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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8-15 (금) 14:00
분 류 사전3
ㆍ조회: 2016      
[조선] 광해조의 당쟁 2 (이성무)
광해조의 당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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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6.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

칠서의 옥

1613년(광해군 5) 봄, 서인의 거두인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비롯하여 서양갑(徐羊甲)ㆍ심우영(沈友英)ㆍ이경준(李耕俊)ㆍ박치인(朴致仁)ㆍ박치의(朴致毅)ㆍ허홍인(許弘仁) 등 일곱 명의 서자들이 정협(鄭協), 출신(出身, 무과에 급제했지만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사람) 유인발(柳仁發) 등과 결탁해 모반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왔다. 한때 이들 일곱 서자들은 소양강 가에 무륜당(無倫堂)을 지어 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곤 했다. 이들은 스스로 강변칠우(江邊七友)니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니 하면서 허균ㆍ이재영ㆍ이사호 등 중앙 관료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벼슬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일곱 서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 탓으로 돌렸다.

우리들은 탁월한 재사이다. 다만 당대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묶여 그 뜻을 펴지 못하게 되었다. 대장부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을 바에는 큰 명성을 낼 것이다. (『연려실기술』권 20, 「폐주광해조고사본말」박응서지옥)

이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것이다. 일곱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모방해 형제의 의리를 맺고 언젠가 있을 병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출신 유인발(柳仁發), 선비 김비(金斐), 만호 김평손(金平孫), 수문장 박종인(朴宗仁) 등과 같은 호걸들과 사귀는 한편, 도적질로 재물을 모아 큰일을 벌이려고 했다. 서양갑은 1611년(광해군 3) 가을에 해주에서 소금 장수를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왔고, 정협ㆍ허홍인 등은 왕의 사신을 사칭해 부호 이승순의 집을 털었다.

그러다가 1613년 봄에 이들은 조령에서 은 장수를 죽이고 은 6, 7백냥을 강탈한 죄로 잡혀 온 것이다. 이들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포도대장 한희길 등은 이들을 문초할 때 일부러 지연 작전을 펴면서 박응서를 꾀어내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서 진술하라. (『연려실기술』 권 20. 「폐주광해조고사본말」 박응서지옥)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박응서가 마침내 커다란 참화를 부르게 될 허위 자백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들은 단순한 도적들이 아닙니다. 장차 큰일을 일으킬 생각으로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려 한 것입니다. 영창대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과 몰래 통해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을 삼으려 한 것입니다. (『연려실기술』권 20.「폐주광해조고산본말」박응서지옥)

이러한 고변은 이이첨이 친척인 이의승을 시켜 사주한 것이라고 한다. 사건을 심문하던 정항(鄭沆)은 그 자초지종을 왕에게 보고했고, 광해군은 이들을 친히 국문했다. 그리고 박응서는 약속대로 사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모자 격인 서양갑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김제남ㆍ영창대군ㆍ인목대비를 한꺼번에 옭아 넣어 자백을 하고부터는 옥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양갑은 김제남과는 서로 소식도 통한 바 없었다. 서양갑은 그의 어머니까지 모진 고문에 시달린 것을 보다못해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광해가 내 어머니를 죽이니, 나도 제 어머니(인목대비)를 죽여야겠다.(『연려실기술』권20.「폐주광해조고사본말」박응서지옥)

그는 거사를 김제남과 함께 모의했고 그 사실을 대비도 이미 알고 있다며 그럴 듯하게 꾸며댔다. 나아가 광해군이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이고, 그도 모자라 천척의 윗 항렬 부인까지 간음했다고 대들자, 사관조차도 차마 그의 말을 받아쓰지 못했다고 한다.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

이 사건으로 많은 관련자들이 문초를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 불똥은 어이없게도 김제남뿐만 아니라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게까지 튀고 말았다. 국청을 통해 자백받은 내용 중에 "임금과 세자를 죽이고, 옥쇄를 가져다가 대비에게 주어 수렴청정을 하게 한 다음,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라는 대목이 문제가 된 것이다.

