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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03 (금) 08:48
분 류 사전2
ㆍ조회: 451      
[고려] 거란의 침입 (한메)
거란의 침입 契丹-侵入

고려 시대에 3차에 걸쳐서 감행된 거란의 침입. 고려의 북진(北進)정책과 거란의 동침(東侵) 정책의 충돌에 기인했다.

[배경]

거란 태종은 후진(後晉)을 멸한 후 국호를 대요(大遼)라 칭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고려는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며 광군사(光軍司)라는 대본영(大本營)을 두고 30만의 군대를 조직, 양성했으며, 동서 양북면(兩北面; 지금의 평안도ㆍ함경도)을 적극 개발했다.

962년(고려 광종 13)에는 요(遼)의 적대국인 송(宋)과 손잡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찾으려는 오랜 염원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북진 정책의 기반을 닦았다. 이러한 고려의 북진 정책과 친송책(親宋策)은 송을 정복하려는 요에게는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요는 송나라를 정복하기에 앞서 우선 배후의 위협이 되고 있는 고려를 정복할 필요를 느껴 동침 정책을 세우게 되었다. 이어 무력 행사로 그 해결을 서두른 것이 요(遼) 성종(聖宗)이 시도한 여러 차례에 걸친 고려 침입이다.

[제1차 침입]

993년 (고려 성종 12) 거란은 소손녕(蕭遜寧)을 도통(都統)으로 한 80만 대군으로 침입했다. 고려는 항적 태세(抗敵態勢)에 통일을 기하지 못하였고, 조정에서도 화(和)ㆍ전(戰) 양론이 대두하는 등 혼란이 일어났다. 적병이 봉산군(蓬山郡; 泰川과 龜城 중간)을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자 왕은 청화사(請和使)를 적진에 파견하여 그 내침의 속뜻을 알아보게 했다.

이때 중군사(中軍使)로 직접 거란군 방어를 담당하고 있던 서희(徐熙)는 이번 거란 침입이 단순한 영토의 확대가 아니라, 고려가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거란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는데 있음을 간파하고 한번 싸운 뒤에 화친해도 늦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며 성종도 이에 찬성하였다.

그동안 소손녕은 안융진(安戎鎭; 安州 서남) 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하고 말았다. 이 기회에 서희는 조정을 대표하여 소손녕과의 담판에 나섰다. 이 담판에서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과 거란의 동경(東京; 遼陽)도 역사적으로 보면 고려의 땅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고려와 요나라가 국교 관계를 맺으려면 양국간에 있는 여진(女眞)의 지역을 회복하고 도로(道路)를 확보해야만 한다고 하여 이를 납득시켰다.

요는 서희의 주장대로 고려가 요에 조공(朝貢)을 한다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 땅 280리(里)의 소유를 묵인하는 화약(和約)을 맺고 물러갔다. 이 압록강 이동 지역은 강동 육주(江東六州)의 기초가 되었다. 이후 고려는 994년부터 송나라 연호 대신 거란의 연호 통화(統和)를 쓰고 거란에 유학생을 보내는 친거란 정책을 실시하였다.

[제2차 침입]

고려가 조공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친송 정책을 유지하고 거란을 멀리하였으므로 거란 성종은 고려를 완전히 굴복시키고자 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고려에서 1009년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이 일어나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게 되자 거란은 강조 문죄(問罪)를 이유로 1010년(현종1)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의주 가도의 흥화진(興化鎭; 義州 咸遠面)을 공격하였으나 양규(楊規) 등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자 진로를 바꾸어 통주(通州) 부근에서 강조의 군사를 격파하고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기세를 올린 거란군은 서북 여러 성(成)을 격파하고 평양을 공격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개경을 함몰, 유린하였으며 왕은 나주(羅州)로 피란하였다. 이에 왕은 하공진(河拱辰)을 청화사로 하여 강화를 요청하였는데 강화가 성립되자 요는 개경 점령 후 10여일 만에 하공진을 볼모로 하여 철군하였다. 이로부터 거란은 고려왕이 친히 내조(來朝)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는 이를 약속하였다.

[제3차 침입]

그러나 요나라의 친조(親朝) 요구는 고려로서는 국가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왕은 병을 빙자해 친조의 불가능함을 통고하자, 요는 앞서 고려가 차지한 강동 6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여 왔다, 고려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요와 국교를 끊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요에서도 1014년(현종5)부터 계속하여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무력 침입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패하고 돌아갔는데, 1018년(현종 9) 12월 요장 소배압(蕭排押)의 총지휘 하에 10만의 군사로 대규모의 재침(再侵)을 감행하였다.

이때 고려에서는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과 부원수 강민첨(姜民첨)으로 하여금 20만 군사를 영주(寧州; 安州)에 배치시켜 두었다가 적의 내습의 보고를 듣고 곧 흥화진으로 전진하여 정기(精騎) 1만 명을 산골짜기에 잠복시키는 한편, 성동대천(城東大川; 義州 三川橋)을 막아 놓은 뒤 적이 이르자 물을 트고 급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에 소배압은 싸움을 피하여 사잇길로 개경을 향해 진격하려 하였으나 곳곳에서 강민첨에게 격파당하여, 그 이듬해 정월 개경 가까운 신은현(新恩縣)까지 왔다가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때 강감찬은 구주(龜州)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후퇴하려는 적의 대부분을 격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으로 요나라 군사 중에서 살아 본국에 돌아간 자의 수가 불과 몇 천명밖에 안되었다 한다. 이 싸움을 구주대첩(龜州大捷)이라 한다.

그 뒤 1019년 다시 사절의 왕래가 시작되었고 20년(현종 11) 5월 양국의 국교는 회복되어 고려는 거란의 연호를 쓰고 송과의 관계를 끊게 되었다.

<정종수>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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