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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8-15 (금)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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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043      
[조선] 광해조의 당쟁 1 (이성무)
광해조의 당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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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1. 대북 정권이 서다

1608년(선조 41) 2월 2일, 광해군이 즉위했다. 이와 함께 광해군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대북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광해군의 왕비 유씨의 오빠인 유희분(柳希奮)은 원래 소북이었지만 대북 정권에 가담했다. 그는 전한(典翰) 벼슬을 하는 최유원(崔有源)을 시켜 광해군이 당일로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공빈(恭嬪) 김씨의 둘째 아들로, 1592년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선조는 정비 박씨에게서 소생이 없자, 임진왜란이라는 위급한 때를 당해 광해군을 세자로 삼고 분조(分朝, 정부를 나눔) 체제로 들어갔다. 선조는 세자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했고, 이 때 광해군은 많은 공적을 남겨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의주로 피난해 백성의 원망과 질책을 받고 있던 선조에 비해 너무도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명나라는 이를 이용하여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를 이간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이들 부자간에 메울 수 없는 틈을 만들어 버렸다.

명나라에서는 세자에게 형인 임해군(臨海君)이 있다는 이유로 세자 책봉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임해군은 성격이 포악하고 덕이 없어 세자로 책봉받지 못했다. 선조 또한 계비 김씨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한 후로는 명나나의 세자 책봉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광해군을 더욱 박대했다. 이에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 세력과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 세력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곧 선조가 죽고, 비로소 광해군은 인정받지 못한 16년간의 세자 시절을 가까스로 마감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광해군을 지지하던 대북이 정권을 차지했다.

광해군의 즉위와 동시에 이산해를 원상(院相)으로 삼아 승정원에서 숙직하게 했다. 2월 7일에는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영의정 유영경이 사직했다. 광해군은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북 정권의 조종을 받은 대간의 끈질긴 탄핵으로 결국 영의정에 이원익이 임명되었다. 반명에 유영경(柳永慶)ㆍ김대래(金大來)ㆍ이홍로(李弘老) 등 소북의 당로자들은 각기 경흥ㆍ종성ㆍ제주 등으로 귀양가서 그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더욱이 이들은 죽음에서 끝나지 않고 훗날 서울 네거리에서 관을 쪼개고 시체를 꺼내어 베이는 추형(追刑)까지 당했다.

유영경의 죄목은 대강 이러했다.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해 중흥의 공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죄, 세손의 원손 책봉과 혼인을 지연시킨 죄,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한 것을 방해한 죄 등이었다. 사실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유영경의 애매한 태도는 일반 백성들에게도 의구심을 살 정도였다. 따라서 광해군 자신과 그 지지 세력들에게 위기감을 느끼게 했을 것임은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세자를 바꾸려 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이었을 뿐 명백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왕위 계승이란 미묘한 문제가 결부되었기 때문에, 정국이 바뀌자 그는 첫 번째 처벌 대상으로 꼽혔던 것이다.

유영경은 선왕의 대신이었기에 광해군은 그를 선뜻 처벌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유영경은 선조가 죽은 지 한 달로 채 못 되어 탄핵을 받아 죽고 말았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612년(광해군 4) 2월 김직재(金直哉)의 옥사가 일어났다. 이 때 유영경의 아들 유선ㆍ유열ㆍ유업ㆍ유항 등이 연루되어 일문이 참화를 입게 된다. 대북의 소북 제거 작업은 계속되었다. 이효원(李效元)ㆍ이유홍(李惟弘)ㆍ성준구(成俊耉)ㆍ남복규(南復圭)ㆍ유성ㆍ홍식(洪湜)ㆍ성영(成泳)ㆍ이덕온(李德溫) 등 소북 인사들이 대거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반면에 귀양을 가던 정인홍(鄭仁弘)ㆍ이경전(李慶全)ㆍ이이첨(李爾瞻)은 곧바로 석방되었다. 정인홍은 고향 진주에서 귀양가라는 명령을 받고 이미 경기도까지 당도한 터였다. 그런데 때마침 정권이 교체되는 바람에 석방될 수 있었고, 이어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정인홍은 이를 사직하고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는 이른바 산림으로 예우를 받으며 향리에서 중앙의 중요한 정치적 현안들을 배루 지휘했다. 선조 말년에 저우건을 전횡하는 유영경에 대해 탄행 상소를 올린 죄로 변방에 유배를 가던 정인홍의 관작이 복위되었으니, 세상은 마치 혁명 정국과도 같았다.

