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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9 (토)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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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737      
[현대] 대한민국13-문화 (브리)
대한민국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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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민족문화의 역사적 조망

문화란 오랜 역사의 학습과 축적의 소산이기에 대한민국 수립 이후의 문화만을 단절하여 서술하는 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따라서 한국문화의 전체적인 역사과정중 서양문화와의 만남 이전을 간단히 살펴본 뒤 그 이후를 중점적으로 개괄하기로 한다.

이때 문화현상 일반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존재의 궁극적인 차원을 다루는 종교라는 관점에서, 좁은 의미의 문화를 대표하는 예술의 전개과정 역시 종교와의 연관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관념적인 허구가 아니라 우리 문화의 실제적인 흐름과도 부합된다.

이렇게 볼 때 최초의 종교생할은 샤머니즘[巫敎]과 연결된 단계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이나 민간 습속에 남아 있는 잔영을 참고할 때 샤머니즘의 특징은 죽어서 거룩한 존재와 교제할 수 있는 새로운 존재로 재생한다는 신비적 체험이 음주가무를 통해 가능해지고, 무아의 경지에서 이루어지는 교령(交靈)을 통해 신의 뜻을 알아내고 영력을 빌어 재액을 없애며 축복된 인생을 창조하려는 것을 본질로 삼는다고 요약할 수 있다. 이를 '신바람의 예술'이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 단계의 예술적 활동은 개인에 의한 의식적 소산이기보다는 오히려 집단적 무의식의 발로라고 볼 수밖에 없다.

뒤이어 고등종교인 불교가 유입되면서 샤머니즘과 불교가 창조적으로 혼합되는 통일신라시대 이전까지를 하나의 단위로 묶어 이를 '힘의 예술'이라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이 단계에서는 대륙의 영향 아래 봉건적 국가권력과 신앙적 신의 위력이 합일되어 연관적 조화를 이루면서 권력을 과장적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그 창작의욕이 발현된다.

재래적 요소와 외래적 요소가 특색 있는 문화를 창조해가기 위한 이 과도적 단계가 지나가면 풍류도(風流道)와 연관된 단계, 즉 '꿈의 예술'이 펼쳐진다. 석굴암의 조각 등에서 그 전형이 발견되는데, 고대 그리스 예술의 '고귀한 단순과 고요한 위엄'과도 상통하는 특징을 드러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조형성보다 음악성이 좀더 강하게 느껴진다.

통일신라가 쇠퇴기를 맞이하면서부터 생동하는 정신과 육체의 균형된 표현이 좀더 내면으로 기울면서 '슬픔의 예술'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이로써 통일신라 후반기와 그 뒤를 이은 고려시대는 80년에 걸친 전성기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항상 불안 속에 살아갔고 그 전성기마저도 혼란기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슬픔의 예술'이라는 단계 설정은 아주 무리한 것은 아니다. 고려청자가 그 상징이자 실제적인 산물이라고 여겨진다.

다음 단계는 유교주의를 표방한 조선왕조로서 예술적인 표현세계에서는 소박·건실의 정신이 특히 평민성과 결합되면서 '멋의 예술'을 보였다. 이 단계에서는 '무기교의 기교'가 특징이라고 설명하는 이론이 비교적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자연을 단순한 이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관조의 대상으로 보는 넓은 의미에서의 자연주의는 서양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와 기계문명, 그리고 관료체제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물론 양식상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 정신에서는 18세기까지의 서양예술의 주류와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이는 동양예술 내지 그와 동류인 한국예술은 19세기말부터 이전과는 그 성격을 전혀 달리하는 서양적 보편성에 휘말려 들고 만다. 이 단계를 굳이 종교와 연관시키자면 그리스도교가 주목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본질이 비본래적인 상태로부터의 탈피를 뚯하는 '거듭남'(重生)이나 억압적인 상태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하는 '되살림'(復活)이라고 한다면, 서양과의 만남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해온 유교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고 그 생명력이 고갈되어가는 상황에서 우리의 문화예술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초기단계에서 볼 때 한국에 유입된 그리스도교는 서양문명이라는 이질적인 체계 자체와 동일시되면서 이른바 복음의 진정한 생명력을 충일하게 살려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서양의 문물을 우리보다 일찍 받아들여 이를 부국강병의 수단으로 삼아 주변국가들을 침공하고 식민지로 합병시킨 일본 제국주의로 인해, 서양문화와 그 원천이 되는 그리스도교적 원리의 수용은 더욱 왜곡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멀게는 1631년 정두원에 의해 가톨릭 서적과 함께 여러 가지 과학·기술의 문물이 소개된 이후, 서양은 직접·간접의 경로를 거쳐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불리기도 한 우리나라에 반드시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충격들을 안겨주었다.

