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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8 (금)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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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이성무)
2-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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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탕평정치기

당쟁은 예송 논쟁을 거치면서 극단으로 치달아 체제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기까지 했다. 이에 숙종조에 처음 황극탕평론(皇極蕩平論)이 대두되어, 왕권을 중심으로 붕당간의 타협을 통한 탕평정치가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1741년(영조 17)에 전랑권ㆍ언론권ㆍ한림회천권이 혁파될 때까지는 사림정치의 틀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탕평정치로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자 탕평당이 생기게 되었고, 또 이들이 벌열화해 왕실의 외척이 됨으로써 외척 세도정치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탕평정치기는 사림정치에서 척신세도정치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고도 할 수 있다.

탕평정치는 영ㆍ정조와 같은 영명한 국왕을 만났을 때에는 붕당간의 타협을 통해 실학과 같은 문운을 일으키고, 일시적으로나마 위민 정치를 실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사후 어리고 무능한 왕이 서게 되자, 곧 척신세도정치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견제 세력이 없는 척신들의 부패로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신임옥사의 충역의리는 경종ㆍ영조조의 정국을 좌우하는 노ㆍ소론간의 뜨거운 쟁점으로 작용했다. 영조는 이 노ㆍ소론간의 첨예한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기의 집권 명분을 확립하기 위해 탕평책을 시도했다. 물론 영조 자신은 노론의 지지로 국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론만 두두하다가는 언제 어떠한 참화를 당할지 알 수가 없는 판국이었다. 그런 사정은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난 뒤에 더욱 절실해졌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緩論]를 중심으로 양당의 인사를 고르게 등용하는가 하면, 처벌할 때도 균형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소론 온건파의 손으로 신임사화에서 받은 노론 인사들의 하나씩 풀어주게 함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자신이 국왕에 오른 명분을 합리화하고 나아가서는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다. 1725년(영조 원년)에 신임옥사를 조작된 사건이라고 규정한 조치로부터 1741년(영조 17)에 임인옥안을 불태워버리고 관련자들을 모두 풀어준 일련의 조치들이 그것이었다.

이를 위해 영조는 치세 전반기에는 소론 탕평을 실시했고, 문제가 해결된 뒤에는 노론 탕평을 실시해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1741년 이조정랑과 좌랑의 자대권과 당하통청권이 혁파되고 언관의 언론권이 제약을 받게 됨으로써, 사림정치의 틀이 무너지게 되었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시키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새로운 탕평책을 키워 그들이 외척 권신으로 되는 길을 열어 놓았다. 18세기 이후 지방 세력의 중앙 정계 진출이 사실상 봉쇄된 상황에서 형성된 서울의 벌열[京華閥閱]들은 탕평 정국 하에서 왕권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결과적으로 왕권이 벌열의 보호를 받는 형국으로서, 이것이 뒤에 왕권이 벌열에 매몰되어 독자성을 잃게 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영조는 궁궐을 수비하는 금군(禁軍)을 용호영(龍虎營)으로 승격시켜 병조판서에 직속시켰고, 도성 수비 체제를 강화해 왕권을 튼튼히 하는 군권을 확립했다. 또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과시하기 위해 유교 경전의 연구에 관심과 열의를 보이는가 하면, 균역법 등 백성들을 위한 개혁 정책을 실시해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그리하여 말년에는 전제적인 국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영조는 1749년(영조 25) 정월에 56세라는 한창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5살 난 세자에게 인사ㆍ형정ㆍ군정에 관한 업무를 제외한 정무 일체를 맡겼다. 노론의 신임의리(辛壬義理)를 국시(國是)로 밝힘으로써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고 탕평을 완수해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한 탕평은 1755년(영조 31)에 『천의소감(闡義昭鑑)』이라는 책을 내어 노론의 신임의리를 재천명하고, 1756년(영조 32)에 노론인 송시열ㆍ송준길을, 1764년(영조 40)에 소론인 박세채(朴世采)를 성균관 문묘에 종사시킴으로써 마침내 완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1762년(영조 38) 윤 5월, 세자(뒤에 思悼世子로 추증)가 뒤주 속에 갇혀서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임오화변(壬午禍變)이다. 세자는 영조의 위압에 눌려 화병이 심했고 그로 인해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지만, 그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세자의 주변에 소론계의 인물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점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다.

