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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8-15 (금) 14:00
분 류 사전3
ㆍ조회: 1258      
[조선] 광해조의 당쟁 2 (이성무)
광해조의 당쟁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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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

칠서의 옥

1613년(광해군 5) 봄, 서인의 거두인 박순(朴淳)의 서자 박응서(朴應犀)를 비롯하여 서양갑(徐羊甲)ㆍ심우영(沈友英)ㆍ이경준(李耕俊)ㆍ박치인(朴致仁)ㆍ박치의(朴致毅)ㆍ허홍인(許弘仁) 등 일곱 명의 서자들이 정협(鄭協), 출신(出身, 무과에 급제했지만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사람) 유인발(柳仁發) 등과 결탁해 모반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잡혀 들어왔다. 한때 이들 일곱 서자들은 소양강 가에 무륜당(無倫堂)을 지어 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거나 술을 마시는 것으로 소일하곤 했다. 이들은 스스로 강변칠우(江邊七友)니 죽림칠현(竹林七賢)이니 하면서 허균ㆍ이재영ㆍ이사호 등 중앙 관료들과의 친분을 이용해 벼슬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일곱 서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서얼에 대한 사회적 차별 탓으로 돌렸다.

우리들은 탁월한 재사이다. 다만 당대의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묶여 그 뜻을 펴지 못하게 되었다. 대장부가 죽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죽을 바에는 큰 명성을 낼 것이다. (『연려실기술』권 20, 「폐주광해조고사본말」박응서지옥)

이들이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도 할 것이다. 일곱은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모방해 형제의 의리를 맺고 언젠가 있을 병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출신 유인발(柳仁發), 선비 김비(金斐), 만호 김평손(金平孫), 수문장 박종인(朴宗仁) 등과 같은 호걸들과 사귀는 한편, 도적질로 재물을 모아 큰일을 벌이려고 했다. 서양갑은 1611년(광해군 3) 가을에 해주에서 소금 장수를 하다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 왔고, 정협ㆍ허홍인 등은 왕의 사신을 사칭해 부호 이승순의 집을 털었다.

그러다가 1613년 봄에 이들은 조령에서 은 장수를 죽이고 은 6, 7백냥을 강탈한 죄로 잡혀 온 것이다. 이들의 죄는 사형에 해당되었다. 그런데 포도대장 한희길 등은 이들을 문초할 때 일부러 지연 작전을 펴면서 박응서를 꾀어내기 시작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세울 수 있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서 진술하라. (『연려실기술』 권 20. 「폐주광해조고사본말」 박응서지옥)

이 말에 귀가 솔깃해진 박응서가 마침내 커다란 참화를 부르게 될 허위 자백을 하고야 말았다.

우리들은 단순한 도적들이 아닙니다. 장차 큰일을 일으킬 생각으로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려 한 것입니다. 영창대군의 장인 김제남(金悌男)과 몰래 통해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을 삼으려 한 것입니다. (『연려실기술』권 20.「폐주광해조고산본말」박응서지옥)

이러한 고변은 이이첨이 친척인 이의승을 시켜 사주한 것이라고 한다. 사건을 심문하던 정항(鄭沆)은 그 자초지종을 왕에게 보고했고, 광해군은 이들을 친히 국문했다. 그리고 박응서는 약속대로 사면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모자 격인 서양갑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김제남ㆍ영창대군ㆍ인목대비를 한꺼번에 옭아 넣어 자백을 하고부터는 옥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서양갑은 김제남과는 서로 소식도 통한 바 없었다. 서양갑은 그의 어머니까지 모진 고문에 시달린 것을 보다못해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광해가 내 어머니를 죽이니, 나도 제 어머니(인목대비)를 죽여야겠다.(『연려실기술』권20.「폐주광해조고사본말」박응서지옥)

그는 거사를 김제남과 함께 모의했고 그 사실을 대비도 이미 알고 있다며 그럴 듯하게 꾸며댔다. 나아가 광해군이 아버지를 죽이고, 형을 죽이고, 그도 모자라 천척의 윗 항렬 부인까지 간음했다고 대들자, 사관조차도 차마 그의 말을 받아쓰지 못했다고 한다.

김제남과 영창대군의 죽음

이 사건으로 많은 관련자들이 문초를 받고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그 불똥은 어이없게도 김제남뿐만 아니라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에게까지 튀고 말았다. 국청을 통해 자백받은 내용 중에 "임금과 세자를 죽이고, 옥쇄를 가져다가 대비에게 주어 수렴청정을 하게 한 다음,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라는 대목이 문제가 된 것이다.

5월 4일, 사간원은 김제남의 관직 삭탈을 요구했다. 사실 김제남은 선조의 장인의 신분으로서 처신을 잘 하지 못해 사림에서 배척을 받고 있었다. 사간원의 지적을 빌자면, 대궐 안에서 하거 없이 유숙한다든지 한강의 별영(別營)을 제 마음대로 헐어 버리고 정사(亭舍)를 옮겨 짓기까지 했다고 한다. 김제남의 파면은 기정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뒤 대간에서는 신흠(申欽)ㆍ박동량(朴東亮)ㆍ서성(徐渻)ㆍ한준겸(韓浚謙)ㆍ유영경(柳永慶)ㆍ한응인(韓應寅)ㆍ허성(許筬) 등 선조의 비밀 유교(遺敎)를 받은 일곱 신하들을 공격하여 관직을 삭탈하거나 사판(士版)에서 깍아 버렸다. 일찍이 선조는 임종에 즈음해 한 통의 유서를 남겼다. 그 겉봉에는 대신들 7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영창대군이 아직 어려 미처 성장함을 보지 못하고 가는 것이 한스럽소. 내가 죽은 후에 인심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들은 대군을 잘 보살펴 주길 바라오. (『연려실기술』 권18, 「선조조고사본말」 광해사위)

대비는 처음에 선조의 유교를 빈청(賓廳에 내렸다가, 즉시 도로 거두어 봉해 버렸다. 이를 두고 이이첨은 "유교는 선왕의 글씨가 아니라 대비가 내시 민희건을 시켜 위조한 것이며, 7신하가 이를 보호한 것이다"라고 반론하고 나섰다. 7명의 신하들 중 당시 생존해 있던 이들은 모두 유교를 받은 사실을 부인했다. 그런데 이 때 박동량은 오히려 자신이 무죄임을 밝히고자 이른바 '유릉저주사(裕陵咀呪事)'를 털어놓아 대비를 곤경에 빠뜨렸다.

대비의 처소에 있는 사람들이 선왕의 병난 까닭은 돌아가신 의인왕후 박씨에게 있다고 해 수십 명의 요망한 무당과 함께 연달아 의인왕후의 능인 유능(裕陵)에 가서 저주하는 일을 크게 벌였습니다. (『연려실기술』 권20, 「폐주광해조고사본말」 박응서지옥)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173~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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