문화·예술 부문에서는 1884년 〈한성순보〉의 해외 문화 소개 기사 가운데 음악·미술이라는 새로운 낱말이 출현했고, 1898년에는 비록 미국 화가 휴버트 보스의 손을 빌려서나마 고종과 황태자의 등신대 초상화가 처음으로, 서양식 화법을 사용해 그려졌다. 1909년 2월 고희동이 일본 도쿄[東京] 미술학교에 유학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화를 전공하게 되었다. 이같은 상황 변화를 '일제강점기의 신문화운동'이라는 관점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일제강점기의 신문화운동

신문화운동은 개화운동인 동시에 독립운동이라는 이중의 성격을 띠고 언론·교육·산업·종교·사상·여성·소년·형평(衡平)·국학·한글·문학·연극·미술·음악·영화·체육·의료 등을 포괄했다. 이러한 신문화운동의 단계 중 특히 3·1운동 이후부터 만주사변까지의 기간에는 민족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이 진흥되어 전국적으로 사립학교와 사립강습소 등이 설립되고, 마침내 민족의 성금으로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민립(民立)대학 기성(期成)운동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국어를 존중하고 문법을 통일하여 국어사전을 편찬하자는 한글운동으로 '조선어학회'가 창립되고, 큰사전을 편찬하는 단계까지 들어갔으며,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면서 민족사의 주체적·세계사적 발전상을 밝히려 한 민족주의 사학이 해외의 독립운동 전선과 국내 학계에서 일어났다.

예술문화의 영역을 살펴보면 우선 문학에서는 비로소 근대문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서구식의 단편소설·희곡·평론 등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문학적 성과는 1919년을 전후로 한 잡지와 동인지들의 발간에 크게 힘입었는데, 〈창조〉·〈폐허〉·〈백조〉 등이 그것이다.

연극에서는 신파조를 탈피한 신극 운동이 토월회를 중심으로 활발해졌으며, 영화에서는 나운규의 출현과 함께 비로소 볼 만한 영화가 상영되었다. 미술에서는 민간단체인 서화협회가 활발히 움직여 우수한 미술가들이 배출되었고, 음악에서는 홍난파를 중심으로 신음악운동이 일어났다. 예술로서의 무용도 최승희의 무용연구소가 서울에서 문을 열면서(1929) 본격적인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밖에 3대 민간신문인 〈동아일보〉·〈조선일보〉·〈시대일보〉와 〈개벽〉·〈신생활〉·〈신천지〉·〈동광〉 등이 신문화운동을 지지·격려했으며,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의 기관지 〈문예운동〉(1926)이 출현했다.

1931~45년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기치로 내건 동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민족적 역량을 총집결한 신간회가 해체되고(1931),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동맹원 70~80명이 검거되는(1931, 1934) 등 문학·예술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었다. 또한 수양동지회원 백수십 명이 검거되었고(1937), 창씨개명이 선포되는 한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민족적 색채가 짙은 신문과 잡지가 모조리 폐간되었다(1938).

1938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어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발표하고(1941),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하여 수십 명의 문화인을 검거하는 등 문화운동을 근저로부터 괴멸시키려 했다. 이때는 일제의 계속된 탄압과 회유에 의해 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변절한 어두운 시대이기도 했다.

예컨대 1939년 일제는 친일 반민족 문학단체인 조선문인협회를 조직했으며, 1941년에는 당시의 대표적인 문예지 〈문장〉과 〈인문평론〉을 폐간시키는 대신 일본어전용의 〈국민문학〉을 내놓게 했다.

해방직후의 상황

해방직후(1945. 8. 15~1948. 8. 15)는 참으로 역동적 시기였다. 해방공간이라고도 불리는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도 정치적 상황의 격동에 따라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좌·우익의 구분에 따른 수많은 단체와 조직들이 명멸했다. 그러나 그 혼돈의 와중에서도 그 이후의 6·25전쟁을 전후한 시기와 대별할 때 매우 고양된 문화·예술 활동이 진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해방직후 문화예술인들의 대응이 가장 먼저 표출된 사건은 좌익 문학인들을 중심으로 한 조선문학건설본부의 결성이었다. 이 조직은 이후 조선문학가동맹(1945. 12)으로 변화했으며, 이에 대응하여 우익계에서는 전조선문필가협회(1946. 4)를 결성했다. 미술계·음악계·연극계 등에서도 이러한 사태는 마찬가지였다.

