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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9 (토) 16:12
분 류 사전3
ㆍ조회: 1978      
[현대] 대한민국10-과학 기술 (브리)
대한민국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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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

한국은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했고, 이미 1,000여 년 전에 10t이 넘는 종(鐘)을 주조했으며,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했을 뿐만 아니라 장영실(蔣英實)과 같은 위대한 발명가를 배출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기 극단적인 쇄국정치로 소위 산업혁명의 산물인 기계문명을 접할 기회가 극히 제한되었고, 35년 동안의 일제강점기에는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결국 현대적 과학기술에 관심이 모아지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였다. 물리학·화학·생물학 등의 이학사학위 취득자가 각 분야당 5~10명 내외였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대학 교수로 등용되어 과학교육이 시작되었으나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으로 다수의 학생과 교수, 교사, 교육시설, 교육재료 등을 잃었다.

전쟁 뒤 복구가 진전되었고, 교육환경이 점차 회복되긴 했으나 1962년부터 시작된 5개년사회발전계획안에 체계적인 과학기술진흥정책이 비로소 포함되었다. 경제발전은 과학기술의 진흥 없이는 이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5개년계획이 갱신될 때마다 과학기술관련 연구시설, 연구지원시설, 금융 및 세제의 조정, 이공계 인력양성 등의 의욕적인 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무역수지가 다시 적자로 들어섰다. 특히 무역개방압력과 기술보호장벽강화 등 국제적인 요인과 연구역량의 취약성 혹은 임금상승 등과 같은 국내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제조업의 경쟁력이 일시에 둔화되었다. 최근에는 외환관리의 부실로 인하여 IMF의 금융구제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연구투자는 감소했다.

과학기술진흥체제

1967년 과학기술진흥법이 제정되었고, 동시에 정부조직 내에 과학기술처가 신설되었다. 또한 과학 연구의 주체가 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1967)가 설립된 데 이어 1971년에는 과학인력 양성을 위한 한국과학원(KAIS)이 설립되었다.

1975년 한국표준연구소 등 정부출연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77년 한국과학재단이 발족되면서 주로 대학교수들에게 연구비가 지원되기 시작했다. 특히 1974년부터 조성된 대덕연구단지 내에 정부출연연구소들이 점차 자리잡게 되었고, 다수의 민간연구소들이 이 단지 내에 이주하거나 혹은 신설되었다.

특히 1981년 KIST와 KAIS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되었으나 1989년 학사부는 다시 연구사업을 수행하는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교육기관인 KAIST(한국과학기술원)로 분리되었고 1995년에 광주에 새로 대학원과정인 광주과학기술원(K-JIST)이 설립되었다.

1990년 정부는 대학에 탁월성연구집단 조성을 목표로 하여 우수연구센터(SRC/ERC)사업에 착수했다. 그간 20여 개의 SRC와 28개의 ERC를 선정해 집중적인 연구비 지원을 하고 있다.

1989년 발족한 한시적인 '과학기술자문회의'가 1991년 헌법에 근거해 '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로 개편되어 대통령을 자문하고 있다. 또한 1998년에는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구성했다.

또 종전에 과학기술부 등 관련부처에 속했던 과학기술 관련 정부출연연구소를 연구자율성을 높인다는 명분으로 기초기술, 산업기술 그리고 공공기술연구회의 3분야로 묶어서 국무총리실 산하에 두기로 하였다. 이 같은 새로운 체제가 실효를 거둘 때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연구역량은 크게 신장될 것이다.

연구인력

해방 후의 혼란과 6·25전쟁 등을 겪으면서 대학의 교육 여건은 매우 미약했고, 대학졸업생의 다수는 대학원 과정의 이수를 위해 해외유학을 떠났다. 특히 1950~59년에 약 5,000명의 대학졸업생이 유학을 떠났는데, 80% 이상이 미국에서 수학했다. 대학 교육의 여건이 갖추어지기 전에 국립·사립 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되었으며, 졸업생 수도 급증했다.

1962년부터 시작된 5개년사회발전계획이 추진되면서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소가 늘어났고, 산업체 부설 연구소도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연구인력의 수요도 크게 증가했다. 1985년 당시 연구원 수는 인구 1만 명당 10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1996년에는 29명으로 크게 늘었다. 그러나 일본의 52.3명, 미국의 36.6명과는 큰 차이가 있다.

연구원수가 한국은 13만 명, 일본이 67만 명 그리고 미국이 96만 명인 점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의 실제 연구인력수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연구원수뿐아니라 연구역량도 아직 뒤쳐져있다. 즉, 1997년 우리나라 과학자가 발표한 논문수는 1만 여 편인데 이는 국제비교 17위에 속한다.

최근 대학의 연구환경이 개선되고 있으나 교수 대 학생수 비가 평균 1대 30에 이르며 교수의 과중한 강의부담 때문에 연구역량을 일시에 제고할 형편이 못된다. 2000년까지 이공계대학의 교수 대 학생 비율을 1대 20으로 감축할 계획이지만 그 실현여부는 미지수이다.

연구개발투자

한국의 연구투자비율은 근래 선진국수준에 이르고 있다. 즉, 1980년 국민총생산(GNP) 대비 0.55%였던 것이 1997년에는 2.9%에 이르는데 이 수치는 일본(1996)의 2.83%, 미국(1997)의 2.64%와 견줄 만하다. 그러나 연구투자총액기준을 보면 1997년 한국이 128억 달러, 일본이 1,301억 달러, 미국이 2,065억 달러여서 각각 우리나라의 10배와 16배가 된다. 정부는 2002년까지 연구개발비를 정부예산의 5%수준, 그리고 GNP 대비 5%까지 끌어 올릴 계획이다.

