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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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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04      
[고려] 고려의 과학과 기술 (민족)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1. 인쇄기술

고려의 기술은 말할 나위도 없이 신라기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밖으로는 송나라 문화의 영향과 자극을 크게 받은 것이다. 고려의 기술적 발전을 대표하는 것은 목판인쇄의 발전, 금속활자인쇄술의 발명과 고려청자이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송판본(宋板本)을 몹시도 좋아하였던 지배층의 귀족적 취향을 충족하려던 서예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또 한편 불력(佛力)의 도움을 받아 거란과 몽고의 침략에서 나라를 구하려던 종교적 기원에서 불경의 조판이 시작되고 발전하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훌륭한 최고의 판목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의 ≪팔만대장경≫도 이렇게 해서 만든 것이다.

인쇄술은 사람이 한 글자씩 손으로 써 나가던 일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바꾸게 하였고, 목판인쇄에 의한 고정된 방법에서 목활자에 의한 움직이는 형태, 즉 활판으로 발전시켜 더 능률적인 작업을 하게 하였다.

이 목활자는 중국인이 11세기에 발명하였지만, 그 목활자를 금속공예에서 얻은 경험적 기술의 성과를 도입, 응용하여 더 견고하고 완전한 인쇄를 가능하게 한 금속활자로 발전시킨 것은 우리 나라이다.

고려의 공장은 금속활자의 주조에 필요한 모래 거푸집의 제조법을 알고 있었고, 금속활자에 알맞은 먹과 질 좋은 종이를 만들고 있었다. 이러한 기술적 요건이 갖추어지고 필요성과 경제성이 절실히 요구된 고려로서는, 목판이나 목활자 대신 금속활자를 만들어 쓴다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따라서 고려의 금속활자는 청동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고려공장이 발명한 것은 청동활자를 주조하는 주형이었다. 그것은 인쇄술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아마도 그 기술은 신라공장이 쌓아올린 수많은 청동제 대범종의 주조기술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 같다.

한국의 광산물 중에서 구리가 가장 많았다는 것도, 고려에서 청동활자에 의한 인쇄가 세계 어느 지역보다 일찍 시작된 요인의 하나가 아닌가 한다.

고려는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에 이르는 사이, 마침내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목판인쇄에서 드러난 문제점들을 우선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려의 청동활자인쇄술은 13세기 후 거의 200년 동안 별로 큰 발전을 보지 못한 것 같다. 고려인들은 목판과 목활자 제조에 따른 어려움을 해결하는 방법의 하나로 청동활자를 만들어 쓰기도 하였지만, 그 인쇄본은 훌륭한 송판본이나 원판본의 아름다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고, 인쇄 능률도 좋지 않아 목판본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릴 수가 없었다.

이러한 초기의 기술적 어려움이 새로운 발전으로 해결되기 전 고려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강화에 천도하여 40년 간이나 항쟁을 계속하여 청동활자인쇄술 발전의 기회는 사실상 막혀 버리고 말았다.

2. 고려청자

10세기 초 고려 도공들은 오랫동안 그들이 추구하던 비취옥의 신비로운 빛깔을 도자기에 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청자는 유약과 태토에 포함된 적은 양의 산화철이 환원해서 생긴 푸른 색의 자기이다. 그것은 우리 기술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자기 제조기술에 새 경지를 연 커다란 비약이었다. 고려청자의 제조는 그야말로 고도의 승화된 기술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청자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것은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청자의 고향이라고도 불리는 전라남도 일대, 특히 강진 등지에서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청자 가마터의 발굴과 조사 연구에서 해명의 결정적 실마리가 풀릴 가능성이 있다.

많은 실험적 분석과 공동연구가 병행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미술사와 기술사가, 그리고 과학자와 역사학자들이 함께 조직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고려청자는 흙과 불의 조화로 만들어진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즉, 가마의 구조와 쓰임새, 불질의 기술이 해명되어야 하고, 흙과 유약의 신비가 풀려야 한다.