미술계의 경우는 해방직후 정치적 성격이 아직 선명하지 않았던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동양화·서양화·조각·공예·아동미술·선전미술 등 각 분야를 망라하여 성립되었으나(1945. 8), 좌익계의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이 따로 결성되자(1945. 9) 해체되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미술동맹을 중심으로 조선미술가동맹이 결성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가 해체된 후 우익계의 미술단체로는 고희동을 회장으로 한 조선미술협회가 생겨나 두 단체가 대립했으나, 단독정부 수립 후에는 미술동맹이 도태되고 조선미술협회가 대한미술협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연극계의 경우도 해방직후 아직 좌·우익의 뚜렷한 구별 없이 조선연극건설본부가 성립되었지만, 이후 좌익계의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이 결성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연극건설본부 내의 좌익계와 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이 합쳐 조선연극동맹을 발족한 후 일제잔재 소탕, 봉건유제 청산, 국수주의 배격, 진보적 민족연극수립, 진보적 국제연극과의 제휴 등을 강령으로 내세우고 그 산하에 조선예술극장 등의 극단을 두었다.

한편 조선연극건설본부에서 이탈한 우익계 연극인들은 1947년 유치진 등을 중심으로 극예술협회를 성립시켜 순수연극과 순수예술주의를 지향했다. 이후 대한민국 수립으로 좌익계 연극인 대부분이 월북해버리자, 극예술협회가 연극계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이러한 단체들의 결성·해체·재결성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상황은 전체 문화·예술인들을 대표하려는 시도로 좌익계의 조선문화단체총연맹(1946. 2)과 우익계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1947. 2)가 결성되는 것으로 하나의 정점을 맞는다.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의 경우 첫째, 해방 도상의 모든 장벽을 철폐하고 완전 자주독립을 촉성하며, 둘째, 세계문화의 이념에서 민족문화를 창조하여 전세계 약소민족의 자존을 옹호한다는 등의 강령을 내세웠다. 이를 통해 민족문화를 수립하겠다는 좌·우익 공통의 명제가 현실 속에서는 합치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흔히 가장 비정치적인 활동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음악의 경우를 들어 당시의 상황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이 시기는 다시금 제1기(1945. 8. 15~12. 31), 제2기(1946. 1. 1~1947. 8. 15), 그리고 제3기(1947. 8. 15~1948. 8. 15)로 세분될 수 있다.

제1기에는 민족음악에 대한 해석자의 입장에 따라 악단이 정비되고 여러 가지 조직이 결성되면서 민족 좌·우파의 틀이 잡혀갔다.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조선음악가동맹이 결성되었는데(12. 31), 이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음악동맹(9. 15 결성) 전체와 조선음악가협회(10. 22 결성)의 일부를 흡수해 7대 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은 일제잔재 음악의 소탕, 봉건주의적 유물 음악의 청소, 음악의 국수주의적 경향 배격, 악단의 반민주주의적 세력의 추방, 민족음악 유산의 정당한 계승과 외래음악의 비판적 섭취, 진보적 민주주의·민족주의 문화의 건설, 국제음악과의 교류협조 등으로 되어 있다.

이 음악동맹은 12월말에 이르러 민중국악운동을 내세운 국악원(10. 10 결성)과 연계되어 민족좌파로서 골격을 형성하면서 고려교향악협회-고려교향악단, 조선음악가협회(10. 22 결성), 이왕직아악부의 후신 구왕부아악부가 연계된 민족우파와 대립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제2기에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안(1945. 12. 27)이 알려진 뒤 민족 현실에 대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좌·우익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벽두에 음악동맹은 국악원과 함께 조선문화단체총연맹(문련)에 참여하여 집단 역량화를 꾀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1946년 8월 15일부터 1년 동안 스스로 내건 강령을 구체화하고자 했다.

같은 시기에 전국음악문화협회가 현제명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우익을 대표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채동선을 중심으로 한 고려음악협회가 결성되어(1947. 2), 음악동맹의 비조선적 유물론이나 현제명 세력을 동시에 비판하면서 민족자결 정신 아래 정통음악예술의 연구 창작 및 연주 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우익 주도적 입장을 내세웠다.

