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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10 (토) 21:04
분 류 사전2
ㆍ조회: 3219      
[고려] 태조 왕건 (브리)
태조 太祖 877(헌강왕 3)~943(태조 26)

고려의 제1대 왕(918~943 재위).

뛰어난 정치력과 덕망으로 고려왕조 창건과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다. 이름은 왕건(王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嶽:개성) 출신이다. 아버지는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이고,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크게 세력을 떨치자 왕륭은 송악군 사찬(沙粲)으로서 자신의 군(郡)을 들어 궁예에게 귀부(歸附)하여 금성태수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궁예의 휘하에 들어간 왕건은 발어참성(勃禦塹城) 성주(城主)가 되었으며, 898년에는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었다.

그뒤 왕건은 여러 전선에서 공을 세워 승진을 거듭하면서 차츰 자신의 세력을 쌓아나갔다. 900년에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지금의 화성)·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 여러 군현을 경략하여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 수군을 거느리고 전라도지방으로 진출하여 금성(錦城:지금의 나주) 등 10여 군현을 빼앗아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으로 승진했다.

906년 상주(尙州)의 사화진(沙火鎭)에서 견훤(甄萱)의 군대를 격파했으며, 909년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이 되어 나주와 광주(光州) 일대에서 활약했다. 913년 변방에서의 공으로 파진찬(波珍粲)에 오르고 시중(侍中)이 되었다.

궁예가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자 918년 6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궁예를 몰아내고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했다. 이듬해에는 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관제를 개혁하여 국가의 토대를 닦았다.

태조는 일부 무인 중간세력, 일반 병졸, 민중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궁예의 옛 영역 내의 호족세력이나 집권층 내부의 정치세력 중에는 태조에게 불만을 품거나 반발한 세력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 건국 초기 태조의 당면 과제는 정치적 안정과 민심수습을 이루는 것이었다.

태조는 온건한 방법으로 정치적 안정을 꾀했다. 새 왕조의 정치체제는 기존 체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마련했고, 다만 행정관서에 대한 인사이동과 궁예 때의 탐관오리에 대한 숙청만 단행했다.

이와 함께 지방 각처에서 독자적인 무력과 경제기반을 가지고 독립적 상태를 유지하던 호족들을 극진히 회유하여 포섭했다. 즉위 직후 호족들에게 사절을 보내어 '중폐비사'(重幣卑辭)라는 저자세 외교로써 화친의 뜻을 보였고, 귀부해오는 호족들에게는 특별한 대우를 해주었다. 나아가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 및 호족출신 관료의 딸들과 혼인하고, 유력자에게 왕씨(王氏) 성을 하사했으며 그밖에 기인제도(其人制度)·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 등 여러 정책을 시행했다.

한편 고려 왕실의 독자적인 세력기반을 위해 서경(西京:지금의 평양)의 경영에도 힘을 기울였고, 민심수습을 위해 궁예 때의 가혹한 수취를 비판하면서 '취민유도'(取民有度)를 표방했다. 또한 평민으로 몸을 팔아 남의 종이 된 자 1,000여 명을 찾아내 내고(內庫)의 포백(布帛)으로 몸값을 갚아주었으며, 백성에게 3년 동안의 조세와 부역을 면제하고 유민(流民)은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했다.

태조는 신라와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후백제와는 무력으로 맞섰다. 처음에는 군사적인 열세로 후백제에게 계속 패했으나 930년 고창(古昌:지금의 안동)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두면서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뒤 935년에 투항해온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신라를 병합했으며, 936년에는 후백제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통일 직후 태조는 직접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저술하여 반포했다. 이것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해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북방을 개척하여 만년에는 서북으로 청천강 하류 안주(安州) 지방에서 동북으로 영흥(永興)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또한 거란에 의해 멸망한 발해의 유민들이 망명해오자 이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여 민족융합의 전기를 마련했으며 거란과는 국교를 단절했다.

943년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10조(訓要十條)를 남기면서 후세 왕들이 대대로 귀감으로 삼도록 했다. 훈요10조를 통해서 볼 때, 태조의 정치이념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상은 불교와 지리도참설, 유학이었다.

불교와 지리도참설은 새 왕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으며, 유학은 정치의 실제적인 실천윤리로서 존중되었다. 특히 태조는 불교를 적극 장려하고 육성시켜 건국 초기부터 많은 사찰을 지었고, 국내외의 고승을 극진히 예우했다. 943년 재위 26년 만에 죽었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참고문헌>

한국중세사연구 : 하현강, 일조각, 1988
고려태조의 후삼국통일 연구 : 문경현, 형설출판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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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광종연구 : 이기백 편, 일조각,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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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훈요와 고려 태조의 정치사상 〈한국사상대계 III-정치법제사상편〉 : 김성준,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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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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