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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6-23 (월) 18:50
분 류 사전3
ㆍ조회: 2365      
[근대] 일제강점기의 경제 (민족)
일제강점기의 근대기업

1910년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압으로 병합된 뒤 우리 민족의 근대적 발전은 크게 제약받았다. 조선총독부는 합병 직후 〈조선토지조사령 朝鮮土地調査令〉과 〈조선회사령 朝鮮會社令〉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경제법령을 발표했다. 1912년에 공포된 〈조선토지조사령〉에 따라 조선총독부는 8년여에 걸쳐 전국토의 세부측량을 단행했다.

이 조사사업에서 일제는 토지소유권이 분명하지 않다는 구실로 전체 경작지의 12.3%인 35만7000여 정보, 전체 임야의 58%인 294만 정보를 조선총독부 소유로 편입시켰다.

이러한 방대한 조선총독부 소유의 토지와 산림은 일본의 우리 나라 통치에 있어 주요 재원이 되었고, 또한 우리 나라에 진출하는 일본인에게 그 일부를 헐값으로 불하하여 그들의 경제활동 기반을 닦아주었다.

일제는 또 한국농촌에 대해서는 봉건적 현물고율소작료(現物高率小作料)를 근간으로 하는 소작농체제를 그대로 유지 강화함으로써 농민경제의 향상을 억제하였고 농촌의 근대적 발전을 저해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인구의 75%는 농업을 주업으로 하였다. 그 가운데 1933년부터 1937년까지의 상황을 보면 55.2%는 순소작인이며, 25.6%는 자작 겸 소작인으로서 그들의 경작규모는 1호당 1정보 미만의 영세농이었다.

1910년 12월에 공포된 〈조선회사령〉은 일제의 조선상공업정책을 집약적으로 표명한 것으로서, 이 법령이 목적한 것은 조선에 근대공업을 건설하지 않겠다는 데 있었다.

즉, 조선은 일본공업에 대한 원료제공지요, 상품판매지로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법령이 실시된 1910년대에는 조선 내에 진출한 일본인기업의 절대다수는 상사회사였고, 그 밖에 광공업 분야에서는 광산개발과 수출원석을 처리하는 제련공장, 수출면화를 위한 조면공장(繰綿工場)이거나 또는 수출미곡을 위한 정미회사(精米會社)가 고작이었다.

이 〈조선회사령〉은 1920년에 철폐되었으나 당시 그 철폐의 경제적 배경은 제1차세계대전 후 일본의 경제적 불황을 타개하는 방법으로, 일본 내의 유휴자본을 조선에 옮겨놓고자 한 것이다. 〈조선회사령〉이 철폐되었어도 조선의 공업건설은 활발하지는 않았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의 유휴자본은 군소자본이었고, 그들은 고율소작지대가 보장되고 있는 토지투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따라서 당시 조선의 근대공장공업의 건설은 부진하였다.

1929년 말 조선의 공업노동자수가 10만1900여 명이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근대공업의 실태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밖에 당시 조선 내 근대공업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경제지표를 들 수 있다.

즉, 1929년 말 조선의 산업생산액 중 농림·수산업은 전체의 78.6%, 광공업은 겨우 21. 4%였다. 그리고 당시 제조회사의 업종비율은 염직공업(染織工業) 4.7%, 화학공업 15.6%, 기계공업 7.1%, 식품공업 43.7%, 기타 잡공업 28.9%였다.

이와 같이 〈조선회사령〉이 철폐된 뒤에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정책에는 큰 변동이 없었으며, 조선은 여전히 일본의 식량기지와 상품판매지로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에 변화가 온 것은 일본의 만주침략 이후였다.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의 동북방을 장악하게 되자, 조선은 대륙전진기지로의 새로운 전략적 시각으로 재검토되었으며, 그때부터 조선의 공업화가 진전되었다. 1937년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전을 개시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 내의 경제체제도 더욱 강화되었다.

전시물자생산을 위한 정책으로서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량증산계획의 재실시와 산금(産金)5개년계획(五個年計劃) 및 조선의 중화학공업기지화계획이라는 세 부문에 걸쳐 집중적 개발을 단행하였다.

