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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20:10
분 류 사전3
ㆍ조회: 1012      
[근대] 근대-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민족)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1. 개화기의 과학기술

아편전쟁 이후 대원군은 쇄국정책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무기기술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기초가 없어 실패하였다. 1876년 일본에 의해 강요된 개국(開國)이 이루어진 다음 적극적인 서구과학기술 수용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1881년 영선사행(領選使行)의 텐진(天津) 파견과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본 파견은 서구과학을 받아들이겠다는 조선정부의 강한 의지의 표시였다. 영선사행은 38명의 장인(匠人)과 학생들로 이루어졌고 서구기술을 배우는 것이 목적이었으나 별다른 준비와 뒷받침이 없이 단시일에 서둘렀으므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62명으로 된 신사유람단은 석달 동안 12반으로 나누어 일본에서 정착되어 가는 서구과학의 여러 분야를 성공적으로 시찰하고 돌아왔다.

한말의 지식인들은 극단적인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과 서양문물의 선택적인 수용을 주장하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880년대에는 한걸음 더 나아간 개화론이 득세하게 되었다. 개화사상은 동도서기론이 지키려는 전통적 가치를 거부하고 전면 서구화를 지향하였다. 개화는 어느 틈엔가 진보적 지식인뿐 아니라 정부의 방침이 되어버렸다.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유길준(兪吉濬) 등은 일본에 남아 학생이 되었다. 유학생 파견은 갑오개혁 이후에야 실현되었으며, 1895년에는 182명의 유학생이 일본으로 갔다. 그들은 대다수가 게이오의숙(慶應義熟)에서 단기간의 기초교육을 받았다. 그 가운데 고등교육을 받은 학생은 극히 적었다.

1899년에는 6명이 도쿄(東京)고등공업학교의 색염과와 응용화학과를 졸업하였고, 다른데서 측량·광산학 등을 마친 사람들도 있었다. 1900년대에 가서야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이 늘어났고 조선공학을 전공한 상호(尙灝)가 1906년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도쿄제국대학 공학사가 되었다. 1911년에는 유전(劉銓)이 교토(京都)제국대학 제조화학과를 졸업하였다.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규(朝美通商修好條規)가 맺어지고 이듬해 보빙사(報聘使)가 미국에 파견된 것을 계기로 서구과학이 직수입되는 길이 열렸다.

정부는 일본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접근하는 정책을 폈다. 미국도 한국에게 선진기술을 가르치겠다는 호의를 보였다. 보빙사 일행은 미국 각지를 돌며 새로운 문물을 익히기에 열중하였다. 그 가운데 수원(隨員) 최경석(崔景錫)은 귀국 후 미국의 종자와 가축을 들여와 모범농장 농무목축시험장(農務牧畜試驗場)을 만들기도 하였다.

보빙사의 수원이었던 유길준은 일행에서 떨어져 최초의 한국인 미국유학생이 되었다. 그는 갑신정변(甲申政變) 소식을 듣고 공부를 중단한 채 귀국했지만 이 정변이 실패한 뒤 일본을 거쳐 미국에 유학한 변수(邊燧)와 서재필(徐載弼)은 1890년대 초 각각 매릴랜드농과대학(Maryland Agricultural University)과 컬럼비어의과대학(Columbia Medical College)을 졸업,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돌아온 보빙사 일행의 요청으로 서양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육영공원(育英公院)이란 학교를 세웠다. 육영공원은 미국인 아펜젤러(Appenzeller, H.G.)와 스크랜턴(Scranton, W.B.)에 의해 세워진 배재학당, 이화학당과 함께 1886년 설립되었다.

거기서는 미국에서 교사를 초빙해 양반과 고관의 자식들에게 과학을 포함한 서구교육을 베풀었으나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8년만에 문을 닫았다.

1884년 청(淸)나라에서 옮겨온 미국 선교사 알렌(Allen, H.N.)은 갑신정변에서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을 치료해 준 것이 인연이 되어 고종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앨른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1885년 왕립병원 광혜원(廣惠院)이 생겼다. 이 병원은 곧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조선인들에게 서구의술의 혜택을 베풀었다.