여하튼 이 임오화변은 영조조의 신밈옥사와 마찬가지로 정조조 정국의 주요 변수가 되었다. 임오화변으로 세자를 동정하는 시파(時派)와 동정하지 않는 벽파(僻派)간의 대립이 가시화되었고,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데 그의 재임기간을 다 보냈던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추존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더 많았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영조의 두 번째 왕비(정순왕후)의 아버지인 김한구(金漢耉), 오빠인 김구주(金龜柱) 등 벽파의 계략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들은 세손의 대리청정을 방해했다.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작은 아버지 홍인한(洪麟漢) 조차 세손을 모해하려고 했다. 세손이 자신의 사람됨을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조는 1775년(영조 51) 12월에 세손으로서 대리청정을 맡았다가 두 달 후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 때문에, 세손 때부터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서 그를 보호하던 홍국영(洪國榮)을 왕의 비서인 승지로 발탁했다. 그로 하여금 수어사ㆍ총융사ㆍ금위대장ㆍ숙위소(宿衛所)의 책임을 맡게 해 경호를 튼튼히 하고, 규장각을 설치해 측근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하여 홍국영의 세도정치가 실시되었다. 홍국영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누이(元嬪 洪氏)를 정조에게 바쳤다. 그러나 원빈이 소생 없이 죽자 다른 마음을 품게 되었고, 그 때문에 1779년(정조 3) 9월에 축출되었다.

그 후 정조는 소론 시파 서명선(徐命善)을 중용해 소론과 노론의 탕평을 실시했다. 그리고 채제공(蔡濟恭)ㆍ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등 기호 남인 세력을 끌어들여 노론ㆍ소론ㆍ남인 삼당의 연립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김종수(金鍾秀)를 비롯한 노론 벽파의 압력을 받아 정국을 풀어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노론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정조는 효종 능이 있는 여주에 대로사(大老祠)를 지어 주고 그 비문을 손수 쓰는가 하면, 송시열의 문집을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고 붙여 주기까지 했다. 이는 『주자대전(朱子大全)』에 비견되는 예우였다.

그런 한편으로 정조는 자기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부심했다. 1781년(정조 5)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를 두어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했다. 1784년(정조 8) 9월에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고, 이를 기념하는 과거 시험을 실시했다. 1789년(정조 13)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융원(顯隆園)을 수원으로 이장하고, 수원을 화성(華城)으로 승격시켜 유수(留守)를 두었으며, 수원의 관할 구역을 넓혀 새로운 성을 쌓았다.

그리고 왕권의 뒷받침을 위해 1791년(정조 15) 6월에는 숙위소를 개편해 장용영(壯勇營))을 두었다. 도성을 지키는 내영과 화성을 지키는 외영으로 나누어진 장용영은 기존의 5군영보다 규모가 더 큰 군영이었다. 1796년(정조 20) 화성이 완공된 후 정조는 그 곳에 빈번하게 행차하게 되었고, 이에 노론들은 정조가 장차 수도를 수원으로 옮기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기에 이른다.

정조는 산림무용론(山林無用論)을 내세워 노론 정권의 이념적 기초를 무너뜨리는가 하면,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내세워 자기의 말에 거스르는 사람은 금령을 내려 제압했다. 그리고 정쟁보다는 개혁 정치에 뜻을 두어 서얼들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품팔이하는 하층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고공법(雇工法)을 제정했으며, 노비제 혁파의 기틀도 마련했다. 또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해 어용 상인들의 상업 독점권을 제한하고 일반 백성들의 상행위를 보장해 주었다.

이와 함께 학문을 장려하고 많은 책을 펴내어 문운을 일으켰다. 한편 정조의 탕평 정책을 지지하는 관료들은 『서경(書經)』「홍범구주(洪範九疇)」에 나타나는 탕평론을 다시 해석해 군주 중심의 탕평론을 뒷받침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정조는 1800년(정조 24) 5월 말일에 갑작스럽게 교서를 발표했다. 교서에서 정조는 신임의리(辛壬義理)와 임오의리(壬午義理)를 구별해 전자는 옳고 후자는 그르다는 판정을 내리되, 임오의리에 저촉되는 사람들을 결코 처벌하지 않겠다고 단언했다[五晦筵敎]. 이는 노론의 반발을 무마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지 12일만에 정조는 별안간 의문을 죽음을 맞는다.