5월 4일, 사간원은 김제남의 관직 삭탈을 요구했다. 사실 김제남은 선조의 장인의 신분으로서 처신을 잘 하지 못해 사림에서 배척을 받고 있었다. 사간원의 지적을 빌자면, 대궐 안에서 하거 없이 유숙한다든지 한강의 별영(別營)을 제 마음대로 헐어 버리고 정사(亭舍)를 옮겨 짓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제남의 파면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대간에서는 신흠(申欽)ㆍ박동량(朴東亮)ㆍ서성(徐渻)ㆍ한준겸(韓浚謙)ㆍ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허성(許筬) 등 선조의 비밀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들을 공격하여 관직을 삭탈하거나 사판(士版)에서 깍아 버렸다. 일찍이 선조는 임종에 즈음해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그 겉봉에는 대신들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창대군이 아직 어려 미처 성장함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스럽소. 내가 죽은 후에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들은 대군을 잘 보살펴 주길 바라오. (『연려실기술』 권18, 「선조조고사본말」 광해사위)

대비는 처음에 선조의 유교를 빈청(賓廳에 내렸다가, 즉시 도로 거두어 봉해 버렸다. 이를 두고 이이첨은 "유교는 선왕의 글씨가 아니라 대비가 내시 민희건을 시켜 위조한 것이며, 7신하가 이를 보호한 것이다"라고 반론하고 나섰다. 7명의 신하들 중 당시 생존해 있던 이들은 모두 유교를 받은 사실을 부인했다. 그런데 이 때 박동량은 오히려 자신이 무죄임을 밝히고자 이른바 '유릉저주사(裕陵咀呪事)'를 털어놓아 대비를 곤경에 빠뜨렸다.

대비의 처소에 있는 사람들이 선왕의 병난 까닭은 돌아가신 의인왕후 박씨에게 있다고 해 수십 명의 요망한 무당과 함께 연달아 의인왕후의 능인 유능(裕陵)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크게 벌였습니다. (『연려실기술』 권20, 「폐주광해조고사본말」 박응서지옥)

의인왕후에 대한 저주 사건이 확대되어 선조를 모셨던 궁녀들은 모두 형벌을 받게 되었다. 다만 박응서는 고변한 공으로 죄가 사면되었다.

이 때 영창대군은 겨우 8세였다. 그러나 그는 선조의 적자로서 종법상 왕위 계승 서열 1위의 위치에 있었다. 그 때문에 '화란의 근본'으로 여겨져, 이이첨 등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이첨은 자신의 무리인 유생 이위경을 시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게 했다. 5월 23일에 이위경은 다음과 같이 영창대군과 김제남에 죄를 물을 것을 청하는 동시에 폐모론까지 언급했다.

모후(母后)는 안으로 저주를 일삼고 밖으로 역적의 모의에 연락했으니, 어머니로서의 도리가 끊어졌습니다. ……전하께서는 비록 모자의 은혜가 있지마는 종사(宗社)에 대해서는 현저하게 끊어야만 될 죄가 있아온데, 신하된 사람들이 그녀를 국모로서 대우하겠습니까? 역적 영창대군은 비록 어린애라 하지마는 그를 받들어 임금으로 세운다는 말이 역적들의 입에서 자자하게 퍼졌습니다. 몸이 대역죄의 죄명을 짊어지고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운데도 전하께서는 우애의 정으로서 차마 형벌을 가하지 못하셨습니다. ……따라서 빨리 담당한 관리에게 명해 역적 영창대군을 처단하고, 김제남을 엄하게 국문해 국법을 바로잡기를 청합니다. (『명륜록』)

장령 정조(鄭造)와 윤인(尹訒) 등이 폐모론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이이첨은 3사를 사주해 계속해서 글을 올리게 해 영창대군을 죽일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또한 3정승이 마땅히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해야 할 것인데 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이이첨의 무리는 대표적 반대론자인 이항복을 포섭하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써 보았다. 그러나 이항복은 끝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영의정 이덕형도 이항복과 뜻을 같이 했다.

갑론을박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김제남은 위리안치되었다가, 3사의 주장에 따라 6월 1일 서소문 밖에서 사사(賜死)되었다. 그 후 1616년(광해군 8) 가을에는 가을에는 김제남의 관을 저자거리에서 부관참시하였으며, 연좌율에 따라 그의 일가가 모두 참화를 입어야 했다.

한편 김제남이 서소문 밖에서 사야을 받을 즈음, 영창대군은 이미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는 대비의 곁은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대비의 처소에서 강제로 끌어내어 강화에 위리안치시켰다.

8월 2일, 영창대군은 강화로 유배되었다. 영창대군을 죽여야 한다고 조신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서는 가운데 영의정 이덕형은 다시금 '형제의 의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결국 이덕형은 관직만을 삭탈당했지만,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개탄하며 식음을 전폐하다가 10월 10일 죽고 말았다.