한편 이이첨은 사헌부 지평ㆍ홍문관 부교리 등의 요직을 거쳐, 이듬해 정월 동부승지로 승진해 왕의 측근에 있게 되었다. 이산해는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대북의 원로로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 아들 이경전도 정인홍ㆍ이이첨과 함께 광해군의 즉위에 공을 세웠다 하여 역시 중용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대북 정권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초에는 소북 중에서도 유영경의 일파가 아닌 사람들이 아직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왕비의 오빠인 유희분(柳希奮), 왕비의 외숙인 정창연(鄭昌衍)과 남이공ㆍ김신국 등이 각각 외척으로 혹은 청류란 이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편 남인과 서인의 원로였던 이원익ㆍ이덕형ㆍ이항복ㆍ심희수(沈喜壽) 등이 대신으로 남아 있었지만, 이들은 별다른 세력이 없었으므로 급변하는 정국에 이렇다 할 변수가 되지 못했다.

광해군은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해 효경전(孝敬殿)에 봉안했다. 왕비가 아닌 후궁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고 해서 그 후궁을 왕후로 추존하는 것은 전례에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반대가 많았지만, 광해군은 기어이 추존을 강행하고야 말았다. 정인홍도 적극 찬성했다. 1615년(광해군 7) 윤 8월 13일, 광해군은 공성왕후를 종묘에 들인 날을 기념해 증광시(增廣試)도 베풀었다. 그러나 공성왕후의 추존은 적자가 아닌 국왕으로서 지나치게 욕심을 낸 처사라 하여 두고두고 후세의 비난을 받게 된다.

2. 임해군의 옥사

광해군은 즉위한 그 다음날로 영흥부원군 이호민(李好閔)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선조의 죽음과 광해군의 즉위 사실을 알리고자 했다. 통상적인 관례일 뿐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조정에서는 특별한 준비 없이 선조의 행장과 일반적인 방물(方物)만을 지참하게 하여 보냈다.

그러나 명의 태도는 예상 밖이었다. 명나라에서는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도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이유가 뭔지 캐물었다. 당황한 이호민은 "임해군이 중풍이 있어 선조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 "임해군이 광해군에게 왕위를 사양했다"는 등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명에서는 한층 더 깊숙하게 추궁해 들어왔다.

선조의 묘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니 필시 병이 든 것은 아닐 것이요, 임해군과 광해군이 서로 다투지 않았으면 어찌 왕위를 사양할 수가 있겠는가? (『광해군 일기』권4, 즉위년 5월 을사)

이 소식을 접한 조선에서는 영의정 이원익 이하 1만 8,805명이 연명으로 광해군의 추대를 결정한 자초지종을 적어 북경으로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모두 헛수고였다. 광해군에 대한 인준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결국 명에서는 요동도사 엄일괴(嚴一魁)를 비롯한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임해군이 정말로 병이 들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무슨 내막이 있는가를 조사해 볼 심산이었다. 당시 임해군은 모반죄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이보다 앞서 광해군이 즉위한 지 보름도 채 안 되어 조정에는 임해군을 처단하라는 다음과 같은 상소가 올라왔다.

임해군이 오랫동안 다른 뜻을 품고 사사로이 군기를 저장하고 남몰래 결사대를 기르더니 대행대왕께서  편찮으실 때에는 무사를 소집해 반역을 도모한 진상을 백성들이 모두 명백하게 아는 바입니다. 선왕께서 승하하시던 날에는 발상하기 전인데도 대궐에서 자기 집으로 나갔다가 한참 뒤에서야 달려왔는데, 가병(家兵)을 지휘한 형적이 현저하게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궁궐과 지척인 곳에 있으면서 집을 짓는다는 핑계로 철퇴와 환도를 빈 가마니로 싸서 자기 집에 들였으니,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귀양보내도록 하소서. (『연려실기술』권19, 「폐주광해군고사본말」, 임해군지옥)

