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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25 (목) 08:22
분 류 사전3
ㆍ조회: 8743      
[근대] 조동호 (유정기념사업회)
조동호(1892-1954)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혁명가 호는 유정(榴亭)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299번지에서 출생. 본관은 풍양 조씨(豊壤趙氏) 회양공파(淮陽公派) 중 청교파(靑橋派)이고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신 증 이조판서(贈 吏曺判書) 철명공의 7대 주손(胄孫)이신 명하공(明夏公)(1862-1900)과 고령 박빈(高靈朴彬)(1864-1945)여사의 3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가세는 선산과 전답이 많아 대체로 부유한 편에 속했다. 소년 시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자라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08년 경성측량학교(京城測量學校)에 입학, 1910년 수료했다.

우리 나라를 섬 오랑캐에게 강탈당하고 백성들은 울분에 쌓여 있을 때 조동호는 동대문에 살던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과 친분을 갖게 되면서 서로 뜻이 맞아서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개성 이만규(李萬珪)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914년 12월 하순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남경(中國 南京)으로 망명하여 남경금릉대학 중문학부(南京金陵大學 中文學部)에 입학, 3년간 수학하면서 몽양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7년 졸업, 상해(上海)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는 구국일보(救國日報) 기자로 채용되면서 언론인의 출발이 시작되었으며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도 겸직했다. 박은식,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이사(理事)로 참여하면서 섬 오랑캐에게 반만년의 역사와 화려한 금수강산을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게 된다.

1918년 조동호는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과 6인이 발기인이 되어 조선독립과 청년학생 교양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했다. 당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할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에게 협조를 얻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영문으로 작성했다. 또한 김규식을 대표로 하여 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전문(獨立請願全文)」과 신한청년당의 취지서, 당헌, 당강을 작성하였으며 「신한청년(新韓靑年)」창간호에 실려있다.

창당시에는 6인이었으나 50명까지 당원수가 늘었다. 즉 신한청년당이 조직되면서 그일이 알려져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모여 2,8독립선언, 국내에서는 전국방방곡곡에서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며 3.1운동 후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가 수립되는 진원이 된다.

1919년 4월 상해 김신부로 22호에 신한청년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조동호와 여운형, 이동녕, 이시영, 손정도 등 독립애국투사 29인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조동호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忠淸道) 의원과 국무위원(國務委員)을 겸직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사료조사편찬부(史料調査編纂部)」를 설치하고 안창호, 이광수 등 10여명과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전4권을 편찬하였으며 임시정부 기관지로 이광수, 차이석(車利錫), 백성욱(白性郁) 등과 같이 상해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성경(聖經)에서 그 자체(字體)를 따서 한글 활자를 고심 끝에 제조하여 사용하였다.

유정 조동호는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받친 뜨거운 가슴의 독립운동가요, 곧은 언론인이였다. 우리 민족이 독립되는 그날까지 잠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1920년 중국인들과 합동하여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설립하였다.

1921년 이동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독립운동에 러시아가 도움을 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이동휘 국무총리 등 임시정부요인들인 조동호를 비롯하여 여운형, 이동녕, 노백린, 신규식, 박용만, 김규식, 조완구, 신채호, 최창식 등과 같이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출판위원이 된다. 또 1922년 10년후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목적으로 여운형, 김구,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여 취지서, 회헌, 회측의 기초 위원과 회계 검사원역을 맡았다.

1923년 12월 귀국하여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하고 봉천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에 봉직(奉直) 전쟁을 취재하면서 종군기 전지행(戰地行)을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중국의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내용으로 썼으며 마지막회에는 손문(孫文)씨가 민국원년(民國元年)에 북경(北京)에 다녀간 후 13년간을 해외로 표류하다가 북경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漢城)에 나타낼가 손선생의 이번 행동이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아니한다.」(1924년 11월 30일 북경에서)고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에 실려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1면에 썼다는 것은 용감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1925년 4월 17일 오후1시 전조선 신문기자 대회를 개최한다는 기회로「아서원」2층에서 일제경찰의 눈을 피해 당시 전국의 신문기자 등 19인이 모여서 조선의 독립과 민족의 계몽을 위하여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창당하고 7인의 중앙집행위원과 조직부를 담당한다.「코민테른」에 승인을 얻기 위하여 조동호는 정대표, 조봉암은 부대표로 하여 각기 모스크바에서 승인을 얻어내었으나 신의주사건을 계기로 귀국하지 못하고 상해 해외부에서 황동하다가 1928년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증거서류를 뜨거운 난로 속에 집어넣는 사건으로 서울 경성지법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과 증거인멸죄로 4년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이에 관한 기사는 당시 동아일보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어 있다.

1932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를 윤희중(尹希重), 조동순(趙東淳) 등의 출자로 인수 확장하여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무기명으로 항일 논설을 계속 집필하면서 젊은 청년들을 독립운동가 양성을 목표로 중국에 유학 보내다가 다시 2년간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했고, 또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을 하게 된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제거사건으로 결국은 조선중앙일보가 폐간하게 된다.