1894년 제중원은 폐쇄되었는데 그 책임자였던 에비슨(Avison, O.R.)이 1만 달러를 미국에서 얻어와 1904년 세브란스(Severance)병원을 세웠다. 에비슨은 다른 5개 교파를 참여시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를 만들었다. 1908년에는 첫 졸업생을 냈고 이듬해 정식인가를 받았다. 이 무렵 지방에도 여러 교파가 나누어 병원을 세우고 의료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였다.

1883년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학교 원산학사(元山學舍)가 개항장 원산의 조선인 유지들의 힘으로 문을 열었다. 1909년까지는 29개의 사립학교가 생겼고 갑오개혁 이후는 정부가 각종 기예학교(技藝學校)를 세웠다. 기예학교의 설립은 1899년부터 본격화되었다. 우선 관립상공학교 관제가 반포되어 과학기술 교육의 제도적 기반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일본에서 전문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나와 교수진의 주축이 되었다. 우무학당(郵務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양지견습생(量地見習生)에 관한 규정이 마련되어 체계적인 교육이 가능해졌다.

의학에서도 제중원과 함께 관립의학교가 세워져 서양의학과 한의학을 병행한 교육이 시행되었다. 이어 관립 광무학교(鑛務學校)가 섰고 사립으로는 한성직조학교(漢城織造學校), 철도학교, 낙영학교(樂英學校) 철도과와 공업제조과, 흥화학교(興化學校) 양지속성과(量地速成科)가 설치되었다.

1900년대에 들어와 정부는 기술진흥 장려책의 일환으로 기술자들을 모아 경연대회를 열고 우수한 사람들에게는 포상과 함께 특허권을 주었다. 박람회를 열어 전국의 제품을 출품하게 함으로써 기술개발을 촉진하기도 하였다. 도량형 개량에도 노력을 기울여 전담기구를 설치하거나 기술인력을 기르는 조치가 취해졌다.

정부는 러일전쟁 직후 군기창(軍器廠)을 대폭 확대해 군사기술의 자체개발에 힘썼다. 총포·탄환·화약·가죽장비·피복 등의 제조소를 설치하고 많은 기술인력을 배치하였다. 1907년에는 황실에 직조·염색·양잠 등을 담당할 직조과를 만들어 직물기술의 발전을 꾀하기도 하였다.

1905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과학기술자들을 초빙해 공업전문과를 세우려 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음해부터 일제의 본격화된 침략에 대응해 학교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각지에서 활발히 일어나 공업기술학교 6개, 수리학교(水利學校) 4개, 광업학교 1개가 문을 열었다. 특히 1908년부터는 일제의 토지침탈을 막으려고 사립 측량학교가 백여 군데 생기는 붐이 일어났다.

한말의 대표적인 기술학교는 정부가 세운 상공학교(商工學校)였다. 이 학교는 제대로 자리도 잡기 전에 통감부 설치후 일제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면서 1906년 관립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로 바뀌었다. 그 목적은 실기에 능한 사람들을 단기교육으로 양성해 실무에 배치하려는 것이었다. 전습소에는 염직·도기(陶器)·금공(金工)·목공·응용화학·토목 등 6개 학과가 있었다.

전습소는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가내공업 실태를 조사해 지배정책 수립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제공하려 하였다. 둘째, 실습장에서 개량 공산품을 시범생산해 선정(善政)을 알리려 하였다. 셋째, 일본의 가내공업 장려를 대대적으로 지원, 선전할 자영(自營) 기술인과 기술교사를 양성하려 하였다.

그 뒤 각종 공업전습소가 지방으로 확대 설치되었다. 이것들은 공업자영자들을 속성으로 대량 양성해 지역에서 활동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공업전습소보다 수업연한이 짧았고, 실습 위주로 운영되었으며 규모도 훨씬 작았다. 또한 일본은 1905년 측량기술견습소를 설치하였고, 대구·평양·전주에도 차례로 출장소를 세워 측량기술 강습을 확대해 나갔다.