채동선은 반탁을 표방하여 우익의 조직체와 맥을 같이했으나, 이후 제3기에는 미군정과 당국의 문화정책 및 사대주의적 극우파를 신랄히 비판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길로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다.

제3기는 미군정과 관계당국이 좌익계열의 모든 단체들을 비합법 단체로 규정한 1947년 8월 15일부터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기까지의 1년간이다. 이때 문련뿐 아니라 민주주의 민족전선 산하의 모든 정당·사회단체·음악단체가 불법화되었는데, 음악단으로는 국악원·조선가극동맹·대중음악가협회, 그리고 음악동맹이 해당된다.

음악동맹을 제외한 다른 단체들은 자체 조직 개편으로 변화된 상황에 대응했지만, 음악동맹의 김순남 등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는 월북한 후 북한에서도 1953년 '반동예술인'으로 몰려 숙청되어 악보 그리는 작업으로 연명하다가 1986년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수립 이후의 문화·예술

1948년 8월 15일 남쪽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북쪽에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해방 후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던 민족의 염원은 좌절되었다. 더구나 6·25전쟁으로 인한 남북분단의 고착화는 좀체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민족성원들에게 안겨주었다.

월북·체포·구금·처형·잠적·자수·납치·살해 등의 단어들은 비단 앞에서 예시된 음악의 세계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분단상황 아래 전개된 민족 문화·예술은 남·북 그 어느 쪽도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다. 그러나 문화·예술은 자유를 생명으로 삼는다는 전제에서 본다면, 자유민주주의를 목표로 하는 대한민국에서 상대적으로나마 좀더 넓은 발전의 여지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1948년 이후의 상황은 대략 제1기 정부수립부터 휴전까지(1948~53), 제2기 휴전부터 5·16군사정변까지(1953~61), 제3기 5·16군사정변부터 제5공화국까지(1961~87), 제4기 6·29선언 이후 현재까지로 나누어 관찰할 수 있다.

제1기 정부수립부터 휴전까지

정부가 수립되었다고는 하나 식민지적 상황으로 인해 국가 건설에 필수적인 경제기반이 붕괴된 상태에서, 사상대립으로 인한 치명적인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겹치면서 문화·예술이 뿌리를 내릴 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전쟁을 겪는 동안에는 예술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 역시 빈곤과 공포 속에 떨어야 했고, 본래의 예술과는 구별되는 선동·선전 기능의 수행이 그나마 공식적인 활동의 거의 전부를 차지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순수예술을 지향하는 예술활동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반일을 내세우면서도 인력부족 등을 이유로 친일적 요소가 철저하게 정리되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의 대중문화가 밀려들자 주체적인 민족문화의 건설은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휴전협정은 또 하나의 단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기 휴전에서 5·16군사정변까지

1953년 7월 휴전을 맞이했으나,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좀처럼 복구되기 어려웠다. 더구나 국가안보를 명목으로 국가권력을 1인 내지 1당 독재체제 아래 영속시키려는 부정·부패는 민족정기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에서도 끈질긴 예술적 노력들은 적지 않은 성과와 새로운 시도들을 낳았다.

우선 특징적인 것은 전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실존주의에 의지한 예술적 산물들이 특히 문학분야를 중심으로 하여 큰 흔적을 남긴 것이다. 이들 작품은 대개 전후의 정신적·물질적 폐허 앞에서 인간조건으로서의 삶과 죽음, 그리고 생존의 근거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으며, 나름대로 휴머니즘에 입각한 답변을 시도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로는 손창섭의 〈혈서〉, 장용학의 〈요한시집〉·〈원형의 전설〉, 선우휘의 〈불꽃〉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점차 문화적으로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영향권 안에 편입됨으로써 유학 등의 정보유입을 통해 당대 서구 모더니즘 예술사조들의 영향을 엿볼 수 있는 작품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미술분야에서 이제까지의 구상적 아카데미즘의 고루한 양식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나타난 1950년대말의 앵포르멜 운동은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예술작품들은 자칫 현실과는 유리된 상태에서 고전적인 미학원리의 중심개념인 독특한 쾌(快)로서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전부인 듯한 태도를 반사적으로 고집하게 하는 역작용도 낳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예술작업들은 전쟁과 계속된 실정으로 인해 고통과 혼란에 빠진 민족성원들이 그 와중에서도 지켜나가야 할 진정한 가치를 충분히 공유할 수 있게 해주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다만 그러한 정황에서도 〈사상계〉(1953. 4)를 중심으로 한 일군의 지식인들의 비판적 노력과 실존주의 예술경향을 계승한 사회 고발적인 예술산물들의 성과들에 대해서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좌절과 체념, 그리고 실의에 빠져 있던 민족성원들에게 1960년의 4·19혁명은 분명 하나의 돌파구였다. 이를 계기로 타성에 젖어 있던 기성세대 역시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를 새삼스럽게 확인하는 동시에 민족의 장래에 대해 어떤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참여를 감행했으면서도 결코 현실정치의 담당 세력일 수는 없는 학생들의 한계가 정치적인 군부세력에 의해 가시화되고 말았다.