6) 외척세도정치기

정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순조가 11살의 나이로 즉위하고, 영조의 둘째왕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벽파 김구주(金龜柱, 경주 김씨)의 누이였기 때문에, 정권은 심환지(沈煥之)ㆍ이시수(李時秀)ㆍ서용보(徐龍輔)ㆍ김관주(金觀柱)ㆍ김노충(金魯忠) 등 노론 벽파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영조의 신임의리를 재천명하고, 정조의 임오의리를 지지하는 시파 세력을 제거했다.

1800년 10월에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라는 영남 만인소에 동조한 사람들을 제거했는가 하면, 정조의 측근이었던 은언군(恩彦君) 인(裀), 홍봉한의 아들이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동생인 홍낙임(洪樂任), 정조가 아끼던 윤행임(尹行恁) 등을 죽였다. 1801년(순조 원년)에는 신유사옥(辛酉邪獄)을 일으켜 이가환ㆍ정약전(丁若銓)ㆍ정역용 등 천주교와 관련된 남인 인사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이들을 지원한 채제공의 관직도 빼앗았다. 그리하여 남인은 재기불능 상태가 되었다. 계속해서 1802년(순조 2)에는 시파 김조순(金祖淳)이 장악하고 있던 장용영을 혁파했으며, 백성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공노비도 혁파했다.

그러나 정조로부터 순조의 보호를 부탁받은 김조순(안동 김씨)의 지위는 쉽게 흔들 수 없었다. 대왕대비 김씨로서는 정조가 결정한 사항을 정면으로 뒤집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김조순은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으로, 많은 산림을 배출한 가문의 배경과 정조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정조는 생전에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재간택까지 한 반 있었다. 그러나 벽파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02년 10월에 김조순의 딸은 마침내 순조의 왕비가 되었다. 이에 정권은 김조순에게 돌아갔다.

김조순은 훈련도감ㆍ장용영ㆍ총융청의 군문대장, 병조ㆍ예조ㆍ형조ㆍ이조의 판서, 비변사 제조, 대제학, 규장각 검교ㆍ제학(檢校ㆍ提學) 등을 역임했고, 이제는 국왕의 장인으로서 전권을 휘둘렀다. 그가 정권을 잡는 데는 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綏嬪 朴氏)의 친정 아버지 박준원(朴準源)의 도움이 컸으며, 순조비를 간택하는 데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의 도움이 컸다.

한편 조득영(趙得永, 풍양 조씨)은 시파를 섬멸하려다 잡혀 죽은 김달순(金達淳)을 공격함으로써 벽파 세력을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것은 풍양 조씨 가문이 김조순의 안동 김씨 가문과 협력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으며, 1819년(순조 19) 8월에 순조의 세자빈이 그의 8촌 형인 조만영(趙萬永)의 딸로 결정되는 기반이 되었다. 김조순은 반남 박씨 가문과 풍양 조시 가문의 도움을 받아 벽파 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1804년(순조 4) 정월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이듬해 정월에 그녀가 죽음으로써 벽파들이 더 이상 기댈 데가 없어진 것도 벽파 정권 몰락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순조조 이후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계속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되었다. 이는 바른 도리로서 정치를 주도해 간다는 세도(世道)와는 의미가 다르다.

김조순은 정치적으로 송시열의 북벌론을 계승하고, 학문적으로는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人物性同論]고 주장하는 안동 김씨 김창협ㆍ김원행(金元行) 등의 낙론을 이어받았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北學)을 수용하는 데에도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사람과 사물의 본성이 같다고 보는 것은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도 포용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남인의 천주교도들이나 중인 및 노론 벽파의 일부까지도 포용하는 유연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그가 영조조의 완론탕평과 같은 정치 형태를 표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순조는 안동 김씨 세도 가문에 눌려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세가 되던 1808년(순조 8)부터는 안동 김씨를 누르고 친정에 나서고자 시도했다. 정무를 직접 파악해 보려고도 하고, 김조순의 군권을 제약하기 위해 궁궐 호위를 담당하는 군병을 늘려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번번이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더욱이 1811년(순조 11) 12월에 평안도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순조의 왕권 회복 노력은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정국은 안동 김씨 가문과 남공철(南公轍)ㆍ이상황(李相璜)ㆍ심상규(沈象奎) 등 안동김씨에 동조하는 세력에 의해 계속 주도되었다.

