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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23 (월) 19:43
분 류 사전3
ㆍ조회: 2589      
[근대] 대한제국 시기의 기업 (민족)
기업(한말의 근대기업)

세부항목

기업
기업(개항과 민족기업의 태동)
기업(한말의 근대기업)
기업(일제강점기의 민족기업)
기업(광복 후의 기업)
기업(참고문헌)

민족자본의 기업활동은 189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크게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비단 상사회사뿐만 아니라 산업의 각 부문에 걸쳐 근대기업회사가 설립된다. 즉, 근대 금융기관인 은행의 설립이 성행하며, 운수·광업·제조업 부문에서도 각종 기업회사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이후 191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민족회사의 설립실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금융업

민족은행 설립의 필요성은 이미 일찍부터 논의되어 왔으나 갑오경장 이후 그 운동이 구체화되어, 우리 나라 최초의 은행인 조선은행이 1896년에 안경수(安去壽)·김종한(金宗漢)·심상훈(沈相薰) 등의 발기로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한흥은행(韓興銀行)·제국은행·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한일은행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으나, 한말의 정계가 불안한 가운데 자금의 뒷받침이 튼튼하지 못하여 그 중 일부는 개점 수년 후에 폐업되고, 한성은행·대한천일은행·한일은행만이 존속할 수 있었다. 이 민족은행의 설립에는 귀족의 토지자본과 거상들의 상업자본이 주도적 구실을 하였다.

(2) 수송업

철도와 광산은 한말에 열강들이 서로 다투어 개발권을 얻고자 한 이권이었고, 따라서 뜻있는 민족기업가들은 이것만은 민족의 힘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철도는 거액의 자본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것이므로, 민족기업가들은 뜻은 있어도 손쉽게 착수할 수 없는 사업이었다.

우리 나라 철도업의 선구자는 부산 경무관을 지낸 박기종(朴琪淙)이었다. 그는 1898년에 부하철도회사(釜下鐵道會社)를 설립하고 부산과 하단(下端) 간의 철도부설을 기도했으며, 1899년에는 대한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서울과 의주 간의 철도건설, 1902년에는 삼마철도(三馬鐵道) 건설을 기도했다. 그의 계획은 자금부족과 일제의 방해로 완성을 하지 못하였으나, 그러한 운동은 우리 정부와 민족기업에 큰 경종이 되었다.

기선업(汽船業)에서 우리 나라의 해운권은 개항 후 진출한 일본의 거대 상선회사인 일본우선주식회사(日本郵船株式會社)와 대판상선주식회사가 거의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민족기업가들은 이 독점운수가 민족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생각하여 자본을 모집하고 외국선박을 구입하여 약탈당한 운수권을 회복하고자 힘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900년 7월에는 안영기(安永基)의 대한협동우선회사(大韓協同郵船會社)가 설립되고, 같은 해에 이윤용(李允用)·이영균(李泳均) 등의 인천우선회사(仁川郵船會社), 이재극(李載克)·민영철(閔泳喆) 등의 인한윤선주식회사(仁漢輪船株式會社) 등이 설립되었으며, 1903년에는 김일진(金一鎭)의 의령상선회사(宜寧商船會社)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막대한 자본이 들어 가는 기선업에 민족자본은 너무나 미약했다. 그 밖의 운수업도 해상운수권을 일본에 약탈당한 민족기업가들은 비교적 소자본으로 운영할 수 있는 육운업(陸運業)에 적극적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897년에는 안경수·김기영·백완혁(白完爀) 등의 발의로 마차회사(馬車會社)를 설립, 인천∼서울 간의 운송을 담당했다.

또, 1899년에는 조의연(趙義淵)·민영준(閔泳駿)·조병하(趙秉夏) 등이 주동이 되어, 연안운송을 목적으로 이운사(利運社)를 조직하였다. 그 밖에 1901년에는 통운사(通運社), 1903년에는 통동회사(通同會社) 및 종선회사(從船會社), 1906년에는 창성사(昌盛社) 등이 설립되었다.

또, 철도용달회사로는 1899년에 박기종·이규환(李圭桓) 등의 철도용달회사, 1900년에 김기락(金基洛) 등의 경부철도역부회사 (京釜鐵道役夫會社) 등이 설립되었다.

(3) 제조업과 광업

제조업 중에서 민간기업인이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은 역시 방직공업이었다. 개항 후 대량으로 수입된 상품은 면사 및 면직물이었고, 또 그것은 대중수요품으로서 판로도 날로 확대되어 갔다.

그리하여 국내 민간기업인은 대표적인 방직공장으로서 대한직조공장·저마제사회사(苧麻製絲會社)·종로직조사(鐘路織造社)·김덕창직조공장(金德昌織造工場)·한영서원실업장(韓英書院實業場) 등을 설립하였다.