제3기 5·16군사정변부터 제5공화국까지

1961년 5월 16일 헌정질서는 중단되고 대한민국은 군사독재라는 또 하나의 암초에 올라앉고 말았다. 반공을 국시로 삼고 극심한 민생고의 시급한 해결을 표방하고 나선 군사정권은 이른바 근대화를 위한 개발독재를 강력히 추진해갔다. 이러한 정책은 공과를 불문하고 우리 삶의 양태를 크게 변화시켰다.

아직도 유교적인 전통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고 있던 우리의 삶의 양식은 농촌의 파괴와 도시화, 특히 도시주변에서의 빈민 거주지역의 증대, 공업의 발달과 유흥사업의 번창, 도시의 아파트군들의 성립과 새로운 소비문화적 생활양식의 정착, 대중문화의 막대한 보급과 발전 등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과정에서 산업화를 뒷받침하는 서구화와 이와는 좀처럼 양립하기 힘든 민족 주체성의 확립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보려는 시도는 정부의 입장에서건 민간의 입장에서건 그리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가의 문화정책은 이 과정에서 대체로 관주도적인 양태로 지속되었다. 이러한 관주도의 양태는 이미 5·16군사정변 이후 포고령을 통해 모든 문화·예술 단체를 해체시키고 한국문화예술단체총연맹(1962. 1)을 결성하도록 한 것을 비롯하여 이후 민족성현을 기리기 위한 조각물들이나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국가의 문화정책과 동일시한다거나 심지어 국전에 새마을부를 설치하고, 새마을 영화·연극을 권장하며, 음반에 건전가요를 삽입하게 하는 등의 활동양식에서도 더욱 분명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활동양식은 민간부문으로부터 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를 통상적인 구분에 따라 1960, 1970, 1980년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960년대의 경우 문화예술 영역에서의 새로운 특질은 한편으로는 4·19혁명이 북돋아준 희망을 계승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리얼리티와 감수성을 반영하려 한 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순수·참여 논쟁이야말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한 사건이었다. 이 논쟁은 결국 가까이는 해방공간, 멀리는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지는 예술과 사회참여의 문제를 변화하는 1960년대의 상황에 맞추어 다시금 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핵심적인 논지는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찬 현실상황에 문학과 예술이 보다 적극적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과 문학과 예술은 상식적인 인간통찰이나 파악으로서 사회현실에 참여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는 주장 사이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비록 "모든 전위문학은 불온하다. 그리고 모든 살아 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다"( 김수영)라는 범상치 않은 통찰이 제기되기까지 했지만, 논쟁 자체는 더이상 심도 있게 전개되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동시에 이 시기부터 한글세대라고 통칭되는 신세대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대들의 경험을 표출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특기할 만하다.

문학 분야에서의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무진기행〉 같은 작품들이나 미술에서의 추상표현주의 양식의 대두, 무용 분야에서의 현대무용의 적극적인 도입, 연극 분야에서의 부조리극 소개 등의 현상은 이를 말해준다.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1960년대의 추세는 그 윤곽이 더욱 뚜렷해진다. 경제성장의 성과와 후유증이 점차 명확해지면서 한편으로는 문학과 예술은 사회의 모순과 갈등에 주목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경향과 다른 한편으로는 변화하는 삶의 리얼리티를 예술이라는 매체의 가능과 한계에 입각하여 더욱 심도 있게 드러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경향이 서로 공존하면서 우리 문화의 두께를 더했다.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특히 텔레비전으로 대표되는 대중매체의 급속한 보급을 통해 막대한 양의 대중문화 산물들이 분출됨으로써 문화예술의 상업성이 증대되는가 하면, '청년문화'로 불리는 청소년 중심의 대중사회적 하위문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할 것은 1960년대 후반에 창간되었지만 이 시기부터 적극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창작과 비평〉과 1970년대에 창간된 〈문학과 지성〉 등 두 계간지의 역할이었다.