순조는 왕권을 회복하려는 의도에서 안동 김씨 세력의 양해를 얻어 1827년(순종 27) 2월에 효명세자(孝明世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대리청정의 표면적 명분으로 자신의 건강 악화와 세자에게 정치적 경륜을 쌓게 해 준다는 것을 내세웠다. 세자는 대리청정을 맡자 심상규ㆍ이상황ㆍ김교근(金敎根)ㆍ남공철 등을 몰아내고, 뒤에 익종 4간신(翼宗四奸臣)으로 지목되는 김로(金鏴)ㆍ홍기섭(洪起燮)ㆍ이인보(李寅溥)ㆍ김노경(金魯敬) 등 반 안동 김씨 세력을 기용했다.

또한 조만영(趙萬永)ㆍ조인영(趙寅永)ㆍ조종영(趙種永)ㆍ조병현(趙秉鉉) 등 세자의 처가인 풍양 조씨들로 하여금 측면에서 돕게 했다. 그 밖에도 김노경의 아들인 김정희와 권돈인(權敦仁)을 비롯해 조만영ㆍ조인영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지연(李止淵)ㆍ이기연(李起淵) 등이 협력했다. 이들은 반 안동 김씨 세력을 형성했다.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소외되어 있던 소론ㆍ남인ㆍ북인ㆍ서북인의 일부도 탕평을 통한 왕권 강화를 주장하며 이에 합류했다. 이들 중의 주류는 외척의 세도정치를 반대하는 노론 청명당(淸明黨) 계열이었는데, 이들은 상호간에 혼인 관계를 통해 결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또한 이전부터 세자의 측근들이기도 했다. 특히 김로는 순조조에 활약하던 김재찬(金載瓚)의 아들로서, 일찍이 세자를 가까이에서 돕다가 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하자 승지가 되어, 세자의 모든 정책을 뒷받침해 준 인물이었다.

또한 조만영은 효명세자의 장인으로서 훈련대장과 선혜청 당상(宣惠廳堂上)을 맡아 군권과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안동 김씨 대신 비변사 당상도 맡았다. 이에 김조순은 몇 달 동안 여주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은거할 수밖에 없었으며, 1832년(순조 32)에 결국 죽고 말았다.

세자에게는 정책적 야심이 있었다. 세자는 경복궁 중건도 구상했으며, 정조가 실시하려다 못한 서얼 허통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또 백성들의 민생을 보살피려고 부단히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세자는 1830년(순조 30) 5월 6일에 죽고 말았다. 세자는 뒤에 익종으로 추대되었다. 세자가 죽은 뒤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세자의 측근인 김로ㆍ홍기섭ㆍ이인보ㆍ김노경 등은 네 간신으로 지목되어 처벌받았고, 그 추종 세력들도 모두 축출되었다.

그러나 조만영ㆍ조인영 등 풍양 조씨들은 건재했다. 왕실의 외척이었기 때문이다. 세자가 죽고 나서 순조의 친정이 다시 이어졌는데, 순조는 오히려 조인영에게 세손(뒤의 헌종)의 후사를 부탁했다. 이것이 헌종조에 조인영을 비롯한 풍양 조씨가 세도를 잡을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순조가 1834년(순조 34) 11월 죽고, 손자인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했다. 헌종의 나이가 어려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 김씨(김조순의 달)가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이에 조정은 안동 김씨와 순조로부터 헌종의 보호를 위탁받은 조인영 세력간이 균형을 유지하게 되었다. 김조순이 죽은 뒤에는 김유근(金逌根)이 안동 김씨의 세도의 주역이 되었다.

김유근ㆍ조만영 연립 정권의 성립으로 윤행임ㆍ김로ㆍ이인보ㆍ김노경 등의 죄가 풀릴 수 있게 되었다. 안동 김씨들은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기 전에 미리 세력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1835년(헌종 원년) 7월에 안동 김씨계의 김홍근(金洪根)으로 하여금 김로ㆍ김노경ㆍ김정희ㆍ이지연ㆍ이기연 등을 쫓아내도록 했다.

헌종은 19살이 되던 해부터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헌종은 자신의 외가 쪽인 조인영계를 두둔했지만 안동 김씨와 풍양 조시의 연정 체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김유근이 1840년(헌종 6) 12월에 죽자, 그의 동생인 김좌근(金左根)이 안동 김씨의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아직 젊었기 때문에 6촌 형인 김흥근(金興根)이 그를 도왔다. 조인영계에서는 조만영의 아들 조병현*趙秉鉉)과 조인영의 아들 조병기(趙秉夔)가 예조ㆍ호조ㆍ이조의 판서직을 두루 역임해 세도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다졌다.