광해군은 형제로서의 우애와 충역 시비를 분명하게 판별해야 했다. 군신의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던 광해군은 그저 대신들에게 문의해 보겠노라고만 했다. 그러나 대북 일파는 즉시 국청을 열어 임해군의 부하 고언백(高彦伯)ㆍ박명현(朴命賢)ㆍ운원도정 등을 죽여야 한다고 했다. 특히 정인홍ㆍ이이첨은 임해군까지도 죽이기를 청했다. 결국 임해군의 비복 100여명은 국문 도중에 죽었다. 일부는 고문 끝에 "임해군이 뇌물을 써서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중국의 허락을 얻으려 했다."는 자백을 했다. 이로써 임해군의 모반죄는 간단히 성립되었다.

3사에서는 몇 달에 걸쳐 임해군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몰아붙였다. 원로급 대신인 이원익ㆍ이항복ㆍ심희수ㆍ정구(鄭逑)ㆍ이덕형 등은 '형제의 도리'를 들어 임해군을 귀양보내는 선에서 마무리짓자고 했다. 이에 정인홍ㆍ이이첨 등은 대신들이 역적을 두둔한다고 비난했다. 이 과정에서 좌의정 이항복은 역적을 비호한다는 누명을 쓰고 포천에 있는 농장으로 물러갔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광해군은 하는 수 없이 임해군을 일단 강화도 교동으로 귀양보냈다. 이와 함께 임해군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허성 등 48인은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추대되었다. 그런 가운데 그 해 6월 명나라에서는 주청사신으로 갔던 이호민의 실언으로 광해군의 왕위 계승에 하자가 있는 것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요동도사 엄일괴는 임해군과의 면담을 고집했다. 이에 영의정 이원익은 상복을 입은 사람은 손님을 보러 먼저 가지 않을 뿐더러, 모역 죄인인 임해군을 중국 관원이 만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고 둘러댔다. 그러나 엄일괴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하는 수 없이 임해군을 서강(西江)으로 나오게 하고, 거짓으로 미친 체하도록 하여 사신을 만나 보고 강화도로 돌아가게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북 당로자들은 다시금 임해군을 처형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당시 대사헌에 임명된 정인홍은 임해군의 머리를 베어 차사(差使)에게 보일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광해군은 정인홍 등의 상소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국 사신에게 은과 인삼을 뇌물로 주어 사태를 무마하려고 했다. 조선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아 달라는 종계변무(宗系辨誣) 때나, 임진왜란 때 두차례 명나라의 구원병을 요청할 때에도 뇌물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이 물꼬를 튼 이후부터는 사소한 일일지라도 통역관이 농간을 부려 뇌물이 아니면 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후로 중국 사신들은 조선에 오기만 하면 뇌물을 요구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버렸다.

1609년(광해군 1) 5월 3일, 임해군이 유배지 강화도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임해군은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현감 이직이 모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사인과 사망 일시는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 사실 임해군은 난폭하고 무도한 행실 때문에 세인들로부터 인심을 잃고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비참한 최후를 맞고도 누구 하나 동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평소 상당한 재력과 무력을 갖추고 있었고 일부 무장들이 그의 집을 출입하고 있어, 오해를 받을 소지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모반을 꾀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 무엇보다도 임해군 자신이 그런 사실을 끝내 부인하였다. 결국 그는 광해군의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되어 제거된 것이다.

3. 사림 5현의 문묘종사

사림 5현은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ㆍ조광조(趙光祖)ㆍ이언적(李彦迪)ㆍ이황(李滉)을 통칭하는 말이다. 저마다 사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아 16세기 후반부터는 사림파의 학통을 이룬 인물들이다. 일반적으로 사림파의 학통은 동방 이학의 조(祖)로 일컬어지는 정몽주(鄭夢周)에서 발원해 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학통의 계보는 조광조가 주장한 이래 이황이 재천명함으로써 사림의 통념이 되었다. 사림을 자처한다면 누구도 이 계보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었다. 이는 연원을 중시하는 사림 사회의 정신적인 틀이었다.

훈구파의 갈등과 반목, 그리고 그에 따른 수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은 성장해 왔다. 그 결과 선조의 즉위와 더불어 사림시대를 개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림의 모든 욕구가 충족된 것은 아니었다. 아직 남은 과제가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학문 연원을 현양(顯揚)하는 일이었다. 이는 사림파의 도통(道統)을 천명하는 과정인 동시에 사림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중요한 작업이었다.