이들은 1960년대의 순수·참여 논의를 한 차원 넘어서서 문화와 예술이 사회적 삶의 총체와 연관된 것임을 주장하고 실제로 그러한 편집을 고수함으로써 사회적 삶에 대한 예술문화의 대응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탈춤보급운동에서 출발하여 마당극 또는 민족극으로 불리는 새로운 매체양식을 창출해낸 문화운동도 주목할 만하다.

이 시기의 성과물로는 우선 김지하의 〈오적〉으로 대표되는 저항시들, 황석영의 〈객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대표되는 현실의 모순과 갈등을 드러낸 작품들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장호 감독의 영화 〈별들의 고향〉, 김민기의 대중가요 〈아침이슬〉, 최인호의 소설들에서 엿볼 수 있는 좀더 대중적인 문화 분야의 성과들 역시 특기할 만하다. 동시에 음악·무용·미술 분야에서의 적극적인 현대화의 시도들이나 박경리의 〈토지〉 혹은 여타 분야에서 예술적 심도를 더한 성과들 역시 주목되어야 할 것이다.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으로 인해 1979년 10월 26일 18년간 권좌에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되고 이른바 신군부에 의해 정권이 계승되면서 민주화에 대한 희망의 불꽃은 다시 한번 폭풍 앞에 서게 되었다. 신군부에 의한 공포정치는 예술의 무기력함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하는 동시에 예술의 적극적인 무기화를 선언하게 하는 상황을 낳았다.

거의 전예술분야에서 '민족예술' 혹은 '민중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예술의 적극적인 사회적 영향력 행사를 실험하는 운동이 펼쳐졌다. 수많은 노동시·노동소설이 쓰여졌으며, 마당극·현장극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극 운동, 판화나 걸개그림으로 대표되는 민족 미술운동, 운동가요의 보급으로 대표되는 노래운동, 또 무용에서의 새로운 흐름들이 연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좀더 장기적인 예술문화의 증진과 자체단련을 꾀하는 흐름은 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의 과실에 힘입어 예술 각 분야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들이 나타났다. 연극이나 춤 등의 공연예술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양상은 이전 시기와 비교할 때 폭발적이라 할 정도의 공연의 증가와 관객증대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상대적으로 기반이 잡혀 있던 미술·음악 분야에서도 전시와 음악회의 폭발적인 증대현상이 나타났음은 마찬가지이다. 또한 유학이나 상호 방문 공연 등의 행사를 통한 국제적인 정보교류의 증대는 각 영역에서 날로 변화하는 현대 사회의 생활양식에 대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예술의 토대 마련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여러 가지 굴곡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의 대한민국 위상의 고양은 우리의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고취했고, 맹목적이었던 서구 추종의 양태를 좀더 주체적인 대응의 양상으로 바꾸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음악 분야에서 국악보급운동이라든가 춤 분야에서 해외공연의 증대 등의 현상이 이를 입증한다.

1987년 6월 29일 드디어 이른바 6·29선언이 이루어지고, 사회 각 분야와 함께 예술도 이제까지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시기를 또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제4기 6·29선언 이후 현재까지

6·29선언 이후 출판부문에서는 출판사 등록 전면 개방(1987. 10. 19)을 비롯하여 판금도서해제(1987. 10. 19, 650종의 판금대상 중 431종 해제), 출판사 등록 절차 개선과 간행물 납본제도 개선(1988. 7. 30), 월북작가의 작품 출판과 공산권자료개방(1988~)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공연예술 부문에서는 금지가요해제(1987. 8. 18)를 비롯하여 동구권·미수교국 예술작품 국내개방(1988. 6), 월북음악가의 곡 해제(1988. 10. 27), 공연법시행령개정(1989. 1. 1)으로 인한 공연물 대본의 사전심의제 폐지 등의 조치가 있었다.

6·29선언은 집권세력의 자기 정당화를 위한 전시성 행사라고 해석되면서 국민 일부로부터 '당신들의 축제'라는 빈축을 샀던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회에 대한 문화·예술인들의 참여를 자발적인 방향으로 돌려놓았고, 개·폐회식의 성공은 국제화 시대에 대비한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자기확인에 크게 기여했다.