풍양 조씨들은 김정희ㆍ성해응(成海應) 등의 도움을 받아 서학(西學)은 배격하되 청나라로부터 고증학은 받아들였다. 이 때 특히 김정희의 제자 중에는 신헌(申憲)ㆍ이하응(李昰應, 뒤의 흥선대원군)ㆍ남상길(南相吉)ㆍ민태호(閔台鎬) 등 경화사족들뿐만 아니라 조희룡(趙熙龍)ㆍ이상적(李尙迪)ㆍ강위(姜瑋)ㆍ오경석(吳慶錫) 등 중인 출신 지식인들도 많았는데, 이들은 대원군의 집권시대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조인영은 사림정치를 표방하고 송계간(宋啓幹)ㆍ홍직필(洪直弼)ㆍ김매순(金邁淳) 등 산림을 존숭했으나, 그들이 공론의 주체가 되는 것은 반대했다. 이 시기에 산림은 세도 가문의 시녀로 전락하여 서학을 배척하는 전위대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헌종은 군권강화를 통한 독자적인 힘을 축정하기 위해 총융청을 총위청으로 승격시키고 2품 이상의 문신으로 하여금 군문대장을 맡게 했으나 마음대로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왕권이 세도 가문에 매몰되어 제대로 그 권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세도 가문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왕을 멋대로 골라 세우는 것이 통례였다.

헌종이 1849년(헌종 15) 6월에 아들 없이 죽자, 순원왕후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후손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아들인 원범(元範)이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곧 철종이다. 원범은 집안이 몰락해 강화도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고 강화도령이라 불릴 정도로 중앙 정계에서는 생소한 인물이었다. 순원왕후가 헌종 초에 이어 두 번째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정권은 안동김씨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김좌근ㆍ김흥근 등 안동 김씨의 풍양 조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조병현이 죽음을 당하고, 풍양 조씨를 추종하던 인사들이 대거 몰려났다.

그리고 1851년(철종 2)에 헌종의 탈상을 앞두고 철종의 종통을 둘러싼 전례(典禮) 문제가 일어났다. 철종이 종통으로는 헌종의 뒤를 이었지만, 가계는 순조의 뒤를 이었기 때문이었다. 종통상으로는 영조의 다음대 왕으로 진종(眞宗)이 철종의 5대조가 되어 종묘에서 옮겨 가야만 했다. 그러나 가계상으로 보면 3대조가 되므로 진종을 종묘에서 옮겨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안동김씨는 후자를 택하고, 이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철종을 순원왕후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들은 세도정치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원범을 찾아내어 허수아비 왕을 삼았고, 대숙 틀린데도 철종으로 하여금 왕통을 잇게 한 것이다. 이하전(李夏銓)과 같이 대수도 맞고 인물도 출중한 왕위 계승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그는 안동 김씨의 미움을 받아 1862년 죽임을 당한다) 무리하게 철종을 왕으로 옹립한 것이다.

조인영계의 권돈인(權敦仁)은 순원왕후의 처사가 전례에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안동 김씨들은 권돈인을 귀양보내고 반대 세력을 일망타진했다. 그리하여 김흥근ㆍ김좌근 등이 국정을 주도하고 김병국(金炳國)이 훈련대장, 김병기가 어영대장을 맡아 본격적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펼쳐지게 되었다. 국가의 관직은 안동 김씨의 사유물로 떨어져, 그들의 집안 내 서열이 곧 관직 서열로 탈바꿈하는 형국이 되었다. 1851년 윤 8월에는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철종의 왕비로 간택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는 더욱 굳어졌다.

비판 세력이 없는 상태에서 안동 김씨들은 관직을 팔고 온갖 비행을 다 저질렀다.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자 수령들의 토색질이 심해지고, 삼정이 문란해지자 전국적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밖으로는 외세의 침입을 받고 안으로는 민란이 끊일 사이가 없어, 나라는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은 이렇듯 당쟁 때문이라기보다 세도정치 때문이었다.

철종은 재위 14년만인 1863년(철종 14) 12월에 아들 없이 죽었다. 이에 대왕대비 조씨(조만영의 딸)가 이하응(李昰應)의 12살 된 둘째아들 명복(命福)을 세워 고종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되어 섭정(攝政)에 임하게 되고, 신정왕후 조씨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정의 모든 권한은 대원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안동 김씨 세도가 일시에 대원군의 세도로 바뀐 것이다.