고려 도공들은 기술적 바탕이 없던 상태에서 송청자(宋靑磁)를 모방해서 청자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일본사람들은 끝내 모방하지도 못하였던 기술이었다. 고려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 자연스럽게 해내었다. 선사시대 토기로부터의 오랜 기술적 축적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청자는 가마의 기술전통, 유약과 태토의 기술전통, 아름다운 선과 그릇 모양의 예술적 감각의 바탕과 전통 등을 이은 것이다. 처음에는 순청자를 구워내었다. 산기슭 비스듬히 자리잡은 가마에 그릇을 넣고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열이 일정한 온도에 오르면 아궁이를 막아 환원염이 되게 불을 조절하는 방법이다.

그릇은 고도로 정선한 태토에 나무나 풀을 태운 재를 주원료로 하고, 장석(長石)이나 석영의 규산 성분을 섞어 만든 유약을 입혀 불 속에서 1,350℃(어떤 것은 1,200℃ 내외) 정도의 높은 온도로 가열한다. 이때 유약과 태토의 겉이 한데 어울려 유리같이 매끄러우면서도 그윽한 비색(翡色)이 나타나는 것이다.

12세기 전반에 고려의 순청자 기술은 절정에 달하였다. 장식 무늬는 중국청자와는 달리 번잡스럽지 않고 간결하여 소박한 듯하면서 산뜻하다. 또, 그릇의 모양과 선은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예리한 각법(刻法)으로 수놓은 무늬는 비길 데 없이 아름다웠다.

유약을 입히는 기술 또한 아주 세련되어 엷고 고르게 발라 날렵한 자태를 간직하게 하였다. 실험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유약의 두께는 놀랍도록 일정해서 중국청자가 유약을 두껍게 발라 투박하게 보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순청자의 기술이 완성 단계에 이른 12세기 초, 고려 도공들은 도자공예에서 새로운 경지에 들어서는 기술을 창출하여, 상감청자를 개발한 것이다. 그것은 그릇의 거죽을 파고 그 속에 백토 또는 흑토를 메워서 청자의 푸른 바탕에 백색과 흑색의 무늬를 장식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의 개발로 고려청자는 그 아름다운 푸른색에 흑백의 선명한 도안이 화사하게 장식되기에 이르렀다. 상감기술은 그때까지 금속공예품이나 목공예품에만 쓰이던 기법이다.

금속의 표면을 파고 은이나 금을 박아서 장식하는 은입사(銀入絲)의 기법이 있었고, 목공예품의 표면을 파고 그 속에 자개를 장식하고 옻칠을 하는 나전(螺鈿)과, 얇은 쇠뿔판으로 장식하고 주칠을 하는 화각(華角)의 기법이 있었다. 그러나 도자기에 그러한 장식 수법을 쓴 것은 고려의 도공이 처음이었다.

이 기막힌 기술로 고려 도공들은 시원스럽게 날아가는 학의 모습과 청초한 국화, 그리고 냇가 풍경 등을 문양으로 해서, 청자의 화사하면서도 부드럽고 우아한 멋을 더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도자기술에서의 또 하나의 완성이었다. 고려 도공의 기술은 세계 최상의 송자기 제조기술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창조하였고, 중국인이 나타내지 못한 독특한 감각을 표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3. 천문·역법

고려 천문학은 관측천문학의 발달과 정확한 역(曆) 계산을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천문관측은 처음 태사국(太史局)과 태복감(太卜監)에서 맡아 보다가 1023년(현종 14) 사천대(司天臺)로 통합, 개칭되었고, 다시 사천대와 태사국으로 분리되었다가 1308년(충렬왕 34) 서운관(書雲觀)으로 통합되어 직제가 개편되었다.

서운관은 한때 중국의 명칭을 따라 사천감(司天監)·태사국으로 불린 일이 있으나, 고려 말까지 주로 서운관이라는 이름이 보편적으로 쓰여 조선시대까지 계승되었다.

천문관측을 위하여 서운관에서 어떠한 관측시설이나 관측기계가 사용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직 한가지 송도(松都) 만월대 서쪽에 고려 첨성대로 알려진 석조물이 있으나, 그 설립연대나 기능 및 설치된 의기(儀器) 등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고려 초부터 태사국에 영대랑(靈臺郎)·사신(司辰)·감후(監候) 등 천문관측을 위하여 일하던 기술직 관리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송도에 천문관측대와 관측기계가 있었을 것은 확실하다.