개별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적인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는 문화발전에 대해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더구나 1990년 1월 3일 문화정책을 전담하는 독립된 중앙 행정부서인 문화부(1993년 문화체육부로, 1998년 문화관광부로 개칭)가 탄생했다.

그러나 문화창조력의 제고, 문화매개기능의 확충, 국민의 문화 향수기회 확대, 국제문화교류의 증진 등이 포함된 장기 계획이 2차례에 걸쳐 수립, 추진되는 과정에서 과거와 마찬가지로 관주도의 일회성 행사나 전시행정적인 면모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정부당국의 투자의지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또한 정부가 현대사회에서 가장 주요한 방송매체를 아직도 단지 보도 혹은 홍보 매체로, 더욱이 정권홍보의 매체로 인식함으로써 정보화와 국제화라는 조류에 맞설 수 있는 건전한 대중문화의 창출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어느 정도 정당하다.

공보처라는 중앙행정부서의 독립적 설치가 그와 같은 비판의 근거가 된다. 특히 문화산업 전반에 대한 정책의 미흡과 무관하지 않은 열악한 문화산업은 상업주의적인 발상에서 제작된 외국의 정교한 문화상품들에 대한 종속을 조장함으로써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일제의 잔재 위에 또 다른 폐해가 겹치게 될 위험이 생겨나고 있다.

1997년 대통령 선거 결과 정권 교체와 함께 닥쳐온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지원체제와 무관하지 않게, 김대중 정권은 문화산업의 기간산업화를 국정목표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일본 대중문화 개방 선언과 함께 획기적인 조치로 인정받고 있으나, 문화적-인간적 가치 영역을 경제적 가치를 재는 척도로 재단할 때 생기는 부작용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 역시 만만찮게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정보화와 세계화에 대한 올바른 대응은 그 나름대로 절실하다. 학계와 예술계를 들끓게 했던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된 논란은 그 한 예가 된다. 여기서는 연극의 경우를 살펴 보기로 한다.

포스트모던 연극의 특징으로 지적되는 사항들에 대한 여러 의견을 요약할 때, 대체로 다음과 같은 6가지 항목이 제시될 수 있다.

① 연극성의 강조, 또는 대본으로부터의 해방 : 본질적 형식이라는 관념들의 거부, 예술작품이라는 자기동일성의 해체, 이미지들의 연극, 존재론적 신경증적 연극, ② 순간적인 우연성의 우위 : 즉흥성·즉각성·독창성·자발성의 강조, 비연극화, 불확실성과 형식적 이중성 철폐, 아버지 연출가로부터의 해방, 흐름, ③ 장소의 자율성 : 극장으로부터의 탈출, 연극과 비연극의 문지방 넘나들기, 사이성, ④ 결과보다는 과정으로서의 작품개념 : 자아반성성의 신장, 메타 연극, 공연 자체에 충실한 연극, 부재의 미학, 상품성의 거부, ⑤ 풍부성의 강조 : 재현이기보다는 제시, 임재의 미학, 불연속성, 서사의 거부, 음향·조명의 역할 강화, 빠른 전환, 해체성, 기호들의 표류, ⑥ 정치적 함의 : 사회적 및 맥락들 안으로 빨려드는 상태, 페미니스트 연극 등이다.

예술 전반에서 목도되는 이른바 해체 현상과도 연결되는 이와 같은 특징들은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요소들에 대한 새로운 주목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단순한 '가벼움'의 지나친 노출이라는 현상을 낳기도 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서구 중심적 현상이라는 지적과 함께 한국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 논의가 맹목적인 서구 추종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른바 정보화의 추세와 함께 한국에서도 제기된 '허상현실'에 대한 논란과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검토는 그 나름대로 의의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에 대한 관심이 차츰 자라나고 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통치를 경험한 한국의 지식인들로서는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합당한 개념틀로서 받아들일 만하다.

정보화와 세계화에 대한 대비만큼이나 시급한 것이 통일에 대한 대비이다. 물론 통일이라는 과제는 우리가 당면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의 하나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의견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술활동이 정치적인 분위기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각계의 많은 인사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은 남 북한의 문화 예술 교류에서 우리가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는 의식을 묵시적으로나 현시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남 북한의 문화 예술교류에서 대결의식은 그 현실성이 어느 정도 인정될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남 북한 간의 문화교류가 진정한 통일문화의 형성을 그 이념으로 설정하는 한 극복되어야 한다.