1614년(광해군 6) 봄, 영창대군은 강화도의 작은 골방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대군을 밀실에 가두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 질식하여 죽게 하였다. 이로써 광해군의 정통성을 가로막았던 최대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7. 대북의 전횡

인목대비의 폐비와 서궁 유폐

1615년(광해군 7) 4월, 광해군은 대비를 경운궁에 홀로 남겨 둔 채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사실 1613년 유릉저주사가 불거져 나오면서 제기된 이위경의 폐모론은 인목대비를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했다. 경운궁에는 군사들이 배치되어 대비의 일거수 일투족을 일일이 감시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1월, 누군가가 경운궁에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를 투입했다. 그 글에는 기자헌(奇自獻)이 박승종(朴承宗)을 몰아내고 유희분을 협박해 대비를 맞이한 다움 큰 일을 도모하려 한다고 쓰여 있어, 커다란 파문이 일어났다. 익명서는 허균의 소행으로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광해군은 상금을 내걸로 진범을 찾아내는 한편, 궁성을 더욱 엄히 호위토록 했다.이어 성균관 유생들은 대비를 폐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 때 허균이 김개ㆍ이강(李茳)을 시켜 호남ㆍ영남의 무뢰배들을 모아 유생처럼 꾸미게 하고, 대비를 폐하고 역적의 괴수를 두호하는 기자헌을 처벌해야 한다고 잇달아 상소하도록 했다. 이에 맞서 영의정 기자헌은 폐비 문제를 널리 수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기자헌은 종친ㆍ외척ㆍ문무백관을 모아 일종의 공개 토론 형식인 수의로써 가부를 결정하고자 했다. 그는 조정 신료들 중에 만약 한두 사람이라도 폐비를 반대한다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임금의 마음을 돌이켜볼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3사에서는 기자헌을 위리안치시킬 것을 청했고, 결국 그는 서강으로 나가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수의에 참가한 사람은 백관 930명, 종실 170명이었다. 1천 명이 넘는 인원인지라 의견도 갖가지였다. 그러나 모두 강경과 온건의 차이일 뿐 대부분이 대비를 폐출하자는 이이첨 등의 주장에 찬동했다. 다만 기자헌ㆍ이항복ㆍ정홍익(鄭弘翼)ㆍ김덕함(金德諴) 등은 끝까지 폐모 주장에 반대했다. 결국 이항복은 북청으로, 기자헌과 정홍익은 길주로, 김덕함은 명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그 외에 수의에 참여하지 않은 종실 30여 명과 백관 40여 명도 모두 귀양가거나 쫓겨났다.

1618년(광해군 10) 정월, 마침내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으로 칭해지게 되었다. 또 며칠 뒤에는 좌의정 한효순(韓孝純), 공조판서 이상의(李尙毅), 예조판서 이이첨, 동지춘추관사 이경전(李慶全), 우찬성 이충, 호조판서 최관, 공주참판 조위, 병조참의 정립, 부제학 정조, 예조참의 이명남, 예조참판 윤수민(尹壽民), 병조참판 이덕형ㆍ형조참판 박자흥(朴自興)ㆍ호조참의 정규ㆍ대사간 윤인ㆍ호조참판 경섬(慶暹) 등이 폐비절목을 만들었다. 이로써 인목대비는 대비로서의 모든 특권과 매우를 박탈당했다. 대비는 인조반정 전까지 서궁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후궁만도 못한 박절한 대우를 받았다. 이것도 성에 차지 않은 대북 일파는 백대형과 이위경을 사주해 대비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그런데 폐출의 절차를 완결짓는 데는 한 가지 과제가 남았다. 바로 명나라로부터의 폐서인의 허락을 받아내는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엄격한 의미에서 인목대비는 대비의 신분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서인과 남인, 그리고 소북인은 "천자가 책봉한 고명과 관복이 있는데, 어찌 마음대로 폐하겠는가!"라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또 엄격한 금령에도 불구하고 과거 합격자들 중에는 서궁에 나아가 예를 올리는 이도 있었다.

능창군의 죽음

선조의 아들 정원군(定遠君)은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 구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다. 훗날 인조가 되는 능양군(綾陽君)이 첫째아들이고, 둘째는 능원군(綾原君), 세째는 능창군(綾昌君)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광해군의 귀에 정원군의 집이 있는 새문동(塞門洞)에 왕기(王氣)가 돈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광해군은 마침내 그 집을 헐고 그 자리에 경덕궁(景德宮)을 지었다. 그런 와중에 1615년(광해군 7) 6월, 익산에 사는 진사 소명국의 고변은 광해군을 더욱 자극시켰다.