식량 특히 미곡증산정책은 일본의 식민지조선건설의 기본정책이었고, 따라서 병합 직후부터 조선총독부의 중점사업으로 진행되어왔으나, 1930년대 초 일본농민이 조선미 수입을 심하게 반대하자 조선산미증산정책은 일단 중지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본토침략을 개시하면서 대륙에 진출한 일본군대의 군량충당을 위해 조선미의 필요가 절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 1938년 다시 산미증식10개년계획을 세우고 강력히 추진시켰으나, 당시는 전시중이어서 화학비료생산의 부진, 농민징용에 따른 농업노동력의 부족 등으로 미곡증산계획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따라서 농민보유미곡의 징발을 강화하여 군량미를 보충했다.

산금정책(産金政策)은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킨 이후 팽창되는 국가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1938년 조선 내에 산금5개년계획을 수립하고 그 개발을 감행해나갔다. 중화학공업기지화정책은 일본 대재벌의 진출에 따라 1930년대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936년 삼척개발주식회사를 창설하고 영월과 삼척탄전 개발에 착수했고, 1937년 이래 종래의 일본제철주식회사·겸이포제철회사 외에 미쓰비시(三菱)광업주식회사 청진제철소·일본고주파중공업주식회사 성진공장·조선질소비료주식회사 흥남공장·조선이연금속주식회사(朝鮮理硏金屬株式會社) 인천공장에서 제철공업이 착수되었다. 조선마그네사이트개발주식회사도 창설되었다.

이와 같은 국방자원개발과 아울러 금속공업·조선공업·철도차량공업·무수주정공업(無水酒精工業)·화약공업·인조섬유공업 등 중공업이 전력자원과 지하자원과의 연결하에 북조선 일대에 건설되었다.

그 뒤 전쟁이 제2차세계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은 소위 결전체제(決戰體制)로서 경제운영의 근본을 규제한 국가계획을 수립하고 모든 국력을 이에 경주할 태세를 갖추었다.

위에서 보아온 바와 같이, 일본의 식민지치하에서 우리 나라는 하나의 국민경제단위로서 발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경제활동도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은 점차 높아졌고, 또 대중 속으로 확대되었다.

3·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참여운동은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민족의 근대적 경제의식의 발로였다. 1920년 〈조선회사령〉이 철폐되고 일본의 군소자본이 조선에 진출하여 각종 산업 분야에서 기업활동을 전개할 무렵, 우리 민족은 대중운동으로서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전국적 규모로 펼쳤다.

이 운동은 단순한 일화배척(日貨排斥)이 목적이 아니라 민족경제의 자립을 위한 근대기업활동에의 참여를 촉구한 운동이었다.

한편, 당시에 민중의 경제저항투쟁도 활발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의 협동조합운동이 전개되는가 하면 소작인의 소작쟁의가 일어나 봉건적 고율소작료에 반대하였고, 광산·부두 및 공장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도 치열하였다.

1920년대 초에서 1930년대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우리 민족은 근대기업계로 활발하게 진출했는데, 그것은 3·1운동 이후 민중의 경제의식이 높아진 까닭이다.

1938년말 현재 우리 나라 기업회사 총수는 5,413개 사였고, 그 중 민족계 회사수는 2, 278개 사로서 전체 회사수의 40%였다.

이것은 1920년말 현재 한국인 소유회사수 비율이 18.2%에 비하면 그 동안 민족계 회사의 증가는 상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계 기업회사의 성장은 극소수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영세기업회사의 수가 증가한 데 따른 것이다.

당시의 민족계 회사 2,278개 사 중 공칭자본금 50만 원 이상의 회사는 50여개 사에 불과하였고, 나머지 대부분의 회사는 자본금 10만 원 미만의 중소기업회사였다.

1938년 말 현재 우리 나라의 일본인 소유 1개 회사당 평균자본액은 30만5000여 원이었으나 한국인소유회사의 평균자본액은 5만3000여 원이었다.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중엽에 이르는 시기에 한국인의 근대기업계 진출이 활발해졌던 것은, 영세자본에 의한 중소기업 분야에서 겨우 그 활로를 개척해나갔음을 말해 준다.

1937년 일본이 중국본토 침략전쟁을 감행하였고,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확대함에 따라 일본의 전시경제체제는 강화되었고, 기업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대에 접어들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민간기업체를 그에 통합하는 정책을 단행하였다. 1942년의 〈중소기업정리령 中小企業整理令〉은 특히 조선인기업체가 정리대상이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기업의 몰락은 현저하게 나타났다.

<조기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경제(개항 후 서구문화의 수용과 시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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