연구추진현황과 전망

50년전 거의 황무지와 같았던 우리나라 과학기술을 오늘의 수준에 이를 만큼 끌어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과학기술의 진흥없이 경제의 부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역대 정부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도 일관되게 강력한 과학기술육성책을 추진한 까닭이다.

1962년 이후 사회발전 5개년계획이 반복 수립될 때마다 과학기술 육성을 위한 각종 시책, 제도, 기구들이 신설되었고 기술진흥확대회의 혹은 기술진흥심의회의 운용, 대통령의 자문을 위한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의 설치, 국무총리가 의장인 종합과학기술심의회의 운용, 정부조직내 과학기술처의 신설과 과학기술부로의 승격, 과학기술진흥법을 폐지하고 종전보다 더욱 강력한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특별법'의 제정과 그 안에 규정된 기구 및 제도의 개편, 신설 등 과학기술역량의 획기적 신장을 위해 의욕적인 정책을 펴나가고 있다.

기업체들은 자체의 연구개발역량을 제고하기 위해 자체 기구내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있다. 1985년 60여 개의 민간연구소가 1997년에 이르면서 3,000여 개로 증가하며 앞으로도 민간연구소 수가 늘어날 전망이다. 특히 기술보호장벽이 두터워졌고 특허 혹은 지적소유권 등 외래기술의 도입 혹은 모방이 어려워짐에 따라 기업체들은 연구소 설립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자체 연구능력의 축적없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절실함이 기업체로 하여금 연구소를 개설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이처럼 기업체 연구소가 증가하고는 있으나 연구능력을 갖춘 고급인력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나라 대학들이 재원의 부족, 교육 및 연구여건의 부실 등으로 인해 능력있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부터 기업체는 대학의 연구 인력을 활용할 목적으로 몇몇 대학에 첨단과학기술분야 연구소를 건립 기증하고 있으며 연구시설을 공여하거나 연구비를 지원하는 등의 방식으로 산학협동 연구체제를 구축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내에 건립된 신소재연구소, 기초전력연구소, 자동화연구소, 컴퓨터신기술연구소, 정밀기계연구소 또는 뉴미디어연구소 등은 기업체들이 기증한 건물들이다.

기업체에 의한 연구소 건물의 기증은 다른 대학으로까지 확대되었으며 산학협동 풍조 역시 전에 비해 크게 확산되었다. 또 많은 대학들이 대학구내에 과학기술 연구단지를 조성하여 중소기업의 기술지원을 위한 보육시설을 설치 제공하고 있다. 근래 경제의 침강사태에서 탈피할 목적으로 정부는 벤처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특히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든가 첨단적 생명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한 벤처산업이 대학을 중심으로 급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첨단적 기술의 경쟁력없이 산업의 발전을 기할 수 없다는 절박한 상황에서 비롯한 것이다.

정부 조직의 개편작업이 있을 때마다 과학기술처(부)의 존폐가 주요한 대상이었다. 원래 과학기술처는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의 수립, 연구개발 우선분야의 선정과 평가, 분석 혹은 연구개발투자의 조정 등 국가차원의 연구개발사업을 총괄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그 기능보다는 오히려 정부출연연구소 관리가 주요한 업무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이로 인하여 매번 과학기술처의 위상이 문제가 되었으나 1998년 정부조직 때 과학기술처가 부로 승격함으로써 총괄기능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99년 정부조직개편작업에서 과학기술부 산하 출연연구기관의 관리부서는 총리실로 옮겨졌고 과학기술 총괄기능은 대통령이 의장이 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로 넘어갔고 과학기술부는 이 위원회의 사무부처일을 맡게 됨으로써 과학기술부의 연구사업 조정 및 총괄기능이 오히려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가 대통령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장단기적 과제에 대하여 자문하게 되어 있어서 과학기술부의 기능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러나 과학기술부가 그 수임사항인 인력양성기능, 기초분야에 대한 연구비지원 기능, 그리고 국가적 연구과제에 대한 종합적 평가기구로서 그 업무를 충실히 한다면 과학기술역량의 제고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우수연구센터의 지원뿐 아니라 1992년 이래 선도적 연구 프로젝트(소위 G7 프로젝트)에 중점적으로 지원을 해왔다. 또 근래에는 대학 등 기초연구의 역량을 제고하기 위한 창의성 연구프로젝트 지원사업에 착수했다.

그동안 한국과학재단은 연구업적이 현저한 과학자에게 '한국과학상' 및 '한국공학상'을 수여해왔으며 최근에 창립한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매해 연구업적이 뛰어난 젊은 과학자들을 선정하여 '젊은과학자상'과 5년간에 걸쳐 연구장려금을 수여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은 노벨상 수상자를 주로 한 외국인 회원을 영입하는 한편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 아카데미와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또한 1999년에는 우리 나라가 유치한 최초의 국제연구기관인 ' 국제백신연구소(International Vaccine Institute)'가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 연구소는 세계 어린이 질병퇴치용 백신을 연구개발할 세계유일의 독립된 국제연구기관으로, 우리 나라가 소요경비의 일부를 지원하게 되어 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연구소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우리 나라는 인도적 사업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얻게 되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창립이나 국제백신연구소의 유치 등은 우리 나라 과학기술의 세계화에 일조할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 연구능력이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조완규(趙完圭)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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