장령 윤길(尹趌)과 정언 양시진(楊時晉)이 신경희(申景禧)와 함께 몰래 반역을 모의해 능창군을 추대하려 합니다. 전 부사 신경희가 말하기를 "새문동궁에 왕기가 있는데, 신성부인(信城夫人, 신립의 딸)은 여자 중의 남자이며, 능창군은 배우지 않고도 글을 잘하고, 또 그 친족에는 무술에 익숙한 이름난 무인 2,3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연려실기술』 권21, 「폐주광해조기사본말」 신경희지옥 능창군)

광해군은 평소 정원군의 아들들이 인망이 있음을 꺼려 했다. 그런데다가 신경희가 임진왜란 때 충주에서 죽은 신립 장군의 집안이며, 능성구씨 가문에서 시집 온 연주군부인의 외사촌이었기 때문에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신경희의 평산 신씨 가문은 능성 구씨 가문과 함께 당시 이름 있는 무인 집안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경희를 비롯해 소명국의 고변에 등장한 윤길ㆍ양시진ㆍ황란수ㆍ문경천(文擎天) 등 관련자들은 고문을 견디다 못해 죽고 말았다.

능창군은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되었다. 그 동안 수많은 옥사와 억울한 죽음을 보고 들었던 능창군은 자신도 얼마 안 있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는 위리안치되어 있던 중 자신의 수발을 정성껏 도맡아 온 고봉생에게 부모에 영결을 고하는 편지를 전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으니, 이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고봉생은 편지를 감추어 두었다가 인조반정 후 인조에게 바쳤고, 그 공으로 그는 천인 신분에서 해방되었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과 적자인 영창대군이 있었기에, 늘 왕권에 대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대북당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시키는 등 무리수를 계속 둔 것도 그런 광해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대북의 이이첨 등은 역모를 조작해 정적을 소탕하는가 하면, 관직을 팔아먹고 과거를 변칙적으로 운영하는 등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파행을 거듭했다.

대북의 전횡은 인목대비를 폐비시킬 때 절정에 달해, 북인 중에서도 이를 반대하는 정온(鄭蘊) 등의 중북(中北)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대북 정권을 공격하는 상소도 끊이지 않았다. 더욱이 이이첨ㆍ허균ㆍ박승종 등 대북의 실력자들 사이에서도 권력 투쟁이 벌어져 허균이 처형되는 등 난마와 같은 정국이 계속되었다. 서인과 남인계 인사들도 대북을 견제하고자 했으나, 정계에서 발붙이기조차 힘들었다. 이러한 정황은 이항복 문하의 서인이 반정을 모의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8. 광해군의 대 후금 정책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 몇 차례 교섭을 가진 끝에 1608년(광해군 1) 기유조약(己酉條約)이 체결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지만, 대륙과의 관계가 새롭게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여진족(女眞族)의 흥기와 명과의 충돌, 그에 따른 명으로부터의 청병 문제와 후금(後金)과의 교섭 문제 등 풀기 어려운 상황들이 계속 전개되었다.

만주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12∼13세기 무렵에 금나라를 세워 한때 그 세력을 떨쳤다. 그러나 금이 원에 망하고 이어 명나라에 복속되면서, 여진족은 건주여진(建州女眞)ㆍ해서여진(海西女眞)ㆍ여인여진(野人女眞)ㆍ의 세 갈래로 갈라졌다. 건주여진은 무순(撫順) 동쪽으로부터 압록강 연안 일대에 살았다. 해서여진은 장춘(長春)ㆍ길림(吉林) 일대에, 야인여진은 흑룡강(黑龍江) 유역에 살다가 남으로 연해주(沿海州)ㆍ압록강ㆍ두만강 유역으로 옮겼다.

명나라는 이 세 갈래의 야인에 대해 분열책과 회유책을 병행했다. 이들은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명나라와 조선에 종종 무역을 요구했다. 그리고 의도가 관철되지 않으면, 비록 소규모지만 변경 지방을 침략하기 일쑤였다. 특히 건주여진과 야인여진이 조선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곤 했다. 세종대에는 이들을 정벌한 후 국경 지역에 4군과 6진을 두었다.

16세기 초반 몽고족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여진족에게도 민족 의식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건주여진의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심양(瀋陽) 동쪽 흥경(興京, 지금의 老城)을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이룩했다. 누르하치는 이미 1589년(선조 22)에 여진족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국주(國主)라 칭한 상황이었다. 그는 팔기제(八旗制)라는 강력한 군사 조직에 근거하여 주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조선과 명나라 양국이 왜란에 시달리고 있는 틈을 타 더욱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1616년(광해군 8) 1월 후금(後金)을 건국하고 58세의 나이로 대한(大汗)의 위에 올랐다. 이가 바로 후금의 태조이다.