1900년 이후 서구과학 수용을 위한 마지막 노력이 처절하게 기울여졌다. 독립협회 등 애국계몽단체들의 실력배양운동의 요체는 과학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정치적 불안과 유교의 오랜 전통 때문에 성과는 부진하였다. 어느 정도의 결실을 보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2. 일제하의 과학기술

1910년 대한제국은 일본에 병합되었고 이제 서구과학의 수용은 일본의 손에 맡겨졌다. 일본은 초기의 무단(武斷)정치로부터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였다. 사이토(齊藤) 총독은 내선융화(內鮮融和)를 내세웠으나 그 속은 교활한 것이었다. 조선인은 하급관리·사무원·기능공으로 기르는 것이 조선총독부의 방침이었다.

대한제국의 관비생으로 일본의 이공계 대학을 마친 사람은 둘이었다. 병합 이후 1920년대 중반까지 이공계 유학생 14명 가운데 졸업생은 둘뿐이었다. 일제가 병합후 유학생규정을 개정해 조선인들의 유학을 철저히 통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3·1운동 이후 유학생규정이 완화되자 이공계 유학생 수는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것은 일제의 지원 때문이 아니라 조선인들 자신의 각성과 노력의 결과였다.

조선에서 첫 번째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인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5년에 세워졌다. 그전까지는 공업전습소와 몇몇 간이(簡易)공업학교가 있을 뿐이었고, 교육내용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교육열은 크게 높아졌는데 이를 수용할 상급학교는 없었다. 조선인들은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인들은 국채보상운동으로 모금된 수 백 만원의 돈을 합병후 민립대학 설립기금으로 돌려쓰려 하였다. 보성전문학교는 기금을 모아 학교를 확장, 개편하고 보성대학으로 명명하였다. 언더우드(Underwood, H.G.) 등이 주축이 되어 경신학교(儆新學校)에 대학부를 설치해 독립된 대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일제는 조선인들의 불만을 달래 사회안정을 도모할 필요를 느꼈고, 조선에 있는 일본학생들의 일부를 상급학교에 수용할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문을 연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염직·응용화학·토목·건축·광산 등의 학과를 갖추었다. 이 학과들은 전통산업의 개량과 총독부 통치의 원활한 수행을 위한 분야였고 기계·전기·금속 등 학과는 중일전쟁 이후에야 설치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비율을 2:1로 정하고 출발하였으나, 불이익을 주어 조선인은 소수로 전락하였고 1922년부터는 일본인 중심의 학교가 되고 말았다.

대학에 이학부·공학부를 개설해야 한다는 조선인들의 열망은 컸다. 1920년대 민립대학 설립운동 때도 이학부·공학부를 만들 계획이 있었다. 1930년대 초 보성전문학교를 이과·공과를 포함한 대학으로 승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좌절되었다.

결국 이 꿈은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함에 따른 전쟁을 위한 과학연구의 필요에 의해 1938년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 예과를 설치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공학부는 일본의 제국대학에는 없는 특이한 것으로 이학은 공학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이학은 공학과 직접 관련 있는 몇몇 분야에만 한정되었다. 이공학부는 물리학과·화학과·토목공학과·기계공학과·전기공학과·응용화학과·광산야금학과로 이루어졌다. 수학과 지질학은 강좌 개설에 그쳤다.

교수진은 전원 일본인이었으며,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3회 나온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은 36명으로 전체의 30%에 지나지 않았다. 경성제국대학도 다른 고등교육기관처럼 일본인 중심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학부는 물리학과 출신 5명뿐이었는데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밖에도 경성광산전문학교(1939), 연희전문학교 수리과(1915), 대동공업전문학교(1938)가 있었고, 의약계 9개, 농수산계 4개 학교가 있었다. 시험연구기관으로는 중앙시험소(1912), 지질조사소(1918), 연료선광연구소(1922), 경성제국대학 부설 대륙자원과학연구소(1944)가 있었다. 의약계, 농수산계에는 더 많은 연구기관이 있었다.

과학기술 학회도 몇 되지 않았다. 조선박물학회(朝鮮博物學會, 1923)와 조선화학회(1929)와 1940년대에 설립된 일본토목학회 조선지부, 일본공업화학회 조선지부 정도였다. 학회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한국인은 극히 드물었다.

조선박물학회만이 예외여서 많은 한국인들이 참여해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밖에 준학술단체로 조선광업회·조선건축회·조선철도협회·조선전기협회·조선토목건축협회가 있어 때로는 학술연구 발표를 하기도 하였다.

<전상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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