통일을 지향하는 문화, 또는 통일 이후 민족적 동질성을 확립하기 위한 통일문화란 '다양성을 존중하면서도 민족적인 보편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문화'이다. 흔히 전통문화를 통한 민족적 동질성의 회복이 통일문화 형성에 중요한 매개물로 기대되는데, 남 북한이 각각 진행해온 전통문화 연구의 성과 자체를 서로에게 알린다 할지라도, 원형적인 상태의 탐색이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즉 동질성의 회복을 위해 생활문화 영역을 포함하여 전통문화유산을 확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서로 간의 차이를 민족의 현재 및 미래 생활을 위해 가장 바람직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의 경우에도 남 북한이 함께 상찬하는 문화, 즉 피지배지 시기에 민족적 양심을 지킨 문화인들의 작품발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원리적으로는 남 북한이 서로 상대편의 이념적인 견고성을 격파하기 위해 자기편의 첨단적인 작품을 강요하지 않아야 할 것이라는 견해가 경청될 만하다.

체육

한국의 스포츠가 서구식 스포츠에 처음 접한 것은 대한제국 말기인 1897년(고종 34) 영국 함대가 인천항에 입항하여 그 수병들이 축구경기를 시범으로 보여준 데서 비롯된다고 전한다. 그러나 정책적인 차원에서는 1895년 2월에 고종이 조서(詔書)를 내려 덕양(德養)·체양(體養)·지양(智養)이 교육의 3대 강기(綱紀)임을 밝히고 체육을 적극 장려한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리하여 그해 4월에 한성사범학교관제, 5월에 외국어학교관제, 7월에 소학교령을 연달아 발표하고, 한성사범학교를 비롯한 일본어·중국어·영어·프랑스어·독어·노어 등의 각종 외국어학교와 또 정동·묘동·계동·장동에 소학교를 설립할 때 교과목 속에 체조를 정규과목으로 했다. 이때 체조는 군인을 훈련하는 일종의 군사교련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학교들의 교외 운동회가 1896년 5월에 최초로 열렸으며, 1905년 5월에는 황성기독교청년회의 운동회가 있었고, 이듬해 6월에는 한국 최초의 체육단체인 대한체육구락부의 운동회가 개최되었다. 1920년 4월에는 조선체육회가 창립되면서 본격적인 스포츠 활동이 시작되었다.

오늘날에도 인기있는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의 체육대회는 1924년 양교 축구부가 탄생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36년의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 손기정·남승룡이 출전하여 1위와 3위를 차지했을 때 그 절정을 이루었다. 그후 조선체육회의 주도 아래 수준을 높여갔으나 일제는 1943년에 이르러 외래 스포츠의 금지지시를 내렸다.

해방 직후 혼란기에도 1947년 4월 19일 서윤복 선수가 제51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했고, 그해 여름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가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1948년 런던에서 거행된 제14회 올림픽 대회에 처음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스포츠도 침체국면을 맞았고, 국군 4군이 장병의 사기앙양책으로 스포츠를 장려함으로써 명맥이 유지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제3공화국·제5공화국시대에는 스포츠를 정책적으로 장려하여 많은 실업 팀과 대학 팀이 생겨났으며 고등학교 이하에까지 그 연령층이 확대되었다. 태능선수촌이 생긴 것도 이즈음이었다. 1972년에는 제1회 청소년체육대회가 개최되었고, 특히 제5공화국시대에는 야구·축구·농구·씨름 등의 분야에 프로 팀을 창설하여 스포츠의 열기를 높혔으며, 1986년의 아시아 경기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했다.

이어 1988년의 서울 올림픽에서는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여 세계 4위의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마라톤에서 황영조가 1위를 차지하여 베를린 올림픽의 영광을 재현했으며, 종합성적 8위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스포츠 정책을 위해 정부는 서울 올림픽에 대비하여 한시적으로 만들었던 체육부를 서울 올림픽이 끝난 이후에도 오히려 체육·청소년부로 확대하여 존치시키고 있다. 현재의 문화정책과 비교하여 체육행정에 대한 공공투자가 과다하다는 견해도 있고, 지나치게 인재 중심으로 치중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사회체육을 위한 정책추진이 촉구되기도 한다.

특히 지방화 시대를 맞이하여 체육과 문화를 위한 지역주민 센터를 하나의 복합건물로서 계획하는 등의 대안도 검토될 만하다. 특히 청소년을 위한 정책은 협력체계망의 구축을 통해 계획·실시·평가될 만하다는 점에서 유관부처 간의 공동보조가 절실히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김문환(金文煥)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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