선조가 즉위하던 1567년 10월 기대승(奇大升)은 경연에서 조광조(趙光祖)를 '현사(賢士)', 이언적(李彦迪)을 '현자(賢者)', 이황(李滉)ㆍ김굉필(金宏弼)을 '현인(賢人)'으로 칭송한 일이 있었다. 표현은 다르지만 '어진 사람'이라는 뜻에서는 동일했다. 11월에는 이황이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을 '현사'로 평가했다. 사림파의 학문 연원을 공인받기 위한 발언이었다. 이황이 조광조의 행장을 개찬하고, 이언적의 행장을 찬술한 것도 그 준비 과정이었다.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에 대한 존경과 현양의 분위기는 퇴계를 통해 한층 무르익어 갔다.

조선 왕조는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내세운 유교 국가였다. 그래서 유교를 집대성한 공자를 받드는 사당인 문묘(文廟)를 두었다. 조선시대 사림들이 가장 존경했던 주자도 여기에 종사(從祀)되어 있었다. 그런 만큼 공자ㆍ주자와 더불어 같은 사당에서 제향된다는 것은 유학자로서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영광이 된다.

1570년(선조 3) 3월, 성균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선조 즉위년부터 태동하기 시작한 4현 종사에 대한 여망이 마침내 표출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4현'이라는 용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된 점이다. 원래 4현은 이황이 김굉필ㆍ정여창ㆍ조광조ㆍ이언적을 칭송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말이었다. 이후 4현은 사림의 범위를 넘어 국가적으로 통용되는 공식 용어가 되었다.

관학 유생이 4현의 문묘종사를 청하던 그 해 11월 8일, 이황이 사망했다. 평소 사랑하던 매분(梅盆) 옆에서 70세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생전에 이미 당대의 유종(儒宗)이며 사림의 영수로서의 권위를 누렸던 이황이었다. 사망과 동시에 사림들은 그에게 현인ㆍ현사의 칭호를 붙였다. 그리고 4현이란 말은 5현으로 대체되었다. '사림 5현' 또는 '동방 5현'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40년 역정

사림 5현의 문묘종사는 1570년 발론되어 1610년(광해군 2)에 달성되기까지 꼬박 40년이 걸렸다. 선조 3년에 관학 유생들이 4현의 문묘종사를 청한 명분은 기묘ㆍ을사사화 이후에 실추된 사기를 고양하고 예의와 염치의 풍조를 회복하자는 데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선조의 반응은 냉담했다. 사안이 중대하니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는 상투적인 이유를 내세웠다.

조신들의 입장도 다양했다. 이준경(李浚慶)은 김굉필ㆍ조광조의 종사는 찬성하면서도 이언적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4현의 일시 종사는 지나치다고 주장하는 부류도 있었다. 선조의 미온적인 태도와 조신들의 반대도 문제였지만, 사림의 공론도 제대로 수렴되지 않았다. 더욱이 을사사화의 신원에 조야의 관심이 집중된 나머지 종사론을 심의할 여유도 없었다. 한 마디로 시기상조였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573년(선조 6) 종사론이 다시 대두되었다. 바야흐로 이황을 포함한 사림 5현이 거론되는 시기였다. 이후 1581년(선조 14)까지 쉴새없이 5현 종사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선조의 태도와 조신들의 반응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더욱이 1575년(선조 8) 이후에는 동서 분당의 여파로 사론이 결집되기 힘들었다. 여기에 기축옥사(1589년)와 임진왜란(1592~1598년) 등 내외적인 불안이 가중됨으로써, 종사론은 약 20년 동안 잠잠했다.