「조동호는 1917년 구국일보와 중화신보(2년), 독립신문(4년), 동아일보(2년), 조선중앙일보(4년) 등 여러 신문에서 총 12~13년간 언론으로 왜인들에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우리 동포에게는 희망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1938년 많은 옥중생활과 일제의 예비소집과 지나친 탄압을 받아 결국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에 친지가 경영하는 광산으로 피신하여 몸과 마음을 추수리게 된다. 당시 조동호는 회상하기를, 「내가 6년반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몰랐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옥중에 있으면서 성경을 몇 십번 읽었고 많은 기도로 고통을 참았다. 성경만큼 훌륭한 말씀이 없으며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라고 회상했다.

이미 국제정세는 일제패망을 예견하였으니 우리는 해방을 맞이 할 수 있다는 희망하에 1944년 8월초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마현리 속칭 '마제'라는 한강변에서 조동호, 여운형, 현우현 등 7,8명이 천렵을 가장하여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8월 10일 서울 경운동「삼광의원」현우현 집에 조동호와 여운형, 김진우, 현우현, 황운 등이 모여 비밀 결사인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정식으로 결성하여 조국 해방에 준비를 하게 된다.

건국동맹에서는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농민동맹을 조직했으며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내무부와 군사 위원회를 담당, 비밀히 활동하다가 8월 4일 부민관(府民館)폭파사건으로 관철동집회소(貫鐵洞集會所)에서 체포되어 경기도 경찰국에 투옥돼어 많은 고문을 받게된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민족은 그렇게도 기다렸던 해방을 맞게 된다.

조동호는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경기도 경찰국에서 출옥한다. 해방과 동시에 건국동맹에서 건국의 모든 준비를 마친 건국동맹 동지들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그간에 일제의 많은 고문으로 인한 지병이 심화되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6일후 8월 22일 모든 직책에서 사의를 표하고 경기도 수원시 교동 35번지에 사는 누님 조동소(趙東昭) 댁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쉬게 된다.

1946년 2월 어느 정도 몸을 추수린 유정 조동호는 친지의 주선으로 큰 한옥을 빌려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후배와 정치인 지망생들을 위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한다. 위치는 안국동 105번지이고 정치학교 이름은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였으며 처음에는 20~30명이었으나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100명을 넘지 못했다고 한다. 조동호는 하루 1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다른 선생들이 2~3시간 강의를 하였다. 유정정치학교는 조동호의 건강 때문에 끝까지 돌보지 못했으므로 지금은 어느 학교의 전신인지 분명치 않다. 또 같은 자리에 설립된「전국실업자동맹(全國失業者同盟)」위원장을 맡아 국민들의 경제 활동에 많은 힘을 썼다. 회원은 9만5천명이었다. 실업자동맹대표로 미,소 공동위원회도 참여하여 남,북의 합작통일에 참여했다.

후배들이 “선생님을 좌익이라고 하는데 그렇습니까?”하고 물었을 때 “맞는 말이다. 모두들 나를 좌익이라고 하고 좌익에서는 나를 변절자, 배반자라고 한다. 그 말이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우리 조국을 찾는 일이었으며 조국을 찾았으니 나는 승리자이다. 나는 인생의 성공자이며 내가 바라던 독립이 되지 않았는가." 라고 하였다.

1947년 4월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조직되자 정치협의회 위원과 서울시 위원장에 추대되었으나 여운형이 7월 19일 백주에 흉탄을 맞아 서거하자 그 일도 그만 두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金日成)이 러시아를 등에 업고 남침을 했을 때 조동호는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난 아해(아이)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건가. 이제 서로 원수가 됐으니 우리(남과북)가 합(合)치려면(남북통일)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라고 예견하면서 한탄을 했다.

6.25 전란이 일어난지도 이미 반세기가 지났건만 통일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그때 어찌 그렇게 예견했을가? 조동호는 그 후부터 수원 누님댁과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을 오가면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4년8월 15일(음) 한 많은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사로, 올곧은 성품을 보여준 선비로, 정론을 추구하는 언론인으로, 세상을 먼저 내다보는 예견자로 자신의 삶을 바쳤던 유정 조동호. 시간은 흘러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5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변한 것이 없다. 그가 당당한 붓으로 가르쳤지만 과연 우리의 언론은 그에게 얼굴을 들 정도로 당당한가. 그가 힘겨운 삶을 사는 민중에게 마음을 쏟아 부었지만 지금의 정치가들은 민중의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그러한 질문이 너무도 크고 방대하다면 조금 작게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과연 나는 조상들이 힘겹게 얻어낸 광복의 땅 위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발을 내 딛을 수 있는가. 얼마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가.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2005년 3월 1일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자녀는 2남 1녀이며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해월리 산24번지에 모셔져있다.

출전 : 유정 조동호선생 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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