그 중에서 안경수 등이 주동이 되어 설립한 대한직조공장과 저마제사회사는 당시 국내정세의 변동 및 자본부족 등으로, 생산실적을 올리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종로직조사는 종로백목전(鐘路白木廛)이 주동이 되어 1899년에 건립한 것이며, 초대 사장에는 민병석(閔丙奭), 부사장에는 이근호(李根澔)가 취임하였다.

김덕창 직조공장의 김덕창은 전래의 기업가 출신이었고, 그는 일찍부터 소규모의 가내공업을 경영하였으며, 근대적 공업제품이 다량 수입되자 서구식 기계를 도입하여 공장공업으로 발전시켰다.

한영서원실업장은 1904년 윤치호(尹致昊)에 의해 한영서원이 설립됨과 동시에 학생들의 실습장으로서 직조공장을 병설한 것인데, 제품의 품질이 우수해서 호평을 받게 되었으므로, 주식회사송고실업장(株式會社松高實業場)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한말의 방직공장은 자본에서나 기술에서, 모두가 영세공업이었고, 수공업의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방직공장 이외의 각종 공업 부문에서도 근대공업 건립의 노력은 볼 수 있으나, 그 사정은 이와 비슷하였다.

광업 부문은 1900년에 한석진(韓錫振)이 해서철광회사(海西鐵鑛會社)를 설립하였고, 그 해에 김각현(金珏鉉)·하긍일(河肯一) 등의 강원도매광합자회사(江原道煤鑛合資會社)·흡통매광합자회사(縕通煤鑛合資會社)·해서철광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부문의 회사들은 자본 및 기술 부족으로 본격적인 채굴은 할 수 없었다.

(4) 상사회사

이 시기에도 물론 상사회사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 중 중요한 회사는 양군실(楊君實)이 1895년에 설립한 마포미상회사(麻浦米商會社), 1900년에 이백술(李伯述)이 설립한 석유목면회사(石油木綿會社)·이원오종회사(利原五種會社), 이근호·민소식(閔素植)의 광신교역회사(廣信交易會社), 강인규(姜寅圭)의 협상회사(協商會社), 김지선(金止善)의 광성천일흥업회사(鑛城天一興業會社) 등을 들 수 있다.

이 밖에 농수산업 부문에서는 채과회사(菜果會社)·상물회사(翔物會社)·남초회사(南草會社)·만삼광화회사(蔓蔘廣化會社)·종삼회사(種蔘會社)·양잠회사(養蠶會社)·해산회사(海産會社) 등이 있고, 제조업 부문에는 안경수·이재형(李在衡) 등의 저마제사회사, 이흥우(李興宇)의 구성수철회사(九成水鐵會社)·대한제국인공양잠합자회사(大韓帝國人工養蠶合資會社) 등이 있다.

기타 산업 부문에는 1903년에 설립된 한성전기주식회사, 최석조(崔錫肇)의 신석연초합명회사(信錫煙草合名會社), 이재순(李載純)이 설립한 청축회사(請築會社), 이근택(李根澤)의 전권회사(典卷會社), 김재정(金在政)의 흥업회사(興業會社)·한창회사(漢昌會社) 등을 열거할 수 있다.

(5) 한말기업의 쇠퇴

이상에서 보아 온 바와 같이, 갑오경장 이후 민족자본의 회사설립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며, 그것은 비단 상사회사뿐만 아니라 각종 산업 분야에서 근대 기업회사가 설립된다. 이 시기의 회사들은 초기 개화기의 회사와 같은 특권회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회사설립에서 일반 서민 출신의 기업가는 귀족 또는 관료 출신의 기업가와 합작하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일종의 특권을 기대해서라기보다는, 자금면 또는 회사설립 및 운영면에서 더 손쉬운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일본과 청나라 및 서구열강에 대항하며 민족자본으로 설립된 한말의 근대기업들은 1905년의 금융공황으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개항 이후 민족자본가들은 개화의 물결에 발맞추어 서구 자본주의 기술과 제도를 받아 들여, 1890년대부터는 서로 다투어 기업을 창립하고 있었던 터이므로, 이러한 시기에 뜻밖에 몰아 닥친 금융공황은 민족자본의 성장에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금융공황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인 재정고문인 메카타(目賀田種太郎)에 의해 단행된 화폐개혁에 있었다. 메카타는 1904년 9월 우리 나라에 부임한 뒤 우리 나라의 경제적 실태와 관습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폐 정리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가 구상한 이 〈신화폐조례 新貨幣條例〉는 1905년 1월에 발표되었고, 이것이 직접 원인이 되어 그 해 여름에 대금융공황이 일어났다.

화폐개혁 때문에 일어난 금융공황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은 것은 민족계 기업인들이었고, 일본인을 비롯한 외국상인들은 별로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리하여 1905년의 화폐개혁은 우리의 토착자본을 몰락시켰고, 우리의 토착자본을 일본자본에 예속시키는 역사적 전환기를 마련하였다.

<조기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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