뒤에 연필로 5통을 작성하고, 전동(典洞) 이완식(李完植)의 집에 가서 1905년 11월 4일 새벽,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고하는 유서 3통을 남기고 단도로 자결하였다. 그 때 나이 45세이다.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전해 듣고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등 많은 인사들이 뒤이어 자결을 했고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그가 자결시에 혈의를 장치하여 두었던 침방 뒤 골방 마루 밑에서 푸른 대나무가 났다 한다.

민영환은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대신(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大臣)에 추증(追贈)되었고,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현재의 '충정로'라는 이름은 민영환의 시호인 '忠正'을 따서 지은 것이다.  

저술로는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출전 : 민병태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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