1866년(고종 3) 2월에 대왕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국왕이 친정을 수행하게 되자, 대원군의 위세는 더욱 커졌다. 이에 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력을 내치고, 조두순(趙斗淳)ㆍ유후조(柳厚祚, 남인 유성룡의 후손)ㆍ박규수(朴珪壽)ㆍ조계원(趙啓遠, 남인)ㆍ임상준(任商準, 서북인) 등 당파와 신분에 관계 없이 인재를 널리 등용했다. 그리고 독자적인 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송시열의 화양동서원(華陽洞書院)과 만동묘(萬東廟)를 비롯한 전국의 서원을 일부만 남겨 놓고 대부분 헐어 버리고, 왕권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했으며, 신분에 관계 없이 군포(軍布)를 납부하게 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했다. 천주교를 탄압하고 쇄국 정책을 실시했다. 이러한 정책은 이미 조만영ㆍ김정희 등의 반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배태되엇던 것으로, 대원군이 이들과의 인간 관계를 통해 그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묘하게도 대원군 정권 하에서 또다시 외척 세력이 싹트기 시작했다. 1866년 3월 20일에 대우너군은 고종의 왕비를 맞아들였다. 대원군 부인의 추천에 의해 민비(閔妃)를 간택한 것이다. 민비는 민치록(閔致祿)의 외동딸이었다. 대원군의 왕비 간택의 원칙은 고단한 집안이어야 한다는 것과 자기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외척 세력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종이 궁인 이씨와의 사이에서 완화군(完和君)을 낳고 대원군이 첫 손자라며 귀하게 여기자, 그 때부터 민비는 대원군을 미워해 자기의 친정 식구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민승호(閔升鎬)ㆍ민규호(閔奎鎬)ㆍ민겸호(閔謙鎬)ㆍ민태호(閔台鎬) 등을 중심으로 대원군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모아 민씨 외척 세력을 형성해 나갔다.

그리고 최익현(崔益鉉)을 시켜 대원군을 탄핵하게 했다. 그리하여 집권 10년만인 1873년(고종 11) 11월 3일에 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다. 민비의 공격과 쇄국 정책의 부작용으로 10년 세도가 무너진 것이다. 이 때부터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이유원(李裕元)ㆍ박규수ㆍ이최응(李最應, 대원군의 형)ㆍ조영하(趙寧夏)ㆍ김병국ㆍ최익현 등이 민씨 정부를 도왔다. 반면에 대원군의 측근들은 모두 쫓겨났다.

민씨 정부가 운요호(雲洋號) 사건과 강화도조약으로 어쩔 수 없이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문호를 개방하자, 개화파들은 일본과 협의해 내정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민씨의 개화 정책에 대해 각지의 유림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혹은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고종을 내쫓고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李載先)을세워야 한다고 모의하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민비와 대원군의 사이는 더욱 벌어졌다.

그러던 중 1882년(고종 19) 6월에 선혜청 당상 민겸호가 13개월이나 밀린 군대 급료를 지불할 때 썩은 곡식이나 모래가 절반이나 섞인 곡식을 나누어 주자, 군란이 일어났다[壬午軍亂]. 군사들이 대궐로 쳐들어와 민비를 죽이려 하자 민비는 궁녀옷으로 갈아 입고 장호원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의 수습을 부탁했다. 대원군은 민비의 국상을 치르고 그의 측근들을 다시 불러모았다. 이 사건으로 많은 민씨 당로자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민비는 비밀리에 고종에게 자기가 살아 있음을 알리고 청나라에 요청하여 대원군을 납치해 가게 했다. 그리하여 민씨 정권이 다시 서게 되었다.

민씨 정권은 개화파와 연계해 문호개방 정책을 썼고, 대원군 세력은 유림 등에 업고 쇄국 정책을 썼다. 그런데 민씨 정부가 청나라와 일본의 영향을 배제하기 위해 친로 정책을 쓰자, 일본의 요구로 대운군은 1885년(고종 22) 8월 25일에 환국할 수 있었다. 민씨 정권과 다투지 않겠다는 조건에서였다.

그러나 민씨 정권은 대원군에게 냉담하여 그의 측근들과 임오군란 책임자 30여 명을 처단하고, 그가 사는 운현궁에 금족령을 내렸다. 대원군 살해음모 사건도 일어났다. 민비는 러시아와 청국을 이용해 일본을 반대하다가, 1895년(고종 32)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우(三浦梧樓)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때 일본 공사는 대원군을 받들고 경복궁에 난입해 민비를 살해했다고 한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89~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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