한편 선조 후반에 이르러 임진왜란의 상처도 점차 치유되고 사회가 안정되었다. 이에 선조는 1602년(선조 32) 문묘의 대성전을 중수하고 1604년(선조 34)에는 성균관의 동서무(東西廡)를 낙성하는 등 존현(尊賢)에 열성을 보였다. 1604년 3월, 유생들은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20년의 침묵을 깨고 5현의 문묘종사 운동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의례적인 표방이 아니라 연일 계속되는 강도 높은 요청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5현의 종사를 거부하고, 그 이유를 이언적에게 돌렸다. 선조는 이언적의 출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종사론은 다시금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5현의 종사에 대한 관심이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이는 조야가 호응하는 계기가 되어 후일의 결실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종사론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동년 7월 영남 유생 이전이 5현의 문묘종사를 청하자, 관학과 홍문관은 물론 각도의 유생들이 대대적으로 호응했다. 종전까지는 방관자였던 지방 유생들의 음직임이 활발해진 것이다. 1610년(광해군 2) 4월에는 성균관 유생 이지굉이 주도해 5현의 문묘종사를 대대적으로 추진했다. 이들이 연일 상소해 분위기를 고조시키자, 홍문관과 양사도 호응해 움직였다. 그리하여 다음 5월 한 달은 종사론으로 조용한 날이 없었다.

서서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광해군은 6월 1일에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할 것을 명했다. 이원익과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우의정 심희수가 전적으로 동조하자, 광해군은 이를 그대로 수용했다. 이제 남은 것은 절차대로 의식을 거행하는 일뿐이었다. 이에 종사절목(從祀節目) 을 만들고 좋은 날을 받았다. 그런 다음 곧바로 의식을 치루어, 김굉필ㆍ조광조ㆍ이황은 동쪽[東廡]에, 정여창ㆍ이언적은 서쪽[西廡]에 봉안했다. 1610년 음력 9월 5일의 일이었다.

4. 정인홍의 회퇴변척

1610년 6월 1일, 사림들의 40년 노력으로 5현의 문묘종사가 결정되었다. 그리고 9월 10일에는 사림의 축하 속에 의식도 치러졌다. 이제 5현이 갖는 도학상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5현의 문묘종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학자가 있었다. 바로 남명 조식의 엣 제자 정인홍이었다. 그의 불만은 퇴계 이황에 비해 자기 스승인 조식에 대한 예우는 형편없다는 데 있었다. 정인홍은 조식을 수식과 치장이 없는 참된 유학자의 표본이며, 의리가 분명하고 명분을 철저히 지킨 실천 유학의 선구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식은 문묘종사는 커녕 5현 대열에 거론되지도 않았다. 평소 조식이 선비로 여기지도 않았던 이언적ㆍ이황은 문묘에 종사되었다. 더욱이 사림 5현의 이름으로 종사됨으로써 정인홍의 불만은 더욱 컸다. 1611년(광해군 3)4월의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는 그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정인홍은 이 상소에서 이언적ㆍ이황을 냉혹하게 비판했다. 정인홍은 그들을 이록(利祿)을 탐내고 진퇴가 분명하지 않은 몰염치한 사람으로 여겼다. 이들에게는 선비의 칭호를 주기도 아까운데 도학을 인정해 문묘에 종사했으니 참으로 통탄스럽다는 것이 상소의 골자였다. 이는 이언적ㆍ이황의 종사에 대한 반발이며, 조식의 종사를 위한 시설이었다. 비난의 화살은 이언적보다는 경쟁자로 여겼던 이황에게 집중되었다.

자존심의 대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호(號)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조선 유학계의 거장들이다. 그 중 이언적이 가장 선배이고, 이황과 조식은 동갑내기였다. 모두 영남 출신이었지만,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1543년(중종 38) 경상감사로 부임한 이언적이 조식에게 초청장을 보낸 일이 있었다. 그러나 조식은 만나 주지 않았다. 그저 한 통의 편지로 속마음을 전했을 뿐이다.

어찌 거자(擧子)의 신분으로 감사를 뵈올 수 있겠습니까? 주자는 네 조정에 벼슬했지만 40일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상공(相公)께서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날이 머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에 제가 각건(角巾)을 쓰고 안강(安康)의 댁으로 찾아가 뵈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남명집』답이회재)

벼슬에 연연하는 이언적을 풍자한 글이었다. 편지를 받은 회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언적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황과의 관계는 더욱 미묘했다. 두 사람은 고향도 같은 경상도이고 나이도 같다는 '동도동경(同道同庚)'의 인연이 있었지만, 학문의 태도와 출처관은 매우 달랐다. 이황이 인(仁)을 숭상하고 바다처럼 넓은 학문을 지닌 인물이라면, 조식은 의(義)를 중시하고 태산처럼 높은 기상의 소유자였다.