고려의 천문관리들은 그들의 중요한 의무의 하나인 천체운행의 관측을 끊임없이 계속하였다. ≪고려사≫ 천문지(天文志)에 집약된 475년간의 관측기록 중 132회에 달하는 일식(日蝕)의 관측기록이 있는데, 그것은 중세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남긴 기록에 맞먹는다.

또, 태양 흑점의 관측기록은 특히 주목된다. 그것은 ‘일중흑자(日中黑子)’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1151년 3월 2일 “태양에 흑자가 있다. 그 크기는 달걀만하다.”라는 것을 비롯하여, 1024년부터 1383년 사이 34회에 달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태양 흑점 관측의 주기성이다.

1151년 3월부터 1278년 8월까지의 사이에는 8년에서 20년마다 태양 흑점이 관측되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 천문학에 있어서의 평균주기 7.3∼17.1년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태양 흑점은 오수정(烏水晶)을 써서 관측하였다고 한다.

역법은 신라에서 쓰던 선명력(宣明曆)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런데 고려 초 중국은 이미 새 역법으로 고친 뒤였지만, 고려는 그것을 추산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중국에서의 잦은 개력으로 역법에 적지 않은 혼란을 가져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선명력의 오차를 그대로 끌어가면서 오랫동안 쓰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러한 오차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고려는 많이 노력하였다.

1218년(고종 5) 김덕명(金德明)이 만든 ≪신찬력 新撰曆≫·≪고려사성요서 高麗史星曜書≫·≪고려일력 高麗日曆≫ 등도 그러한 시도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들 역서들은 사실(史實)로만 전해지고 있을 뿐, 그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없다.

이때 정치적으로 원나라에 예속된 고려에게 원나라 세조는 곽수경(郭守敬)의 ≪수시력 授時曆≫을 보내와 채용하기를 명하였다. 이 역법은 중국 역법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역학자들은 ≪수시력≫의 개방술(開方術)을 완전히는 배워 오지 못하여 일월교식(日月交蝕)의 추산법을 몰라 어쩔 수 없이 선명력의 구법에 의하여 그대로 추보하니, 일월식의 추산에 오차가 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명나라 태조가 내린 대통력(大統曆)을 시행하기도 하였으나, 혼란이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었다.

4. 의학

고려시대의 업적으로 하나 더 들 수 있는 것은 고려의학의 성립이다. 우리 나라에서 의학이 체계적으로 기초지어진 것은 대체로 6, 7세기에 이르는 삼국의 전성시대였다. 중국의 의학을 바탕으로 해서 쌓아올린 우리의 의학에 한국산 의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도홍경(陶弘景)의 ≪본초경집주 本草經集註≫에는 11종의 한국산 의약이 적혀 있으며, 10세기 일본의 유명한 의서인 ≪의심방 醫心方≫에는 백제와 신라의 의서에서 처방이 인용되어 있다.

9세기에 이르면, 22종의 한국산 의약이 중국과 일본의 의서에 나타난다. 고려의학은 이러한 전통 위에 성립되었다. 그리고 10세기에는 국립의학교가 창립되고, 의원(醫院)의 국가시험제도가 시행되었다.

그 뒤 12, 13세기에 걸친 송나라 의학의 적극적인 도입으로 ‘향약방’이라 불리는 고려의 독자적인 처방이 나오게 되어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 3권이 간행되었다. 이 책은 현존하는 우리 나라 최고의 의서로서 진귀하게 평가되고 있다.

12, 13세기에 이루어진 고려의학의 자주적 발전은 13세기 이후에 나타난 많은 고유의 향약의서(鄕藥醫書)로 완성되었다. 이 책들은 대부분 전해지고 있지는 않으나, 그 처방을 인용한 내용들이 조선 초에 간행한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 중에 남아 있어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고려 말기에 사용하던 향약의약서의 처방 내용을 종합해 보면, 대체로 당·송의 의약적 지식의 토대 위에 성립된 한국산 약재에 의한 각종 처방이 연구, 수집되어 이루어진 고려의약학의 자주적 발전의 결실이라고 볼 수 있다.

<전상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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