후금의 주업은 사냥과 고기잡이였다. 그런 만큼 경제 기반이 매우 취약한 형편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후금은 요동 일대에서 농경지 개척 사업을 추진했다. 당연히 명나라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1618년(광해군 10) 4월 누르하치는 명에 대한 선전포고인 '칠대한서(七大恨書)'를 발표했다. 칠대한서란 명이 까닭없이 자기의 조부를 죽이고 대대로 못살게 굴면서 민족 통일을 방해했다는 등의 일곱 가지 원한사를 말한다. 그러나 이 일곱 가지 원한이란 실제로는 후금의 병사를 고무시키기 위한 구실이었을 뿐이다. 후금은 단숨에 무순 등지를 점령하고 명의 변방을 위협했다. 이에 명나라는 요동경략(遼東經略) 양호(楊鎬)에게 후금을 정복하게 하는 한편, 임진왜란 때 10만의 병력을 지원해 준 사실을 들먹이며 조선에 원군의 파병을 요청햬다.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으로 보면, 당연히 출병해야 했다. 출병에 이의를 제기하는 조신들은 없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을 달랐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후금과 명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다. 후금도 조선에 대해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해 왔다. 그러므로 명의 요청을 들어주면, 후금에게 조선 침범의 구실을 주게 될 수도 있었다. 더욱이 훈련도 태부족한 병사들을 강제로 모병해보냈다가는 강을 건너기조 전에 변심해 난을 일으킬 지도 모를 일이었다. 여러 구실을 들어 좀더 사태를 지켜 볼 필요가 있었다.

명은 급기야 양호를 통해 단 1만 명이라도 파병할 것을 거듭 재촉했다. 광해군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었다. 마침내 1618년 7월에 형조참판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평안병사 김경서(金景瑞)를 부원수로 하고 포수 3,500명과 사수 6,500명 등 도합 1만 군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때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밀지를 내려 은밀히 지시했다.

우리는 대의명분상 어쩔 수 없이 출병하는 것이고, 우리의 힘은 약하니 후금을 적대해서는 안 된다.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 (『연려실기술』 권 21, 「폐주광해군고사본말」 심하지역)

1619년(광해군 11) 2월, 조ㆍ명 연합군 47만과 후금군 6만의 결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3월 초에 사르호산(薩爾滸山)에서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강홍립의 조선군은 완전 포위를 당했다. 이 때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후금과 은밀히 교섭하여 조선의 부득이한 입장을 강조하는 뜻에서 무조건 항복했다.

그러자 조선의 중신들은 강홍립의 항복은 신하의 절개를 잃은 것이라 하여 처자를 죄 주어야 한다고 들고 일어섰다. 물론 광해군은 이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강홍립의 항복은 출병 전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누르하치는 조선에 국서를 보내 조선 출병의 부득이함을 이해한다는 뜻을 표했다. 광해군도 좋은 표현으로 회신을 보냈다. 그 해 12월에는 후금에 막대한 물자를 보내어 호의를 보였다. 이에 누르하치는 강홍립 등 10여 인을 제외한 포로 전원을 석방했다.

한편 사르호산 싸움 이후 계속해서 심양ㆍ요양 등지를 뺐기면서 중원을 위협받게 된 명은 광해군의 친 후금 정책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명의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감독하자는 의견이 팽배했다. 이에 광해군은 병조판서 이정귀를 명에 보내 사르호산에서의 패배로 조선은 더 이상 힘이 없음을 극력 변명했다.

1621년(광해군 13) 심양과 요양을 후금에 뺐긴 후 명의 모문룡(毛文龍)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온 일이 있었다. 그는 의주를 근거로해서 후금에게 함락된 진강ㆍ구련성 등을 회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본의 아니게 조선이 명을 공공연히 돕고 있는 것처럼 비쳐졌고, 후금의 불쾌함은 역력했다. 이 때에도 광해군은 척화론자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정충신을 누르하치에게 보내어 조선의 어쩔 수 없는 입장을 힘써 변명하도록 했다.

적어도 광해군의 치세기에는 명이나 후금 어느 쪽과도 정면 충돌은 없었다. 그는 명의 쇠퇴와 후금의 흥기라는 국제 정세의 전환적 시잠에서 새로운 정복 국가의 대두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중 외교는 바로 국가의 보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 정책은 인조반정과 함께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세력은 의리와 명분만을 중요시한 친명ㆍ배금책으로 급선회했고, 그 결과 2차에 걸친 후금의 침략을 자초하게 된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7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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