문제는 두 사람 사이에 점차 경쟁 의식이 생겨, 서로를 비아냥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두 사람은 서로를 북두성에 비기며 존경하고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새 이황이 조식을 두고 "거만스러워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老莊)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난했는가 하면, 조식은 "요사이 학자들은 물뿌리고 비질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하늘의 이치를 말하며 허명을 훔친다"고 응수했다. 은근한 자존심의 대결이며, 경쟁심의 표현이었다.

이 무렵 조식의 인근에서 음부(淫婦) 사건이 발생했다. 진사 하종악의 후처가 음행을 저지른 것이다. 조식은 사건 처리를 위해 친구인 이정(李楨)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런데 이정이 세 번이나 태도를 번복했다. 이정이 음부로부터 뇌물을 받았다고 생각한 조식은 그 날로 절교를 선언했다. 조식과 결별한 이정은 이황을 가까이 했고, 이황은 이정을 두둔했다. 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깊어만 갔다.

정인홍이 유적에서 삭제되다

정인홍은 조식ㆍ이황 사이의 불화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조식 이상으로 이황을 싫어했다. 음부의 집을 불태운 사람도 정인홍이었다. 그리고 1604년(선조 37)에는 『남명집』을 간행하면서, 이정을 비난하고 이언적ㆍ이황을 비하하는 내용을 실었다.

선조조에 조정 신료들 중에는 이황의 문인이 가장 많았다. 반면에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은 조식 문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한때 이들은 동인으로서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 하기도 했다. 그러나 1589년(선조 22) 기축옥사로 인해 남ㆍ북인으로 갈렸고, 임진왜란의 와중에서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인홍은 유성룡과 정적이 되었다.

양측은 이황과 조식의 학문ㆍ출처ㆍ언행에 대해 논란을 벌이며, 자기 스승은 높이고 상대방의 스승을 비하하는 경쟁을 지속했다. 1600년(선조 33) 유성룡에 의해 『퇴계집』이 발간되고, 1622(광해군 14) 정인홍에 의해 『남명집』이 간행된 것도 경쟁의 일환이었다. 그런 가운데 1610년 사림 5현의 문묘종사는 이황의 우위를 인정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듬해 정인홍의 회퇴변척소는 이에 대한 반발이며,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정면 충돌의 시작이었다.

그의 상소는 조정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쪽은 유생들이었다. 이목(李楘) 등 500여 명의 성균관 유생들은 즉시 상소를 올려 이언적ㆍ이황을 옹호하고 정인홍의 이름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해 버렸다. 유적 삭제는 유림 사회에서의 매장을 의미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정인홍을 두둔하여 주동한 유생들을 금고형으로 다스렸고, 이에 유생들은 단식 투쟁을 벌이며 팽팽하게 맞섰다. 언관들조차 입장이 분분했다. 사간원에서는 정인홍을 지지한 반면, 홍문관에서는 성균관 유생을 두둔했다. 그러나 조신들 대부분은 정인홍의 눈치를 살피는 형편이었다.

정인홍 역시 동요하거나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 유적에서 삭제된 후에도 조식을 위해 서원을 건립하고 문묘종사 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그리고 향촌에서의 영향력은 물론 중앙 정계에서의 비중도 조금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러나 정인홍은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독선적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유적 삭제를 계기로 이황의 문인들과 전국의 유림들이 정인홍에게서 등을 돌렸다. 심지어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정구(鄭逑)도 정인홍과 의절했다. 이는 남명학파의 점진적인 와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결국 정인홍의 권력도 끝이 나게 되었다. 회퇴변척 시에는 광해군의 비호를 받아 무사할 수 있었지만, 인조반정으로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그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처단되었다. 여기에는 회퇴변척으로 야기된 반감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

5.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

1614년(광해군 6) 11월, 조목(趙穆)이 영남학파의 본산인 도산서원에 종향(從享)되었다. 16세기 이후 주자학이 심화되고 도학이 강조되면서 서원 향사는 도통 전수의 상징이 되었다. 이황의 문하에는 제자가 무려 300여 명이나 있었지만, 도산서원에 제향된 사람은 조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일생을 한결 같은 마음으로 이황을 섬긴 덕분에 죽어서도 스승의 사당에 제향되는 영광을 입은 것이다.

조목은 1524년(중종 19) 경상도 예안현 월천리에서 출생했다. 집안은 평생 학문에 전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있었고, 인근 토계리(兎溪里)에는 이황과 같은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 학자로 성장하기에 최상의 여건이었다. 조목은 약관 15세에 이황의 문하에 입문했다. 이후 30년을 하루같이 이황을 시종하며, 학문과 예법을 익히고 선비로서의 행신과 출처도 배웠다. 일생의 지표가 있었다면 학자로서의 이황과 인간으로서의 이황을 체득하는 것이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로 도산서원에 종향되어 수제자의 지위를 선점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정하는 사람보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다. 서원 향사는 사림의 중대사로서 공론이 요구되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조목의 종향에는 사림의 공론이 충분히 수렴되지 못했다. 공론 대신에 퇴계학파와는 매우 이질적인 권력이 개입했다. 바로 북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친북(親北)에 따른 반대급부였다.

이황의 제자들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유성룡과 조목이었다. 유성룡은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중앙 정계의 거목이었다. 반면에 조목은 일생을 향리에 은거하며 학문 활동과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도산서원을 창건하고 『퇴계연보』ㆍ『퇴계선생언행총록』의 초본을 작성한 사람도 조목이었다.

두 사람이 이황을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다. 유성룡이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중시했다면, 조목은 향촌에서의 이황을 중시했다. 이러한 차이점은 『퇴계집』을 간행하는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조목은 이황의 모든 글을 수록하되 향촌에서 간행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유성룡은 관인으로서의 이황을 부각시켜 중앙에서 간행하고자 했다. 이는 유성룡 자신의 정치적 입지와도 직결되는 부분이었다. 두 사람 모두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따라서 옥신각신 하는 가운데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특히 20년 년하의 유성룡에게 제지를 당한 조목의 마음은 불편하기 그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목이 '주화오국(主和誤國)'의 표어를 내걸고 유성룡 비판 운동을 전개했다. 유성룡의 기반을 한 순간에 붕괴시킬 수도 있는 대단히 미묘한 정치 문제였다.

상국(相國)게서 평생 동안 성현의 글을 읽고 배운 것이 고작 주화 오국 넉자란 말이오? (『동계집』 「월천시도비명」)

유성룡에 대해 화의를 주장해 나라를 망친 자로 규정한 것이다. 이에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조목과 북인

그 틈을 북인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북인의 영수 이산해가 조목의 문인을 자처하는가 하면, 폐모론의 주창자 정조(鄭造)가 예안을 빈번하게 왕래했다. 조목과 북인의 연대가 신속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목의 유성룡 비판 운동은 주효해 유성룡 실각의 계기를 마련했다. 북인들은 유성룡에 대한 탄핵을 전개하여 1598년(선조 31)에 그를 파직시키는 데 성공했다. 파직된 유성룡의 심경을 『서애연보』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생의 노기가 날로 심해 손님을 만날 수조차 없었다. 한준겸이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해 방문하려 했으나,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사절했다.(『서애연보』 만력 27년 2월)

조목과 북인의 연대를 통해 예안 일대에는 친 북인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퇴계학파의 본거지인 안동ㆍ예안에는 남인ㆍ북인이 공존하는 가운데 북인이 남인을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은 1605년(선조 38) 조목이 사망하고, 1607년(선조 40) 유성룡이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의 회퇴변척소가 단행되었다. 퇴계학파는 물론 8도의 유림들이 분노했지만, 조목의 문인들은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친북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퇴계학파의 본거지에 자파를 부식하려는 북인의 노력은 집요했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그 절정이었다. 정인홍은 조목의 공로를 인정해 그의 종향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사실 정인홍과 대북의 입장에서는 조목의 종향이 여러 면에서 이점이 있었다. 가장 큰 목적은 예안의 조목 문인들을 포섭하여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반면에 조목의 문인들은 권력에 의지하여 조목이 이황의 수제자임을 천명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양측의 이해는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은 바로 그 결과였다.

(계속)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48~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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